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4-6 장인 장모 봉분 평장 와비 설치
세월은 덧없이 흘러가고,4월을 맞아 청명날도 지나고 한식날도 지나서 2024/4/6(토요일) 김제 묘동(토끼재) 안동김씨 선산 옥토망월형(玉兎望月形) 명당자리에 잠들어 있는
조동화의 장인 어른 김재형님과 장모님 강귀례님의 봉분을 없애고 평평하게 고른후 잔디를 새로 갈아 입히고, 이름과 출생일과 돌아가신날을 새긴 와비를 설치하였다.
옥토망월형(玉兎望月形)은 옥토끼가 자신의 고향인 보름달을 바라보는 형상을 가진 지형을 일컬으며,
뛰어오르는 토끼처럼 많이 솟아있고, 달처럼 둥글게 생긴 산을 주위에 아우르고 있는 것이 옥토망월형의 특징이며 풍수지리학자들이 명당으로 꼽는 이유지요.
조동화의 장인(丈人)어른께서는 본이 안동이시며 1977년 내가 결혼 당시 이름이 김재형(金在亨)이라 불렀는데 족보 호적에는 김재권(金在權)으로 되어 있었고, 장모(丈母)님은 강귀례(姜貴禮)여사로 진주강씨(晉州姜氏)이시다.
오늘날 핵가족화로 변한 사회환경속에서 봉분을 벌초하고 관리하기가 어렵다고나 할까 그래서 좀 묘지관리를 편리하게 하려다 봉분을 없애고 평평하게 한후 잔디를 새로 입히었다.
묘지 봉분은 조상의 유택과 조상으로서의 상징성을 가진 표상으로서 평소 벌초와 관리를 잘하면 좋으나, 봉분이 허물어지고 짐승들이 파헤쳐 눈살을 찌푸리는 경우가 있고 태풍으로 무너지고 잔디가 죽고 띠뿌리가 무성히 자라 잔디는 죽고 보기가 흉하여 평장으로 잘했다 생각이 든다.
조상님을 평안하게 모시기 위해서
보통 봉분묘를 개장하여 수목장, 화초장, 납골묘, 평장 등으로 변경하고 있으나
조동화는
장인 장모님을 평안히 모시기 위해 봉분상태를 평평하게 고른후 와비만 설치하였다.
와비가격은 가로 70cm 세로 45cm 높이 12cm 정도 되는데 대략 700,000원 정도 들어갔다.
장인어른과 장모님 2024/4/6 묘역 작업은 사촌처남 김중회가 주관하여 포크레인은 인근동네에서 60만원에 맡겼으며, 전주 서신동의 효사랑라이프 이창준사장에 위탁하여 평장 와비설치를 하였다.
조동화의 장인어른 김재형님과 장모님강귀례님은 영원한 안식처에서 편안히 잠들기를 빌며,
하늘나라에서 훨훨 날아서 오대양 육대주를 여행하시기를 기도드린다.
행복하세오.
감사합니다.
<조동화는 장인어른과 장모님 묘역을 평장으로 단장하고 와비뒤에 서서 사진을 남기었다.
띠뿌리가 봉분을 감싸고 있어 보기가 않좋고 마음이 무거웠는데, 평평하게 봉분을 골라 잔디를 새로 입혀 놓으니 한결 기분이 가벼웠다.>
<조동화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무덤이다
합장이 아니고 쌍봉분으로 장인어른은 왼쪽이고 오른쪽이 장모님이시다.
봉분에 잔디는 별로 없고 띠뿌리만 무성하다.
쌍봉을 평평히 포크레인으로 골라 새로운 잔디로 갈아 입혔다.
조동화의 장인 장모 묘는 전통적인 무덤으로 상봉분으로 따로 따로 흙더미를 쌓아올려 뙤(잔디)를 입혔으나 세월과 함께 잔디가 죽고 봉분이 빗물에 페이며 띠뿌리로 감싸고 있어 봉분을 평평히 고른후 잔디를 입히고 사초하였다.>
<우측부터 조동화 장인어른 장모님 손위동서 조규창님이다.
이사진은 장인어른 환갑잔치날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모시고 장인어른께서 돌아가시전 1년전 1980년에 찍은 사진이다.
