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역문첨록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 심현(沈誢) 묘갈명(墓碣銘) - 신익성(申翊聖)
시흥(始興)의 동쪽에 있는 봉분과 묘는 바로 유명(有明) 조선국(朝鮮國) 충신 통정대부 돈녕부 도정 심현(沈誢) 공과 그 부인 열녀 숙부인(淑夫人) 송씨(宋氏)를 합장한 무덤이다. 묘를 쓴 이듬해 숭정(崇禎) 무인년(戊寅年, 1638, 인조 16) 봄에 공의 아우 판서공(判書公) 집(諿)이 스스로 행장을 짓고 또 세울 비석을 다듬어 놓은 후 공의 제사를 받드는 외손 박장원(朴長遠)을 시켜 나에게 명(銘)을 요청하였다.
내가 일어나서 절을 하고 받고서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병자년(丙子年, 1636, 인조 14) 난리 때 의로움을 버리고 살기를 도모하여 군신, 부자, 부부의 직분을 잃은 자는 말할 것도 없고, 목숨을 바쳐 그 명예를 떨어뜨리지 않은 사람 중에도 공과 부인만큼 태연히 순절한 사람은 없으니, 그 분들이 익힌 것이 이 상황에서 구차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더구나 동방예의지국이라 칭송을 듣는 우리나라에서 여기에 힘입어서 천하와 후세에 내세울 말이 있게 된다면 묘갈명을 짓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행장을 살펴보니, 공의 자는 사화(士和)로 본관이 청송(靑松)이다. 휘 덕부(德符)는 장상(將相)의 지위를 모두 지냈고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는데, 처음으로 집안을 일으켜 후손들에게 복을 물려주어 대대로 이어받았다. 고조 휘 순문(順門)은 의정부 사인을 지냈고, 증조 휘 달원(達源)은 좌통례를 지냈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휘 자(鎡)는 선공감 첨정을 지냈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휘 우정(友正)은 여주 목사(驪州牧使)를 지냈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목사 안여경(安汝敬)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융경(隆慶) 무진년(戊辰年, 1568, 선조 1)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아름다운 자질이 있었고 성장해서는 선량하고 온순하였으며, 가정에서는 어른을 공경히 받들고 인도하며 뜻을 거스르는 일이 전혀 없었다.
과거체 문장에 뛰어나서 여러 번 향시(鄕試)에 합격하였는데, 계씨(季氏 심집(沈諿))가 먼저 과거에 급제하자 공이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동생이 이미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렸으니, 나는 그만두어도 되겠다.”
하였는데, 그때 공이 서른 무렵이었으므로 사람들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여겼다.
시험 삼아 후릉 참봉(厚陵參奉)으로 관리 일을 시작하여 규례에 따라 여러 관사로 자리를 옮겼다. 흡곡 현령(歙谷縣令)이 되어서는 백성들에게 덕을 베풀었고, 함흥 판관(咸興判官)으로 나가서는 특별한 공적이 있다고 알려져 등급을 뛰어넘어 승진하여 조정으로 돌아왔다. 다시 옥천(沃川), 풍덕(豊德), 철원(鐵原)의 수령을 역임하였는데, 부임하는 곳마다 치적(治績)이 있었다.
판서공이 형조에 있다가 어머니 봉양을 위해 안변 부사(安邊府使)로 나가고 공은 회양 부사(淮陽府使)에 임명되었는데, 안변과 회양은 단지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 오가는 행차가 빛났으므로 사람들이 효리(孝理)를 칭찬하였다. 상(喪)을 당해서는 예법에 따라 잘 거행하였고 나이가 들어서도 독실하였는데, 세상에서 모두 본보기로 삼았다.
만년에 들어 돈녕부 도정에 임명되었는데, 공에게는 이미 오래된 병이 있었다. 종사(宗社)를 따라 강화도로 들어가서는 스스로 목숨을 버리려고 맹세하였다. 적이 침공하던 날 먼저 가묘(家廟)의 신주(神主)를 외진 곳에 묻고서 손수 유소(遺疏)를 쓴 뒤, 의관을 정돈하고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하고는 이윽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임금이 환궁해서 공의 유소를 보고 하교하기를,
“국가는 심현에게 깊은 은택과 두터운 덕을 베푼 적도 없는데, 난리를 만나서는 중신(重臣)들보다 먼저 죽음으로 절개를 지켰으니, 대현(大賢)이 아니고야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또한 그 아내 송씨(宋氏)가 함께 죽은 절개 또한 매우 아름답구나. 아울러 정문(旌門)을 세워주고 그 자손을 등용하여 충렬을 표창하도록 하라.”
하였다.
부인은 여량(礪良)의 세족으로, 영의정 질(軼)의 손녀이고 목사 영(寧)의 따님이며, 참찬 이간공(夷簡公) 신공(申公) 휘 영(瑛)의 외손녀이다. 순수한 덕과 정숙한 행동으로 시부모와 화합하였고, 또 《여계(女誡)》에 능통하여 이의(利義)를 분변하였으므로, 시아버지가 반드시 절부(節婦)가 될 것이라 칭찬한 적이 있다.
오랑캐의 변란을 만났던 처음에 공이 자신의 뜻을 말하자, 부인이 종용당(從容堂)의 고사를 들어서 대답하니, 공이 크게 기뻐하였다. 난이 닥치자 과연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공과 함께 의로움을 지켜 자결하였는데, 마치 극락에 나아가는 것 같았다. 적이 물러가고 나서야 장사를 지냈는데, 이해 3월 10일이었다.
