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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례요한의 역설적인 죽음의 교훈(선지자의 죽음이 주는 진리)
마가복음 6장 14~29절, 마태복음 14장 1-12절, 누가복음 9장 7-9절에는 세례요한의 죽음과 관련한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헤롯은 자기 동생인 헤롯 필립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는 유대인의 종교법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여겨졌습니다.세례요한은 헤로디아와의 결혼을 정당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 부적절한 결혼을 비난하고 헤롯에게 회개하고 종교적으로 바르게 살라고 충고했습니다.
헤로디아는 자신의 결혼과 관련된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세례요한의 말에 분노하여 헤롯에 대해 음모를 꾸미게 되었습니다.
헤로디아의 딸이 춤추는 것에 기분이 좋아진 헤롯은 그녀에게 어떤 소원도 들어주겠다는 맹세를 하였습니다. 그
헤롯이 소원을 물어보았을 때, 그녀는 세례요한의 머리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헤로디아는 딸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고, 헤롯은 자신의 맹세로 인해 세례요한의 목을 베게 했습니다.
따라서 세례요한은 감옥에서 목을 베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성경에서 그의 순수함과 진리를 따르는 예언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기를 예언한 선지자로서, 그의 역할은 그리스도의 도래를 예고하고 예수를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그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라고 전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죄를 사하라고 전했습니다. 그의 세례는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과의 화해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세례 요한은 굉장히 간소한 생활을 하면서 광주리를 입고 꿀과 메뚜기를 먹는 등 극도로 간소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삶은 예수의 등장을 예고하고자 하는 순수하고 예속되지 않은 삶을 상징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선구하는 선지자로, 예수가 나타날 때까지 그의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는 나중에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왔다고 설명되며, 그는 예수의 등장을 증언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역할은 그리스도의 나타남을 예고하고, 예수의 등장을 알리는 예언적 선지자로서의 중요성을 갖고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백성에게 메시지를 전하거나 예언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다양한 선지자들이 다양한 시기와 문맥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교훈을 밝히기 위해 나타났습니다.
선지자들은 주로 미래를 예언하거나, 하나님의 계획을 밝히기 위해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이들의 예언은 종종 차후에 이행되었고, 이로써 하나님의 계획과 실존을 입증하였습니다.
많은 선지자들은 백성이나 국가가 범한 죄를 비판하고, 회개하도록 촉구했습니다. 이는 종종 도덕적인 행동의 부재, 하나님과의 관계의 타락 등을 포함했습니다.
선지자들은 종종 하나님의 명령을 백성에게 전하거나, 특정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이는 종종 특별한 신성한 임무나 사건과 연관이 있었습니다.
선지자들은 종교적인 가르침을 백성에게 전하고, 종종 교리적인 개념을 설명하거나 해석했습니다. 그들은 종종 하나님의 의지와 교훈을 전파함으로써 백성을 올바른 길로 인도했습니다.
많은 선지자들은 평화와 정의를 갈망하며, 그리고 하나님의 국도에서 이를 찾기를 바랐습니다. 이는 종종 백성이 공정하고 의롭게 살도록 권고하는 메시지와 연결되었습니다.
선지자들은 종종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약속을 밝히는데 기여했습니다. 이들은 종종 다가오는 구원의 역사를 예고하며, 그리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세롭게 등장한 예수 그리스도 역시 선지자, 왕, 그리고 구세주로서 성경에 등장하며 여러 선지자들의 역할을 이어받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히스기야(Hezekiah)와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 왕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히스기야는 유다 왕국의 제12대 왕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사야는 그의 시대에 선지자로 나타났습니다. 히스기야와 이사야 사이에는 여러 중요한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왕이 되자마자, 그는 국가적으로 회개와 종교 개혁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이삭의 아들 아하스가 시행한 종교적인 부당함과 신앙의 타락을 바로잡고자 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유다에서는 다수의 신전이 정비되고, 배울 기회가 늘어나는 등 종교적인 개혁이 이루어졌습니다.
히스기야는 이사야와 함께 앗수르 숭배를 금지하고 제거하는 등 정교한 목표를 실현하려 했습니다. 이것은 유다에서의 종교적 타락과 관련된 중요한 사안 중 하나였습니다.
