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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구정쯤의 베트남 여행으로 부터
미군의 지휘체제 내에서 주 베트남 미 군사원조 사령부(MACV)는 합참의 전략 및 작전 지시를 받으면서 태평양 전구를 담당하고 있는 태평양 사령부(PACOM)의 작전지휘 하에 베트남 전을 수행하는 통합군 사령부를 말한다. 남베트남에 통합된 군수지원 부대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한 MACV는1965년 2월 25일에 로버트 듀크(Robert W. Duke) 대령을 단장으로 하는 장교 17명, 병사 21명의 계획단 파견을 인가하였고 1965년 4월 1일 듀크 대령을 사령관으로 제1군수 사령부가 창설(이후 기구가 확장되어 1966년 1월 1일부터 육군소장이 사령관)되었다.
최초의 계획단 요원들로 뒤늦게 창설된 군수 사령부 요원들은 계속 도착하는 군소 군수지원 부대를 장악하여 지상 전투부대에 대한 지원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다. 제1군수 사령부는 주베트남 미 육군사령부의 예하부대로서 지원할 지역별로 사이공 지원 사령부(남베트남 3군단 지역지원), 캄란(Cam Ranh) 지원 사령부, 퀴논(Qui Nhon) 지원 사령부(남베트남 2군단 지역지원), 다낭(Da Nang) 지원 사령부(남베트남 1군단 지역지원, 이 지역에 대한 군수지원은 미 해병대 작전지역으로 미 태평양 사령부 지침에 따라 해군에서 지원 사령부를 운영토록 하였다가 1968년도부터 육군에 통합되었음)의 4개 지역 지원 사령부를 창설하여 통합적인 군수지원을 담당토록 하였다.
알다시피 전투부대만 도착하여서는 전력을 발휘할 수가 없는 것이며 전투부대, 전투지원 부대가 전력을 발휘하는 기본전제는 군수지원이다.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 농민은 쌀 한 가마니와 소금을 지고 고향에서 출발해 자기가 먹으면서 5백 킬로를 걸어 전쟁터 군수창고에 도착해 5킬로그램을 전하면 소임을 다한 것이다. 미국과 북베트남의 시간경쟁은 다른 의미에서는 군수지원 문제를 누가 먼저 해결하느냐에 달려있기도 한 것이다. 쌍방의 필사적인 노력이 시작되었다. 1965년 후반부터 미 지상 전투부대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사전준비를 할 수 없었던 미군으로서는 군수지원상의 제반 애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베트남은 미 본토로부터 10,000마일이나 떨어져 있다. 긴급한 병력이나 물자를 공수하기 위한 비행장도 부족하였고 해상 수송도 항구가 부족하고 하역 능력까지 없었다. 또한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는 국토에 도로망과 철도의 결핍, 여기에다 육상 보급로에 대한 적의 계속되는 공격에 대한 대책, 비행장, 항구, 저장시설에 대한 안전 확보 문제 등 베트남전은 그야말로 군수지원의 지옥이었다.
지금까지 미군의 군수지원 경험은 정규전에서였다. 전선이 있었고 후방 지역, 병참지대가 있었다. 그러나 남베트남같은 비정규전에서는 그러한 것은 있을 수도 없었고 참고할 만한 전례도 없었다. 그렇다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사전에 준비함으로써 지원의 시행착오를 방지할 수 있겠으나, 지상군 개입이 예상된다고 해서 사전 준비를 할 수 있는 여건은 안 되었다. 군사 고문단에 대한 군수지원은 해군의 책임이었으며 육군에게만 필요한 피복, 장구류, 탄약 등은 사이공에 별도의 소규모 직접지원 시설에서 보급하고 있었다. 한국군도 때 맞춰 100군수 사령부(십자성 부대)를 창설하였다.