공은 아들이 없고 딸이 두 명 있는데, 장녀는 승지 홍헌(洪憲)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직장 박훤(朴烜)에게 출가하였다. 모두 자식이 있는데, 박장원(朴長源)은 박훤의 아들로 승문원 정자이다. 공은 어버이를 섬기는 데 도리를 다했고, 동기간에는 정을 다했으며, 벼슬에 있을 때는 힘을 다했고, 난을 당해서는 절개를 다했으니, 옛사람이 말한 ‘나는 반드시 그를 배운 사람이라 하겠다.’라고 말할 만한 사람일 것이다. 아! 공경할 만하구나.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그 남편에 그 부인 / 是伉是儷
열녀와 충신이라네 / 而烈而忠
우주에 정명하고 강건한 기운 / 競爽宇宙
일월처럼 우리 동방을 비추네 / 日月我東
넘치는 말 없고자 하니 / 辭欲無溢
돌에 새겨 무궁토록 전하노라 / 刻示弗窮
[각주]
[주01] 돈녕도정 …… 묘갈명 :
이 글은 심현(沈誢, 1568~1637)과 그의 부인 송씨(宋氏)에 대한 묘갈명이다.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사화(士和), 시호는 충렬
(忠烈)이다.
[주02] 종용당(從容堂)의 고사 :
남송(南宋) 사람 조묘발(趙卯發)이 지주(池州)의 통판(通判)으로 재직할 때 원(元)나라 군대가 침입하자 군대를 모아 대항했으나
막지 못하자, 부인 옹씨(雍氏)와 함께 자신의 서재인 종용당에서 목을 매어 자살한 일을 가리킨다.《宋史 卷450 趙卯發列傳》
[주03] 나는 …… 하겠다 :
특별히 배우지 않고도 훌륭한 행실을 지닌 인물을 말한다. 자하(子夏)가 말하기를,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되 여색을 좋아하는 마음
과 바꾸며, 부모를 섬기되 그 힘을 다할 수 있으며, 임금을 섬기되 그 몸을 바칠 수 있으며, 벗과 사귀되 말함에 성실함이 있으면 비록
배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웠다고 이를 것이다.” 하였다. 《論語 學而》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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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始興之東廣輪揜坎, 卽有明朝鮮國忠臣通政大夫、敦寧府都正沈公誢曁厥配烈女淑夫人宋氏同封之墓也。 墓成明年爲崇禎十一載戊寅春, 公弟判書公諿自爲狀, 且治牲石, 使彌甥之奉公祀者朴長遠請銘于翊聖。 翊聖起拜以受, 愾然而曰: “丙子之亂, 亡論棄義偸生, 失君臣、父子、夫婦職號, 能死而不隕其聲, 亦亡如公若夫人從容殉節, 則其所講非苟焉已耳。 況吾東方禮義之稱, 賴是而有辭於天下後世, 則銘其可已?”
按狀, 公字士和, 靑松人。 有諱德符, 位都將相, 封靑城伯, 啓慶燾后, 世爲褒紀。 高祖順門, 議政府舍人: 曾祖達源, 左通禮、贈吏曹參判; 祖鎡, 繕工監僉正、贈左贊成。 考諱友正, 驪州牧使、贈吏曹判書, 娶於牧使安汝敬之女, 以隆慶戊辰生公。
幼有美質, 長益祥順, 家庭之間, 夔夔奉引, 一於無違。 才優程文, 屢發解, 季氏先捷, 公喜曰: “斯已悅親, 吾可以已。” 時年始壯, 人甚難之。 試爲吏仕, 自厚陵參奉例轉庶司。 宰歙谷有遺愛, 佐咸興報殊績, 超階陞朝, 復歷沃川、豐德、鐵原, 所莅著績。 判書公自秋官, 爲養出爲安邊, 公除淮陽, 兩府只隔一嶺, 還往有煒, 人稱孝理。 及遭諱秉制, 老而克篤, 世皆儀之。 晩授敦府, 公已宿瘵。 從宗社入江都, 自矢捐軀之志, 受敵之日, 先埋家廟木主於屛處, 手寫遺疏, 整冠帶北向四拜, 遂自決。 上迴鑾, 見公遺疏, 敎曰: “國家於沈誢, 無深恩厚澤, 而臨亂死節, 先於重臣。 若非大賢, 何以至此? 其妻宋氏同死之節, 亦甚可嘉, 幷旌門, 錄用子孫, 以表忠烈。”
夫人, 礪良世家, 領議政軼之孫, 牧使寧之女, 參贊夷簡申公諱瑛之外孫。 純德令儀, 叶于尊章, 又能通《女誡》, 辨利義, 舅氏常稱“其必爲節婦”云。 遘變之初, 公以意喩之, 夫人乃擧從容堂事而答之, 公大愉。 及難, 果盥沃易服, 偕公就義, 如赴樂地。 寇退始克窆, 是年三月十日也。 公無嗣, 有兩女: 長適承旨洪憲, 次適直長朴烜。 皆有所育, 而長遠卽烜之出也, 承文院正字。 公事親盡其道, 友于盡其情, 居官盡其力, 臨亂盡其節, 古人所謂吾必謂之學矣者耶? 吁! 可敬也。 銘曰:
是伉是儷, 而烈而忠。 競爽宇宙, 日月我東。 辭欲無溢, 刻示弗窮。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