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 7. 15. 오바마 대통령이 노먼 록웰(1894~1978)의 <우리 모두가 함께 사는 문제>(1964)를 보며 그림 속 주인공 루비 브리지스와 대화하고 있다. 인종차별 철폐를 위해 최초로 백인 학교인 윌리엄 프란츠 초등학교에 가는 6세의 소녀 루비 브리지스는 네 명의 보안관과 함께 등교하고 있다. 벽에는 ‘NIGGER’, ‘KKK’가 씌여있고 벽에 던져진 토마토도 보인다. ⓒPete Souza, 백악관 누리집
지구상에는 많은 나라가 존재한다. 유엔 가입국이 193개 나라지만 바티칸, 팔레스타인, 타이완, 코소보도 나라 취급을 한다. 이외에도 일부에서만 인정받는 국가가 있고 비독립 국가도 38개에 이른다. 국가는 공동의 역사와 지리적, 문화적 환경을 공유하며 소속감과 단일 정체성, 자주성, 그리고 공동이익을 추구한다.
세계에 현존하는 나라들 가운데 가장 강한 나라는 미국이다. 그래서 미국과 한편이 되는 것을 유달리 좋아하는 이들이 있다. 지정학적인 이유로 우리나라가 특히 그렇다. 반면 이스라엘은 미국을 하수인처럼 부리기를 예사로 한다. 반면 북한은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미국에 대하여 적대적이어서 우리와 묘한 대조를 이룬다. 미국은 힘이 강하다. 그렇다고 좋은 나라라고 한마디로 말하기는 거북하다.
미국은 어떤 나라인가?
미국은 1776년 북아메리카에서 탄생한 나라다. 그 땅에는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선사시대에 베링육교를 건너온 몽골계 인종이거나 남태평양의 아시아계 인종이 바다를 건너와 정착하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1492년에 콜럼버스(1451~1506)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후 1607년부터 영국인의 이민이 본격화되어 13개 식민지를 대서양 연안에 성립하였다.
북부는 1620년 영국과 네덜란드의 청교도 102명이 오늘의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에 정착한 이후 신앙의 자유를 찾아 출유럽하는 이들이 많이 정착하였다. 경제적으로도 남부에 비하여 월등하게 발전하였다. 종교와 경제력의 차이는 노예제도와 관련하여 남북전쟁(1861~1865)이라는 내전을 치렀다. 그 후 미국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승전국이 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세계의 크고 작은 일에 간섭하였다.
1964~1973년에는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대규모 살상 무기와 고엽제 등 화학무기를 사용하여 민간인에게 피해를 끼쳤고, 결국 미국 내에 반전운동을 불러왔다. 그 후 이슬람 원리주의에 입각한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세계무역센터가 9.11(2001) 테러를 당하자 아프가니스탄과 전쟁(2003~2011)을 벌였고, 2003년에는 대량살상무기 보유를 명분으로 이라크 침공을 감행하였다.
미국을 흔히 국제 경찰이라고 한다. 베스트팔렌조약(1648)을 통하여 근대 국가개념이 등장한 이래 모든 국가는 평등하다. 하지만 국력 차이가 현존하다 보니 이를 인정하는 것 또한 현실이다. 강한 나라가 스스로 힘을 과시하려고도 하지만 그 힘을 이용하여 자기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기를 바라는 주변 나라들의 욕망이 이를 부추기는 경향성도 사실이다. 힘이 센 나라가 좋은 나라는 아니다.
미국이 다른 나라, 특히 적대적이거나 이해관계가 부딪히는 나라에 문제 제기할 때 사용하는 단골 메뉴가 ‘인권’이다. 특히 중국이나 북한을 공격할 때 이를 활용한다. 흑인 대통령을 배출한 나라이지만 미국 사회에 여전히 흑백 갈등은 존재한다. 1964년에 제정된 미연방 민권법은 인종, 피부색, 종교, 성별 또는 출신 국가에 근거한 차별을 금지한다.
이 민권법의 조항은 채용, 승진 및 해고에 있어서 성별과 인종에 근거한 차별을 금지한다. 투표권의 집행과 학교의 인종 차별은 더 이상 없다. 하지만 법적으로만 그럴 뿐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은 여전히 실재한다. 심화된 빈부의 차이에 의한 심각한 인권 편중 현상도 존재한다. 이런 현실에서 예술가에게 미국의 평화를 묻는다. 특히 미국 건국 과정에서 인디언에 대한 관점과 흑인 노예를 보는 인종주의에 대한 예술가의 시선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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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드워드 미첼 배니스터(1828~1901) <다가오는 폭풍> (1886, 캔버스에 유채, 102.2×152.4cm, 스미소니언 미국미술관, 워싱턴DC) |
흑인 화가, ‘에드워드 미첼 배니스터(Edward Mitchell Bannister)’
19세기 미국의 미술계에서 흑인에 대한 차별은 다른 사회와 다를 바 없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졌더라도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기회가 차단되기 일수였다. 아주 고약한 일이 너무 당연시되던 시대였다. 1867년 <뉴욕 헤럴드>는 ‘깜둥이도 미술을 감상할 수는 있지만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는, 흑인을 모욕하는 기사가 실리기도 하였다.