미군이 당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대량의 보급물자를 하역할 항구가 부족한 것이었다. 미 지상군이 대거 개입하는 1965년 6월에 가용한 항구는 사이공 항과 1964년도에 미 원조에 의해서 화물선 2척의 동시 하역이 가능토록 확장된 캄란(Cam Ranh) 항뿐이었다. 사이공 항은 남베트남 정부 관리 하에 있어 화물이 적체될 때에는 몇 개월씩 걸리기도 하였다. 1일 지체에 3,000~7,000달러씩 지불해야 하는 선박 임대료는 차지하고도, 보급물자의 지연도착이 더 큰 문제이며 이 물자를 저장할 창고도 없었다.
비행장도 탄손누트, 비엔 호아, 다낭의 3개만 가용되고 있었다.
1965년 미 육군 제4수송사령부가 도착한 후, 미 태평양 사령부는 항만시설과 저장시설 구축에 최 우선권을 두고 공사를 하도록 지시하였다. 공병대대는 1965년 5월 7일에 해군 건설대대가 추라이(Chu Lai)에 도착하여 공사를 서둘렀고, 8월에는 미 35공병단이 캄란에서, 다른 공병대대가 퀴논에서 항만시설, 비행장, 물자 저장시설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계속해서 다낭, 판랑(Phan Rang), 투이 호아(Tuy Hoa) 등지에서 미국의 설비가 바닥날 정도로 급피치를 올렸다. 1965년 여름, 가을은 공병이 가장 많은 인원을 점하여 총 15개 공병대대(육군10, 해군4, 공군1)가 작업을 하였으나 여전히 태부족이었다. 수송선박은 줄을 이어 보통 2개월 걸려야 하역작업이 끝날 수 있었다. 최고 기록은 110일이었다. 모든 것이 부족한 때였고 시급하였던 그해 1965년이었다.
육군 공병, 해군 건설공병, 민간계약 회사 등의 초인적인 노력결과 1967년 말까지는 사이공 항외에 퀴논(Qui Nhon), 붕로(Vung Ro), 붕타우(Vung Tau), 다낭(Da Nang), 나트랑(Na Trang) 등의 항만시설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65년도에 평균 수송 연체 일자가 20.4일이던 것이 1970년도에는 2일 이내로 완전 해소될 수 있었다. 저장시설 공사도 엄청난 양이었다. 사이공 근교에 있는 롱빈(Long Binh)과 캄란, 퀴논, 다낭에는 종합창이 설치되었다. 캄란 창을 예로 들면 약 4만평의 저장창고, 34,000평의 탄약 야적장, 3,300만 갤런을 저장할 수 있는 유류 저장시설이 구축되었다.
본격적인 군수지원이 시작된 1965년 중반에는 미 육군의 군수지원에 처음으로 컴퓨터가 도입되어 전사화가 진행 중에 있었다. 1968년도까지 주 베트남 미군도 전산화되었으나 일반 및 직접지원 부대 급에서는 수리부속은 전산처리가 되었으나 기타는 여전히 수작업이었다고 한다. 미 육군과 해군(해병사단 지원)은 약 127만 드럼을, 미 공군은 비행장에 278,000 드럼을 저장할 수 있는 시설을 구축하였고 미국의 계약회사들이 약 80만 드럼을 저장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었다. 미군의 저장목표는 30일분이었으나 소요의 증가, 분배 및 수송기간, 총 소모량의 3%에 달하는 손실(자연손실, 송유관 수송 중 절취된 량) 등의 요인 때문에 실제 저장수준은 20일이었다. 송유관이 가설된 곳은 사이공-탄손누트(Tan Son Nhut) 간, 붕로(Vung Ro)-투이 호아(Tuy Hoa) 간, 퀴논(Qui Nhon)-푸캇(Phu Cat) 간, 퀴논-안케(An Khe)-플레이쿠(Pleiku) 간 등 극히 일부에 불과하였다.
