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 프로필 이미지
오늘이 있기에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여행 스크랩 수덕여관 고암 이응로
한국의산천 추천 0 조회 88 08.01.01 17:31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2008년 1월 1일 첫 산행지와 첫 답사지. ( 참석자 한국의산천 & 추억의연가)

복원된 수덕여관과 홍성 용봉산. [글,사진 한국의산천 우관동]

 

이 그리워 새해아침 서해안 방향을 택했다.

산행지는 용봉산, 유적 답사지는 이번에 복원된 고암 이응로선생께서 머무르신 수덕여관.

 

2007년 12월 31일 수덕사에 전화를 걸고 기상 상태를 확인했다.(기상대보다 현지 확인이 제일 정확하다) 

눈이 많이 쌓이고 12월 31일 밤 현재도 눈이 내리고 있다는 내용을 전달 받았다.그리고 준비를 했다.

차량은 사륜구동이지만 체인준비. 그리고 윈드재?, 스페츠, 아이젠, 장갑, 손난로, 보온병에 뜨거운 커피, 간식, 떡 등등...

 

 ▲ 서해안 고속도로 해미IC에서 나와 덕산 방향 수덕사로 이동중에 만나는 터널 ⓒ 2008. 1. 1일 한국의산천 우관동

서산 가야산과 삼준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아래 있는 터널이다. 

아침 5시에 출발 서해대교에서 일출 사진을 촬영하려 했으나 눈발이 거세지기에 일출보기를 단념하고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충남 예산은 금북정맥 산줄기가 지나며 널찍한 내포평야에 터를 잡은 고을이다. 서쪽으론 금북정맥의 맹주인 가야산(678m)과 덕숭산(495m)이 불쑥 솟아 있으나 전체적으론 골격이 부드러운 편으로 내포지방의 여느 고을과 마찬가지로 비산비야의 들판이 넉넉하다.

서해안고속도로 해미 나들목으로 나와 45번 국도를 타고 예산 방면으로 20분쯤 달리면 덕숭산 기슭에 자리잡은 수덕사(修德寺)가 반긴다. 일주문 근처의 수덕여관은 우리 미술의 우수성을 세계 속에 드높인 고암 이응로(1904~1989) 화백 사적지. 고암은 이 여관을 구입한 1944년부터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인 1959년까지 이곳에 머물면서 작품 활동을 했다. 수덕여관 앞의 바위조각은 1969년 동백림 사건으로 귀국했을 때 삼라만상의 성함과 쇠함을 추상화하여 표현한 작품이다.

 

 ▲ 덕산방향에서 육괴정 고개를 넘어 미끄러운 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오면 수덕사 입구가 나온다. ⓒ 2008 한국의산천 

 

 ▲ 수덕사 일주문 (일주문 바로 왼편에 수덕여관이 자리하고 있다) ⓒ 2008 한국의산천

 

▲ 2007. 10. 5일 새로 복원 준공된 수덕여관  ⓒ 2008 한국의산천

고암이 1944년 구입해 1959년 프랑스로 가기 전까지 거처하며 수덕사 일대 풍경을 화폭에 옮긴 곳으로 유명한 수덕여관(도지정 기념물)이 복원되었다.

 

수덕여관과 이응로 화백 

아주 오래전...고교시절 가벼운 차림으로 텐트와 배낭하나 달랑 메고 영등포에서 장항선을 타고 예산 수덕사로 향했다.  수덕사 역에서 버스를 타고 먼지가 풀풀나는 비포장 길을 털털거리고 달려 수덕사에 도착했다.

그러니깐 그때가...여름 방학이 끝나갈 무렵, 수덕여관에 방을 잡았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자는데 혼자 잠자기가 적적하여 그 집에 있는 10살 정도의 아이의 방학 숙제도 해주고 같이 잠을 잤다. 

연로한 분이 계셨는데 어찌나 친절하시던지 하룻밤 방값만 계산을 한 후 밥값도 안받고 그냥 이틀을 머물고 왔다.

