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8. 18. 주일예배설교
갈라디아서 5장 1절, 6장 1~5절
해방과 자율의 신앙적 의미
■ 이스라엘이 애굽으로부터 해방된 날을 기념하여 유월절이라고 합니다. 모든 재앙이 넘어갔다는 의미인 ‘유월’(pass-over)입니다. 이런 경우 일반적으로 해방절이라 표현하겠지만, 신앙의 민족인 이스라엘은 이날을 ‘하나님이 모든 재앙을 넘어가게 하셨다’는 의미의 유월절로 지킵니다.
이후 이스라엘 해방의 경우는 식민지에서 벗어나려는 모든 민족과 나라에 하나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우리도 일제강점에서 해방되어 빼앗겼던 주권을 되찾았습니다. 그래서 광복절(光復節)입니다. 건국절이 아닙니다. 없던 나라/없어진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애굽 안에 있었던 것이지, 애굽이 된 것이 아니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광복절입니다. 해방절(解放節)이기도 합니다.
며칠 전, 우리는 또 한 번의 광복절/해방절을 맞았습니다. 그래서 차제에 한반도 신앙인으로서 해방과 자율의 신앙적 의미를 되짚어 보고자 합니다.
■ 바울은 구원을 해방으로 설명합니다. 5장 1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여기서 “종의 멍에”는 율법에 매인 것을 말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죄에 매인 ‘죄의 노예’를 말합니다. 이렇게 죄의 멍에를 맨 죄의 노예의 상태에서 해방을 받아 자유를 얻게 된 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해방이자 자유입니다. 그러니 구원이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사실 율법이 얼마나 까탈스럽습니까? 율법을 모두 지켜낼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으니 보통 까탈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죄는 얼마나 간교합니까? 구분하기 애매한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말하기에 따라 오히려 좋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니까요. 참으로 죄는 천사로 가장해서 오는 간교함의 극치입니다.
이런 까탈스러운 율법과 간교한 죄로부터 놓인 것이 구원이요 해방과 자유이니, 이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일인가요! 말로 다 표현 못할 감사와 감격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방을 통해 얻은 자유가 방종(放縱)이나 방자(放恣)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삼가는 태도 없이 자기 멋대로 무례하고 건방지게 행동하는 것이 자유가 아닙니다. 자유는 율법과 죄로부터 놓인 것이지, 은혜로부터 해방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해방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해방으로 얻은 자유 또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 선물입니다. 내 수고로 얻은 자유가 아닙니다. 내 몫을 주장할 수 없는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자유가 방종이나 방자로 이해되는 순간 얻은 자유는 다시 종의 멍에를 메는 자리로 되돌아갑니다. 5장 1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그러므로 자유를 스스로 자기의 행동을 규제할 수 있다는 자율(自律)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혹시 자신이 속한 공동체나 문화의 규칙을 따르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것도 자유가 아닙니다. 자유는 우리 자신의 공로로 얻은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이렇게 ‘자유’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 선물’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을 때, 우리는 자율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6장으로 넘어가서 1절, 그리고 3절과 4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우리는 1절에서 “너 자신을 살펴보라”는 말씀과 3절의 “아무것도 아니면서 무엇이나 된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 그리고 4절의 “잘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혼자 자랑스럽게 생각할 일이지 남에게까지 자랑할 것은 못된다”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 말씀에서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자율은 철저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가운데 겸손을 지향하는 태도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자기반성 없는 자율, 겸손하지 않는 자율은 자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방종과 방자는 자율이 아닙니다. 더욱이 자율이 은혜의 삶에 속한 것임을 안다면, 그 누구 앞에서도 자기 멋대로 굴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적 자율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이 신앙적 자율은 또 하나의 특이점이 있습니다. 자율을 자기중심적으로 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타자중심적 삶이라는 것입니다. 2절입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서로의 짐을 지라는 것은 타자의 짐을 지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이기적인 사람에게서는 나타나지 않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적 자율은 타자중심적 삶입니다.
