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종 때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권경희는 처가 한미(가난하고
지체가 낮음)했다.
조선시대에는
처가, 외가가 한미하면 높은 벼슬이나 청요직(지금의 사법관료직)은
맡지 못한 게 상례였다.
그래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밭자, 아버지마저 아내를 버리고 새 장가를
들라고 재촉했다.
그러나
권경희는 끄떡도 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어찌 10년이나
함께 살아온 조강지처를 버리겠습니까?
하늘이 정해준
배필을 버리고 높은 벼슬을 하느니, 벼슬없이 도리를
다하며 살겠습니다"
끝내 권경희가
아내를 버리지 않자, 대간들은 그의 벼슬을 빼앗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성종은 대간을 나무랐다.
"권경희가
공명을 바라지 않아 그 아내를 버리지 않았으니 이는
훌륭한 사람이다."
그래서 벼슬에서
밀려나지 않았는데 나중에야 그의 처가가 한미한 집안이
아님이 밝혀졌다.
하늘이 복을 주지 않으면
원망할 게 아니라 내 덕을 후하게 하고
하늘이 나에게 재앙을 내려도 나는 나의 도리를 다하면 하늘인들
어떻게 하겠는가?
공직자들은
옛 관료 권경희의 사회윤리와 사나이 다운 기개를
배워야 할것이다.
권경희(權景禧)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성(子盛)ㆍ자번(子繁).
집지(執智)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화(永和)이고, 아버지는 판관 질(耋)이며,
어머니는 우참찬이승손(李承孫)의 딸이다.
1468년(세조 14)
사마시에 합격하고, 1478년(성종 9) 친시문과에 장원하여
이듬해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이어 수찬ㆍ공조좌랑ㆍ호조정랑을 거쳐
1485년에는 경상도진휼사의 종사관으로 파견되어 재민구휼(災民救恤 : 재난을 입은
백성들을 구제함)에 진력하였다.
1488년 장령이 되어
군적(軍籍) 편성 때 부자가 같은 곳에 입역하도록
할 것을 건의하였다.
1491년 동부승지ㆍ우승지ㆍ좌승지를 지내고,
1493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동지중추부사ㆍ우윤을 거쳐 1495년(연산군 1)
예조참판이 되었으며, 그 해 정조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대사헌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