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 상 15;24-35.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 이였고. 2021. 10. 3.
튜닝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튜닝(tuning)이 무엇인가요? 대부분의 악기는 온도와 습도에 따라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합니다. 악기는 신축성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신축성 때문에 음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악기의 제대로 된 소리를 내기 위해서 연주전에 음을 조절하는 하는데 이를 튜닝이라고 합니다. 시작의 기준이고 표준인데, 오케스트라는 연주하는 사람이 내는 A(라)음에 맞춥니다. 초점(focus)입니다. 군인들이 사격을 할 때에 미리 초점을 맞추는 것도 튜닝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특정 분야에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거의 중요한 모든 영역에서 튜닝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항공기의 운행에 적용이 되고 아침에 출근하는 사람에게 적용이 되고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 적용이 됩니다. 특히 신앙인에게 적용이 됩니다. 그러면 신앙인은 어디에서 시작의 기준을 잡고 어디에 표준을 맞추고 어디에 초점을 잡아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드는 세상의 변화에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세상의 뜨거운 열기와 눅눅한 습기와 꼼짝할 수 없도록 얼어붙은 이 현실에서 어떻게 신앙인으로 매진할 수 있을까요? 날마다 튜닝을 해야 합니다. 새로운 새벽에 들려오는 기준 음에 귀를 기울어야 하고 모든 시작을 표준에 맞추어야 합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라도 초점을 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이 튜닝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복주시고 높여주신 은혜를 지키지 못합니다. 여러분, 오늘 날 현대인과 신앙인의 맹점이 있습니다. 조선일보 인기 만화 중에 광수생각이라는 그런 칼럼이 있는데 거기에 있었던 이야기 입니다. 한 아가씨가 자기 친구를 만나서 나 며칠 전에 약혼 파혼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친구가 언제? 한 일주일 전에 파혼했어. 생각해보니까? 그 사람과의 함께 할 앞 날이 시원치 않아서 파혼했어. 그런데 이야기를 듣던 친구가 파혼을 이야기 하는 친구를 보니까 여전히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 그런데 너 그 반지는 왜 아직도 끼고 있느냐? 대답하기를 다이아몬드 반지에 대한 내 애정은 변함이 없거든. 무슨 말입니까? 다이아몬드에 대한 애정은 있고, 다이아몬드를 준 사람에 대한 애정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맹점이 아닐까요? 사람은 없고 돈만 보이고 사랑은 없고 물질만 있고, 하나님은 없고 내 지위만 있고, 축복만 있고 책임은 없는 것과 같은 이런 것들이 신앙인의 맹점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는 종종 당신의 할 일만 하라고 합니다. 간섭과 명령과 권면을 싫어합니다. 이런 것들이 사람은 없고 다이야만 있는 경우입니다. 오늘 사울 왕이 그렇습니다. 사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은혜의 집이고 은혜의 연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은혜를 주실 때에 손만 넣으면 해결이 되고 회복이 됩니다. 그런데 낫고자 하는 의지와 생각과 행동이 없습니다. 그냥 머물러 있고 현상만 봅니다. 다른 사람의 회복과 온전케 된 기쁨만 바라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그냥 보고만 있고, 그냥 어쩔 수가 없다고 구경만 하지 않습니까? 타개하려는 그 어떤 의지와 생각과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문제 해결을 위한 발상의 전환이 없고 문을 닫아 놓습니다. 왜 그럴까요? 튜닝을 하지 않기 때문이고 무엇이 시작의 기준이고 표준이고 초점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도 사람은 없고 돈만 보이고 사랑은 없고 물질만 있고, 하나님은 없고 내 지위만 있고, 축복만 있고 책임은 없는 그런 신앙인이 됩니다. 그러면 튜닝을 하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 시작의 기준이고 무엇이 표준이고 무엇이 초점인지를 모르면 기도를 하면 됩니다. 골4;2.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왜요? 이런 맹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줄어들고 늘어날 수 있는 변화가 많은 이세상과 이 현실에서 어떻게 꿈과 소망을 이루어 낼 수가 있을까요? 어떻게 올인 할 수 있을까요? 언제든지 시작할 수 있는 튜닝을 하면 됩니다. 기준에 맞추고 표준에 정조준 하고 초점을 흐리지 않으면 됩니다. 그런 여러분들이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먼저 축원을 드립니다. 그러면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 본문이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1. 역설적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울 왕에 대한 역설적인 사랑입니다. 오늘 최종적으로 사울을 대신하여 다른 사람을 세워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려고 결정을 하지만 하나님은 사울 왕을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룬 것을 후회하셨지만 이는 사울을 사랑한 또 다른 하나님의 표현입니다. 사무엘도 그렇습니다. 사무엘 또한 사울 왕을 역설적으로 사랑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울을 위하여 슬퍼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은 사울을 더 이상 만나지 않고 떠났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떠났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울 왕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 주었습니다. 27절에 옷이 찢어지도록 붙잡고 간절하게 애원하는 간청을 들어 주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사울과 함께 동행을 하고 함께 경배를 했습니다. 여러분, 천년지기 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내가 지쳐 있을 때 내가 울고 있을 때, 위로가 되어준 친구 너는 나의 힘이야 너는 나의 보배야 천년지기 나의 벗이야. 친구야! 우리 우정의 잔을 높이 들어 건배를 하자. 같은 배를 함께 타고 떠나는 인생길 네가 있어 외롭지 않아. 넌 정말 좋은 친구야 내가 외로워 할 때 내가 방황을 할 때 위로가 되어준 친구 너는 나의 힘이야 너는 나의 보배야 천년지기 나의 벗이야. 같은 배를 함께 타고 떠나는 인생길. 네가 있어 외롭지 않아 넌 정말 좋은 친구야. 여러분, 내가 지쳐 있을 때 내가 울고 있을 때 내가 외로워 할 때 내가 방황을 할 때 참으로 위로가 되어준 친구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입니까? 너는 나의 힘이야 너는 나의 보배야. 너는 나의 친구라고 말할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고 사무엘 선지자이었습니다. 옹이가 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옹이가 된 사무엘의 사랑이었습니다. 얼마나 달려가야 그 사랑 받아 들일까. 어디쯤 달려가야 그 마음 알아줄까? 사울에 대한 역설적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역설적 사랑이 되기까지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1-1.