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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 : 반갑습니다. 건강하십니다.
서정주 : 여전히 미남이십니다.
이기영 : 천만의 말씀을, 오늘 고맙습니다. 요새 세상도 좀 시끄러운 듯 한데 선생님 얼굴 뵈니까 활짝 명랑해집니다.
서정주 : 그거 좀 답답하게 안 살았으면 합니다. 모두 찝찝하고 우리나라의 역사가 구김살이 많이 생겨가는 것 같아요.
이기영 : 요새 이러면 이럴수록 찡그리지 않는 모습, 새로운 풍토가 생겼으면 합니다.
서정주 : 예, 공부했다는 사람들도 요새는 찡그리는 것으로 잘난 체 하거든요.
이기영 : 내일이면 부처님 오신 날도 되고, 거리에 연등(燃燈)이 많이 걸려 있고 하는데도 조금 우울해지려고 하는데 그 우울증을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을까요?
서정주 : 내일이면 그분 오신 날이니까, 이것을 계기로 사람들이 서로 다정하게 감춘 것 없이 화기애애(和氣靄靄)하게 웃고 지내는 풍습을 다시 지각했으면 싶습니다.
이기영 : 부처님이 오셨다… 결국 그분이 오셔서 우리에게 사람되기 바란 것, 바로 그런 것 아니겠어요, 또 싸우지 말라…
서정주 : 서로 위하고 사랑하고 살라는 것 아닙니까.
이기영 : 화목(和睦)하게, 서로 도와가면서 또 참고 너그럽게 받아들이면서… 그런데 싸움의 원인이 도대체 무엇에서 나오지요?
서정주 : 불교에서 삼독(三毒)이라는 것, 탐(貪)·진(瞋)·치(痴)… 그런데 탐심(貪心)을 품고 무얼 과도하게 탐하는 것이야 마음속에 감추어져서 안 나타나는데, 이 박사가 늘 주장하는 진(瞋), 성내는 것, 화내는 것은 환하게 드러나거든. 거기서부터 충돌이 생기고 화합이 모두 끊어지는 것 아닙니까. 그럼 결과는 어리석은 자로서 남는 거지. 역시 간단한 원리는 탐·진·치 삼독을 어떻게 가라앉히고 살까, 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기영 : 그렇지요. 인간의 이상(理想)은 부처님처럼 탐·진·치가 없어지는 것이지요. 다만 욕심을 없애라는 부처님 말씀을 아무런 의욕도 내지 말고 살아라, 먹지도 말고 살아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불교도들도 있지 않습니까, 자금 남방(南方) 같은 데 가보면…
서정주 : 잘못이지요.
이기영 : 진심(嗔心)도 시기하고, 남 잘되면 배 아프고 질투하다가 정 안 되면 화를 내고 때려 부수고… 그렇다고 그 반대로 그런 것 다 모르고 무관심(無關心)하라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가난하다, 어렵다 하면서 분발도 해보고…
서정주 : 열심히 일하고 벌어야지.
이기영 : 열심히 자기 자신을 돌이켜보고… 지혜로워졌다 하는 게 부처님 아니겠어요. 저는 부처님이란 가장 멋쟁이로 살 수 있게 된 사람, 가장 이상적인 인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보고 싶은 데… 어떻습니까, 자연(自然)도 부처 아닙니까?
서정주 : 자연의 움직임, 자연의 법도로 하는 것, 그러니까 자연의 조화(調和)지. 이 우주나 자연은 인간과 조화해야만 마땅하다고 생각해 왔거든. 그러니까 자연과 자(自)의 융화(融和)지. 이런 것을 신라 때는 많이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이기영 : 그렇지요.
서정주 :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그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 있는데, 현대인들이 그걸 잊어버린 것 같아요. 그런데 주말에만 비비작거리고, 마이 카를 몰고 어디 산수(山水) 좋은 데 가서 먹던 것 내던져 자연에 폐나 끼치고 오는데… 그래도 자연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있어요.
이기영 : 네, 그 마음은 있습니다. 그런데 자연이 보면, 만화를 그린다면 얼굴을 찡그릴 정도지요.
서정주 : 자연과의 교섭(交涉)을 어떻게 했나 하면 지저분하게 했지.
이기영 : 선생님, 대승경전(大乘經典)들은 모두 다 이제 말법시대(末法時代)라고 그러지 않아요? 세상이 혼탁해졌다고 그러는데….
서정주 : 그런가 보더군요.