히스기야의 왕위에 오른 초기에는 앗수르 강대국의 압력이 가중되었습니다. 아수르 왕국은 이스라엘 북부 왕국을 이미 멸망시키고 유다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고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이런 어려운 시기에 히스기야를 위로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하도록 권고했습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의 시대에 여러 가지 예언을 전했습니다. 이 중에는 선지자가 유다를 다가오는 위험에서 보호할 것이라는 안정과, 예루살렘을 수호하는 하나님의 약속 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수리아와 앗수르에 대한 저항을 시도했습니다. 그는 유다를 강화하고 성벽을 건설하여 적의 침입을 방지하려고 했습니다.
히스기야는 심각한 병에 걸렸고, 이에 대한 회복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듣고 그를 회복시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병에 걸렸을 때의 사건은 성경의 구약에서 이사야 38장에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심각한 병에 걸렸을 때 이사야 선지자에게 회복을 위한 기도를 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다가와서 이 병에서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회복을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는 히스기야에게 병이 치료되어 회복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를 듣고, 그에게 15년을 더 살아갈 기회를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회복과 함께 약속을 보여주기 위해 음식을 만들어서 히스기야의 병문에 바르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가 이렇게 하자 히스기야의 병이 치유되었습니다.
히스기야는 회복된 후에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에 대한 감사를 표현했고, 이를 통해 그의 신뢰와 경의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히스기야와 이사야의 신앙과 하나님에 대한 의존을 강조하며, 히스기야의 회복은 하나님의 기적이고 크신 은혜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신앙을 깊이 살아가도록 독려합니다. 이는 헌신, 성화, 사랑, 용서 등 하나님의 진리를 심어줍니다.
그리스도의 선지자들은 성경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구원의 계획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며, 성경을 통한 영성적인 지도와 교훈을 제공합니다.
현대의 그리스도의 선지자들은 종종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공정, 평등, 인권, 환경 보호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종교적인 가치와 윤리적 원리를 사회적인 변화에 적용하고자 합니다.
교회 내에서는 그리스도의 선지자들이 목회자, 목사, 성직자 등으로서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교회 공동체를 이끄고 가르치고 통솔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선지자들의 역할은 개인적인 신앙 경험과 교회나 종교 공동체의 문화 및 전통에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그들은 종종 전통적인 선지자적 역할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의 도전과 어려움에 대처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종종 희망과 용기를 부여하는 역할을 합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믿음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에 의지하며 힘을 얻도록 도와주는 메시지를 전파합니다.
선지자들은 사회적, 문화적인 변화에 대한 도전을 제시하고, 헌신적인 삶을 살도록 촉구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사회적 변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탈북민 선지자들은 탈북민 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르치며 인권, 자유 등에 대한 메시지를 전파하고 촉진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들은 종종 어려운 환경에서 탈북민들을 돕고 지원하며, 종교적인 메시지를 전하면서 북한의 인권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자 합니다. 이 역할은 다양한 측면에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탈북민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파하여 탈북민들에게 힘과 희망을 주고, 북한에서의 어려운 상황과 인권 문제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대한민국 국내뿐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많은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며, 북한의 독재체제와 강제노동, 억압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합니다.
많은 탈북민 선지자들은 탈북민들을 돕고 지원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는 정착 지원, 식량 및 의료 지원, 교육 등을 통해 새로운 환경에서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포함합니다.
탈북민 선지자들은 종교적 메시지뿐만 아니라 북한의 현실과 도전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사회 운동가로서 활동합니다. 북한의 상황 개선을 위해 국제사회에 대한 알림을 통해 도움을 요청하거나, 국제적인 인권 기구들과 협력하여 인권 문제를 제기하기도 합니다.
일부 탈북민 선지자들은 문학, 음악, 미술 등을 통해 예술적인 방법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북한의 현실과 탈북민들의 이야기를 공유하며 국제사회에 주목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탈북민 선지자들은 북한의 현실에 대한 통찰과 그들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사회적 변화를 이끌려고 하며, 이는 종종 매우 도전적이고 위험한 환경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들은 북한의 인권 문제와 탈북민들의 처지에 관한 관심을 높이고, 국제사회와의 소통을 통해 도움을 요청하는 역할도 수행하고 있습니다.
46 바다야 잔잔해져라.
마태복음 8장의 23절부터 27절은 예수님이 바다에서 폭풍이 일어날 때 제자들과 함께 있는 장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8:23-27:
23 예수님은 배에 올라 바다로 건너편에 가니, 제자들이 따라갔다.
24 이에 바다에서 큰 폭풍이 일어나 배를 덮치게 되었으나, 예수 님은 주물러 자고 계셨다.