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종종 하는 이야기 하는 중에 하나님의 뜻을 말합니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을 너무나 쉽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너무 느슨하게 사용하여, 결과적으로 신앙에 영향을 줍니다. 어느 때는 혼란스럽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면 그것 모두가 다 하나님의 뜻인가? 사람들이 무지와 잘못으로 인한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에 의하여 고통을 당한다면,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도록 요구하는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원래 사울은 왕을 세워달라고 간절한 요구한 이스라엘백성의 요구에 대하여 하나님이 응답하신 사람입니다. 분명히 사울은 이스라엘백성을 블레셋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릴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5절을 보면, 사무엘은 사울을 슬퍼하였고, 하나님은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그러면 세울 때는 언제이고, 모든 백성보다 키도 어깨 위만큼 컸던 이 준수한 사람을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하시는 것이 또한 하나님 뜻이라면 도대체 하나님의 뜻은 때마다 바뀌는 것입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뜻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상황은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후회하심이 없고 변함도 없고 변심이 없습니다. 전3;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뜻으로 결정된 것을 우리가 살아가면서 기준이 될 지혜가 담겨있는 말씀이 전도서입니다.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신앙인이 그의 꿈과 비전을 이루어 가야 하는 삶의 영역에서 기억하고 깨달아야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실수하고 넘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는 때를 따라서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십니다. 끝까지 변개하지 않고 후회하심이 없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 본문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레슬러 웨더헤드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때는 의도적인 뜻과 상황적인 뜻과 궁극적인 뜻을 구별해야 한다고 합니다. 의도적인 뜻과 상황적인 뜻과 궁극적인 뜻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이스라엘백성을 다스릴 사람으로서 사울 왕을 바꾸고 다윗 왕을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인가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울 왕을 세울 때는 사울 왕이 이스라엘백성을 잘 다스리고 그 나라를 블레셋과 같은 적들의 손에서 구원하는 역할을 잘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적인 뜻이었습니다. 물론 사울은 그러한 역할을 감당하기에 충분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준수하고 우뚝 솟은 큰 키를 가진 사람이고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울 왕에게 임하여 새 마음을 주셨고 성령 충만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의하여 왕으로 뽑혔을 때에도 끝까지 겸손했습니다. 몇 몇 반대하는 사람들이 이런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할 수 있겠느냐며 사울의 출신과 인품을 비판하고 빈정거려도 그는 잠자코 인내할 줄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하고 잘 수행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어지는 성공과 전투에서의 승리와 암몬과 블레셋과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그 마음 안에 자기의 생각과 교만함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 보다는 자신의 생각과 자기의 결정이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튜닝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다른 음이 나오고 하나님과 화음이 맞지 않은 실수를 하고 불순종을 합니다. 특히 아멜렉과의 전쟁에서 악은 뿌리까지 다 소멸시키라는 영적인 뜻에서 살아있는 모든 것을 다 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는데, 자신의 뜻과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마음대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아각 왕을 살려두고 양들과 소들 중에 좋은 것들을 남겼습니다. 그리고는 거짓으로 말하고 거짓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것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기 위하여 그리하였노라고 핑계를 댑니다. 이 것은 시작의 기준이 어디이고 어디에 표준을 맞추고 어디에 초점을 잡아야 하는지를 생각하지 않는 위험한 생각이고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셨는가? 이 것이 왜 하나님의 뜻인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은 절대적입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생각을 재단할 수가 없고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생각을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능력도 그렇고 때도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아무리 선한 의도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이라는 것을 15:22절에서 사무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어느 것을 더 좋아하시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번제나 화목제를 드리는 것이겠습니까? 잘 들으십시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하나님의 의도적인 뜻이 사울 왕의 처신 때문에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울 왕의 불순종한 행동을 사무엘은 단호히 비판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그 자신이 직접 아각 왕을 하나님의 제단 앞에서 처형함으로써 하나님의 명령을 완수하였습니다. 사무엘은 시작의 기준을 잡고 표준을 맞추고 초점을 바로 잡아 하나님의 뜻하신 일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은 심히 슬퍼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사울 왕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35절,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였더라. 사무엘은 사울을 위하여 슬퍼했고 하나님은 사울에 대하여 실망을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도적인 뜻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1-2. 