캐나다 출신의 미국 바르비종파 화가 에드워드 미첼 배니스터(1828~1901)는 카리브해 다베이도스 출신의 흑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죽고 어머니마저 죽자 백인의 집에서 키워졌다. 스무 살이 되엇을 때 미국 보스턴으로 건너와 생계를 위해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독학하여 화가가 되엇다. 1876년 ‘필라델피아 100주년 박람회’에 풍경화를 출품하여 동메달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베니스터가 흑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심사위원들은 심사를 다시 하려고 하였다. 다행히 백인 경쟁자가 심사 결과를 인정하여 그는 최종 수상자가 되었다. 그러나 베니스터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시상식 입장을 거부당하였다. 이런 차별 경험이 흑인 화가의 작품에 원망과 분노로 표출될 법도 한데 베니스터의 작품에 그런 의도는 전혀 담기지 않았다. 놀랄만한 일이다. 도리어 그의 작품에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노동의 신성함이 가득하다.
그의 작품 <다가오는 폭풍>(1886)은 비를 잔뜩 머금은 시커먼 구름이 다가오고 바람도 거세게 불고 있다. 그런 상황에 한 남자가 모자를 붙잡고 좁은 산길에서 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몸이 잔뜩 앞으로 기울어진 것을 보아 바람이 그만큼 거셈을 짐작할 수 있다. 이제 곧 소나기가 쏟아질 것이다. 아니 이미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몸을 피할 곳은 보이지 않고 갈 길은 아직 멀어 보인다.
그런데 화면 속 남자는 백인인지 흑인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그의 다른 작품 속에도 등장인물의 유색 여부는 간과하는 경우가 더러 눈에 뜨인다. 흑인 화가로서, 자기 작품의 예술성과 상관없이 푸대접과 멸시를 받았던 화가로서 특이하다. 그는 작품 속 인물의 유색 여부를 모호하게 처리하므로 모든 인종은 하나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예술은 예술로서만 평가해야 하며, 예술 외의 요소로 예술을 평가하는 당시 세상을 그렇게 꾸짖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인디언 아내 크리스타는 남북전쟁(1861~1865) 때 ‘흑인 병사에게도 백인 병사와 같은 임금을 지급하라’며 병사후원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차별과 편견을 이기기란 쉽지 않다. 실력이 탁월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시도이다. 그래서일까. 유럽 유학은 물론 제대로 된 미술교육도 받지 않았던 배니스터는 오직 실력만으로 자신의 활동 무대인 프로비던스의 시민으로부터 사랑받는 화가가 되었다. 여기서 잠깐 무명의 화가에게 갈채를 보낸 프로비던스가 어떤 도시인지 궁금해진다.
미국 동북부에 있는 로드아일랜드의 주도인 이 도시는 미국 역사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1773년 보스톤 차 사건보다 1년 앞서 항영(抗英) 투쟁이 있었다. 미국에서 가장 먼저 노예제도를 폐지하였다. 그래서 자유와 인권을 중히 여기는 이들과 예술가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살기 시작하였다. 프로비던스는 청교도 로저 윌리엄스(1603~1683)가 인디언 부족 내레갠셋의 도움을 받아 정착한 곳으로 여성에게도 설교권을 주는 등 진보적 가치를 실현하므로 종교적 박해를 받는 이들이 모여들었다.
이런 도시가 배니스터의 예술에 긍정으로 응답하는 일은 자연스럽다. 프로비던스는 미국 동북부에서 가장 살기 좋은 친환경 도시로 알려졌고 미국 최고의 미술학교인 로드아일랜드 미술학교가 이곳에 있다. 학문의 자유와 다양성을 지향하는 브라운대학교도 이곳에 있다. 사람이 도시를 만들지만, 도시가 사람을 키우기도 한다. 우리가 만들려는 세상은 어떤 세상이고, 어떤 세상이 사람을 사람답게 취급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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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초에 출생해 활동했던 캐나다계-미국 흑인 화가였던 ‘에드워드 미첼 배니스터’. ⓒWikipedi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