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미련함을 아는 것이 지혜의 첫걸음이다
잠언 9:1~18
오늘 본문에 보면, 1절에서는 지혜가 소리쳐 부릅니다. 지혜인 호크마(여성형)으로 되어 있으니, 지혜의 여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혜의 여인이 잔치를 준비하고 사람들에게 준비한 만찬을 먹고 마시라고 초대합니다. 반대로 13절에서는 미련한 여인이 소리쳐 불러 지나가는 행인들을 초대하여 부릅니다. 그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누구인가요?
4절에 나옵니다. ‘어리석은 자’가 첫 번째 사람이요 4절 후반절에 ‘지혜 없는 자’가 두 번째 사람이요, 7절에 ‘거만한 자’가 세 번째 사람입니다. 또한 잠언에 자주 등장하는 또 한 사람을 든다면, ‘미련한 자’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지혜의 여인이 부르는 초대의 말을 듣기도 하고, 미련한 여인의 초대의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이 사람들은 지혜의 여인의 초대를 잘 듣고 가면 지혜의 은총과 축복을 받아 누리지만, 미련한 여인의 유혹하는 소리를 듣고 따라가면 18절 말씀처럼 스올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참혹은 일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들려오는 소리들을 잘 분별하고 잘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러한 소리를 듣는 자들은 자기에게 들려오는 소리를 잘 분별하고 잘 선택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무지함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아는 자가 지혜의 첫 걸음마를 뗀 사람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어리석은 자’는 어떤 의미를 가진 사람입니까? 그는 히브리어 원문에 ‘페티’라는 단어로 써 있는데, 이 단어는 열려 있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넓고, 열려 있다는 이 뜻에서 나온 의미는 무엇이냐면, 어리석은 자란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일 없이 모든 종류의 유혹에 대하여 개방적인 태도를 가진 매우 단순하고 미숙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잠언 14:15 말씀에,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자기의 행동을 삼가느니라”는 말씀이 적절하게 이 뜻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솔깃하니 남의 말에 잘 귀 기울이고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입니다. 순진하고 단순하여 살짝만 흔들어도 다 넘어가 버리고 맙니다. 마음이 순진한 것은 좋으나 분별력이 부족하여 이리 저리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는 자주 속고 자주 손해를 봅니다. 여기 저기 끌려다닐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이러한 미숙하고 단순함을 순진함, 솔직함으로 생각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잘 모릅니다.
두 번째 사람은 4절 후반절에 나오는 ‘지혜 없는 자’인데, 원문에 보면, ‘마음이 모자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즉 지혜가 모자란 사람입니다. 판단력이 모자란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도 모자랍니다. 생각이 모자랍니다. 생각과 판단과 신앙의 깊이가 모자라고 넓이가 모자라고 높이도 모자랍니다. 그런데 이 지혜 없는 자가 자기의 모자람, 자기의 모자람, 자기의 부족함을 잘 모른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거만한 사람입니다. 거만한 사람은 원문적인 뜻은 비웃는다는 것입니다. 조롱한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비뚤어져서 남을 풍자하고 놀리는 데 익숙합니다. 이 사람은 남의 조언을 싫어합니다. 남의 비난과 공격을 저항합니다. 이 비웃는 사람이 들어가면 언제나 다툼과 소란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잠언 22:10 말씀에 이르기를, “거만한 자를 쫓아내면 다툼이 쉬고 싸움과 수욕이 그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충고하는 자는 그 사람에게 도리어 모욕을 당할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거만한 사람을 충고하는 자는 도리어 해를 받게 됩니다. 거만한 자는 거만함을 깨닫지 못하고 늘 비웃고 조롱하는 정신이 차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코 진정한 성장을 하지 못합니다.
마지막 유형으로 잠언에 자주 나오는 용어가 ‘미련한 자’입니다. 이 단어는 ‘둔하고 뚱뚱하고 고집이 세다’는 데서 나온 단어입니다. 고집도 세고, 둔하고 자기 만족에 차 있어서 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잠언 1:32 말씀에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라고 하였습니다. ‘안일함’이 미련한 자의 특징인 것입니다. 결코 지혜와 지식에 대하여 갈급해하지 않습니다. 나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처럼, “나는 부자라 부족함이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습니다. 스스로 마음이 둔하고 마음이 기름지고 마음이 고집이 세서 결코 배우려 들지 않기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네 종류의 사람이 잠언에서 지혜의 초대를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귀가 얇아 여기 저기 솔깃 말을 듣고 분별없이 넘어가는 어리석은 자, 판단력이 모자란 지혜 없는 자, 늘 우쭐거리며 조롱하는 정신을 가진 거만한 자, 또한 스스로 부자라고 생각하며 안일에 빠져 있는 미련한 자들입니다. 이 네 종류의 사람들은 지혜의 간절한 초대를 잘 듣고 돌이켜서 지혜와 명철을 잘 배워서 미련함을 버리고 천박함을 버리고 모자람을 채우고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기꺼이 잘 배워가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성장과 성숙의 출발은 자기의 미련함을 아는 것입니다. 자신이 바로 분별력이 없이 이것 저것 잘 믿는 사람인 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바로 판단력과 지혜가 좀 모자란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이 남을 조롱하고 남을 무시하고 남 앞에 우쭐하는 교만한 마음을 가진 자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자기 속에 더 이상 배움과 성장에 대한 욕구가 없이 이대로 좋다는 둔한 정신 안일함이 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족한 사람임을 깊이 깨달은 만큼 우리는 지혜의 부르는 소리가 귀에 들릴 것입니다. 그 소리에 귀 기울여 지혜와 명철을 갈급히 찾고 배워갈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분별력이 생기고 미련한 계집의 유혹을 물리치고 점점 지혜로운 사람으로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한 제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자세히 검토하고서 그 제자의 박사학위를 수여해주는 스승이 그 제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 동안은 자네는 자신이 무엇을 아는가를 아는 사람 중 하나였지만, 이제부터는 자기가 무엇을 알지 못하는가를 아는 사람 중 한 사람이 되었네그려.”
이 말은 박사가 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이 결코 아님을 분명히 지적해준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전 3:18)
그렇습니다. 자기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의 한계를 깨닫고 겸손해질 수 있고, 그러기에 더욱 배워가고자 애쓰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바로, 어리석은 사람이요 지혜 없는 사람이요 거만한 사람이요 미련한 사람이라는 점을 깊이 깨닫는 만큼 더 지혜의 계단을 한 단계 올라갈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평생에, 자신의 미련함을 날마다 새롭게 깨달아 가는 지혜의 학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날마다 자신의 부족함을 깊이 깨달아 하나님의 지혜로 점점 채워져가는 자들 되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