이기영 : 그런 시대인데도, 요새도 시골을 가보면 우리나라는 참 아름답데요. 천진난만(天眞爛漫)한 아리들, 시골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어떻게 그리 다정한지 남 같지 않아요.
서정주 : 동감입니다. 이것은 한국의 아름다운 산수의 조화가 무식한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친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도 농촌에서는 가난한 대로 정을 느끼거든, 정이 그대로 순수하게 솟아나는 걸 느끼지요.
이기영 : 네, 소박한 사람들은 말 그대로 천·진·난·만… 이게 멋있는 거지요.
서정주 : 외국 사람 중에서 나를 찾아오는 수가 있어요. 한국사람들의 좋은 것을 보려거든 촌에 가라, 나는 항상 이렇게 권해요.
이기영 : 거기만 가면 있지요. 저는 화엄경(華嚴經)보다가 시골 풍경을 바라보고 생각해요. 부처님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그 조화… 너희들도 이 본(本)을 받으라고 하는 그런 모범(模範)이, 법(法)이 바로 거기에 있는 거지요.
서정주 : 촌에 가면 있다, 촌사람에게 가면 있다.
이기영 : 그런데 또 자연이 파괴되고, 자연에 이상(異常)현상이 나타나는 것도 사람 탓이 아닙니까?
서정주 : 박정희 전직 대통령이 우리나라의 근대화라는 것을 잘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마을, 내가 생겨난 마을에 갔더니, 내가 어릴 때 정붙인 개울이 있는데, 돌들이 깔리고 비만 오면 맑은 물이 흘러가고 양쪽으로 풀이 우거지고… 아 이것을 시멘트로 다 도배(塗褙)를 해 버려 참 섭섭하고 서러웠어요.
이기영 : 수술을 한 거지요.
서정주 : 이 현대화니 근대화라는 걸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되겠어. 우리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아껴서 살아온 민족이 아닙니까, 섭섭했어.
이기영 : 남태평양도 가보시고, 많이 돌아보셨는데 도처에 아름다움이 있지요?
서정주 : 자연과 인생이 조화를 얻는 데서 아름다움이 발현(發現)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문화라는 것이 깨버리면 안 되지, 중요한 얘기지요.
이기영 : 문화… 문화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문화는 산업기술문명의 시대에 와서는 좀 어렵게 된 것 같아요.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어요. 사람은 자연사(自然死), 죽을 때가 되면 죽는 건데, 인간의 지혜로 그걸 연장시켜 주기는 하면서 거기 뒤따르는 여러 부작용이 있다는 것은 생각 안 해요. 또 죽을 때에도 태연할 수 있는 그런 준비를, 죽음의 순간을 담담하게 맞이할 수 있는 그런 것도 가르쳐야 하지 않을 까요?
서정주 :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 우리가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부족한 점, 즉 이 현대 기계문명사회에서 사회인으로 사는 데만 골몰하다가 자연과의 융화(融和)라는 것을 잊어버렸다. 이런 얘기입니다. 그러나 그 자연이 그리우니까 주말에는 아귀다툼을 하면서 교외로 빠져나가 산수 좋은 데 가서 공해나 끼치고, 쓰레기만 흩트려 놓고 온다, 그래도 그것은 자연에 대한 향수(鄕愁)거든….
이기영 : 그렇지요.
서정주 : 자기가 태어난 자연에 대한 향수지. 또 하나는 요새 사람들은 현실 상황에서 아귀다툼을 해서 승자가 된다, 남들이야 어떻든 나만 이기면 되다 하는 생존경쟁의식(生存競爭意識)… 찰스 다윈이 시원찮게 내놓은 사상이지… 진화론적(進化論的)인 정신이 우리 사회에 상당히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그래 가지고는 실패하지.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성공이 아니면 실패니까… 우리 사회 같은 데서는 성공보다는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지 않습니까? 그래서 실패하면 나는 다 살았다, 살 자격이 없다, 심지어 일가족 집단 자살 같은 것도 신문에 나거든. 그것은 현실 사회인의 자격만 너무 생각하고 역사적(歷史的) 존재의식(存在意識)이 전혀 결여(缺如)된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이기영 : 우주역사적(宇宙歷史的)인 건데….
서정주 : 그렇지. 민족사 속에서 뿐 아니라 인류사 속에서, 또는 우주 역사 속에서의 자아(自我)라는 것이 얼마나 존엄하고 대견하고 굉장한 것인가, 하늘과 땅과 역사를 맡아가는 책임자라는 것은 높은 사람이나 위대한 사람만이 아니지 않습니까, 구석구석 자기가 책임지고 있는 한계에서는 역사적 책무(責務)를 맡는 거예요.
