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먹고 사랑하고 혐오하는 동물들》, 할 헤르조그 지음, 김선영 옮김, 살림, 2011.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멜라니 조이 지음, 노순옥 옮김, 모멘토, 2011.
《동물 권리 선언》, 마크 베코프 지음, 윤성호 옮김, 미래의창, 2011.
우리 일상에서 흔히 만나는 종류 중, 한 글자로 이름을 붙인 동물을 들어보자. 띠 중에 8가지, 다시 말해 쥐, 소, 용, 뱀, 말, 양, 닭, 개가 있고 그 이외에 곰, 삵, 매, 학, 꿩, 돔, 복, 쏙, 게, 굴, 이, 좀, 벌, 그리고 회가 있으며 생각이 나지 않아 그렇지 그 밖에도 더러 더 있을 것이다. 대부분 위기를 맞고 있는 울타리 안팎의 동물 명단이다.
한 글자 이름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은 저보다 훨씬 나중에 세상에 나온 사람에게 작명을 의뢰하지 않았건만, 이름을 붙인 사람은 생긴 모습에 주관적 편견을 주입하며 동물을 대하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생태계의 건강한 균형보다 사람과 얼마나 가까운지 따져 고등과 하등으로 구별하더니 오로지 실용적 이유로 해로우니 이로우니 분별해 함부로 살육하거나 보호한다. 어떤 종은 울타리 안으로 끌어와 키우다 잡아먹고 어떤 종은 끌어안고 뒹군다. 그뿐인가. 어떤 종은 철창 안에 가둬놓고 당연한 듯 구경한다.
거울에게 세상에서 가장 진화된 동물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뭐라 답할까. 인간? 깨질 공포에 질리지 않는다면 인간의 요구에 결코 화답하지 않을 것이다. 제 환경에 최적으로 적응돼 생태계를 건강하게 구성하는 모든 동물은 현재 가장 진화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만이 아니라 이름이 한 글자인 소와 개와 닭도, 두 글자인 돼지와 오리도 세 글자인 호랑이와 원숭이와 고양이, 하다못해 아메바도 생태계에 공존하는 한, 그렇다. 하지만 공정하지 못한 무기를 휘두르는 사람은 거울의 주장에 아랑곳하지 않고 동물들을 분별하려 든다. 개와 고양이는 사랑하고 소와 돼지와 양과 닭은 먹으며 많은 동물의 가죽을 벗겨 자신의 가냘픈 피부를 덮는다.
한 시절을 풍미했던 프랑스의 육체파 여배우 브리짓드 바르도는 하필 올림픽이나 월드컵을 앞둔 우리를 향해 개고기를 먹는 야만스런 민족이라며 공개적으로 비난해 심기를 건드렸다. 많든 적든 우리나라에서 개고기가 소비되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타인의 시각으로 폄하될 수 없는 고유문화다. 자문화 우월주의로 다른 나라의 음식문화를 비하하다니! 부아가 치민 어떤 이는 너넨 괜찮은지 물었다. 1870년대 프로이센에 포위되었을 때 거리에 돌아다니는 개가 사라질 정도로 잡아먹었던 사실을 들추며 사료를 억지로 먹여 거위와 오리의 간을 축구공만큼 부풀려서 얻는 프랑스 전통의 푸아그라는 야만스럽지 않은가 하며.
동물은 애초 사람에게 무엇이었을까. 수렵채취 시절이라면 경쟁자나 사냥감이었겠지만 농경사회로 접어들면서 가축으로 길들여졌을 텐데, 150여 년 전 찰스 다윈의 조카 프란시스 골턴은 가축의 조건을 몇 가지 들었다. 튼튼하고 사람을 잘 따르며 사육 조건이 까다롭지 않아야 한다는 것과 번식이 쉽고 유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안전을 도모하는 시설과 기술이 확보된 요즘은 사뭇 달라졌다. 애완동물의 종류와 수가 전에 없이 늘었고 동물원의 규모도 확장되기만 한다. 외양간은 공장식 축산으로 변모했고 애완동물을 애지중지하는 태도 역시 예전과 한참 다르다. 그에 비례해 울타리 밖의 동물들은 위기를 맞았는데, 울타리 안의 동물은 덕분에 행복해졌을까.