25 제자들이 나아와 예수 님을 깨우며 이르되 '주여, 우리가 죽게 되나이다!'
26 예수 님이 말씀하시되 '왜 두려워하느냐, 믿음이 조금도 없느냐?' 이에 일어나 바 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큰 평온이 일어났다.
27 무리는 놀라 가로되 '이는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 순종하는가!
이 구절에서는 예수님이 바다에서 일어난 큰 폭풍에도 불구하고 제자들과 함께 배에 있었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고 위급한 상황에서 구원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의 부족을 책망하며 바람과 바다에 명령하여 순종시켰습니다. 이에 평온이 찾아와 제자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권능에 놀라워하며 그에 대한 의구심을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의 평안한 행동은 폭풍이 일어나는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배안에서 주무시고 계셨다는 점은 그의 안정과 평안함을 강조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신뢰와 안정성에 대한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위급한 상황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깨우고, 자신들은 배가 뒤집혀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왜 두려워하느냐, 믿음이 조금도 없느냐?"라고 말하며 제자들의 믿음의 부족을 비판합니다. 이는 예수님께 대한 완전한 신뢰와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에 명령함으로써 자연의 힘을 조절하는 신비한 권능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연은 그의 권능에 순종하며, 예수님은 자연의 힘을 통제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권능에 대해 의아해하며 놀라워합니다. 그들은 이러한 권능을 가진 사람이 누군지에 대한 의문을 표현하며 예수님의 도적적인 권능에 대한 인식이 발전하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소련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은 남한에 대한 무력침공을 가해왔습니다. 무방비 상태로 일격을 당한 남한은 제대로 반격도 하지 못한 채, 국군은 남하하고 국민들은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인민군의 침략은 거칠 것이 없었고 우리 군은 낙동강에서 최후의 전투를 치러야 했습니다. 국가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고 고향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던 국민들은 좌절과 절망 속에 비참한 생활을 꾸려나갔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인민군들이 쏘는 포 소리를 지척에서 들으며 정부를 이끌었고 정부가 진해로 옮겨간 후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성가대가 찬양을 드리기 전, 나운영 지휘자는 신도들 앞에서 시편 23편을 작곡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눈물을 흘리며 성가대를 지휘하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부부도 울었고, 성가대 대원들도 울었고, 예배에 참여하였던 신도들 모두가 울었습니다. 그야말로 눈물의 예배였습니다. 그리고 찬양대의 성가가 끝난 후, 여호와께서 이 나라를 공산주의의 위협에서 구하여 주실 것을 통성기도로 드렸습니다. 그런 눈물의 기도가 응답되어, 오늘의 한국이 있게되었으며, 우리는 아무리 어렵고 힘들지라도 믿음의 선배들의 눈물로 드린 기도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될것입니다.
당시 예배에 인용된 말씀 구절 (시편 23: 1-6)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에 나를 둘리시니
3 나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나니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 앞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6 나로 향하여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폭풍이라는 비유는 어려운 시련, 어려움, 또는 고통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인생의 어려운 순간이나 폭풍이 밀려올 때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운 상황에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의지합니다. 기도는 그들에게 힘과 평안을 주는 수단으로 여겨지며,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더 깊은 신앙과 의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힘과 지혜의 근원으로 여겨집니다. 어려운 시기에는 성경의 구절들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과 지지를 상기시키며, 성경을 통해 힘을 얻습니다.
어려운 시기에는 교회 내에서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하며 함께 기도와 찬양을 나눕니다. 어려운 시련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의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련을 통해 더 깊은 영적 성장을 이루려고 하는 믿음의 여정을 겪을 수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믿음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움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도전에 대한 대비책을 찾으며 행동합니다.
요약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기도, 성경 독서, 교회 공동체의 지원, 믿음의 성장 등을 통해 폭풍 속에서도 희망과 평안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47 왕보다 앞서 달려가자
열왕기 상 18장에 등장하는 엘리야의 이야기는 바알 선지자와의 대결에 관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왕 아합과 그의 아내 이세벨이 바알 신에게 숭배하는 것에 대한 비판과 함께 전쟁의 판단을 요청하는 상황을 다루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나아가서 이스라엘에게 두 가지 선택을 내세우는데, 하나는 바알에게 숭배하고 다른 하나는 여호와에게 숭배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칼자도와 나무로 제단을 만들어 여호와를 경배하고, 이에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을 벌입니다. 양쪽의 제단에 소를 잡아놓고 불로 번제를 바치도록 요청하며, 그 신이 불을 내려 제물을 소화하는지를 보기로 합니다.