이기영 : 귀중한 존재인데….
서정주 : 역사적인 책임자인 존재의식, 이것이 필요해요. 이것은 말로는 쉽지만 자각해 갖기가 어려워요. 그것이 자각(自覺)입니다.
이기영 : 그것을 가르쳐야지요. 근시안(近視眼)들이 돼 가지고 자기 하나밖에 못 보아 더 나아가서는 다른 사람들도 잘 되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 못 하고, 먼 역사의 흐름 속에서 내가 잘못하면 조상이 욕보고 후손이 욕본다고 하는 것도 생각 못해, 이쪽이 썩으면 저쪽도 아프다고 하는 것도 생각 못해요, 올바로 볼 수 없는 눈이 되어 버렸어요.
서정주 : 탐·진·치… 삼독은 그걸 말하는 것이지요.
이기영 : 그래요, 요새는 탐이 더 확대되고 아주 조직화되고, 진도 조직화되고, 진은 뭐 철저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어수룩하면 안 된다고….
서정주 : 그걸 똑똑하다고 하고….
이기영 : 그래 가지고는 전체를 망치는 거지. 민족국가보다 더 큰 것도 망쳐진단 말이에요. 요새 이게 어디 우리나라에서만 생신 풍조입니까? 세계가 지금 온통 이런데, 돌아보시면서 그래도 아직은 우리나라가 좀 낫다고 생각 안 하셨어요?
서정주 : 내가 여행기를 썼거든요, 서문(序文)에도 썼어요. 고생을 하고 돌아다니면서 내가 머리를 숙이고 배울만한 것을 열심히 찾아보았는데… 별 것 없더라, 그래서 죽은 귀신들, 링컨이라든지, 장개석 총통, 간디… 그 세 군데 묘지를 참배했어요. 머리 숙일 데는 몇 있지, 석가모니라든지 예수라든지… 이스라엘도 가서 참배를 했는데 머리가 숙여지더라고, 그건 그런데 살아 있는 사람 중에는 내가 경배(敬拜)할만한 인물을 발견하지 못 했어요. 그래 돌아와서 우리 역사를 한번 다시 뒤져 보자… 고조선으로부터 조선 말기까지 역사 공부를 34년 했어요. 세계일주 여행이 1978년이었으니까, 그 뒤에 역사공부를 해서 시집(詩集)을 하나 냈습니다.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라고, 단군시재부터 조선 말기까지 시가 됨직한 것을….
이기영 : 서사시(敍事詩)가 되겠군요.
서정주 : 아니오. 토막토막으로… 에피소드로… 담시(譚詩)… 발라드. 거기서 한국인의 정신적 장점, 어느 시대나 소인(小人)들은 있지만, 대인(大人)들이 무엇으로 대인이었나, 민족정신의 주도력이 무엇이었나를 보니까 여유와 웃음이야, 왜 풍류(風流)라고도 하지 않습니까, 여유(餘裕) 있고 태연자약(泰然自若)하고, 동요(動搖)하지 않고, 또 자연과의 융화(融和) 같은 것도 늘 꾀하고…
이기영 : 예….
서정주 : 조선에는 유생(儒生)들이 많지 않았습니까, 모두 공자를 믿고 생활신조로 삼아 오긴 했으나 추사(秋史) 선생이라든지 송강(松江)까지 불교 쪽으로 상당히 기호(嗜好)를 기졌어. 또 신선도(神仙道) 쪽에도 기호를 가졌고, 그러니까 자연과의 융화를 많이 생각했어.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은 그래 벼슬 가라니까, 가다다 꽃이 좋은 데서 술 싣고 오는 걸 다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 버렸거든요. 산수 사이를 누비고 다니다가 작고했는데 역시 조선조나 고려조의 대린, 큰 사람이 살다간 자취를 보면 답답하게 살지 않았어요. 시비만을 가려 찝찝하게 살지를 않았어요. 산수 자연과의 조화, 우주와의 조화, 또 한쪽으로는 살이 있는 동안에는 불우했더라도 역사적으로 자기의 정신이라는 게 완전하게 깨끗하게 흘러가는 것을 주오 많이 생각했어요.
이기영 : 시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멋있어요. 불경(佛經)을 보면, 저는 경을 많이 읽는 사람인데, 경이라는 게 산문이 많죠. 그런데 그 산문으로 된 것에도 중간중간 시가 들어 있지요.
서정주 : 게송(偈頌)으로.
