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정정한 모습으로 교회봉사를 하고 있는 송현성당 김우룡(바오로) 옹을 만났다.
70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하느님의 뜻을 알고 진정한 교회 봉사를 하게 됐다는 김우룡 옹.
그의 신앙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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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에 세례를 받으시기 전까지는 개신교 신앙을 갖고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천주교로 개종하시는 데 있어 바오로 사도의 회심과 같은 특별한 체험이나 계기가 있으셨던 건지 궁금합니다.
▶ 원래 육군사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소령 때 예편을 하고 수원교구 학교법인 광암학원 산하의 효명고등학교가 개교를 하면서 교감으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20년 가까이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기에 가톨릭에 대해 완고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개신교 신자인 제가 천주교 사립학교의 교감이 될 수 있을까 걱정도 했지만 당시 책임을 맡고 계신 유수철(도미니코) 신부님께서 너무도 흔쾌히 저를 받아주셨습니다. 그렇게 1957년에 부임한 후에도 3년간 개신교를 고수했죠. 그러다 몸에 종기가 나서 누워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 제게 유 신부님이 ‘교부들의 신앙’이라는 책을 건네셨는데, 어려운 시기에 만난 그 책은 제가 개신교에서 생각하던 가톨릭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깨닫게 해주었지요. 또, 제가 개신교 신자였음에도 저를 거리낌 없이 받아주시는 신부님의 모습도 제게는 큰 감흥이었기에 결국 1960년에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 특별히 세례명을 ‘바오로’로 정하신 이유가 있나요?
▶ 제가 생각하는 바오로 사도는 굉장히 철저하신 분입니다. 앞장서서 예수님을 박해하던 분이었지만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완벽하게 그 길을 버리고 개종하여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3번이나 선교여행을 하신 분입니다. 그런 바오로 사도의 모습에 반했기에, 저도 하느님의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해 바오로 성인을 수호성인으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하기 싫어 피하려고 했었죠.
그러나 하느님의 뜻이다 보니...
- 70대 후반에 송현성당 평신도사도직협의회 회장을 맡으셨는데, 높은 연세에 쉽지 않은 일이셨을 것 같은데요. 특별한 에피소드가 혹시 있으신지요.
▶ 송현성당이 송서성당에서 분가한 것이 1998년, 제가 정년 퇴임한 지도 10년이 넘었던 그 때 제 나이가 78세였습니다. 나이도 많았고, 할 수 없을 거라며 거절의 뜻을 전했는데도 신부님의 완고한 뜻에 못이겨 총회장 직을 맡게 되었죠. 그때는 솔직히 얼른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 하시는 일에 반대도 많이 하고 신부님을 불편하게 만들어 저를 그만두게 하시게끔 일부러 행동하기도 했지요. 그런데 그렇게 일 년이 지났는데도 오히려 신부님은 절 더러 1년 더 맡으라고 하시는 겁니다.(웃음) 그제야 저는 깨달았죠. ‘나를 계속 부르시는 데는 이유가 있구나, 이 일은 신부님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시키시는 것이구나’하고 말입니다. 그 오랜 신앙생활 동안 내가 한 일이 없었는데, 이제야 나를 주님의 도구로 부르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부님께도 일 년간 열심히 하지 못했던 것을 모두 고백했지요. 역시 신부님께서도 제가 돌아서길 기다리셨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주님이 주신 일이라 마음 먹으니 일을 안 하려고 할 때는 눈에 보이지 않던 일들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할 일이 태산이더군요.(웃음)
- 그렇게 느즈막히 시작한 봉사 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 우선 당시 3~40명에 달했던 예비자에게 교리교사가 없다는 것이 당장 시급한 문제였지요. 당시 수녀님도 안계시고 신부님도 혼자 일을 처리하시느라 예비자들은 세례받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모습을 보고, 제가 교리교사 자격증을 따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단기교육으로 들어갔는데 그곳 수녀님이 개원 후에 80세 이상인 교육생이 온 것은 제가 처음이라고 하시더군요. 사실 신부님도 걱정하셨지만, 그 나이에 교육을 받아서 얼마나 오래 가르칠 수 있을까라는 우려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교리교사 자격증을 딴 이후 올해까지 8년간 제 교리교육을 통해 영세 받은 이들이 총 300여 명 정도입니다. 회장직 맡기가 싫어 피해 다녔던 제가 81세라는 늦은 나이에 이렇게 변한 것은 저 조차도 놀라운 일이죠. 올해 부터는 노인대학 학장을 맡게 되어 교리교사를 그만 두고 신부님과 번갈아가며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1시간 강의를 위해 5시간을 공부해야 하지만 제 강의를 재밌어 하시는 모습을 볼 때는 정말 큰 보람을 느낍니다. 예전 같으면 못한다고 피했을 일들이 모두가 하느님 뜻이라 생각하니 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 송현성당 신축할 때 부채 없이 완공하기 까지 김우룡 옹의 노력이 매우 컸다고 들었습니다.