각 지역 유류 저장고에 대한 적의 공격이 계속되어 많은 피해를 입었다. 사이공 근교에 있는 쉘(Shell) 회사의 나베(Nha Be) 저장고에 대한 적의 공격으로 약 44만 드럼의 피해가 발생하였고 특히 퀴논-플레이쿠 간의 송유관에 대한 적의 공격행위는 집요하여 월 평균 47,000여 드럼의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1965년 3월 이전에 미군의 베트남 내 탄약보급 시설은 탄손누트(Tan Son Nhut)에 육군 항공부대의 탄약을 보급하기 위한 1,300톤 규모와 나트랑(Na Trang)에 미 제5특전부대 지원용의 800톤 규모의 시설뿐이었다. 동남아 지역 우발사태시의 탄약지원 계획은 전개부대는 기본 휴대량만으로 투입되고 이후 미 본토로부터 최초 180일 간의 탄약은 일괄 추진보급 개념으로 해상 수송하는 것이었다.
1965년 4월 지상군 전개 결정에 따라 탄약 저장목표는 남베트남 내에 60일분, 오키나와에 30일분으로 결정되었다. 남베트남 내 60일 분의 저장목표는 사이공, 캄란, 퀴논 창에 45일 분, 탄약보급소에 15일분이었다. 1961년 12월 11일 미 육군의 2개 헬기중대가 파병된 이래 1965년 1월에 베트남에는 510대의 헬기가 있었다. 헬기에 대한 보급 및 정비지원은 붕타우(Vung Tau)에 있는 1개의 일반지원중대와 붕타우, 사이공과 나트랑(Na Trang)에 있는 3개의 직접지원중대가 담당하였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 시기 비행장, 헬기 고치는 곳, 유류저장시설, 항만, 탄약창 등등 다낭과 나트랑은 군수지원의 보고라고 해도 가히 틀리지 않는 중요한 곳이었다. 북베트남 친구들이 집중공략을 한다면 어디를 할 것 같은가. 다낭 아니면 나트랑 아니면 캄란이 되지 않을까.
이제 집으로 향하는 길, 우리의 차는 나트랑 해변을 한 번 휘돌더니 이내 공항으로 향한다. 우리는 호치민에 도착하여 다시 국제선을 갈아타고 인천공항으로 향할 것이다. 저녁을 간단히 공항에서 먹고 우리는 탑승 길에 올랐다. 신나고 즐거운 여정이었지만 쉴 새 없이 쏘다녔으니 피곤할 만도 하다. 그런데 도시 잠을 이룰 수가 없다. 갈 때와는 달리 아기들이 많이 탄 여객기, 합창을 하듯 울어대니 밤 새 우는 아이들이야 오죽하겠냐마는 나도 신경이 곤두선다. 그러나 어쩌랴, 저 녀석들이 장차 우리를 지켜주고 이끌어갈 보배들이 아닌가. 그런데 웬 아이들이 이렇게 떼거지로 몰린 것일까. 나는 바로 알아 차렸다. 우리나라에 시집온 베트남여성들이 친정집에 구정 나들이를 마치고 이제 집으로 향하는 길인 것이다. 떡두꺼비 같은 아이들을 앞세우고 ‘엄마 나 이렇게 잘 살아요, 걱정 마세요.’ 하고 TV 한 대 들여다 주고 기분 좋게 되돌아오는 가슴 뿌듯한 행차가 아닌가. 내 옆자리 모자간 그런 이야기 하는 것을 살포시 엿들어서도 이는 분명하다.
아이가 엄마보다 더 정확한 우리말을 구사하는 게 신기하였지만 그 여성은 아이를 꼭 품에 안고 공항 도착까지 깨우지를 않았다. 보통 엄마들은 곧 도착한다는 방송 멘트가 떨어지면 바로 깨우고 난리인데 그녀는 곤히 잠든 아이를 일부러 깨우지 않는 것 같이 보였다. 아이를 편하게 대해주는 엄마, 나는 그 아이를 위해 하나 착한 일을 했다. 베트남 항공이 생각 외로 서비스가 좋다는 것을 이번 처음 알았다. 밤늦은 시각 생각지 않은 저녁이 나왔다. 그런데 구운 소고기 반찬이 맛도 있고 양도 많았다. 그런데 밤 12시가 넘으니 대부분은 곤히 잠들어 그냥 지나치고 만다. 나는 일부러 스튜어디스에게 부탁을 해 그 아이에게 줄 식사를 받아와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받아들면서 ‘이것 집에 가져가도 되나요?’ 하며 내게 반문을 했다. 얼마나 착한 여성인가 말이다. 도시락을 세우면 국물이 흐를 것 같아 비닐봉지까지 준비해 주었더니 앉은 채로 인사를 꾸벅하는 그녀다.
