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 피어나는 인연 총동문산악회 시산제
서울산업대신문/박준희 기자 2009년 03월 30일
2009년 3월 15일(일) 아침, 총동문산악회 시산제를 위해 동문 82명이 지하철 6호선 독바위 역 앞에 모였다. 총동문산악회는 총동문회 안에 있는 여러 개별동문회 산악 동호회들의 연합 모임이다. 일삼회(경기공업고등학교 13회 졸업생들의 산악 동호회)가 주최한 이번 시산제는 10여년 전부터 열리는 연례 행사다. 왜 그들이 오랜시간 같이 산을 오르는지 함께 북한산으로 가보자.
선배, 앞서서 걷는 사람들
일요일 아침, 나는 총동문산악회를 따라 북한산을 오르고 있다. 그리고 후회를 하고 있다. 괜히 이곳까지 와서 산을 타나? 오랜만에 제대로 하는 등산에 다리가 후들거리고, 땀이 식어서인지 이마가 서늘하다. 등산화가 아닌 일반 운동화를 신고 와서 발을 제대로 딛지 않으면 미끄러지기 십상이다. 신경을 바짝 세워야 한다. 처음 오는 산이기 때문에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앞 서 가는 선배들의 발에 집중하고 있다. 선배들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이는 것을 보니 한두 번 등산한 솜씨가 아니다.
앞서 걷는 사람의 발을 보고, 그 사람이 딛는 곳을 나도 딛는다. 다행히도 산길은 앞 서 걸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다져있다. 그래서 디디기 쉬운 곳은 표가 나고, 그 곳을 밟고 옆을 보면 잡기 좋은 나무가 있다. 이 산에 처음부터 길이 있었을까. 오직 동물만이 헤치고 다녔을 곳을 한 사람이 걷고, 또 다른 한사람이 걸어 길이 닦여졌을 것이다. 인생도 이와 마찬가지 인 것 같다. 올곧이 자기가 길을 개척하기란 매우 어렵다. 앞서서 길을 걷는 사람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면서 때대로 새로운 길을 찾기도 한다. 나도 지금 선배들이 걷는 길을 따라 걷고 있다.
인생이라는 산 넘기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마음속에 서두름이 없다. 중요한 것은 산을 오르는 시간, 순서가 아니다. 차근차근 한걸음씩 내딛어 지금보다 조금 높은 곳에 오르는 것. 만약에 뒤처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격려해 함께 오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산을 잘 오르는 방법이 인생을 잘 사는 법과 다르지 않다. 정상을 목표로 산을 오르지만, 정상에 오른 후 계속 그곳에 머무를 수는 없다. 정상 위에서 내가 올라온 길을 보고 성취감에 기뻐하지만 그 것도 잠시다. 우리는 다시 차분하게 내리막길을 걸어내려 온다. 그리고 또 다시 산을 오를 준비를 한다. 살면서 올라야 할 산은 셀 수도 없지만 지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 함께하는 사람이 있다면 큰 힘이 된다. 인생과 산은 닮은 부분이 많다.
겸손한 마음으로 비나이다
시간은 정오, 산신에게 한 해 동안 무사히 산을 오를 수 있게 해달라고 비는 시산제가 산중턱에서 시작된다. 산 정상을 향해 돼지머리, 떡, 전, 나물을 올린 상을 차린다. 모두들 상을 가운데 하고 둘러선다. 모자를 벗고 양손을 모은다.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산신에게 소망을 비는 모습이다. 한 사람이 대표해서 땅에 엎드려 흐느끼는 목소리로 축문을 읽는다.
아마 산신이 있다면 매년 찾아오는 이 사람들을 알아보고 또 왔냐며 흐뭇해 할 것 같다. 그리고 돌아가며 절을 두 번하고 ,웃고 있는 돼지 입에 돈을 물린다. 절 한 번에 올 해 사고가 없기를, 절 두 번에 올 해도 이렇게 모일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마음. 마지막에는 허리를 숙여 반 절을 한다. 여러 사람이 돼지입에 고삿돈을 물리니, 돼지가 더 흐뭇하게 웃는다. 부디 돼지가 산신께 우리의 뜻을 잘 전해주길.
산까지 음식들을 나른 수고가 헛되지 않게 시산제는 무사히 끝난다. 누군가는 이런 것을 왜 하냐고 할 수도 있다. 시산제는 정말 산신을 믿어서 하는 것보다 겸손한 마음으로 산을 오르겠다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다.
산이 좋아서, 사람이 좋아서
아침부터 준비한 시산제가 끝나고 사람들이 상에 올렸던 음식을 내려 술과 함께 먹는다. 제사의 묘미는 제사를 지내고 난 후 맛있는 음식을 먹는데 있다. 산을 오른 후라 몸이 힘들어서 그런지 술이 입에 착착 감긴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이고 산은 금세 그들의 사랑방이 된다. 흰 머리가 무성한 그들의 이야기하는 모습은 20대 젊은이들과 다르지 않다. 각자 다른 곳에서 다른 생활을 하는 그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학교’ 이야기다. 이들이 혼자 올라가도 될 산을 주말마다 함께 오르는 이유도 바로 ‘사람’이다. 지난 시절을 함께 추억하고, 이야기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배를 하며 외치는 “어이! 어이! 어이!” 라는 구호가, “어의! 어의! 어의”란다. ‘어의’를 함께 외치며 마시는 술이 참 달다.
총동문산악회, 인연의 가지를 뻗다
산을 오르는 것은 겸손하고 포용할 줄 아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박완식(경기공고 64년 졸업) 총동문산악회 회장. 까무잡잡한 얼굴에 오랜 등산으로 몸이 단련돼 보인다. 그가 처음 동문산악회에 왔을 때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단다. 산을 함께 오른다는 것이 뒤처지는 사람까지‘같이 간다’는 의미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가 산을 오르며 얻은 것은 많은 선배를 만나 인연을 맺었다는 것이고 그 인연은 거기에서만 그친 것이 아니란다.
총동문산악회는 동문만의 모임이 아니라 그 가족들의 모임이 됐다. 동문 사이의 인연의 가지가 그 아내, 자식까지 뻗은 것이다. 아내는 남편을 따라 백두대간 종주에 성공을 했다. 남편을 도와 산악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문적인 등산 실력도 갖춘 것이다. 아빠를 따라 나온 어린 아들은 할아버지뻘 되는 아저씨들의 귀여움을 받는다. 산을 혼자 오를 때가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옆에 사람이 생겼다. 혼자 가던 길을 이제 내 가족과 함께 걷게 된 것이다.
오늘은 특별히 재학생도 참석했다. 상진욱(환경·03)학생은 우리대학 산악부 동아리의 회장이다. 처음에는 무리에 섞이지 못하고 얌전히 있었던 그는 선배들과 산을 함께 오른 후, 그들과 나이를 떠나 친한 친구가 된 것 같다. ‘우정에는 나이가 없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선배도 제발로 찾아온 어린후배에게 좋은 말 하나라도 더 해주려 한다.
내려올 산을 왜 힘들게 올라가나? 1924년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정을 앞둔 조지 말로리는 이 곤란한 질문을 받는다. 말로리는 ‘산이 그곳에 있으니 오른다’고 대답한다. ‘산을 왜 오르냐’는 질문의 답은 ‘인생을 왜 사냐’는 질문의 답과 같다. 눈앞에 나타난 높은 산을 서두르며 혼자 오르다 지친 당신.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그리고 주변사람들과 함께 산을 올라 보라. 누구보다 젊게 사는 이들처럼 말이다.
©2009 서울산업대신문
Updated: 2009-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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