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강팍케 하셨으므로
성 경 : 출 9:8-12
우리는 주일 낮 시간에 계속해서 출애굽기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 계속되는 창세기 강해의 말씀속에서 우리의 눈에 자주 들어오는 문장이 있고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팍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위해 모세를 불렀습니다.
출애굽의 지도자가 되기 싫다고 버티고 버티던 모세를 여러 가지 기적을 보여주면서 격려까지 하시면서 모세를 애굽에 보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간 그 애굽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었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실상을 그렇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하나님의 말씀에서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팍케 하셨다”라고 했는데 이 부분에 대해 출애굽기 7장 3-4절에서는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 즉” 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이 부분에 대한 성경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꼭 두 다리를 걸쳐놓은 상황같이 보였습니다.
모세에게는 힘과 용기를 주어서 바로에게 보내어 백성을 내어 놓아라고 말하라고 하시면서
바로에게는 또 강팍하게 해서 그 요구를 묵살하도록 하게 했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수가 있을까요?
구약에서의 이 어려운 문제가 우리는 의외로 신약에서 그 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4-32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버려둔다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24절에 보면 “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두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버림을 말하는 것입니다.
26절에 보면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 두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도적적인 포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28절에,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두사”라고 했는데
이것은 인격에 대한 포기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버려둔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내어 버린다는 뜻의 유기(遺棄)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바로를 강팍케 한다는 것은 원래 선했던 바로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고의적으로 악하고 강팍한 마음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결코 어느 누구의 마음도 능동적으로 개입하셔서 강팍하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한 자들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돌아와 살기를 원하십니다.
겔 33:11, “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의 마음은 선택받은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그 누구도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구원에 이르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요나서입니다.
요나 당시 북쪽 이스라엘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이방나라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저들의 죄가 관영하니 회개해야만 살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요나는 이런 하나님의 명령이 싫어서 배를 타고 그 당시 바다 끝이라고 생각했던 다시스로 갑니다.
그러나 행선하는 중에 풍랑을 만나고 요나의 몸은 바다에 던져지고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주야로 갇혀 있다고 고기의 배속에서 토해집니다.
결국 그렇게도 가기 싫은 니느웨로 가서 그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것도 억지로 하는 일이기에 건성으로 합니다.
요나서 3장을 보면 요나가 얼마나 건성으로 니느웨성의 멸망을 선포했는지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요나 3장 3-4절,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 일 길이라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니느웨성은 큰 성이라 삼일길인데 요나는 하룻길을 행하여 “니느웨가 무너진다”고 외쳤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건성으로 꼼꼼하게 말씀을 선포하지 않고 대충 외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대충 외친 회개의 메시지를 니느웨의 왕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잘 듣고 실제로 회개함으로 멸망을 당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요즈음 주일 오후에 보여드리는 성경과학아카데미 프로그램에서 더 정확하게 소개되어지니까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오후나 내일 다음 주일 오후쯤에 요나와 니느웨성에 대한 이야기기 나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나의 니느웨에 대한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요나의 마음은 겉으로는 회개를 축구하면서도 속으로는 자기의 나라를 늘 괴롭히던 원수의 나라의 수도이기에 멸망하기를 원했습니다.
이에 요나는 니느웨가 멸망하지 않은 모습을 보고 불평불만을 합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요나에게 말합니까?
요나서 4장 10-11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성도 여러분 !
이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만물을 다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노예로 삼아 괴롭히는 바로를 그냥 버려두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관습하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지 않으면 우리 인간은 본래가 죄성을 가진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냥 강팍해지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강하게 붙들고 있을 때의 상황과
하나님께서 그냥 버려 두었을때의 상황이 완전히 다른 인물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이었던 사울입니다.
사울은 처음은 여호와의 신이 임함으로 시작됩니다. 그것도 크게 임했습니다.
사무엘상 10장 6절,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이렇게 사울에게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했을때 당시의 사람들은 너무나도 놀라서 전에 사울을 알던 사람들이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속하느냐”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함께하는 사울왕은 그 후에 승승장구하면서 나라를 이끌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런 승승장구로 교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사울을 하나님께서 버렸을때 사울의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사무엘상 16장 14절,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하므로”
이 말씀대로 사울왕은 날로 날로 강팍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소년 다윗을 불러 수금을 타서 자기를 강팍케 하는 악신을 떠나게 했지만 나중에는 가기에게 그렇게 고맙게 헌신한 다윗 그것도 불렛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다윗 그것도 자기의 사위가 되는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된 사울의 모습을 우리는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버리시면 그것이 바로 그 마음에 강팍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이름이었지만 사울 왕과는 정 반대의 한 인물이 있습니다.
신약의 바울입니다.
바울은 원래의 이름이 사울인데 사울이었을 때의 바울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은 상태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사울이었던 바울은 참으로 강팍했습니다.
스데반을 돌을 던져 죽이는 데 가장 앞장섰던 강팍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메섹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잡아 죽이려고 앞장서서 특공대를 조직해서 잡으러 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강팍했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간섭하심과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그 결과 완전히 사람이 180도로 변하여서 바울로 이름이 바뀌고 이방인을 위한 복음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잡힌바 된 바울의 모습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4-28, “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이런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고 어떻게 옛날의 사울이라고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
우리가 주님께 붙잡힘바 된다는 사실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늘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
주여 ! 나르 사로잡아 주옵소서.
주여 ! 나로 하여금 성령충만케 하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물론 주님께 사로잡힘바 되었을때 순간적으로는 손해가 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보건데 하나님께 사로잡힘바 된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내어 버린 바 된 바로와의 관계속에서 늘 승리를 했습니다.
신약의 사도 바울의 경우도 그의 인생 말년에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6-8절 “6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