이시절 시골집에는 벽장이 있었고, 이때 내나이 30살이었다.
안방 아랫목에 앉아서 사진을 찍었는데 벽에는 부뚜막쪽으로 벽장이 설치되여 있었다.
장인어른 김재형님은 내가 결혼후 4년만에 1981년 돌아가시었고, 장모님 강귀례님은 2001년도에 돌아가시었다.
동서 조규창님은 조동화보다 2살 위로 양계사업을 하고 계신다.>
조동화 처가 안동김씨 소개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경상북도 안동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인 김구(金九) 임시정부 주석을 배출하였다. 또한 김구(金九)의 아들 김신(金信)이 한국의 교통부장관을 지냈다.
안동김씨는 신라김씨의 시조이신 대보공(大輔公) 휘 알지(諱 閼智)의 후손 중 한 성씨이다. 평장사공(平章事公) 휘 숙승(諱 叔承-경순왕의 손자)을 시조로 모시고 있으며, 경순왕의 8대손으로서 고려조에 출장입상(出將入相)으로 높이 추앙받는 충렬공(忠烈公) 휘 방경(諱 方慶)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충렬공은 안동에서 출생하여 고려조에 삼별초를 평정하고 고려 도원수로서 일본 원정에 나선 뒤 돌아와 최고 관직인 추충정난정원공신 벽상삼한 광정대부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推忠靖難定遠功臣 壁上三韓 匡靖大夫 三重大匡 僉議中贊 判典理司事 世子師)로 치사(致仕)한 후 가자(加資)되어 첨의령(僉議令)에 이르렀으며, 상락군(上洛郡) 개국공(開國公)에 봉해지고 안동을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몰 후 선충협모 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宣忠協謀 定難靖國功臣 壁上三韓 三重大匡)에 추증되고 시호 충렬(忠烈)을 받으셨다.
안동김씨는 신라 왕손이며 고려왕의 외손(外孫)으로서 고려 500년간 대대로 공경장상(公卿將相)이 끊이지 않았다. 고려가 망하자 많은 사람들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을 지켜 각 지방에 흩어져 은거하였고, 그 후 형성된 세거지(世居地)를 중심으로 후손들이 번성하였다.
조선조에 와서도 태종조에 좌정승을 지내신 익원공(翼元公) 휘 사형(諱 士衡)을 비롯한 4분의 정승(政丞-士衡, 石質, 壽童, 自點), 6분의 호당(湖堂-壽寧, 澍, 弘度, 瞻, 緻, 德龍), 5분의 청백리(淸白吏-碔, 延壽, 斗南, 睟, 時讓), 두 분의 충무공(忠武公-時敏, 應河), 5분의 장신(將臣- 應海, 世翊, 重器, 흡(水+翕), 善弼) 등이 배출되었고 수많은 고관대작(高官大爵)과 충신열사(忠臣烈士)가 끊이지 않았으며, 모름지기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서의 명분을 지켜왔다.
근대에 들어와 일제 강점 시절에는 많은 분들이 일제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였으며, 특히 상해 임시정부의 주석으로서 평생토록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백범 김구(金九)선생이 배출되어 문명(門名)을 크게 빛냈다.
김 구(金 九)(1876-1949)
자주독립(自主獨立)을 평생의 소원으로 삼고 민권투쟁(民權鬪爭)의 선봉장이었던 백범(白凡) 구(九)는 안동 김씨(安東金氏)가 자랑하는 인물이다.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순영(淳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5세에 학자 정문재(鄭文哉)에게 한학(漢學)을 배우고 1893년(고종 30) 동학(東學)에 입교하여 동학혁명(東學革命)을 지휘했으며 명성황후(明星皇后)의 원수를 갚기위해 일본군 중위(中尉)를 때려 죽인 죄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고종(高宗)의 특사령으로 감형되어 복역중 탈옥하여 마곡사(麻谷寺)의 중이 되기도 하였다.