우리와 같이 구정을 쇠는 베트남 사람들, 전쟁의 아픈 경험도 침략에 식민지 생활 한 것도 같으며 한자도 알고 유교도 알고 풍속도 비슷한 사람들, 나는 그들과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친해졌으면 좋겠다. 석 교수는 구정 때 달랏 라디오 방송국에 출연해 한국의 설날에 대해 소개를 하였다고 했었다. 그들이나 중국이나 우리나 설날에 대해서는 그 어느 나라보다도 전통적 사고가 뿌리가 깊다. 이번 여행 때 가만히 보니 설날이 지났는데도 베트남은 여전히 설날 같은 기분으로 사는 것 같이만 보였다. 중국도 한 달은 아마 그렇게 지난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이 즐겁고 기쁜 구정이 몸서리쳐지고 통한의 상처로 남은 시대도 있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역사가 그들에게 있다.
1967년 12월 20일 북베트남은 하노이에서 열린 외교관 리셉션에서 미국이 북폭을 중지한다면 미국과 협상을 할 용의가 있다고 말하였다. 오랫동안 협상신호를 기다렸던 미국을 긴장시켰음은 물론이다. 루마니아가 중재하도록 북베트남은 요청하였다. 1968년 1월 중순경 루마니아 대표가 하노이를 방문하자 미국은 호의를 보이기 위하여 그의 방문기간 동안 하노이 일대의 북폭을 제한하였다. 민족해방전선은 진작부터 1968년도 구정휴전은 1968년 1월 27일부터 2월 3일까지(구정일자는 1월 30일) 실시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들이 제시한 휴전 개시일자 하루 전인 1월 26일에 민족해방전선은 구정휴전은 쌍방이 엄격히 준수하여야 한다고 마지막 능청을 부렸다. 북베트남은 공세의 보안을 위해서 전반적인 공세계획을 베트콩들이 알지 못하게 하였다. 수행하여야 할 개인임무만을 명확하게 알려주고 훈련을 시켰을 뿐 다른 사람은 어디에서 무슨 임무를 수행하는지 타 지역에서는 어떻게 공세를 취하는지 전혀 모르게 하였다.
남베트남의 구정 전야는 전국이 이동하는 날이다. 전쟁 중이어서 구정기간이 아니면 헤어진 가족들을 만나기가 어렵기 때문에 구정휴전 기간을 이용하여 모두 다 이동하는 날이다. 초 만 원을 이룬 버스는 문을 닫을 수도 없었고 3륜차인 람브레타는 10명 정도가 탈 수 있는데 20명 가까이 태웠다. 각 검문소도 차량들을 그대로 통과시키고 있었다. 검문할 수도 없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오랜만에 마음 편하게 쉬고 싶었다. 더구나 1968년도 구정에는 베트콩들이 일주일 동안을 휴전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으니 당연 이동 인파가 다른 해에 비하여 더 많았다.
전국의 베트콩들도 이동하고 있었다. 그들의 이동은 1월 중순 경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신분을 위장할 수 있고 은거가 가능한 자들 그리고 사전정찰이 필요한 요원부터 도시로 잠입하였다. 가까운 거리는 당일 야간에 공세지점으로 이동하면 되었다. 무기와 탄약 수송이 문제였다. 장례식을 가장한 관속에 넣어 운반하였다. 꽃 수레, 채소, 과일 트럭 밑에 실어서 운반하기도 하였다. 나룻배 밑에 2중으로 만들어 수로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구정 이동 인파에 뒤섞여 이동하였다. 검문이 불가능한 초만원 버스가 많이 이용되었다. 대담하게 남베트남군 복장을 착용하고 지나가는 미군 트럭을 세우고 태워 달라고 하였다. 미군 트럭은 남베트남군이나 경찰의 검문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가장 안전하였다. 미군 트럭 운전병도 구정에 귀향하는 남베트남군 병사들을 도와주어서 기분이 좋았다.