보아뱀에게 고양이를 먹이로 주는 게 잘못일까? 《우리가 먹고 사랑하고 혐오하는 동물들》의 저자 할 헤르조그는 ‘인류동물학’을 연구하는 학자다. 1973년 3명의 동물행동학자가 노벨상을 탄 이후 동물행동학은 인기가 높아졌지만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분야는 지원자가 드물었는데 이제 어엿한 학문이 되었나보다. 현대 문명 속에서 마음 틀 이웃이 없는 사람이 늘면서 각광받기 시작했을지 모르는데, 할 헤르조그는 동물을 대하는 사람의 비일관성을 주목한다. 1년에 고작 쥐 2킬로그램 정도 먹으면 그만인 보아뱀은 가구를 흠집내거나 이웃을 깨우지 않지만 21킬로그램의 고기를 해마다 먹어치우는 고양이는 재미로 새나 설치류 같은 작은 동물을 죽인다. 미국에서 해마다 200만 마리에 달하는 길고양이가 안락사당해 소각되는데, 새와 설치류도 보호할 겸 고양이를 보아뱀에게 먹이로 주는 일은 왜 부정되어야 하나.
치매나 자폐환자에게 애완동물은 치료효과가 있다는 게 증명되었는데, 돌고래는 훌륭한 치료사일까. 시간 당 700달러를 받는 관련 시설은 고개를 흔들게 한다. 치료를 위해 풀에 뛰어든 사람을 스쳐지나가거나 본체만체하는 돌고래는 자연에서 사로잡힌 개체로 낯선 인간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거다. 개를 키우는 사람과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은 성격이 다를까. 연구결과는 뒤죽박죽이었다고 밝히는 할 헤르조그는 동물학대 아동이 폭력적인 어른으로 성장한다는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와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의 주장까지 뒤집는다. 어릴 적 통과의례라는 게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어려서 시골에서 개구리와 참새 괴롭히지 않았던 이가 드물지만 그들은 대개 건강한 시민으로 성장했다. 우리에게 아직 생경한 인류동물학은 그런 걸 연구하나 보다.
사람들은 눈이 크고 얼굴이 둥글며 몸이 포동포동한 동물의 ‘귀염성 인지반응’에 반응을 보인다고 지적하는 할 헤르조그는 캐나다의 빙원에서 어린 하프 바다포범의 머리를 못 박힌 몽둥이로 때려잡는 사냥에 시민들이 저항하는 이유를 탐색한다. 갓 태어나 저항능력 없는 바다표범은 털이 새하얗고 눈은 우물처럼 깊고 까맣기에 캐나다인들은 뱀과 달리 ‘귀여운’ 아기 바다표범 사냥을 막을 따름이라는 거다. 그래서 사람들은 애완동물을 마냥 귀엽게 육종했다. 다 커도 아기처럼 코가 짧아 호흡이 곤란하며 임신과 출산이 버거운 애완견들이 그렇다. 이제 동물을 비하하는 ‘애완’보다 가족처럼 함께 지낸다는 의미로 ‘반려’를 선택한 사람들은 동물에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식구처럼 “이 아이”, “저 아이”한다. 심지어 “내 딸”, “네 아들”이라 말하는 이도 많다.
실험동물이나 살코기용으로 사육하는 가축에 이름을 붙이면 어떤 마음이 될까. 남몰래 이름을 붙이고 돌보던 실험동물을 차마 죽일 수 없었던 할 헤르조그는 생명체를 먹는다는 죄책감을 줄이려는 육류산업을 주목한다. 고객들이 출처를 고민하지 않도록 가공하는 거다. 대형 식품매장 육류코너를 가보라. 삼겹살, 목살, 사태, 스테이크들로 가공된 고기에서 돼지나 소가 연상되는가. 튀김가루나 양념을 뒤집어 쓴 고기에서 공장식 축산의 고통을 읽고, 어린 나이에 죽은 가축의 운명을 안타깝게 여기는 손님은 없을 것이다.