엘리야는 여호와, 아브라함, 이삭,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알려진 하나님에게 기도합니다. 그 기도 후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 소, 나무, 돌까지 모든 것을 소멸시키면서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합니다.
여호와의 불이 내려온 후,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을 가지고 기손시내로 내려가서 모두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이어서 엘리야는 하늘에 기도하면서 비를 내리라고 여호와께 요청합니다. 비가 오기 전까지 여러 차례 기도를 반복합니다.
마침내 하늘이 검게 되고 큰 비가 내려와 이스라엘 땅을 적시게 만듭니다.
이 이야기에서 엘리야는 하나님의 뜻을 명확히 나타내고, 바알 선지자들과의 대결을 통해 여호와의 권능과 신성을 입증하며, 비로 인하여 가뭄을 끝내는 등 하나님의 힘과 권능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타냅니다.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했다는 것은 여호와의 특별한 도움이나 인도를 나타냅니다. 엘리야가 여호와와 가까운 관계를 맺고 그의 도움과 지원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허리띠를 동이는 행동은 준비 상태에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엘리야는 여호와의 도움을 믿고, 행동으로 나타내려고 합니다. 이는 그가 여호와의 명령을 받고 신속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스르엘을 앞서 달려가니라": 엘리야는 아합 왕앞에서 비가 쏟아지기 전에 이스르엘에 도착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입니다. 그의 달려가는 모습은 여호와의 능력과 명령에 순종하는 예시입니다.
현대에서도 그리스도의 사명자들은 세상을 앞서나가야 합니다.
세상사람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하며 세상과 섞이지 말고 모든 사람들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서 모든 민족을 가르치며 제자로 삼고, 아버지와 아들,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명령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복음을 전파하고,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제자로 만들도록 하는 사명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사랑과 관용, 이해로운 태도를 통해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공의를 행하고, 자비를 베풀며, 겸손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명을 가지고 복음으로 세상 변화 이끌어가야 합니다. 현대 세계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원리와 가치를 기반으로 한 도덕적 행동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맡아야 합니다. 이는 공정한 사회를 위한 노력, 기꺼이 돕고 나누는 행동, 환경 보존을 통한 창조주의 섭리에 대한 책임감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 9장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으로 세움받고 처음으로 예배를 행하는 장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아론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제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9장에서는 그가 첫 번째 예배를 진행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세우라고 명령합니다.
아론은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기 위해 제단에 나아갑니다. 번제와 속죄제의 동물을 가져와 제사를 지내고 이때 여호와의 영광이 모든 백성 앞에서 나타납니다.
아론이 백성을 위해 속죄제를 드리고 축복의 손을 들어 백성에게 축복을 전합니다.
아론이 번제와 속죄제를 다 드린 후, 여호와의 불이 번제물을 태우고, 이스라엘 백성은 주목하며 경배합니다.
백성들은 여호와의 영광과 불의 나타남을 보고 너무 놀라워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립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의 거룩함과 신성한 존재에 대한 경의를 일깨워 주는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대상 21장에서 다윗이 사단의 간섭으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고 허무맹랑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다윗은 사단의 권유에 따라 백성들의 수를 세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전에 명령한 것이 아니라, 다윗의 교만한 행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행동에 노하셨고, 다윗에게 세 가지 택한 징벌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손에 빠지는 것보다 사람의 손에 빠지기를 택했습니다.
그 결과로 70,000명의 이스라엘 사람이 염병으로 인해 사망하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후 참회하고, 여호와께 속죄제를 드리기 위해 아라바에 있는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제단을 세우려고 합니다.
오르난은 땅과 떠날 동물을 다윗에게 선물하려고 했지만, 다윗은 그것을 받지 않고 그 땅을 구입하여 여호와께 희생을 바칩니다.