이기영 : 예, 게송. 그런데 학자들의 의견으로는 게송이 더 오래 된 거다. 알맹이다 하는 얘긴데 아주 실감이 납니다. 산문은 뭘 자꾸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말을 하는 데, 하고자 하는 얘기는 아주 조그마한 것으로 요약이 돼요.
서정주 : 시의 특징을 아주 잘 말씀하셨습니다. 시라는 것은 산문이 백 마다 천 마디 늘어놓는 것을 몇 마디로 요약해서 말하는 속에서 몽땅 암시(暗示), 함축(含蓄)하는 표현형식 아닙니까? 그러니까 기독교에서도 시편(詩篇)이 있고, 공자도 시경(詩經)을 주욱 외웠고, 중요 경전의 하나로 그것을 채택했고, 또 불경에도 요약해서 말하는 것은 게송, 시로 나타냈고, 시인에게 인생의 진리, 인생의 교훈 같은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거든요. 그것이 19세기 후반부터 소설이 붐을 일으키면서 시라는 것이 소외되어 버렸어. 현재는 시가 소설만큼 팔리지 않아요.
이기영 : 그건 아주 재미있는데요.
서정주 : 소설도 순수 소설, 문학적으로 애써서 표현한 것은 귀찮아서 안 읽는답니다. 논픽션, 성큼한 사건을 문학적 표현 없이 사실만 묘사한 것을 좋아하지요. 어제도 일본 신초샤(新朝社)라고 세계문학전집도 낸 큰 출판사, 그 편집 책임자가 여기 왔어요. 일본도 논픽션은 백만 부, 2백만 부 나간다고 해요. 그런데 시집은 천 부를 찍어 내놓아도 몇 년 되어도 안 팔린다는 겁니다. 아무리 좋은 시인의 시집이라도….
이기영 : 참 부처님 말씀이 들어맞아가는 하나의 증거네요. 말법시대가 되면 싸움이 많아지죠, 투쟁전국시대(鬪爭戰國時代)인데, 전 세계적인 현상이 시를 우습게 생각하고, 소설도 논픽션과 추리(推理)가 많지 않습니까? 범죄소설… 텔레비전도 대부분 범죄수사물이거든, 결국 이 사회 사람들의 심정의 변화를 잘 나타내 주는 건데, 그것을 그대로 좋다고 받아들여 줄 수는 없지 않아요?
서정주 : 이 인생을 진선미(眞善美)하게 만들어 주는 가치 있는 작품을 진지하게 읽으려는 게 아니라, 오락으로, 사건 일어난 것 한번 읽어보고서, 야, 그거 대단한 사건이 일어났구나 하고 구경하는 거지, 구경거리로만 보는 독자층이 많고, 자기도 그런 것 해보고 싶어 하고….
이기영 : 주인공이 자기가 되고.
서정주 : 현대사회의 시스템이라는 건, 아침에 직장에 출근하면 저녁때까지 밀폐되어 있어 인생의 유익한 것을 받아들일만한 시간 여유도 없고, 독서할 시간도 별로 없지. 그러니까 그저 쇼킹한 사건이 일어나면 그런 거나 좀 보다가, 탐정물 같은 거나 좀 보다가 그만 자는 거야. 자고 또 일어나고….
이기영 : 누구나 다 그렇게 되면 곤란한데요.
서정주 : 곤란하지요, 우리 같은 사람이 있어야지요.
이기영 : 우리 같은 사람을 요새는 바보로 보는데.
서정주 : 바보지.
이기영 : 네, 그래도 우리는 그게 직업이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요새 참, 선사어록(禪師語錄)이 역시 멋있어요.
서정주 : 아, 그거 참 중요한 말씀하셨습니다.
이기영 : 우리 불교가 임제(臨濟)스님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좋아하는 까닭이 있어요. 임제라는 중국 스님이, 우리 민족이 낸 위대한 원효(元曉)스님하고 비슷하단 말예요. 생각하는 게 비슷해, 그런데 원효대사보다 말이 적으면서도 같은 얘기를 탕탕하거든, 그게 다 시(詩)인 것 같아요.
서정주 : 그게 중요한 거예요. 동양 시인이나 한국 시인이나 서양 가서 두각(頭角)을 나타내려면 선시적(禪詩的)인 매력을 가지고 시를 써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왜냐, 서양 사람들은 생각할 때 각지(覺知), 깨달아서 생각하는 데 중점을 안 뒀어. 각지라는 것은 성당의 신부 같은 이들이 오래 수행(修行)을 하다 반짝하고 깨달은, 그런 경험을 적어 논 것은 더러 있는데 그건 불교의 선승(禪僧)들이 선시 쓰는 거나 비슷해. 그러나 그런 것은 적거든, 희소가치고, 일반적으로는 그저 논리를 따라서 뭘 옳고 그르고를 밝히고, 이제 모두 학설이었어. 정신을 모아서 감정이나 지혜, 지성을 통일한 상태에서 깨닫는 것이 각지 아닙니까?