상황적인 뜻과 궁극적인 뜻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사울 왕 대신하여 다른 한 왕을 세우고자 합니다. 16:1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이렇게 되어 진 상황은 온전히 사울의 문제이고 사울 왕으로 부터 발생이 되었습니다. 3번의 기회를 주었는데 사울은 어디에서 시작의 기준을 잡고 어디에 표준을 맞추고 어디에 초점을 잡아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튜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내 자신에게 있어서 상황이 바뀌면 우선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 현명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바뀐 상황은 본인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통하여 이루려고 하셨던 뜻을 다른 사람을 통하여 이어가고자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상황적인 뜻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만든 상황에 대하여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바꾸지 않습니다. 또 다른 것을 준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 무엇입니까? 이는 인간의 연속된 악함과 잘못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그 악함까지도 하나님의 의도적인 뜻이 성취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신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은 모든 일들이 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은 끝까지 최종적으로 무너지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한 번 더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모든 일들이 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은 끝까지 최종적으로 무너지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대신하여 세우신 다윗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지켜 가십니다. 삼상 12:22-23절에서 사무엘은 사울 왕을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최종적인 뜻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그러니까? 하나님은 단순히 사울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기계적으로 하나님의 최종적인 목표를 성취한 것이 아니라, 사울왕의 스스로의 추락과 대신 왕이 된 다윗 왕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셨습니다. 즉 사울 왕이 추락하지 않았어도 이루실 것과 마찬가지로 완전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을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면 사울이 왕으로 세워진 것과 사울 왕이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은 무엇으로 해석을 합니까? 은혜입니다. 은혜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진 것이 사울 왕에게 은혜이었습니다. 그리고 물러나는 것 또한 은혜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 이스라엘백성을 버리지 않은 것처럼 사울을 끝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삶의 부귀와 영화가 중단이 되었지만 영혼을 하나님의 곁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영혼이 더욱 귀중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울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의도하신 뜻이 당신의 나라와 당신의 이름이 사람들의 이야기 거리와 우스갯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반드시 성취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명을 내어 놓고 죽으시면서 까지 역설적으로도 사랑하셨던 주님이 여러분과 지금도 함께하시고 여러분을 통하여 주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성취가 됩니다. 그런 주님의 뜻하신 의도와 상황과 궁극적인 은혜를 받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3.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쓰임 받음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해를 기준으로 하나님의 최종적인 의도가 성취되는데 내가 쓰여 질 수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은 하나님의 최종적인 의도를 위하여 쓰임 받는 기쁨이 아닙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시는 것을 통하여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그 쓰임받기 위한 선택의 원칙은 16;7절 하반 절입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과 하나님의 목적을 최종적으로 이루는 데에 합당한 기준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입니다. 중심은 신앙과 영적인 마음의 중심이요. 그 사람의 신앙과 마음의 경향이 늘 어디로 기울고 있는 지입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순종할 것과 거스를 것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신앙과 마음의 향방이 늘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말합니다. 여러분, 화초들을 보면, 태양빛이 있는 쪽으로 늘 기울어져 있습니다.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반대로 돌려놓으면 다시 태양 쪽으로 기울어 져서 자랍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과 마음의 중심입니다. 사람은 잘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고 아십니다. 사람들은 겉으로는 보이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음을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실제로 사울도 그렇고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다고 하시고는, 사무엘에게 이새의 집에 가서 기름을 부으라고 합니다. 현재의 왕인 사울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사무엘에게 구체적 방법을 알려주시기도 합니다. 16; 2-3절. 사무엘이 이르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일 것이라고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하고,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내가 네게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 이에 사무엘은 베들레헴으로 가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합니다. 보통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자주 재난을 예고했기 때문에 베들레헴의 장로들은 불안에 차서 평강에 대하여 묻기도 합니다. 사무엘은 평강을 위하여 왔음을 밝히고,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제사에 청합니다. 