브리짓드 바르도가 과거 우리 농가에서 도축하는 모습을 보았다면 놀라 자빠질 개고기와 대형 식품매장의 할로겐램프 아래 전시된 살코기를 비교할 때 어떤 게 더 윤리적일까. 적나라한 모습으로 가마솥에 들어간 그 개는 동네를 얼마간 돌아다녔고 짝을 만나 강아지를 몇 차례 낳으며 짧은 삶을 만끽했지만 공장식 축사의 가축들은 달랐다. 어미젖을 떼자마자 옴짝달싹 못하는 축사에 갇혀 몸에 맞지 않는 옥수수 사료와 항생제와 성장호르몬을 받은 채 몸집만 불리다 사춘기에 이르기도 전에 일제히 도살장으로 향했다. 할 헤르조그는 암모니아 가스로 가득한 양계장에서 별안간 자라다 한 순간에 도살되거나 죽을 때까지 계란을 낳는 닭보다 칼과 쇠발톱을 차고 살벌하게 싸우는 투계가 더 인도적이라는 데 동의한다.
시장한 끝에 받은 한 국자의 부드러운 스튜. 근사한 맛에 조리법을 물었더니 개를 넣었다고 대꾸한다면? 대개의 미국인은 식탁의 즐거움이 일순 혐오감으로 바뀔 것이다. 스튜를 떠준 친구가 농담이라 해도 식욕은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의 저자 멜라니 조이는 개는 식용으로 키우는 동물이 아니라는 심리적 틀을 가졌다고 귀띔한다. 쇠고기를 먹을 때 살아 있는 소를 연상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리라. 잡식동물인 사람이 일단 고기 맛을 알고나면 자꾸 끌리게 된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후천적 습득이다. ‘원래 그런 것’이라고 흔히 말하는데, 채식과 마찬가지로 육식도 선택인 만큼 ‘육식주의자’로 불러야 옳다고 주장하는 멜라니 조이는 ‘육식 이데올로기’를 ‘폭력적 이데올로기’라고 단정한다. 그는 생태계와 가축의 복지를 생각하면서 내면의 육식동물인 야후와 타협해 윤리적인 고기를 조금 먹겠다는데 동의하는 할 헤르조그와 달리 완전한 채식주의자다.
소와 돼지, 그리고 닭과 칠면조를 사육하고 도살하는 실상에 진저리치는 멜라니 조이는 거대한 식육사업에서 부품처럼 혹사당하는 노동자의 재앙과 같은 희생과 오염된 고기를 먹고 발생하는 질병 희생자의 고통을 조명하고, 육식주의가 만든 폭력에 불안해하다 점점 익숙해지는 ‘순응과정’의 폐해를 주목한다. 도살하며 정신적 외상을 겪은 작업자는 동물과 사람 모두에게 폭력적이 된다는 게 아닌가. 육식 관련 거대 초국적기업의 정치자금과 로비로 더욱 막강해진 육식주의는 언론이나 홍보 대행업체를 동원해 비판적 사고를 방해하는 이데올로기, 다시 말해 고기 먹는 일은 정상이고 자연스러우며 필요하다는 인식을 내면화하기에 이르렀다고 한탄하는 멜라니 조이는 육식주의가 만든 시스템의 밖으로 나가 깨어 있는 자유의지를 되찾자고 독자에게 호소한다. 독자들은 그이의 호소에 얼마나 호응할까.
구제역으로 소 수백만 마리를 살처분하던 2001년 영국은 피닉스라는 이름을 가진 어린 송아지의 사진을 앞세우며 정책 수정을 요구하는 동물보호운동가들이 의견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희생자의 숫자가 많을수록 몰개성화가 심해지는 경향을 주목하는 멜라니 조이는 동물은 물론이고 사람까지 대상화하고 몰개성화하며 이분화하는 육식주의에서 벗어나는 길을 감성에서 찾는다. 공장식 도축장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숲으로 숨어든 한 젖소의 저항에 공감한 많은 이들이 아예 고기를 끊었다는데 주목하는 멜라니 조이는 육식주의가 초래하는 비윤리적이고 환경적인 문제를 증언하고 고발하는 행동이 모이고 모여 육식주의를 거부하는 사회를 만들자고 촉구한다. 폭력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자는 건데 《동물 권리 선언》의 저자 마크 베코프는 사람을 향해 동물이 권리선언을 한다면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할지 생각한다.