이기영 : 그렇지요.
서정주 : 참선(參禪)하는 선사(禪師)들이 깨달아 아는 그 이해는, 그 understanding은 과학자들이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는 거나 거의 같거든요.
이기영 : 그보다도 깊지요, 정신적으로 차원이 더 높지요.
서정주 : 차원이 높지, 서양에서는 그런 식으로 시를 쓰지 않았어… 못했지. 그러니까 서양 가서 한몫 보려면 시는 선시적인, 각지의 입장에서 써라. 정서도 그렇고 언더스탠딩에서도 그렇고, 오래 잠겼다가 야, 이거다 하고 깨닫는, 그것이 주는 효력은 대단한 거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기영 : 그 방향은 이제 안다 하더라도, 그러니까 형식은 그렇게 쓴다 하더라도, 요새 보면 내용은 그렇지 못한 것도 있는 것 같은데….
서정주 : 무엇이 빠짝빠짝….
이기영 : 구호(口號)나 써 넣거나….
서정주 : 아니면 시비, 욕, 혼란……담을 쌓아야지.
이기영 : 그러니까 그런 형식을 취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용을 갖고 나가야 서양에 가서도 통할 텐데¨ 그 내용을 그냥 만들 수가 있나….
서정주 : 그러고 역시 각지의 근본도 정신적인 입장에서 보면, 대자대비(大慈大悲), 크게 너그럽고 크게 사랑을, 사람의 고민을 서러워할 줄 아는 그 정신적인 바탕에서 나오는 거지.
이기영 : 누구나가 다 남 같지 않고 다 내 새끼 같고… 다 내 집 식구 같고.
서정주 : 그거예요.
이기영 : 이런 마음을 길러야 되는 데… 교육도, 종교도, 장치도 그런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하고, 경제도 그런 식으로 해야지….
서정주 : 그럼, 경제 이념의 근본이나 정치 이념의 근본이나, 그게 있어야 돼요.
이기영 : 다스린다는 게 무엇입니까. 다스린다는 것은 모두 하나가 되게, 잘 아물게, 상처가 없게… 그러니까 누구를 다스려야 되느냐 하면, 탐·진·치 많은 놈들을 좀 다스려야 된단 말예요.
서정주 : 자기부터 다스리고… 하하….
이기영 : 물론이지요. 탐·진·치 많은 자가 누구를 다스립니까? 또 탐·진·치 많은 사람이 시를 써도 선사어록 같은 멋있는 광채(光彩)를 발하지 못합니다.
서정주 : 못 하지. 삼독(三毒)에 걸린 자는 눈치를 많이 보아야지, 탐심을 감추려면 음흉하게 가태(假態)를 부려야 하니까….
이기영 : <임제록(臨濟錄)>에 이런 게 있데요. 만약 어떤 사람이 누구에게나 다 예스, 예스하면 그 사람은 무슨 일을 하겠느냐, 사자(獅子)가 한번 울부짖으면 여우 새끼의 뇌가 찢어진다….
서정주 : 그 표현, 아주 잘 썼는데, 여우 새끼들의 뇌가 찢어진다… 상당한데….
이기영 : 이 글을 재미있게 본 것은 저의 선생, 라모뜨 교수입니다. 파리대학에 있는 드묄빌이라는 그의 친구가 임제록을 프랑스말로 번역해서 라모뜨 교수에게 선물을 했는데, 거기에다 한문으로 ‘누구에게나 다 칭찬받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해나가겠나’고 썼답니다. 이건 무슨 얘기인고 하니, 다스리고 화목한다, 또는 민주주의라는 게 아무에게나 다 그저 호호(好好)… 탐·진·치 많은 놈도 호호… 너하고 친구하여야 하니까 네가 치(痴)하면 나도 치하자… 이런 것은 아니지 않느냐 하는 말입니다.
서정주 : 그렇지요.
이기영 : 아까 죽은 귀신들을 많이 보고 오셨다는데, 죽은 귀신도 등급이 많겠지만 그 중에서 제일 멋있는 사람들이 그 임제록에서 얘기하는 무위진인(無位眞人) 아닙니까.