그후 임시정부 주석(主席)에 선임되어 민족분단의 평화통일을 위해 앞장서서 남북협상(南北協商)을 제창했고 한독당(韓獨黨) 당수로 있다가 경교장(京橋葬)에서 안두희(安斗熙)의 흉탄에 쓰러져 1949년 6월 74세의 생애를 마침으로 충효의열(忠孝義烈)의 가맥(家脈)을 이어온 명문 안동 김씨의 전통을 빛냈다.
국민장으로 효창 공원에 안장, 1962년 대한민국 건구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장모님 진주강씨의 유래
진주강씨는 고려사에 업적을 남긴 명장 강감찬 장군을 파조로 하는 인헌공(仁憲公)파, 그리고 강민첨(姜民瞻) 장군을 파조로 하는 은열공(殷烈公)파 등으로 대별되고 있다.
강감찬은 983년(성종 3) 과거에 갑과 장원으로 급제한 뒤 1018년(현종 9) 내사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內史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와 외관직인 서경유수(西京留守)를 겸직하는 벼슬에 올랐다. 강감찬의 귀주대첩은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이순신의 한산대첩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역사상 위대한 3대 전승 대첩으로 손꼽힌다.
진주 강씨(晉州姜氏)의 시조는 고구려 영양왕 시기에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를 역임한 강이식(姜以式) 장군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강이식은 정사로 인정받지 못하는 조선상고사에서만 언급되는 인물이다.
강이식의 선조는 중국의 강태공의 자손인 천수강씨(天水姜氏)의 지파인 광동강씨(廣東姜氏)의 일족으로 중국 광동강씨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현재 진주시 상봉동에 위치한 봉산사에 강이식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강씨가 진주에 세거한 것은 고구려 멸망 이후 당 황제가 인재를 발탁하기 위해 실시한 과거에서 강진(姜縉)이 장원급제한 후 태중대부 판내의령(太中大夫判內議令)을 역임하다가 진양후(晋陽候)에 봉해진 이후이다. 이때부터 진주 강씨의 본관을 진주(晉州)로 하게 되었다.
수목장
화장한 분골을 지정된 수목의 뿌리 주위에 묻어 그 나무와 함께 상생한다는 자연회귀 섭리에 근거한 새로운 장묘 방법. 수목의 뿌리 주위에 골분을 묻어주는 방법으로 고인이 함께 상생한다는 자연회귀의 정신을가지고 있으며,
우리민족의 신수사상 및 존골사상 등과도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는 전통적인 화장 이후 유골의 추모방법이다.
수목장이 필요한 이유로는 국토의 1%인 998㎢가 묘지로 잠식되고 매년 여의도 면적 1.2배인 9㎢의 묘지가 생겨나고 있다.
이는 전국 주택면적 2,177㎢의 절반에 해당하는 면적으로 서울시 면적의 1.6배에 해당한다.
이로 인해 귀중한 산림이 훼손되는 것은 물론 호화분묘로 국민적 위화감마저 조성되고 있는 실정이다.
수목과 함께 영생하며 자연회귀 사상에 기초한 수목장은 장묘문화 개선을 통해 자연훼손을 최소화함으로써 후손에게 아름다운 자연을 물려주기 위해 꼭 필요한 장묘제도이다.
◎수목장의 역사와 나라별 추이
◆스위스
수목장의 창시자는 스위스의 우엘리이다. 1993년 우엘리(Ueli Sauter)는 친구가 사망한 후 친구의 소원대로
화장한 재를 산에 뿌려 달라는 부탁을 듣고 프리트발트(Fired Wald 평온의 숲 또는 안식의 숲)의 조성에 관한
아이디어가 떠올라 시작한 것이 시초이다. 우엘리는 종교철학교수, 법의학연구소, 특허전문변호사의 자문을 얻어
1999년 1월에 스위스특허청을 거쳐, 유럽연합특허청에서 프리트발트라는 상표로 특허를 출원 받게 된다.
이어 관청의 재정복지부서에서 장례절차에 대한 기준, 수자원부호국으로부터 수질오염에 대한 긍정적인 답변을
듣게 된다. 이어서 수목장 토지가 결정되고, 여기에 심어놓은 나무들은 최장 99년까지 보호받을 수 있도록 등록했다.