사람들의 의제에 동물까지 포함하자고 제안하는 마크 베코프는 인간은 자연을 경외의 대상으로 바라보아야 하고 모든 동물은 존재만으로 내재적 가치를 지니므로 그들의 존엄을 침해하지 않으며 공존해야 한다는 신학자 토마스 베리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종 우월주의’에서 벗어나자고 당부한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는 애완동물이든, 공원에서 한 여성에 다가갔다 사살된 코요테든, 전기 철조망에 감전사한 새끼를 찾으러 주택가로 왔다가 총격을 받은 흑곰이든, 그들과 평화롭게 공존해야 한다고 덧붙이며, 우리가 동물들의 공간을 잠식하지 않았는지 묻는다. 어쩌면 동물들이 사람 곁에 다가와서 공존을 먼저 타진하는지 모른다고 자신의 경험담을 전한다.
동물은 생각할 줄 알고 감성도 가졌다. 딱정벌레가 모여들도록 포유류의 배설물을 가져오는 가시올빼미만이 아니다. 새끼에게 치실 사용법을 가르치는 원숭이와 보모에게 새끼를 맡기는 향유고래를 비롯해 까치와 거북과 코끼리와 유인원들의 감성적인 행동을 두루 살핀 마크 베코프는 캥거루를 구하는 개, 사람을 구조하는 돌고래와 개를 예로 들면서 온정적인 동물은 마땅히 사람의 온정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걸 강조한다. 동물은 사람과 경쟁관계에 있지 않건만 동물과 밀접한 관계를 나누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현대문명으로 인해 ‘자연결핍 장애’를 갖게 된 현실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온정적인 채식 위주의 식습관을 당부하는 마크 베코프는 멜라니 조이처럼 고기의 출처라도 알고 먹자고 당부한다. 장차 공장식 축산으로 얻은 고기는 물론이고 유기농 살코기도 피하게 되리라 기대하면서.
사냥으로 희생되는 동물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수족관에 갇힌 동물들, 일방적 개발로 생태공간이 잠식된 동물들의 신세는 어떤가. 동물실험 결과는 사람에 적용 가능하며 공연장의 동물은 행복한가. 좁은 나무상자에 집어넣고 키워 얻는 송아지 고기가 금지되었다. 철망 상자로 산란용 닭을 사육하는 행위가 머지않아 유럽에서 금지된다고 한다. 애완 영장류의 거래와 바다포범을 잔혹하게 사냥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일련의 조치는 온정주의를 실천하는 행동이 있기에 가능했다. 사람에 의해 최악의 위기에 처한 동물에게 마음을 열면 그들도 우리 마음을 움직이게 할 것이라 믿는 마크 베코프는 품위와 겸손, 존중, 온정, 연민과 사랑으로 동물을 대한다면 더 많은 것을 얻고 더 적게 잃을 거라고 말한다. 하긴 선물은 받을 때보다 줄 때 더 기쁜 법이다.
올 겨울의 구제역은 일부의 감염된 가축과 감염되지 않은 수백만의 가축들을 살처분해 땅에 묻게 했다.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철새 배설물에서 검출되었다는 이유로 600만 마리의 멀쩡한 가금들이 같은 방식으로 처리되었다. 공장식 축산을 부추기는 우리의 식습관이 바뀌지 않는다면 구제역과 조류독감이 계속될 것이다. 광우병도 재현될지 모른다. 일본 후쿠야마 핵발전소 반경 20킬로미터 이내의 소와 돼지들은 공포에 질린 사람이 탈출하자 시방 굶주리다 죽어 자빠지는데 동물도 방사능에서 자유로울 리 없다. 그 동물들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우리를 왜 여기에 태어나게 했냐고 인간에게 물을 것 같다.