그곳에서 이틀을 머무른 후 집으로 돌아오고, 그후 그 아이의 큰 누나 쯤 되는 "정"某 씨와 펜팔을 하게 되었다. (나 보다 두살 아래...) 

 군대를 다녀오고 오랜 시간이 흘러 그곳이 그 유명한 수덕 여관이란 것을 알았다.  

다리를 건너 들어가면 그곳에는 일엽스님의 이야기가 있고 그와 동갑내기인 나혜석의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며 한국 화단에 큰 족적을 남긴 이응로 화백의 이야기가 가슴 짠하게 베어있는 곳이다. -한국의산천- 

▲ 복원된 수덕여관 전경 ⓒ 2008 한국의산천 

 

▲ 눈이 약 30cm 정도 쌓여있다 ⓒ 2008 한국의산천

이 수덕교를 통하여 수덕 여관으로 들어간다. 당시 수덕 여관 전면은 지금처럼 허리춤 높이의 쪽 마루와 난간이 있었고 안에는 방이 여렀 있는데 비교적 깨끗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그 당시 이곳에서는 산채정식이 유명하였다. 

▲ 2008년 1월 1일 이른 아침 눈까지 내려 어두운 상태. 노출 ?추기가 어려웠다. ⓒ 2008 한국의산천 

▲ 지금의 옥호는 이응로선생께서 쓰신 수덕여관을 달았다. ⓒ 2008 한국의산천   

 


▲ 너무 이른시간이라 대문이 닫혀있어 옆 마당쪽으로 돌아드니 이응로선생님께서 마침 화분을 나르고 계셨다. ⓒ 2008 한국의산천   

깜짝 놀랐다 살아계신듯한 모습의 포스터가 그대로 생화 화분과 겹쳐져서 생생한 화면이 만들어졌다. 

 

이응로(李應魯) 1904∼1989. [충청남도 홍성출생. 화가. 본관은 전의(全義), 호는 죽사(竹史), 고암(顧菴)]

 

1924년 서울로 올라와 김규진(金圭鎭)에게 묵화를 사사하여 그해부터 조선미술전람회(鮮展)에 묵죽(墨竹)을 비롯하여 묵매(墨梅)·묵란(墨蘭) 등 사군자의 그림으로 거듭 입선하고, 1938년부터는 수묵담채의 사실적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1944년까지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 계속 입선과 특선에 오르며 전통화단에 뚜렷이 진출하였다.
1938년 새로운 그림수업을 위하여 일본에 건너가 동경에 머무르면서 가와바타화학교(川端畵學校)와 혼고회화연구소(本鄕繪畵硏究所)에서 일본화법과 양화의 기초를 익히며 그림의 기량을 넓혔다.
그러면서 1939년부터 1944년까지 동경의 일본화원전(日本畵院展)에 참가, 입선과 특선을 하는 작품활동을 보였다.
 

1945년 8·15광복 직전에 귀국하여 배렴(裵濂)·장우성(張遇聖)·김영기(金永基)·이유태(李惟台)·조중현(趙重顯) 등과 전통회화의 새로운 방향을 탐구한다는 모임으로 ‘단구미술원(檀丘美術院)’을 조직하여 1946년부터 동인전을 가졌고, 조선미술가협회 상임위원이 되기도 하였다.
그 시기부터 현대적 수묵화작업으로 자연풍경과 향토적인 인물풍경 또는 동물·새 등의 소재를 주제로 삼은 독특한 붓놀림의 창작성을 시도하기 시작하여 1950년대의 분방하고 자유로운 독자풍으로 이어졌다.
 

1957년 조선일보사 주최 제1회 현대작가미술전에 참가하고, 다음해에도 초대를 받는 등 현대적인 작가상을 스스로 확립하다가, 1958년 국제적 도전으로 부부관계였던 제자 화가 박인경(朴仁京)과 더불어 독일을 거쳐 프랑스의 파리에 정착, 그간의 수묵화 한계를 과감히 벗어난 서구(西歐) 미학의 콜라즈(collage)로 파격적인 변신을 나타내었다.
 

