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로움 감수하고 손으로 정성껏 만들어내는 원조 병천순대
우리나라 대표적인 서민음식을 들라 하면 역시 순대를 빼놓을 수 없다. 순대는 각 지역마다 그 지역의 풍토와 산물(産物)을 이용해 만들어진다. 그래서 지역을 대표하는 먹을거리로 발전하곤 한다. 쉽게 떠올려 보아도 속초의 아바이순대, 용인의 백암순대, 예천의 돼지 막창순대, 담양의 암뽕순대, 제주순대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그만큼 순대는 우리 음식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친숙하고도 대중적인 음식인 것이다. 그 중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아우내장터’라고 알려진 곳에는 50여 년간 순대만을 만들어 팔아 전국에 병천 순대의 이름을 널리 알린 순대 국밥집이 있다. 바로 병천순대의 원조, 이정애 할머니의 <충남집>이다.서울에서 출발해 천안을 지나 목천 나들목으로 나와 병천, 진천방향으로 십여 분간 달리면 충남 천안시 동부의 작은 시골마을 병천(아우내) 읍내에 도착한다. 유관순 열사가 3.1만세운동을 주도한 아우내 장터가 바로 이곳이다. 독립기념관, 유관순열사 사옥, 상록리조트 등 주변 관광지도 많을 뿐 아니라 충남 천안에서 충청북도의 청주, 진천, 괴산지역으로 지나가는 길목이어서 그런지 시골 면 소재지 치고는 꽤나 번화하고 활기찬 모습이다. 병천 읍내의 큰 길 가에서 보이는 간판들의 반 이상이 순대 집 간판이다.
천안사람들 하는 말 중에 천안지역을 먹여 살린 두 할머니가 있다고 한다. 천안의 명물 학화 호두과자의 원조 심복순 할머니와 천안 병천순대의 원조 이정애 할머니가 바로 그 두 분이란다. 그 말이 무색하지 않게 정말 천안시내 어디를 다녀도 호두과자와 병천순대국밥집은 쉽게 눈에 띄는 지역 특산물로 자리매김했다. 병천순대의 원조 <충남집>의 이정애 할머니를 만나 충남집의 역사와 맛. 그리고 순대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남편 사별 후 순대국밥집으로 생계 꾸려
병천 읍내 사거리에 자리 잡은 <충남집>을 찾은 시간은 오전 10시. 평일 오전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가득 찼다. 인근 리조트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을 먹으러 찾는 손님이 많단다. <충남집>은 지금 이정애 할머니의 큰아들 내외가 가업을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다. 할머니는 이제 가게에 나오지 않으시냐는 질문에 아들 오호준 씨 (병천순대 원조 <충남집> 대표)는 여든을 바라보는 어머니께서 아직도 가게에 나와 일하셔서는 안 되지 않겠냐며 효성어린 답변을 한다.
동네 의원에 물리치료 받으러 가셨다는 말씀에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일흔 중반의 할머니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할머니의 모습은 정정하고 생기 있었다. 그 연세의 할머니들이 으레 그러하듯 희끗한 머리에 허리도 좀 굽고 주름살도 있으리라 생각한 바와 달리 멋쟁이 할머니에다 말씀도 재미있고 조리 있게 잘 하신다.
병천순대 원조 이정애 할머니는 병천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조치원의 부광마을에서 시집을 오셨다. 보통의 여염집 아낙내로서 시댁 일가가 모여 사는 이곳 병천에서 여섯 남매를 낳아 기르며 살았다. 그러다가 당시 마흔 여섯의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살 길이 막막해 졌다고 한다. 농사가 많지도 않을뿐더러 여자 몸으로 자식들을 거느린 채 농사일을 한다는 것도 무리. 어차피 조석(朝夕)으로 자식들 끓여 먹이기는 해야니까 먹는장사라도 하면 자식들 굶기지 않겠다 싶어 음식장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남편 잃고 정신 차려 보니 여섯 남매가 올망졸망 날 바라보고 있데요. 아직도 그 때 자식들 눈망울이 잊혀 지지 않아요. 먹고는 살아야 하는데 뭘 해서 먹고 살지 막막하던 시절이였지요. 그때만 해도 이곳 아우내 병천 5일장이 매우 규모가 컸어요. 그래서 장날 모여드는 사람에게 국밥을 말아 팔기 시작했지요. 처음에는 육개장과 불고기를 만들어 팔았는데 시간이 지나니 차츰 음식장사가 손에 익고 할 만 하더라고요. 자신이 생겼지요. 그래서 5일마다 열리는 장날만 장사 할 게 아니라 매일 장사를 하기 시작했어요. 장날이 아니더라도 면사무소직원들이나 길가는 행인들이 더러 들러서 배를 채우고 가곤 하더라고요. 옛날엔 저기 병천면 면사무소 뒤에 도살장이 있었어요. 거기서 돼지 잡는 날 나오는 돼지곱창과 선지를 얻어다 이곳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배추며 파 등 채소를 버무려 넣어 만든 순대를 손님상에 곁두리로 낸 게 반응이 좋더라고요. 그래서 순대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러다보니 그 순대를 넣은 순대국밥도 만들어 팔기 시작했지요.”
시누이 도움으로 장사 계속 해
이정애 할머니가 매일 가게 문을 열고 장사를 시작하자 혼자서는 일손이 벅차기 시작했다. 아침 4시면 일어나 순대를 삶기 시작해 먼동이 트고 아침이 되면 순대국 손님들을 받기 시작한다. 하루 종일 일하고 밤 10시면 다시 연탄불에 해장국을 끓이고 밤 12시엔 다시 내일 팔 순대를 준비했다. 그리고 다시 새벽 4시에 순대를 삶고…. 고난의 연속이었다고 이정애 할머니는 당시의 생활을 회상한다.
“그때 참 힘들었어요. 장사는 시작해서 사람들이 많이 팔아줘 벌이도 되고 자식들 키워나갈 셈이 서니 그것은 참 다행이었지요. 근대 이대로 가다간 정말 힘들어 병나겠더라고요. 뛸 재간 없이 바쁠 때 날 도와주기 시작한 양반이 바로 우리 시누에요. 우리 시누가 날 도와줬어요. 그때 도와줬기에 아직까지 이 장사 계속 하는 거지요. 요즘 젊은 애기들 시집가면 시누들이고 시어머니고 참 어려워하데요. 난 근데 그러질 않았어요. 시집 올 때부터 내가 먼저 남 같잖게 살갑데 대하고 이물 없이 지내니까 그게 서로 편하고 나중에는 친정 피붙이보다도 더 정겹게 되었어요. 시누랑 장사하면서 난 참 시누가 고마웠어요.”
이정애 할머니를 도와 장사를 하던 시누이는 몇 년간 함께 일하다 <충남집>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그 근처에 <자매집>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따로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취재에 들어가기 전 원조 병천순대국밥집을 조사하는 취재진에게 원조가 <충남집>이다, <자매집>이다, 시민들의 의견이 분분하게 엇갈렸던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