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히 역사 지식을 얻기 위한 책이 아니다. 지식을 나열한 책도 아니다. 역사 교과서에서 다루지 않았던 우리의 역사를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정리한 책이다. 대한민국의 남녀노소라면 소설책 읽듯 한 번 쯤은 꼭 읽어보야할 책이다. EBS 역사채널에서 텔레비전으로 방영된 내용을 책으로 엮었다고 한다. TV를 즐겨하지 않는 터라 책으로 만나게 되어 감사하다. 상식을 넓혀 줄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얼을 찾게 해 준다. 백과사전식으로 되어 있다고 해서 가볍게 대하지 말라. 깊이도 있는 책이다.
사실 토막토막 상식을 알려주는 형식의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나의 고정된 생각을 내려 놓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 과거급제는 입신양명의 지름길이었다. '쨍하고 해 뜰 날'을 기대했던 이들은 과거시험을 보러 가는 것을 가리켜 인생의 빛을 보러 간다고 해서 이른바 '관광 觀光'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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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임금 가운데에서도 특히 세종은 혈통보다는 능력을 중시했던 임금이로 숨어 있는 인재를 찾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1447년 치러진 전시에서 '인재를 등용하고 양성하며 분별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논하라'는 주제를 내 놓았을 만큼 세종은 인재 등용에 관심이 많았다.
세종의 곁에서 18년간 영의정 자리에 있었던 황희는 서얼 출신이었고, 세종시대 과학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 장영실은 노비 출신이었다. 북방 개척의 주역으로 활약한 김종서와 최윤덕 역시 그들의 능력을 알아본 세종의 안목으로 등용된 인물이었다. (105)
서얼 문제에 가장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인 국왕은 영조였다.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의 소생인 영조는 서얼이었지만 왕이 된 인물이었다. 영조는 서얼에게 관대한 정책을 펼쳤다. 영조에 이어 정조는 서얼과 노비 등 소외된 사람들이 관직에 진출할 수 있도록 법제화했다. 최고의 학문 기관인 규장각에 능력 있는 서얼들을 대거 등용했다.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 등.(106)
육영공원의 제1회 졸업생 이완용. 일본에 나라를 팔아 '을사 5적의 수괴'라 불리는, 바로 그 이완용. 이완용은 일본어보다 영어를 먼저 배운 조선의 신지식이었다. 영어로 무장한 이완용은 미국에 건너가 주미 공사관의 대리공사가 되었고, 귀국 후 미국통으로서 두루 요직을 맡았으며 독립협회에도 관여했다. 1905년 을사늑약에 서명하기 전까지 이완용은 괜챦은 평을 듣던 인물로 고종도, 독립협회도 모두 그를 믿었다.
구국의 인재를 양성하였던 것이 영어학교 육영공원을 설립한 고종의 취지였지만, 영어를 배운 자들이 매국에 앞장섰으니 그 뜻은 안타깝게도 빗나갔다. (159)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과 러일 전쟁 이후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는다. 일본이 미국의 필리핀 점령을 묵인하는 대가로 미국은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는 것에 대해 눈감아주기로 한 것이 이 조약의 핵심이다. 미국 입장에서는 조선의 정치에 개입해봐야 아무런 이익도 없었다. 미국만 믿고 있던 영어파로서는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이완용처럼 친일로 돌아서는 사람도 있었다. 윤치호 같은 이도 있었다.(161)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운 외국인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미국인이라고 불리는 호머 헐버트. 1886년 23세 선교사로 입국. 고종의 밀서를 미국에 전달하는가 하면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열사 일행이 참석하는 것을 지원했다. 서재필과 함께 <독립신문> 창간에 참여했고, 서양 지리서를 편찬해 조선의 청년들에게 세계에 눈뜰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었다. 1949년, 헐버트는 한국에 다시 돌아 온 뒤 일주일 뒤에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해는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는 유언에 따라 마포구 양화진 절두산 성지에 묻혔다.(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