서정주 : 큰 귀신들이지. 영원(永遠)을 그득히 채우는 귀신… 석가모니 같은….
이기영 : 그럴라면 무위(無位), 위가 없어져야 된다고 했거든, 선생님도 감투 하나 있는 모양이던데요.
서정주 : 아 그거… 요새 교포사회에서 대립이 심해, 뭐 3파전이니 2파전이니 하고 있어. 그래서 그 사람들의 친목, 단합을 옆에서 도우면서 그들의 예술활동을 도와 보자. 그런 단체하나 만들 만한 때가 아니냐….
이기영 : 그건 감투도 아니네요. 해외문예인평화회사… 내가 왜 감투 이야기를 끄집어내느냐, 임제스님 말씀의 그 무위진인이 곰곰이 생각되어서 그래요. 무위진인이라는 말이 어떻게 보면 욕설 같기도 한데, 욕설은 아니지요, 새빨간 살덩어리 고기덩어리 위에 하나, 무위진인이 있어, 지위나 감투나 명예나 아무것에도 매달리지 않는 진짜 사람이 있어, 네 얼굴 문으로 들락날락한다, 그걸 보아라… 이러지 않아요?
서정주 : 무위진인… 좋아, 무위지 자리가 없지.
이기영 : 무위… 있어도 보이지 않는….
서정주 : 영원에 있으면 자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니까, 이제 생각나는데 부처님이 무위진인 아닙니까? 법화경(法華經)에 보면 어떤 제자가 부처님에게 나이를 물었지, 부처님은 나이가 몇이라는 대답은 안 하시고, 너 저 수미산(須彌山·히말라야 산맥) 전체를 떡가루 같이 부숴서 1겁(劫)이 지날 때마다, 1겁이라는 게 불교사전에 보니까 4억 3천2백만 년이거든요, 가루 한 개씩 흩고 가거라. 몇 겁이 지나면 가루가 다 없어지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제자가 그것은 항하(恒河), 즉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을 것이라, 세기에 곤란합니다, 그랬더니 석가모니는 그러나 그것은 가한수(可限數) 아니냐, 한정이 있는 수가 아니냐, 언젠가는 끝이 있을 가한수이다. 그러나 내 나이는 무시무종(無始無終)하여, 처음도 없고 끝도 없어서 헤아릴 수가 없느니라. 이것이 무위진인이 자기의 정신적 생명을 생각하는 방식이지.
이기영 : 그렇지요.
서정주 : 그러니까 영생(永生)이야, 영원한 인류사회에서 영원불멸(永遠不滅)하게 살아가는 자기 정신능력의 나이, 그 자각을 우리가 부처님 오신 날에 즈음하여 갖는다면 탐·진·치에 걸릴 필요도 없어요.
이기영 : 어떤 위(位)… 시추에이션, 포지션, 어떤 계급, 감투, 자리… 자리지 결국은, 이것은 내 자리….
서정주 : 자리가 아까워서 이것 놓치면 어떻게 하느냐… 나는 명년에 2년 임기가 끝나면 후배에게 물려주려고 해요, 나도 이제 나이가 많으니까 물러나 편안하게….
이기영 : 아니 그 자리에 계시고, 그리고도 그 자리에 안 있는 것처럼….
서정주 :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리에 연연(戀戀)해요.
이기영 : 자기 분수를 모르고 제 본분, 제 자리를 모르는 거지. 제 진짜 자리를, 제 진짜 자리가 어디에 있어.
서정주 : 진짜는 무위지, 무위진심이지. 부처님은 법화경에서 무위진심이 무어냐 하면 자기(自己)라고 했지.
이기영 : 그럼, 그렇게 될 때라야 이 천상천하에 정말 멋있는 주인이지. 도처에서 임마, 네가 주인이냐… 주인이란 무슨 얘기냐 하면, 야, 네가 망가지면 큰일 나….
서정주 : 현재의 어떤 자리의 주인이 아니라 역사의, 영원의 책임자라는 그게 중요하지.
이기영 : 그렇지요, 너 한마디, 네 손짓 하나, 네 얼굴 표정 하나, 이게 엄청난 거다 하는 얘기입니다. 이것도 모르면 똥막대기지.
서정주 : 불교도 사람 인간성의 극단의 존엄성, 영원히 이어져 가는 정신적 생명, 이런 것을 각설시켜야 돼. 신라 때는 그게 상당히 되었거든.
이기영 : 이런 얘기를 좀 많은 사람이 알고, 그렇게 해 보려고 애를 써도 될까말까 한데….