북베트남은 모든 구정행사를 1월 29일에 마쳤다. 1월 30일부터는 그들의 공격이 시작되면 미군의 북폭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노이 라디오에서는 호치민의 신년사가 끝난 후 신년을 위해 그가 특별히 자작했다는 시가 흘러 나왔다.
“올해의 신춘(新春)은 다른 해의 봄과는 다르리라.
승리의 환희가 온 누리에 가득히 퍼지리니
남과 북은 우리 모두 하나였고 하나로 뭉쳐
미제 침략자를 응징하리라.
앞으로 진군하라.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모두가 호치민의 상투적인 선전으로 생각하였으나 이것은 총 공세, 총 봉기를 계획대로 결행하라는 호치민의 명령이자 신호였다. 1968년 1월 30일, 음력으로 무신(戊申)년 새해가 되는 00:00시가 지나고 거리에는 남 베트남인들이 폭죽을 터트리며 축제를 하고 있었다. 나트랑(Na Trang) 남베트남 해군훈련소에 00:35에 베트콩들이 박격포 공격을 가하면서 1개 대대가 나트랑 시내로부터 공격을 개시하였다. 01:35에 반메투오(Ban Me Thout)에서 군중들이 폭죽을 터트림과 동시에 박격포, B-40로켓포의 사격과 함께 2개 대대가 공격을 개시하였다. 호이 안(Hoi An), 다낭(Da Nang), 퀴논(Qui Nhon)에서도 베트콩들의 공격이 개시되었고, 04:40 티우 대통령은 30일 오전 10:00에 구정휴전의 취소를 발표하고 휴가 중인 남베트남군들의 부대복귀를 지시하였다. 그러나 복귀한 병사는 얼마 되지는 않았다. 교통편도 없었고 만일 적이 공격한다면 우선 자기 가족부터 먼저 지키고 싶어 했다.
이미 공격을 개시한 8개 도시지역의 베트콩들이 착오를 일으킨 것이다. 북베트남의 공격개시 시간이 최초에 1월 30일 새벽이었다가 1월 31일 새벽으로 변경되어 전달과정에서 착오를 일으켰는지 확실히 밝혀지지는 않고 있다. 1월 31일 02:45 사이공 미 대사관 공격을 필두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남베트남의 6개 직할시 중 5개 직할시, 44개의 성도(省都) 중 36개 성도, 242개의 군청 소재지 중 64개소 그리고 50여개의 촌락에 대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일차 경고는 되었으나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전국에 걸쳐서 이와 같이 일제히 공격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습은 달성할 수 있었으나 지난 밤 공격의 착오로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공격에 대한 반응시간을 단축시켜 놓고 말았다.
미 대사관 공격은 15명의 베트콩이 2대의 차량에 분승하여 대사관 정문으로 접근하면서 시작되었다. 경계를 하던 초병이 사격을 가하자 베트콩들은 담을 폭파하고 내부로 진입하였다. 미 해병대 헌병의 사격으로 최초 3명의 베트콩이 사살되었고 미 해병대 헌병 2명도 전사하였다. 베트콩들은 사이공 지역의 작전본부를 촐론(Cholon) 지역에 설치하고 주요 시설들을 공격하였다. 독립궁, 라디오 방송국, 남베트남 해군본부, 남베트남군 총참모부, 5,000여 명의 죄수가 있었던 사이공 교도소(베트콩 1개 대대 공격), 탄손누트(Tan Son Nhut) 공항(베트콩 3개 대대 공격), 남베트남군 포병, 기갑사령부(베트콩 2개 대대 공격) 등이 베트콩의 공격을 받았으나 격퇴되었다.탄손누트 공항은 베트콩들이 3개 대대를 집중하여 공격하였으나 미 기계화 연대 예하 1개 대대가 신속히 출동하여 베트콩들의 후방으로 공격하여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날이 밝으면서 항공기, 건쉽, 포병화력이 지원되어 베트콩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산발적으로 도처에서 교전이 있었으나 2월 6일까지는 촐론(쩌런) 지역을 제외하고 사이공은 평온을 되찾았다.