토지소유주와 계약을 체결하였고, 계약내용은 언제든지 묘지를 방문할 수 있고, 나무와 묘지 사용료,
운영비에 대한 내용이다. 현재 스위스에 56개소, 독일에 8개소가 운영되고 있는데 유럽 다른 나라에도 더욱
확산될 것으로 예상된다.
◆독일
2000년 6월 은행원 악셀바우다와 변호사 페트라바하가 수목장림에 대한 발상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두 사람은 우선 기구장묘, 우주공간장묘, 수중장묘 등 여러 가지 자연장묘 형태에 대해 연구한 바,
유일하게 성공적인 장묘법이 수목장뿐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2000년 회사를 창립한 이후, 수목장이 급속도로 확산되게 된다. 장기간의 저항이 있었지만 10개의 수목장림이
개설되었다. 독일은 스위스와 달리 처음부터 대규모의 수목장림이 조성되었다. 현재 가장 큰 수목장은
라인하르트발트에 있으며 그 크기는 약 116hr에 달한다. 2004년에는 1,000건 이상의 장례가 수목장림에 치러졌으며,
2005년도에 1,800건 정도 치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아직 공동묘지에 비교하면 아주 미미한 것이지만 앞으로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2005년 8월 현재 프리트발트 유한회사에 예약된 수목장림 나무 묘소의 숫자는 45,000개를 넘고 있고,
큰 면적의 수목장림이 10개에 이른다.
◆일본
일본은 자연장에 대한 법률적인 규제가 없고 상식적인 범주에서 누구나 행할 수 있다.
다만, 성묘는 꽃다발만 허용하고 공물은 하지 않는다. 산불을 방지하기 위해 향, 초 등의 사용을 엄격히 금지한다.
유골을 땅에 묻고 그 위에 키가 낮은 꽃나무를 심는다. 작은 명찰을 표식으로 남기며 구역 간 울타리는 없다.
이와테현 이치노세키시의 임제종 ‘쇼운지’ 수목장의 경우 27,000㎡에 3,000위를 수용할 수 있으며 묘지 사용료와
관리비가 50만엔 정도이다.
◆프랑스
프랑스의 수목장은 집단산골 형태로 지정된 구역에 분골을 뿌리는 방식이다.
가톨릭 전통이 강한 프랑스에서는 매장 문화가 주류이고 수목장과 유사한 장묘형태는 거의 발전되지 않았다.
공동도로를 제외한 어느 곳에서나 화장재를 뿌리는 것(산골)이 가능하다.
다만 산골에 따른 시민들의 불편을 줄이기 위해 지정된 집단 산골장소를 제공한다.
◆영국
영국은 수목장은 기존 공원묘지의 수목에 산골 하거나 자연 분해성 용기에 담아 묻는 방식이다.
영국에서는 이를 자연장(Natural Burials)이라고 부른다. 1991년 설립된 내추럴 데스 센터(The Natural Death Center)가
자연장을 주도한다. 영국의 수목장은 모두 기존 공원묘지 내에서 이루어진다.
수목장을 위한 식생은 교목, 화목, 관목, 잔디 등 다양하게 사용된다.
유골을 묻거나 뿌린 후 고인을 기리는 표찰을 아주 작은 묘비석이나 나무줄기 표피에 설치한다.
自然葬(樹木葬 · 花草葬 · 잔디葬)
“자연장(自然葬)”이란 화장한 유골의 골분(骨粉)을 수목·화초·잔디 등의 밑이나 주변에 묻어 장사하는 것을 말한다.
장례의 한 종류로, 화장한 유골의 골분을 나무, 화초, 잔디 밑이나 주변에 묻는 것이다. 나무 밑이면 수목장, 화초 밑이면 화초장, 잔디 밑이면 잔디장이라고 구분한다.
가장 널리 알려지고 시행되는 것은 수목장, 잔디장이다.
기존의 봉안당 안치가 인공적이고 답답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안으로 자연장으로 장례를 치르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현재 장사 등에 관한 법률(약칭: 장사법)에는 매장, 화장, 자연장만 규정돼 있는데, 유골분을 바다에 뿌리는 해양장(바다장)을 이 자연장에 포함시키려는 입법 발의가 있었으나, 아직 통과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