서울에서 가져간 화선지 외에 버려진 모든 종이를 재질삼아 콜라즈로 형상시키고 바탕도 무엇이든 이용한 그 실험적인 조형행위는 먹물 또는 은근한 색상 부여로 동양적인 정신성과 은밀한 형상창조로 이내 국제적 평가와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 작품들은 1965년 무렵까지 ‘콩포지시옹(Composotion)’이라는 단일명제가 붙여졌다. 파리와 독일·스위스·덴마크 등지의 여러 화랑 및 미술관에서 그 작품들이 초대전시되었다.
그뒤의 약 10년간을 작가 스스로 ‘사의적 추상시기(寫意的抽象時期)’, 그리고 그에 이은 1980년대 초기까지를 ‘서예적 추상시기(書藝的抽象時期 : 흔히 문자추상이라 한다.)’로 작화(作畵) 의도와 조형적 표상성의 창조적 변화와 집중성을 나타내었다. 그 모두가 동양적 표현정신과 밀착된 특질로서 국제적 위상을 실현시켰다.
그러나 6·25 때 월북한 아들 관계로 베를린에서 북한 공작원과 만난 것이 〈반공법〉에 위반되어 1967년 서울로 유인된 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가 1969년 특별사면되어 파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1977년에도 파리에서 피아니스트 백건우(白建宇)와 영화배우 윤정희(尹靜姬) 부부의 북한납치미수사건의 배후로 몰려 곤욕을 치른 뒤, 남한과의 관계를 단절하다가 1983년 프랑스에 귀화하였다. 그리고 1981년부터는 남한의 민주화투쟁을 주제로 삼은 ‘시위 군중’ 소재의 대대적인 수묵화 연작에 주로 열중하였다
 

 

 

▲ 대문에서 들어가사 오른쪽 제일 끝방 ⓒ 2008 한국의산천    

객수(客愁)에 잠 못 이루며 뒤척이던 어느 겨울 밤, 문득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탐스런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굵은 함박 눈이 하얗게 내려앉은 좁은 마당과 봉긋한 초가지붕은 어느새 둥덩산같이 솟아올랐다.

매화꽃 같은 눈송이가 하염없이 휘날리는 밤의 정취에 몰입한 나머지 겨울날의 살을 에는 듯한 한기(寒氣)조차 느낄 겨를이 없었다. 객수로 뒤척이던 차에 눈 구경까지 하느라 수덕여관에서의 그날 밤은 거의 뜬눈으로 지새우고 말았다. 그 뒤로는 수덕사를 생각할라치면 절 자체보다도 수덕여관이 먼저 떠오르곤 한다. 

 

수덕여관은 그 독특한 외형으로 인해 길손의 마음을 잡아끈다. 위압적인 콘크리트 구조물의 여느 여관들과는 달리 초가지붕을 얹고 있어 옛날의 객줏집이나 시골의 민가를 보는 듯하다. 해방된 뒤로 여태까지 문짝 하나 허투루 고쳐 달지 않고 고집스럽게 옛 모습을 지켜왔다고 한다. 더구나 이곳에는 고암 이응로(1905~1992) 화백의 미망인인 박귀희씨(89세)의 애절한 망부(望夫)의 사연이 아로새겨져 있어 사람들의 가슴을 찡하게 만든다.
  

충남 예산 출신인 고암은 세계 화단의 주목을 받았던 현대 한국화의 거장이다. 그는 그림에 대한 소질을 타고났으나 화업(畵業)을 천하게 여기는 양반집의 가풍으로 인해 제대로 그림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17세때에 집을 뛰쳐나온 고암은 각처를 두루 돌아다니며 그림 공부를 하였는데 한때는 해강 김규진의 문하에 있기도 했다. 마침내 제10회 선전(鮮展)에서 '소낙비가 쏟아지는 날의 대밭'이라는 작품으로 특선을 하였고, 그 뒤에 일본으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하였다. 해방이 되자 고향으로 돌아온 고암은 수덕여관을 사서 그곳에 잠시 머물렀다. 그러나 여관은 부인 박귀희씨가 맡아 운영하였고, 고암은 그림을 그리러 다닌다는 구실로 집을 떠나 있는 날이 더 많았다. 그리고 며칠 만에 돌아와서는 여관 손님처럼 머물다가 다시 훌쩍 떠나곤 했다. 