이새와 그의 아들들이 오자, 사무엘은 제일 먼저 이새의 큰아들 엘리압이 들어오는 것을 보는데 엘리압의 큰 키와 준수한 용모에 사무엘이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6절입니다.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그러자 하나님의 대답은 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람들은 보는 것만 봅니다. 외모를 봅니다. 탈무드의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몸에는 여섯 개의 소용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중에서 셋은 자신이 지배할 수 없지만, 나머지 셋은 자신의 힘으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자신이 지배할 수 없는 3가지는 눈과 귀와 코이고, 내 자신이 임의로 할 수 있는 3가지는 입과 손과 발입니다.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없고,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들을 수 없습니다. 맡고 싶은 냄새만 선택해서 맡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임의로 할 수 있는 것은 먹고 말을 하는 입과 잡고 놓을 수 있는 손과 가고 가지 않을 수 있는 발이 있습니다. 이 것이 외모입니다. 그런데 이런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그 속에 무엇을 지향하고 무엇이 있느냐에 따라 중심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고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중심이 무엇입니까> 튜닝입니다. 언제어디서나 준비 되어진 하모니가 될 수 있는 음입니다. 어디에서 시작의 기준을 잡고 어디에 표준을 맞추고 어디에 초점을 잡아야 하는지에 대한 튜닝을 하는 중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찾으시고 이런 사람이 쓰임에 대한 기준입니다. 여러분, 과거는 해석에 따라 바뀌고 미래는 결정에 따라 바뀝니다. 현재는 지금 행동하기에 따라 바뀝니다. 바꾸지 않기로 고집하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목표를 잃는 것 보다 기준을 잃는 것이 더 큰 위기입니다. 인생의 방황은 목표를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기준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튜닝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기준에 맞게 여러 분야와 허락하신 영역에서 쓰임을 받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4.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됨입니다. 다윗은 사람의 선택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기준으로 세워졌습니다. 사울은 사람들의 기준을 하나님께서 용납하시고 은혜를 주셔서 왕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신다는 중심은 다름 아닌 하나님과 하나님께 대한 용기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용기를 낼 줄 아는 청년이었습니다. 그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것을 우선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골리앗에게 자신에 있는 마음의 중심을 이렇게 표현하는데, 삼상17:45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이 것이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자로서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을 위하여 우리를 쓰시는 모습은 어떻게 보면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12민족의 가장 작은 베냐민지파에다가 그 지파가운데 가장 작은 가문에 그 가장 작은 가문 가운데 가장 연약한 사울의 집안에서 사울을 들어 쓰셨습니다. 들판에서 양이나 돌보던 다윗이 또한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위대하게 세우시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생각이 사무엘을 포함하여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 넘지 않습니까? 모세는 어떻습니까? 모세는 사십 세가 되어 자기 민족을 괴롭히던 애굽인을 죽였지만 오히려 비난과 불신만 일으켰고 광야로 도망갑니다. 그는 선한의도에 대한 민족의 영웅이 아니라, 오히려 따돌림 당한 상처를 안고 왕자였던 신분에서 40년간 양의 목자로 추락을 합니다. 매일 척박한 광야에서 몇 마리가 안 되는 양의 목자로 살아가는 스스로 보기에도 한심하기까지 추락한 모세를 통하여 위대한 출애굽의 계획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광야에서의 삶의 체험은 이스라엘백성들을 광야에서 이끌어가기 위한 필수적인 것이었음을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입니다. 전혀 생각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또한 이루어질 것입니다. 물론 특수한 어떤 훈련을 받아두는 것도 좋고 세상에서 강력한 무기로 사용될 칼과 창을 열심히 준비하는 것도 좋지만 먼저 신앙과 마음이 진실과 진정으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준비입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마음을 보여드릴까? 그것은 각자의 문제입니다. 각자에 마음에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고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아무리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나의 경험과 지식과 살아온 삶과 만남과 모든 것을 가장 정확하게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여러분, 운외 창천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구름 뒤에 있는 푸른 하늘인데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은혜가운데 극복을 하면 밝은 하늘을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대한민국에 대한 선교 선구자인 언더우드의 기도문이 있습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를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한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중략~ 조선사람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중략~ 지금은 예배드릴 장소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시옵소서. 언더우드의 기도문을 보면 19세기 말 대한민국의 모습을 생생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나라이었고 6.25전쟁으로 더욱 황폐해진 나라이었고 아무 산업도 없었던 나라가 지금은 세계 유수한 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지 않습니까? 참으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세우셔서 이루어진 기적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코로나19로 2년 가까이 구름 속에 가려져 있지만 구름이 걷힌 뒤 푸른 하늘을 만날 수 있는 운외청천이 될 것입니다. 시27;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 하리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남은 삶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운외청천이 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