요사이 바다에서 알 낳으려 돌아오는 황어를 맞느라 해안의 하구마다 북적인다. 붉은색 띠를 가진 팔뚝만한 황어들이 ‘물 반 고기 반’ 맑은 물을 헤치며 상류로 오르는 장관은 경이로운데, 강원도의 어떤 황어축제는 ‘맨손잡기’를 홍보한다. 엉터리 어도에 상처받고 물길을 차단하는 보를 힘겹게 뛰어넘었더니 팔뚝을 걷어붙인 사람들의 등쌀에 죽어가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인가. 펄떡이는 생명체를 움켜쥐고 만면에 웃음을 짓는 관광객들은 황어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황어의 생태와 고통까지 고려하는 축제는 정녕 불가능한 걸까.
후미진 곳마다 애완견의 배설물이 흩어진 아파트 단지의 공원에 가끔 두건과 선글라스를 쓰고 양말에 농구화까지 신은 애완견이 나타나 어기적거린다. 양쪽 귀와 리본을 단 꼬리가 알록달록하게 염색된 그 애완견은 얼마나 불편할까. 아파트 상가의 주점을 기웃거리던 길고양이가 주차한지 얼마 되지 않는 자동차 아래에 웅크린 채 처절하게 울어대자 병정놀이하는 아이들이 장난감 총을 난사한다. 고양이는 아스팔트로 튀어나가고, 이윽고 공기를 찢는 브레이크 소리! 이맘때 울부짖는 길고양이라면 임신했을지 모른다.
한여름이면 철망 상자 한가득 켜켜이 트럭에 실리는 황구는 할 헤르조그가 한국인의 점심상에 오른다고 쓴 개고기가 될 운명인데, 일부 학자와 율사는 개고기 도축 합법화를 주장한다. 음성으로 도축되는 개를 안전하게 사육해 위생적으로 도축하는 제도를 마련하자는 주장이다. 음식문화 상대주의 관점에서 그런 주장이 아무리 떳떳할지라도 국제 통상을 먼저 생각하는 이는 인상을 찌푸릴 게 분명한데, 문제는 다른 데 있다. 개고기 통조림과 3분 요리도 구상하는 이들은 개까지 공장식으로 사육하려 들 게 뻔하지 않은가. 과다한 육식으로 환경과 인성과 몸이 망가지는 세상에 송곳니가 날카롭고 몸이 날렵한 개까지 망가뜨려야 할까.
생긴 모습으로 동물을 해석하는 서양은 전설이나 우화에 두꺼비를 사악하게 취급하지만 우리는 은혜를 갚는 존재로 이해하려 한다. 등불에 모여드는 해충을 넙죽넙죽 잡아먹는 두꺼비는 농경사회에서 친근했기 때문이리라. 이제 두꺼비를 만나려면 관광버스를 타고 산골짜기를 찾아야 한다. 그러자 두꺼비를 살리자는 시민단체가 생겼다. 그들은 두꺼비의 산란 연못은 물론이고 서식공간까지 보호하려 애쓴다. 가녀리게 남은 두꺼비나마 두꺼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생태계를 지켜주려는 행동이다. 그들이 채식을 하는지 알 수 없는데, 채식의 가치를 역설하며 따뜻한 동정심으로 동물의 복지와 권리를 배려하자고 간절하게 제안하는 3권의 책은 동물을 그 본성에 맞게 키우거나 보살피자고 외친다. 결국 사람답게 살자는 뜻일 게다.
|
첫댓글 독일에서 잘 돌아왔습니다. 큰돈을 들인 여행이니만큼,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돌아오려 했는데, 완전하지 않아도 여행목적은 거의 이룬 것 같아 다행입니다. 이제 그 이야기들을 여기저기 쓰고, 본격적인 글도 쓰려고 합니다. 어제 돌아와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을 정신없이 처리하고, 잠들었다 이제 일어나 여기에 올립니다. 월요일이 지난 만큼 목요일 올릴 글을 당기면서, 조금 긴 글을 올리니다. <녹색평론> 지난 호에 기고한서평입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고맙습니다.생각없이 살다가 선생님 글을 읽으면 정신이 번쩍 듭니다.어릴적만해도 고깃국은 일년에 한두번 아버지의 생신이나 명절때 탕국으로밖에 구경할수 없었지요.어쩌면 예전 삶의 방식으로 돌아간다면 모든게 부족하고 없어서 귀할때 귀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