 

당시 이미 화단의 주목을 받고 있던 고암은 서울로 올라가 미술대 교수로 재직하였다. 고향에 본부인을 둔 채 서울 생활을 하던 그는 이화여대 제자였던 박인경씨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1957년 고암은 자신의 예술세계를 더 넓은 무대에서 펼쳐보기 위해 박인경씨와 함께 프랑스 파리로 건너갔다. 그때부터 박귀희여사의 기약없는 기다림과 망부의 세월이 시작된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1968년에 박씨 할머니는 고암과 짧은 재회의 시간을 갖게 된다. 고암이 이른바 '동백림(동베를린 공작단) 사건'에 연루되어 국내에서 옥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친자식이 없었던 고암은 양자 둘을 두었는데, 그 중 장남이 6·25 때에 납북되었다. 파리에 머무르던 고암은 장남이 북한에 살아 있음을 알고 양아들을 만나기 위해 윤이상과 함께 북한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 일이 동백림사건의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 대전교도소와 전주교도소에서 옥살이하는 고암을 남모르게 옥바라지 해준 사람은 그에게 버림받은 본부인 박씨였다. 1년여 뒤에 출옥한 고암은 수덕여관에 잠시 머무르며 요양을 하다가 다시 파리로 훌쩍 떠나버렸다. 

 

그때 고암은 수덕여관 뒤뜰의 우물가 양옆에 있는 두개의 넓다란 바위에 독특한 문자추상화를 새겨 놓았다. "1969년 이응로 그리다"라는 사인까지 새겨진 이 암각화(岩刻畵)는 한글의 자모음들이 서로 엉키는 듯하면서도 조화를 이루며 아름답게 풀려가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문자추상은 동양적인 전통과 정신을 서구적으로 변형시킨 동도서기(東道西器)의 한 시도였다. 수덕여관의 뒤뜰에 있는 암각화는 고암의 동도서기식 문자추상화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박씨 할머니는 이 암각화를 바라보며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고암은 1992년 회고전이 열리고 있던 파리에서 끝내 다시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세상을 뜨고 말았다. 고암은 영영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박씨 할머니는 그와 함께 보냈던 날의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이 여관을 옛 모습대로 지켜왔다고 한다.

초가집의 그윽한 운치나 객수가 아니더라도, 수덕여관에 녹아 있는 이런 애절한 사연을 알고난 뒤라면 누구나 잠 못 이루고 뒤척거리는 밤을 보내게 된다. [출처 " 예술의전당] 

 

▲ 아름다운 한글전시회가 이응노 화백이 생전에 작품활동을 했던 수덕여관이 복원되면서 수덕사 선(禪) 미술관에서 열렸다. ⓒ 2008 한국의산천   

이곳 말고도 이전에 서울, 대전에 이응노 미술관이 건립되었다.

고암 이응노(1904~1989) 화백이 한때 옥고를 치른 한밭벌 대전시 서구 만년동 대전시립미술관 옆에서 독립된 '이응노미술관'으로 문을 열었다. 작품 200여점을 부인 박인경(83)여사로부터 기증받아 수장하고 있다. 이 화백의 부인 박인경 여사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 아름다운 한글 심응섭 글씨 모양전 작품 ⓒ 2008 한국의산천   

▲ 아름다운 한글 심응섭 글씨 모양전 작품ⓒ 2008 한국의산천     

 ▲ 아름다운 한글 심응섭 글씨 모양전 작품 ⓒ 2008 한국의산천     

▲ 아름다운 한글 심응섭 글씨 모양전 작품 ⓒ 2008 한국의산천    

▲집사람과 새벽 4시에 일어나 5시에 길을 나섰다.ⓒ 2008 한국의산천    

▲ 나는 우리가 쓰는 말과 문자, 흰옷을 입는 기상 등 깨끗하고 고상하고 착한 우리 민족성을 그리고 싶습니다-이응로- ⓒ2008 한국의산천 

▲ 수덕여관 뒤뜰 ⓒ 2008 한국의산천   

▲ 수덕여관 측면(동쪽)ⓒ 2008 한국의산천

동트기 직전이라 눈바람이 매우 차가웠다. 겨울은 진짜 강철로 된 무지개인가보다.     