다윗이 교만과 어리석음으로 인해 하나님은 분노하셨지만 다윗이 참회하고 하나님께 눈물로 제사하는 것을 보시고 하늘에서부터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북한민족도 하나님께 참으로 씻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었지만 눈물로 회개하고 돌아온다면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알게 모르게 국가적 차원에서, 개인적 차원에서 지은 무수한 모든 죄들을 아뢰이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거듭남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진정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종교는 아편이다. 성경은 비과학이다. 선교사는 악마다 등등 그들이 북한 사람들을 세뇌하고 선동하여 잘못된 생각들을 주입시키고 자유를 말살하고 평화를 유린하고 인간의 기본 생존권마저 박탈한 죄행은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가증스러원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끼리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고 감시하고 통제하고 분노하고 싸우게 만들었습니다. 김일성을 우상화하였고 창조주인 하나님을 알 수 없도록 정치범수용소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가두고 처형하였습니다.
지금도 지하교회의 많은 성도들을 붙잡아 가두고 복음이 전파되는 통로들을 철저히 차단시키고 있습니다.
우리 북한성도들과 남한성도들이 연합하여 하나님께 울며 회개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복음통일의 불을 내리셔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통일을 이루시고 북한민족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크게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48 라마나욧과 같은 교회
'라마'는 사무엘의 출생지이자 고향으로 이곳에 사무엘의 관저가 있었고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이곳을 거점으로 벧엘·길갈·미스바 등지를 순회하였습니다.(삼상7:15~17) 이스라엘 장로들은 이곳에서 사무엘에게 그들의 왕을 선정해 달라고 요청했고,(삼상8:4~55) 이에 따라 첫 번째로 사울을 택해 기름부음을 준 곳이며,(삼상10:1) 이후 다윗을 택해 기름부음을 주었습니다.(삼상16:13)
사무엘은 사울이 타락하자 결별하고 고향 '라마'로 돌아왔는데(삼상15:34~35) 이때 이곳에 '나욧'을 세워 후학들인 선지자들을 가르쳤습니다. '나욧'은 거주지·거처·초원지대라는 뜻으로 지금의 '기숙사'와 같은 의미입니다. 사무엘은 말년에 사울이 타락하자 훗날을 기약하고, 말씀을 가르치며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무엘이 '라마'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는 동안, 하나님의 명에 따라 기름 부어 준 다윗이 사울을 피해 미갈의 도움으로 도피한 곳도 '라마'였고(삼상19:18) 사무엘은 사울의 행태를 고하는 다윗을 '나욧'으로 데리고 가서 말씀으로 교육했습니다.(삼상19:19)
다윗이 '라마나욧'에 있다는 것을 안 사울은 세 번에 걸쳐 다윗을 잡아오라고 사람들을 보냈으나 그때마다 '라마나욧'에 온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여 예언하게 됩니다.(삼상19:21) 이때 예언은 미래를 예측하거나 선지자적인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황홀경 상태로 성령이 임한 현상이어서 사울은 다윗을 잡으러 직접 가는데 그가 '라마나욧'에 도착하자 그에게도 성령이 임했고 사울은 사무엘 앞에서 예언하며 벌거벗고 종일 누워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성령이 임하여 사울의 죄와 수치를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며 이때 다윗은 피신하였습니다.
'라마나욧'은 선지자들을 가르친 말씀 공동체요, 교육기관이며 또 말씀의 지식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메마른 지성을 위해 성령의 은혜가 함께 하고 역사하는 영성 훈련장이요, 성령 공동체였습니다.
이는 신약에서 사도바울이 에베소에서 '두란노서원'을 통해 2년 동안 후학들을 길러내고 그들이 흩어져 가정교회의 지도자가 되고 순회 전도자가 되어 초대교회를 든든히 세웠던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라마나욧 이야기는 교회의 역할과 관련해서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라마나욧은 사단이 힘쓸 수 없는 곳이고 죄인의 변화와 회복이 일어나는 곳이었습니다. 이는 라마나욧이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나는 믿음의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라마나욧은 치유와 회복이 있는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다윗'은 주의 종 '사무엘'에게 그간 있었던 일들을 낫낫이 다 고하였습니다.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전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삼상19:18)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그의 마음 깊이 억울하고 원통한 사연을 주의 종 '사무엘'에게 모두 고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의 마음이 치유되었던 것입니다. 억압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여 생기는 마음의 상처와 고통들이 어우러져 생기는 이러한 감정의 암 덩어리를 그대로 두면 자신과 이웃을 원망하고 신세를 한탄하며 생을 저주하고 자주 무력감과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이 정서적인 블랙홀이 되어 우리에게 오는 축복과 행복, 위로와 기쁨을 다 빼앗아 가고 정상적인 감정과 의지를 송두리째 잡아 먹어버립니다.
