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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창권 목사의 고향은 전라남도의 명산인 추월, 병풍, 불태산을 배후에 두른 담양군이다. 고향은 영산강 발원지인 중암천이 흐르니 청정지역일 뿐만 아니라, 남도의 맛과 멋이 시작되는 문화의 고장이다. 사시사철 푸른 대나무의 고장으로 죽향 가득한 죽녹원의 옆 동네인 담양군 창평면 창평리 340번지에서 태어났다. 창평리에는 지금도 구한말 유명한 의병장이었던 고광순과 창흥의숙(昌興義塾)을 세워 인재들을 길러냈던 고정주의 고택이 보존되어 있다. 고정주의 사위로 고려대학교 설립자인 김성수, 대법원장을 역임한 김병로, 항일운동가 송진우 씨가 월봉산 중턱의 상월정에서 같이 수학한 동문이다. 원창권은 이렇듯 산수와 인물이 출중한 고장에서 성장했다.
원창권 목사는 담양군 봉산면 소재에 1910년 유진 벨(Eugene Bell) 선교사가 세우고 타마자(John Van Talmage) 선교사가 시무한 양지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였고, 교회에서 조사(助事)로 활동하면서 1929부터 1934년까지 고향인 창평교회에서 목회하였다. 원창권은 1935년부터 순담성경학교 에서 공부한 후, 담양 양지교회 담임목사를 하면서 순담성경학원 원장 타마자 선교사의 수제자로, 그 학원의 교사가 되었고, 1941년부터 담양읍교회 4대 목사로, 1946부터 영광대교회 9대 목사로 시무했다.
원창권 목사
영광대교회는 1905년 5월 7일 배유지 선교사에 의해 영광읍 무령리에 세워졌다. 10여 년이 지나 영광보통학교 교사요 영광대교회 조사(선교사를 도와 교육하고 심방하고 설교하는 지도자)인 우계후 씨의 주도하에 1919년 3월 독립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한 교회로 영광 지역에서 자긍심이 크다.
원창권 목사는 해방 이후 혼란기에 있는 교인들을 상담하고 세례를 집례하는 등 교회의 안정에 집중하였다. 영광 염산교회(1948~1949) 시무 중에는 정의감이 강하신 원 목사님이 지역의 공산 좌경 세력에게 잘못된 사상을 바로잡아 주다가 매일 교인 한 명씩을 죽이겠다는 위협을 받았고, 또한 아들이 군인 장교로 있었기에 좌경세력의 위협을 견딜 수 없어 결국은 사임한다. 이후 선교지역에 “순회목사”로 활동하던 중 1950년 10월 19일에 좌경 세력들에게 붙잡혀 가족과 함께 순교 당한다. 순교 지역은, 불갑산의 “밀재”(현재 22번 국도 밀재터널 근처)이다. 이런 사실은 신학교 동창이요, 섬 선교의 공로자요, 총회장을 역임한 박요한 목사가 증언했다.
시무했던 영광대교회
영광군은 사회주의자 박헌영과 남로당 조직책 김삼룡의 영향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공산당원들이 활발하게 활동한 지역으로, 전국에서 민간인 학살이 가장 많았던 지역이다. 남한에서 6만 명의 학살당한 자를 세분하면 전남에서 43,500명이 죽고, 그중에 영광군에서 21,200명에 달한다. 그리고 영광군 염산면에서는 1만5천여 명 주민 가운데 5천 명이나 학살당했으며, 영광군 전체에서 200여 명 교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순교 당했다.
시무했던 염산교회
순교자로는 4남 6녀 중 장녀(원영은 권사)와 차녀(원영의 권사)는 결혼하고 장남(원효섭)은 군입대 하였고, 순교자로는 원창권 목사(1897년 12월 2일), 조이성 사모(1906년 2월 12일), 차남 종섭, 삼남 종태, 사남 종석, 삼녀 영숙, 사녀 은자, 오녀 영자, 육녀 영복 등이다.
죽음의 자리에서 살아나온 이의 증언에 따르면 사모님은 임신 7개월이었는데 잔인한 좌경 세력들은 사모님의 배를 갈라 태아와 함께 죽였다니 태아까지 10명이 순교한 것이다. 사역자의 길은 순교자의 길이다. 12 제자가 그렇듯이 원창권 목사님이 받을 영광의 면류관은 지극히 아름다울 것이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 후손의 외손주 가운데는 허문자 권사, 허성연 장로, 허신자 집사, 허성운 장로, 허성호 목사, 허선자 집사, 허애자 사모, 주기철 목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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