서정주 : 장벽은 탐·진·치….
이기영 : 우리 주면엔 사견(邪見)이 너무 많아, 지식이 가져온 게 무어냐 하면, 서양의 것도 알고 문화인이 되고 하면서 오히려 눈만 더 어둡게 만들어 놓았어요.
서정주 : 시비, 내가 옳고 너는 그리고 하면, 이 조그만 나라에서… 조선 당쟁사(黨爭史)를 보세요. 유교에서는 시비를 가리는 그것이 근원이야. 성리학(性理學)은 더구나 따지는 건데… 지금은 유교도 성리학도 모르지만 고루한 구습이 쩔어 들어, 그대로 아이들에게 작용하는 것 같아 큰일이에요.
이기영 : 점잖아서 그래요. 우리는 점잖지 못한데, 저는 불교에서 그것을 배웠어요.
서정주 : 진심으로 점잖은 게 아니라 가죽만 점잖은 거겠지.
이기영 : 가식(假飾), 위선(僞善)… 그러나 이런 것을 없애려면, 벗어나게 하려면 어디 가서 무얼 배워야지요? 누가 그걸 가르쳐 주지요?
서정주 : 불경(佛經)은 한자로 되어 너무 어렵고, 또 가짓수가 너무 많지요. 요새 요약해서 내놓은 것도 몇 개 있지만 미비해. 기독교는 성경이 신구약으로 간단한데, 불교는 앞으로 불경의 에센스만을 집약해서 내놓아야 할 거예요.
이기영 : 한 가지는 작업이 진행중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면서 항상 겁이 나는 것이 선시(禪詩)지요.
서정주 : 나는 벌써 시를 거기다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각지의 입장, 정신이 잘 통일된 상태에서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다가 깨달은 것, 그것이거든요.
이기영 : 중요한 것은 죽은 글자를 주워 모으는 것보다 살아 있는… 부처가 2천5백60 몇 년 전에 왔다 그것만 자꾸 생각할 게 아니라, 임제스님 애기도 그렇고, 원효스님도 얘기했지, 야, 임마, 딴 데 가서 엎드리고 하지 말란 말이야, 옆에 살아있는 것들은 전부 다 부처님 씨앗이고, 아니 부처란 글자가 싫으면 그 멋있게 사는 사람이 될 수 없는 사람들 아니냐, 지금도 지식이 많은 사람이 이상하게 살지, 자리 같은 데 연연한 탐·진·치 때문에 이상하게 살지, 본래는 대체로 다 소박한 사람들인데, 그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 각 분야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좀….
서정주 : 진리를 향해 지혜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꾀가 늘었고, 꾀가… 잔꾀, 잔꾀가….
이기영 : 허, 꾀로 팔아먹으려고….
서정주 : 지성이라는 것이 모두 꾀로만 발달해 이것이 사고인데, 내가 그전에 재미있는 현상을 본 것은, 4차원 물리학자들 가운데 지금 미국의 버클리대학에 카플라라는 사람 있지요, <현대(現代) 물리학(物理學)과 동양사상(東洋思想)> 읽어 보셨어요? 우리나라 말로 번역되었습니다. 범양사에서.
이기영 : 네, 알아요.
서정주 : 그것을 읽어 보았는데 그게 있어. 어떤 해안에 가서 번개·천둥이 치는 때, 동양의 도인들의 그 각지(覺知), 그 감동에서 각지한 것, 그것이 자기들 물리학자에게도 부합이 된다, 그 말이야. 그러니까 물리학상의 발전에서 오는 ‘그거야!’하는 감동은 동양인의 선시 같은 데에 나오는 각지의 표현과 공통되는 것을 느꼈어. 그래서 아, 이거 물리학자들도 상당하구나….
이기영 : 어느 도(道)로 가든지 다 되는 것 아닙니까? 도는 하나니까….
서정주 : 공통이야, 알 것은 알거든.
이기영 : 그러니까 저는 이렇게도 얘기하고 싶은데, 종교니 예술이니 철학이니 기술이니 과학이니 할 것 없이, 어디로 가든지 정말 마음 바로 먹고, 탐·진·치 좀 없앤 상태에서 무얼 발견하려고 그러고, 자기도 그렇게 살려고 그러면 다 그것을 발경할 것 같은데….
서정주 : 같은 데로 가지….
