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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7일(주일) 예산수정교회 주일설교 고린도후서 11:16~33 ‘귀담아 들어야 할 바울의 자랑'
새찬송가 407장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오늘은 고린도후서 11:16~33절 본문을 중심으로 ‘바울의 자랑’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 나누기를 원합니다. 5월은 가정의 달인데, 특별히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그래서 참고적으로 ‘어린이 주일의 유래’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에는 어린이의 고귀함과 그들에 대한 마땅한 대우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하나님의 축복이자 선물이며(시 127:3-5), 하나님의 피조물이자 영원한 생명체이며(롬 11:36), 구속의 대상이자 천국 시민의 그림자이며(막 10:13-16), 가정과 사회와 국가의 기초가 됨(마 7:24)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어린이들은 신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 약자인 동시에 진지함과 순수함을 갖춘 인격의 주체이기도 하며 그들에게는 내일의 역사가 달려 있으므로 바르게 교육해야 할 대상임에 분명합니다. 이에 몇몇 선각자들은 세계 각 지역의 교회를 중심으로 어린이 주일을 정하였으며, 1870년 미국의 한 조합 교회에서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예배당을 꽃으로 장식하고 '샤론의 꽃, 어린이'라는 제목으로 어린이 예배를 드린 데에서 유래하여 어린이 주일을 다른 말로 '꽃주일'이라고도 불립니다. 어린이 주일은 어린이들의 가능성과 꿈을 존중하는 미국에서 가장 먼저 실시되었습니다. 즉 1856년 미국 메사추세츠주의 레오날드 목사가 6월 둘째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지킨 이래 1868년 미국 감리교회에서 이날을 기념일로 정했으며, 1883년에는 미국 전역에서 이날을 어린이 주일로 지키는 것으로 확산되었으며 오늘날에도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여러 나라들은 일반적으로 6월 둘째 주를 어린이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처럼 6월 둘째 주가 어린이 주일로 결정된 것은, 일년 중 꽃이 만발한 가장 아름다운 이 시기가 푸르고 아름다운 어린이들의 이미지와 가장 잘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초창기에는 6월 둘째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지켜 오다가 1956년 5월 첫째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변경하였습니다. 이는 1946년부터 지켜오던 5월 5일 어린이날과 근접해 있을 뿐 아니라 어린이 주일의 근본 취지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우리 가정의 자녀들과 가정을 위해서 특별히 기도하는 한 달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정을 위한 기도] 1.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하나님 아버지 모심으로 믿음의 반석 든든하게 하소서. 2. 온 가족이 한 상에 둘러앉아 먹고 마시듯, 희노애락(喜怒哀樂)도 함께 하는 가정되게 하소서. 3. 우리 가정이 배움터, 쉼터, 놀이터가 되게 하소서. 4. 서로 사랑하고 감사하는 가정되게 하소서. 5. 예의와 관계, 자기 통찰과 문제 해결 능력을 배우는 가정되게 하소서. 6. 악하고 더러운 세상 문화로부터 보호받고, 위험으로부터도 막아주소서. 7. 온 가족이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고, 노아처럼 세상에 물들지 않으며,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가문을 만들고, 이삭처럼 순종하며, 야곱처럼 성실하고, 요셉처럼 꿈을 꾸며, 모세처럼 리더십이 있고, 여호수아처럼 팔로워십이 있으며, 다윗처럼 순진하고, 솔로몬처럼 지혜로우며, 다니엘처럼 뜻을 정하여 끝까지 신실한 가족 되게 하소서. 8. 온 가족이 한 교회를 충성되게 잘 섬기게 하소서. [출처] 가정을 위한 기도문|작성자 등경 위의 등불
이제 어린이날과 가정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하고 오늘 본문 말씀을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세상에서 자랑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다섯 명의 프랑스 작가가 쓴 희곡집 “다섯 손가락 이야기”를 보면 다섯 손가락의 특징을 들면서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인간의 본능을 꼬집고 있습니다. 다섯 손가락이 함께 사이좋게 지내고 있는데, 어느 날 첫째 손가락이 “얘들아, 내가 엄지니까 최고야.”라고 자랑을 했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둘째 손가락이 “무슨 말이야, 무언가를 가리킬 때는 내가 제일 많이 사용된다.”며 자랑을 합니다. 그러자 셋째 손가락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손가락들을 쳐다보며 “우리 중에 내가 제일 크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니 넷째 손가락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약혼이나 결혼 같은 귀중한 사랑을 서약할 때 내 손가락을 사용하는 것 알지?”라고 잘난 체했습니다. 마지막 남은 다섯째 손가락은 내놓을 자랑거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손가락이 당당히 큰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없으면 장애인이다.” 