하지만 다윗이 그 환난과 고통 중에 "한"이 생길만 하였지만 치유와 회복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라마나욧"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광야에서 피가 마르는 도피생활 중에도 정신 분열증이나 우울증에 걸리지 않았던 것은 "라마나욧"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라마나욧"에서 성령의 강한 임재와 능력을 경험하고 심령이 새로워 졌을 뿐 아니라, 주의 종과 상담하여 마음의 아픔을 풀고 내적치유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신령한 "라마나욧"인 교회에 와서 사랑의 주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기만 하면 사랑의 주님이 마음을 만져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바디메오', '삭개오', '혈루증여인', '사마리아여인'등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깊은 한을 가지고 살았지만 예수님을 만난 뒤 모두 치유 받고 회복되어 건강한 삶을 살았습니다.
"나욧"은 기숙사 혹은 오늘날의 신앙 훈련소였습니다. "라마나욧"은 신앙공동체 즉 오늘 날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교회로 나오면 그 삶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내려간 '엘리멜렉'과 '나오미' 그들은 10년도 못되어 가장인 '엘리멜렉'이 죽고 두아들 '말론'과 '기룐'이 모두 죽어 세 과부가 남아 '나오미'의 가슴에 한이 생겼습니다. 고향사람들이 '나오미'가 돌아온다고 환영하면서 자기 이름을 부르자 그 이름의 뜻이 기쁨이었지만 "마라" 즉 "쓴물"이라고 부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신앙공동체인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그녀는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고 큰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라마나욧"은 성령님의 임재와 능력이 강하게 나타나는 곳이었습니다.
사울이 "라마"에 이르게 되자 그도 역시 개인의 자격과 잘못에 상관없이 성령님의 임재와 능력에 붙잡혀버렸습니다. "라마나욧"은 이처럼 하나님의 영이 강력하게 역사하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에는 예언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이 곳 근방을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였습니다. 그곳은 어느 누구라도 근방에만 오면 하나님의 성령에 감동되어 예언자가 되는 신비의 처소였습니다. 그리해서 살의를 가진 자든, 세상의 어떤 목적을 도모하려는 자이든지, 그 근방에만 오면 하나님의 성령에 사로잡혀서 예언자가 되는 곳이었습니다. 다윗을 잡으러 온 사울도 "라마나욧"을 향해 걸어가는 내내 예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악한 마음과 잘못된 영적상태를 가지고 성령이 역사하시는 현장에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영적 상태나, 마음 상태와 상관없이 성령의 능력에 노출되자 거룩한 변화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악령에 사로잡혔던 자, 예언할 수 없는 사람, 성령의 능력을 받을 수 없다고 여긴 사람도 성령의 능력에 압도당하여 예언을 하였습니다. 이런 사울이 예언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강력한 임재와 능력이 몰려 있던 현장 가까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습니다. 사울이 보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신약에서도 성령께서 강권적으로 임재하신 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 모두 그 능력에 사로잡혔던 기록이 있습니다(행2:1-4).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마가요한의 다락방에 모여 있었던 120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두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혀 충만하게 되었고 변화되었으며 새 방언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의 영적 수준이 모두 달랐고 성품도 기질도 모두 달랐지만 성령의 능력이 몰려 있던 곳에 있었기에 모두 큰 변화를 받았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도 로마의 장교 고넬료의 집에 모여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임재 앞에 거룩한 변화를 받고 방언을 받았던 기록이 있습니다. 그 사건은 베드로와 함께 온 유대인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실로 놀라운 사건이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이방인 모든 사람들 심지어 종들 까지도 모두 성령을 받고 방언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라마나욧"은 신앙의 공동체(교회)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렵고 힘들고 분주하고 매우 바쁘더라도 신앙의 공동체(교회)를 소중히 여기고 신앙의 공동체 모임에 모이기를 힘쓰고 신앙의 공동체에 임재하신 주님의 임재와 영광과 능력을 힘입고 매일 매일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라마나욧"은 가장 안전한 피난처이고 "라마나욧"은 치유와 회복이 있는 곳이며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신 현장이므로 교회가 여러분의 "라마나욧"이 되어 살아계신 하나님의 실재가 되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첫댓글 예섬 선교사님, 대단하십니다.
라오스가 큰 복을 받을 줄 믿습니다.
훌륭하신 칼로스 사역자도 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칼로스 사역자라는 고귀한 칭호를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높은 산도 넘고 험한 강도 건느며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데 남은 일생을 다하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