더욱이 이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완성”하는 태도라는 사실입니다. 타자의 짐을 짊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완성하게 된다고 할 때, 이것은 일종의 영적 숙제/과제를 하는 것입니다. 신률, 즉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신앙적 자율은 각자에게 맡겨진 거룩한 하늘의 과제를 이행하는 삶입니다. 5절입니다.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이렇게 각 사람에게 부여된 짐은, 하나님이 맡기신 각자의 사명입니다. 이 사명의 짐을 짊어져야 하는 책임이 모두에게 있습니다. 누구도 예외 없습니다. 모두가 거룩한 하늘의 과제를 각각 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마다 사명이 달라도 창조적으로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 이렇게 책임져야 할 대표적인 하늘의 과제는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범죄자들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바로잡아 주는 일입니다. 두 번째는, 삶에 짓눌린(억압된) 사람들에게 몸을 굽혀 손을 내미는 일입니다. 세 번째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늘의 과제가 무엇인지 조심스럽게 살피는 일입니다.
첫 번째는, 범죄자들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바로잡아 주는 일입니다. 모두가 죄에 빠지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죄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죄에 빠지거든 바로잡아 주되, 너그러운 마음으로 잡아 주는 것입니다. 혹시 야단치는 것도 너그러운 마음의 일종이라고 강변하면 할 말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너그러운 마음이 긍휼의 마음이자 친절한 마음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면, 야단치는 것을 너그러운 마음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범죄의 내용이나 정도에 따라 그를 대하는 태도가 쉽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죄를 대하는 태도는 엄격해야 하지만, 범죄자를 대하는 태도는 인권을 존중해야 합니다. 이것이 너그러운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범죄자를 대하면서 동시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자신을 살피는 것입니다. ‘나는 과연 어떠한가? 나는 이 사람보다 나은가?’라는 질문으로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이들처럼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령한 사람, 즉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의 하늘 과제 수행 중 지녀야 할 태도입니다.
두 번째는, 삶에 짓눌린(억압된) 사람들에게 몸을 굽혀 손을 내미는 일입니다. 이들은 힘을 빼앗긴 사람들입니다. 억울하지만 상대의 강력한 힘을 이겨낼 수 없어 짓눌린 채 있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짓눌려 심리적, 문화적 박탈감을 당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몸을 굽혀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몸을 굽힌다는 것은 겸손이고, 그들의 높이에 맞춘다는 뜻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혜택을 베푼다는 태도가 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유인즉 내게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거룩한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자율이 작동한 행위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힘으로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어떤 사람에게도 손을 내밀 때는 반드시 몸을 굽혀야 합니다. 결코 거부감을 갖게 하는 태도는 삼가야 합니다.
세 번째는, 첫 번째와 두 번째 과제 이외에 자신에게 주어진 하늘의 과제가 무엇인지 조심스럽게 살피는 일입니다. 이는 각자에게 맡겨진 짐입니다. 이렇게 맡겨진 하늘의 과제를 찾았으면, 그 일에 몰두해야 합니다. 집중하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유념해야 할 태도가 있습니다. 우쭐대서는 안 됩니다. 혹시 남과 비교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일이 특별하고 대단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자신을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쭐함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경계하라는 말씀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태도를 어렵지 않게 접합니다. 하지 말라고 하셨음에도, 이런 모습은 너무도 쉽게 접합니다. 자신의 업적이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한 매스컴 타기, 출판 등을 통한 자기 홍보하기 등과 같은 행위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신 말씀을 어기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거역하는 카인의 후예들입니다. 어둠의 자식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입니다. 과연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있을까요?
■ 우리의 해방은 죄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이 해방은 자유를 주었고, 인격적으로 살 수 있는 자율을 누릴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부러울 것 없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영원한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누릴 때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나의 그 어떤 수고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감사하고 감격하는 삶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맡기신 하늘의 과제에 충실한 삶이 마땅합니다.
그 과제의 첫 번째는, 범죄자들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바로잡아 주는 일입니다. 두 번째 과제는, 삶에 짓눌린(억압된) 사람들에게 몸을 굽혀 손을 내미는 일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과제는, 첫 번째와 두 번째 과제 이외에 자신에게 주어진 하늘의 과제가 무엇인지 조심스럽게 살피는 일입니다.
이 모든 과제는 자율을 이기적이 아닌 이타적 개념으로 이해할 때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쭐대지 않고 겸손하게 이행할 수 있습니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성실하게 이행할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이 모든 해방과 자율의 신앙적 의미를 평생 잊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모든 걸음이 거룩한 걸음으로 평가받길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