이기영 : 같은 데로 가는데, 종교에서 오히려 더 그럴 줄 모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시(是)도 아니고, 비(非)도 아니다는 것은 시이고 비도 사실 생각 하나 까딱 잘못해서 그런 것 아닙니까. 다시 생각하면 옳을 수도 있는 것을, 우리는 자꾸 나무라지 맙시다. 자꾸 나무랄 필요는 없는데 그 원리는 알아 주었으면 좋겠단 말이지. 시비를 초월하고… 그렇지 더 올라가야지, 더 올라가야지.
서정주 : 넘어선 법열(法悅)을 각지(覺知)… 그게 생명의 본상(本相)이라야 하거든, 젖먹이 어린애의 웃음에 무슨 시(是)가 있고, 비(非)가 있고, 선(善)이 있고 악(惡)이 있습니까. 원상(原相)이지. 생명의 원상은 있어야지. 석가모니가 찬양한 게 그거거든, 꽃이 찬란하게, 지금 막 봉우리가 터서 싹이 있는 상태가 이게 지금 시냐 비냐 선이냐 악이냐….
이기영 : 그것을 넘어섰지요.
서정주 : 그 이상의, 생명의 원상의 모양이고 값이다, 그러니까 시비선악을 넘어서야 비로소 생명의 진미(眞美)와 참뜻, 진의가 나타나는 거다….
이기영 : 이게 연꽃같이 생겼어요. 이것이 빛 아닙니까? 빛, 색깔도 빛이지만 빛이 바로 부처라고 해도 돼요. 정말 그거 얼마나 시입니까.
서정주 : 탐·진·치가 꺼지면 싹 나타나기 시작하겠지, 연꽃이.
이기영 : 그런데 말입니다, 그냥 불길이던 것이 착 꽃으로 되는 것….
서정주 : 피었어요, 싸악….
이기영 : 그런 것이 여기저기 많이 나타나도록, 이렇게 생각하고 반성하는 날(釋誕日)이 되어야지요. 공휴일이 되었다고 해서 무조건 알지도 못하면서 즐기기만 하는 것은 사실 우스워요.
서정주 : 그리고 절의 중들은 불공하는 시주나 많이 오기를 바라고, 또 이 불공하는 시주라는 것은 너무나 무식군이어서….
이기영 : 그저 뭐든지 갖다가 바치기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서정주 : 바치면 극락으로 가는 줄 알거든, 그게 우스운 거야.
이기영 : 제 마음에 빛이 없으면….
서정주 : 그것을 계몽해야지.
이기영 : 그렇지, 빛이 없으면 빛이 생길 수가 없지 않아요. 누가 찡그린 사람을 좋아합니까?
서정주 : 이러다가 절간의 스님들이 불공 못 가게 한다고 우리보고 마군(魔軍)이라고 할는지 모르겠어.
이기영 : 절에 가도 좋은데 마음만 바로 먹고, 거기 갔다 나오면서 빛을 좀 발할 수 있도록… 좀 자비로운 빛을 발할 수 있도록 해줬으면 참 좋겠어요.
서정주 : 참 오랜만에 말이지, 이 선생하고 만나니까 이거….
이기영 : 저는 항상 이렇게…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 중요해요.
서정주 : 중요하지.
이기영 : 오래 계십시오, 오래 계시고….
서정주 : 이 박사야 나보다도 나이가 적고 하니까….
이기영 : 아니, 저에게 필요해요.
서정주 : 그런데 그건… 기독교 문자지만 영생이야, 영원히 정신적으로 사는 거지, 불교도 그것 아니야?
이기영 : 영원히 사는데, 살아 있는 동안 그게 그대로 좋거든.
서정주 : 그래서 나는 곡차(穀茶)를 한잔씩 후배들 하고 할 때 무어라 하느냐 하면, 아 우리 영생하자, 거 한 잔 하자….
이기영 : 사실 이렇게 자주 안 만나도 항상 제가 스스로 미당(未堂)이라고 그러시는, 아직 덜 됐다 그러시는 선생님한테 언제든지, 마음이 가고 있습니다.
서정주 : 나야 유치합니다, 언제나 그러니 미당 아니오? 아직 미숙한 사람이야.
이기영 : 저는 아무것도 못 된 상태예요.
서정주 : 미숙한 사람이라 미숙합니다.
이기영 : 오늘은 방담(放談)이니까, 그저 아무런 얘기나 마음대로 하게 된 것 같은데… 오늘 기쁜 날 하루 전날이고 그저 매일매일이 다 기쁜 날이지요. 항상 모두 하고 이렇게 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게 되었으면 합니다.
서정주 : 반갑습니다. 성불(成佛)하십시오.
1985년 5월 26일
KBS TV 방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