 ▲ 전면에서 바라 본 수덕여관 측면 ⓒ 2008 한국의산천   

▲ 고암 이응로 선생 기념비  ⓒ 2008.  한국의산천      

수덕여관 앞 수덕교 옆에 세워진 기념표석    

▲ 아침 7시 계속해서 눈이 내리고 있다 ⓒ 2008 한국의산천    

▲ 사선을 그으며 내리는 눈과 바람 ⓒ 2008 한국의산천    

▲ 수덕여관과 앞에 보이는 암각화 ⓒ 2008 한국의산천   

 ▲  우물 옆에 있는 암각화 ⓒ 2008.  한국의산천

한글을 형상화한 암각화는 고암의 동도서기식 문자추상화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  다리 옆에 있는 암각화 ⓒ 2008.  한국의산천

한글을 형상화한 암각화는 고암의 동도서기식 문자추상화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  다리 옆에 있는 암각화 ⓒ 2008.  한국의산천

 

▲ 용봉산으로 등산가기위해 나오는 뒷걸음에 다시 바라 본 수덕여관. 눈발이 날리고 있다.ⓒ 2008. 한국의산천 

지금도 눈발이 날린다.

고암은 1992년 회고전이 열리고 있던 파리에서 끝내 다시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세상을 뜨고 말았다. 고암은 영영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박씨 할머니는 그와 함께 보냈던 날의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이 여관을 옛 모습대로 지켜왔다고 한다.

초가집의 그윽한 운치나 객수가 아니더라도, 수덕여관에 녹아 있는 이런 애절한 사연을 알고난 뒤라면 누구나 잠 못 이루고 뒤척거리는 밤을 보내게 된다.

다시 건축한 수덕여관을 보며 기약없이 기다리는 망부의 애닮은 한이  절절히 되살아 난다.

세월은 가도 아픔은 남아....     

▲ 한국의산천과 허구헌날 고생 많이한 제 집사람 추억의연가 ⓒ 2008 한국의산천 

숙연한 마음을 갖고 집사람과 함께 계속해서 눈쌓인 용봉산으로 이동합니다.

 
다음검색
댓글
  • 08.01.02 05:49

    첫댓글 수덕여관 다리옆 이응로 화백의 암각화가 흰눈을 소복하게 맞고 후레임처럼 되어 고인의 유작품에 깊이를 더합니다. 박씨 할머니의 수절로 지켜 온 수덕여관의 초가 지붕밑에서는 망부의 정이 녹아 흐르고 있어, 이곳을 찾는이들에게 눈시울을 적시게 합니다 우리의 미술을 서양에 심어 놓은 이응로 화백, 아들을 만나려 한 것이 무기징역의 죄가 되었었던 뼈 아픈 시대가 있어서 그를 더욱 큰 재목으로 만들었었는지?... 한 민족의 얼과 정신을 서양에 알리고, 우리민족의 우수성을 서양에 인식시켰던 세계적인 귀재였습니다. 지금 프랑스 국립 박물관에서는 이응로 화백의 작품을 복원 저장한 타피스트리(대형 카페)가 수백장

  • 08.01.02 05:50

    만들어져서 국보처럼 보존되고 있습니다 꽃삽 어딨지?

  • 08.01.02 11:47

    서양에서 미술을 배워오고 미술에서 서양의 미술만이 예술인 것처럼 잘못된 인식을 깨우쳐 주고, 우리의 미술을 서양인들의 미술세계에 인식시키고 서양사람들이 배우도록 만든 세계적인 귀재였었습니다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