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조정에서는 이순신 수군의 활약에 큰 기대를 걸었다. 1592년 5월 첫 출전부터 연전연승한 이순신의 수군은 불패의 상징이 되었다. 일본 수군은 서해를 거쳐 북상해 조선의 숨통을 완전히 끊으려는 계획을 실패했고, 그로 인해 군량 보급과 병력 이동이 어려워져 결국 평양까지 진출했다가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며 부산을 비롯해 남해안으로 밀려났다. 남해 바다를 지킨 이순신의 힘이었다.
《난중일기》 1593년 3월 22일 일기 뒤의 메모에는 ‘편범불반(片帆不返)’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단 한 척의 적선도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뜻이다. 나라를 침략하고 무고한 백성을 죽이고 괴롭힌 적을 끝까지 섬멸하겠다는 이순신의 각오를 표현한 것이다.
같은 의미를 다르게 표현한 ‘척로불반(隻櫓不返)’도 나온다. 이 표현은 명나라와 일본이 강화 협상을 하던 중인 1594년 3월, 명나라 군대가 이순신의 수군에게 일본군을 공격하지 말라고 한 <금토패문(禁討牌文)>을 보내자, 이순신이 쓴 반박문에 언급된 것이다.
<금토패문>의 핵심은 명나라가 일본이 강화조약을 체결하려고 하는 중이니, 이순신에게 “속히 본고장으로 돌아가고 행여나 일본 진영에 가까이 가서 논란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이었다. <금토패문>을 읽고 이순신은 분노했다. 그는 그 당시 병에 걸려 20여 일 동안 심하게 앓고 있었기에 처음에는 부하에게 대신 답장을 쓰도록 했으나 자신의 생각을 담아내지 못했다. 또 원균의 부하도 글을 지었지만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이순신은 중병임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일어나 반박문썼다. 이순신의 반박문이 바로 <답담도사종인금토패문答譚都司宗仁禁討牌文>이다.
▲ 왜적들이 먼저 트집을 잡아 군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와 죄 없는 우리 백성들을 죽이고 또 서울로 쳐들어가 흉악한 짓들을 저지른 것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의 원통하고 분한 마음이 뼛속까지 맺혀있다. 나는 왜적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誓不與此賊, 共戴一天. 서불여차적, 공대일천). ▲ 남아 있는 왜적들이 탈 단 한 척의 배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여 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한다(使殘兇餘孼, 隻櫓不返, 擬雪國家之 怨. 사잔흉여얼, 척로불반, 의설국가지수원). ▲ 왜놈들은 거제ㆍ웅천ㆍ김해ㆍ동래 등에 진을 치고 있는데 거기는 모두 우리 땅이다(皆是我土. 개시아토). 그런데 우리에게 일본 진영에 가지 말라는 것은 무슨 말인가? 또 우리에게 속히 제 고향으로 돌아가라 하고 하지만, 본래의 고향이 어디를 말하지는 알 수 없다(謂我速回本處地方云, 本處地方, 亦未知在何所耶. 위아속회본처지방운, 본처지방, 역미지재하소야). 또 트집을 일으킨 자는 우리가 아니라 왜적들이다. 대인은 이 뜻을 널리 살펴 놈들에게 하늘을 거역하는 것과 하늘의 순리를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면 천만다행일 것이다(裨知逆順之道, 千萬幸甚. 비지역순지도, 천만행심).
이순신이 쓴 답장의 핵심은 “영남 연해안이 우리 땅 아닌 곳이 없고(嶺南沿海, 莫非我土. 영남연해, 막비아토) 도적들과는 한 하늘 아래 같이 살 수는 없다(吾爲朝鮮臣子, 義不與此賊共戴一天. 오위조선신자, 의불여차적공대일천)”이다.
이순신의 편범불반의 결의는 1598년 11월 노량 해전 직전에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난 다음 일본군은 철수를 하려 했다.
그러나 이순신이 일본군을 철저히 궤멸시키려고 후퇴하는 길목을 막자 일본군은 명나라 수군대장 진린에게 뇌물을 주어 후퇴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고 요청했다. 이순신은 진린이 일본군의 후퇴를 돕기 위해 길을 열어 주려고 하자 진린에게 말했다.
“대장으로 화친을 말할 수 없고, 원수를 놓아 보낼 수 없소(大將不可不和, 讐賊不可從遣. 대장불가불화, 수적불가종견). 일본군은 심지어 이순신에게도 뇌물을 바치며 간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순신이 단호히 거절하자, 일본군은 계속 진린에게 뇌물을 바치며 도망칠 길을 열고자 했다. 진린은 일본군의 탈출을 돕기 위해 도망가려는 일본군을 토벌하는 대신, 남해의 다른 지역에 주둔한 일본군을 토벌하러 떠나겠다고 이순신에게 말했다. 이순신은 진린에게 한 번 더 설득했다. “남해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 백성으로 적에게 포로가 된 사람들이지 왜적이 아니오.” 그러자 진린은 일본군의 포로가 된 조선 백성일지라도 적이라며 그들을 토벌하겠다고 주장하며 심지어 이순신을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이순신은 재차 엄하게 말했다. “한 번 죽는 것은 아깝지 않소. 나는 대장이 되어 결코 적을 버려두고 우리 백성을 죽일 수는 없소(一死不足惜, 我爲大將, 決不可舍賊而殺我人也. 일사부족석, 아위대장, 결불가사적이살아인야).” 이순신의 당찬 결의와 설득에 검동한 진린은 결국 이순신과 함께 노량에서 후퇴하는 일본군과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조명 연합군은 일본군 전선 5백여 척과 밤새도록 싸워 적선 2백여 척을 불태웠다. 이순신은 이날 전사했다.
편범불반의 정신은 침략에 대한 철저한 응징을 위한 자기 다짐이었다. 그는 적을 완전히 굴복시켜야 두 번 다시 똑같은 침략을 저지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순신의 편범불반의 정신은 한 번 시작한 일은 완전히 끝날 때까지 최선을 다하려는 자세다. 온갖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목표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려는 태산같은 자세이기도 한다.
편범불반의 정신이라면, 누구와 싸우던, 누구를 만나던 당당할 수 있다. 편범불만의 정신으로 산다면 우리는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