여러분들도 이 사진은 많이 보았을 것이다. 사이공에서 경찰국장 구엔 곡 로안(Nguyen Ngoc Loan)이 노상에서 포로가 된 베트콩 장교를 권총으로 사살하는 장면이 전 세계 신문에 보도되어 베트남 전에 대한 세계여론에 큰 영향을 주었다. 베트콩들은 공세 기간 중 후에(Hue)에서만 수천 명을 학살하였는데도 이 사진 한 장으로 오히려 남베트남이 더 잔인하다는 인상을 전 세계인에게 특히 미국인에게 심어주게 되었다.
구정공세 당시 베트콩 장교를 즉결 처형하는 구엔 곡 로안 사이공 경찰국장
구정공세의 최대의 비극이 후에에서 일어났다. 북베트남군은 후에 시내에 8개 대대 7,500여명을 투입, 02:00부터 은밀히 진입하기 시작하여 후에를 점령하였다. 곳곳에 베트콩 기가 휘날리고 14만의 시민은 포로가 되었다. 북베트남군은 1개 사단 규모의 병력으로 후에 시까지의 보급로를 확보하여 재보급을 실시하면서 후에의 장기 점령을 시도하고 있었다. 남베트남군 1사단과 미 해병사단의 일부 병력은 고도(古都) 후에의 유적을 보호하기 위하여 항공, 전차, 포병화력의 지원 없이 후에를 재탈환하기 위하여 공격을 하였으나 피해만 속출하였고 베트콩들도 완강히 저항하여 진격이 저지되었다.
북베트남군은 보급로가 차단당한 후 전투력이 급격히 저하되기 시작하였으나 이미 시 외곽이 포위되어 탈출로도 없게 되자 필사적인 저항을 계속하였다. 북베트남군이 후에를 점령한지 25일 만인 2월 24일 재 탈환작전은 종료되었다.
민간인 피해도 엄청났다. 모든 공무원, 군인, 경찰, 교사, 종교인, 청년 등 5,800여명이 처형당하였다. 2,800여명을 한곳에 집단 매장해 버렸고 생매장되기도 하였다. 이재민은 116,000여명이었다. 외국인은 모두 사살되었고 미 민간인 수석고문(미군 내 장군 급에 해당하는 군무원) 맨하드(Manhard)와 헬기추락으로 다낭 군수지원사 부사령관 퍼셀(Purcell) 대령이 포로가 되었다. 후에에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들이 저지른 엄청난 만행은 남베트남인에게 깊은 공포심을 갖게 하여 이후 피난민 사태는 군 작전의 중요한 변수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외에 비엔 호아(Bien Hoa), 쾅트리(Quang Tri), 달랏(Dalat), 다낭 등지에도 베트콩들의 강력한 공격이 있었고 베트콩들이 10개의 성도를 일시적으로 점령하기도 하였으나 2월 11일까지는 후에를 제외하고는 북베트남의 공세는 거의 마무리 되었다.
미군이 집계한 구정공세 기간의 피해 및 전과는 실로 엄청나다. 미군 및 연합군 전사 1,536명, 부상 7,764명, 실종 11명, 남베트남군 전사 2,788명, 부상 8,229명, 실종 587명, 북베트남군 베트콩 사살 45,000명(투입병력의 1/2로 추산), 포로 6,991명, 공용화기 1,300정, 개인화기 7,000여정 노획, 민간인 사망 14,000명, 부상 24,000명, 이재민 63만 명 등이었다. 이게 과연 사람이 할 짓인가. 즐거운 명절 날. 전쟁은 앞뒤 위아래 가리지 않고 그렇게 비참하고 참혹한 것이다. 베트남의 미래와 마치 평화를 위해 싸우는 양 말들을 앞세웠겠지만 그 시대 베트남은 저주받은 땅임에 틀림이 없었다. 부디 베트남인이여! 과거를 모두 잊고 앞날에 축복이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