▶ 제가 송현성당 총회장을 맡았을 당시 다른 신축성당들은 모두 많은 성당 빚으로 신자들이 힘들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송현성당으로 분가하게 된 신자들도 마찬가지로 부담이 컸지요. 그 후 저는 신자들에게 큰 부담을 주지 않으며 성당을 짓기 위한 방안이 무엇일지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신부님께 “신부님께서는 마음의 성전을 키워주십시오. 저는 눈에 보이는 성전을 짓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성전 신축을 위해 ‘마음의 성전에서, 눈에 보이는 성전으로’라는 모토를 내걸었지요. 그러다 생각한 것이 교무금으로 성당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교무금 수익은 평균 3%에 그쳤습니다. 제가 계산을 해보니 한 가구당 교무금을 6%까지만 올려도 성당을 짓기에 충분히 가능한 금액이었습니다. 그리고 교우들에게 “한 번에 신축금을 내려면 모든 가정에 부담이 되지만 지금까지 내던 교무금에서 조금씩만 더 내면 우리의 힘으로 큰 부담 없이 성전을 지을 수 있다”고 호소했지요. 제가 수학교사를 했기 때문에 계산은 정확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웃음) 그렇게 신자들에게 호소한 결과 첫 분기에 4억 이상의 교무금을 모을 수 있었고 부채 하나 없이 성당을 짓게 된 것이지요.
- 바오로 서간이나 사도행전 중 특별히 마음에 남는 구절이 있으신지요?
▶사도행전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는 말씀이 깊이 와닿습니다. 하느님께서 바오로 사도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제가 길을 잘못 갈 때도 주님께서 저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실 뿐 아니라, 바오로 사도처럼 저를 써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바오로라는 세례명을 가진 것이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삶을 허락하시는 때까지
- ‘바오로 해’를 맞아 다짐하신 것이 있다면요? 또한 신앙생활의 선배로서 다른 신자들게 특별히 조언해주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 먼저 제가 다짐한 것은 하느님께서 제게 건강을 허락하시는 한 무엇이든 할 것이라는 겁니다. 10년 전만해도 그냥 그런 신앙생활을 했던 저는 하느님께 순명하는 것을 알고부터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그저 하느님께 순명하는 것이 바오로 성인처럼, 그분 뜻에 따라 사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특별히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절대 거부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람이 생각하기에 부족한 것은, 하느님께서 모두 채워주실 것입니다. 한 때는 저도 ‘내가 운도 없이, 이런 부담스러운 일을 하게 됐다’는 생각에 피하려고만 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을 때 비로소 진정한 기쁨과 평안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일을 맡겼을 때 “못한다”라고 하면 기쁨을 느끼지 못합니다. 봉사를 하면서 그에 따른 희생과 고통도 느끼지만 그 짐을 하느님께 맡기며 순종하면, ‘이것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육신의 평안을 위해서라면, 종교는 필요 없는 것이 됩니다. 내가 혼자 극복하지 못하는 것을 하느님께 모두 맡기는 것이 신앙이고, 그 때 하느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교우들이 하느님께 짐을 맡기지 못해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짐이 힘든 만큼 그 은총은 더욱 크다는 것을 저는 깊이 체험했고 여러분들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윤수현 명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