이 다섯 손가락 이야기가 우리 인간의 본능을 잘 표현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할 수만 있으면 자기를 홍보하고, 자기를 선전하고, 자기를 자랑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랑의 특징은 대부분 자기의 특기나 취미, 그리고 자기가 이루어놓은 업적, 등과 같은 장점을 내용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단점을 자랑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만약 자기의 단점이나 부족함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신 나간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난 후 세상의 자랑은 헛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자랑이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데 가장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살펴볼 신앙의 모범인 바울의 자랑은 세상의 자랑과는 정반대의 자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바울의 자랑을 귀기울여 담아 들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일반상식을 뛰어넘어 장점이 아닌 단점을, 자기의 업적이 아닌 핸디캡을 자랑했습니다. 원래 바울에게 자랑거리가 많았습니다. 그는 예수 믿기 전에 출세의 탄탄대로를 걷던 사람입니다. 남부러울 것이 없는 환경 속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빌 3:5-6절에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라.”고 했고, 또 행 22:3절에서는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히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자랑하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자랑할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적인 것을 자랑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귀기울여 들어야 할 바울의 자랑은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바울의 자랑은 구원을 위한 육체의 자랑입니다(16~20절).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교회를 위협하는 거짓 교사들의 위험성을 알리고자 스스로 어리석은 자가 되어 자신을 자랑합니다. 16~18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너무도 쉽게 거짓 사도들의 허탄한 자랑에 넘어가 복음에서 멀어지고 신앙에서 멀어지는 상황을 보면서 자신 또한 바보 같은 자랑을 합니다. 이렇게 하는 바울의 목적은 대적자들의 자랑과는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거짓 사도들은 스스로를 높여 교회를 자신들의 종으로 삼거나 빼앗고자 했습니다. 자랑의 목적이 아주 사탄적이지요. 교회를 자신들의 원하는대로 지배하고 무너뜨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종인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육체를 따라 자랑하는 이유가 바로 고린도 교인들의 구원과 고린도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 였습니다. 거짓교사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자랑했지만, 바울은 구원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자랑합니다. 로마서 15:2에는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교회에 덕을 세우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덕을 세움’의 원래 의미는 집이나 어떤 영적 건물을 세우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미덕이 있다는 것은 공동체가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성전을 건축하는 일은 사랑, 용서, 섬김 등의 미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교회를 든든히 세우는 일은 바로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섬기고 함께 동참하는 교회의 덕을 세우는 데 있습니다. 또한 교회의 덕을 세우려면 자신이 받은 은사대로 활용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10에는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합니다. 우리의 영적 은사는 우리 자신이 아닌 교회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주어졌습니다. 모든 은사는 교회에 유익을 주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자랑을 영혼구원과 교회의 덕을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어떤 책에는 이 세상에서만 할 수 있는 7가지 일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원수를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믿음으로 살고 보이는 것으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세째는 유혹을 견디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보화를 천국에 쌓아두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과 복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곱째는 우리의 영적 은사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영적 은사를 이 땅에서 다 사용하세요.
적용) 나의 자랑은 스스로를 높이고 세상 유익을 위한 것입니까? 영혼 구원과 교회 공동체의 덕을 위한 것입니까?
둘째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바울의 자랑은 복음을 고난의 자랑입니다(21~27절). 바울은 자신의 신분과 자기가 겪는 고난을 자랑합니다. 먼저 바울은 자신의 신분을 드러냅니다. 바울은 유대인에 비해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 신분적 배경을 갖고 있었습니다. 21,2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또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누구보다 많은 박해를 받고 고난을 겪었음을 드러냅니다. 바울은 복음 때문에 옥에 갇히고, 매도 맞고, 전도여행을 하면서 강과 강도와 바다의 위험을 겪었으며, 굶주리고 춥고 헐벗었다고 고백합니다. 23절에서 27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이런 일들을 기꺼이 감당한 것은 오직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위하는 바울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성도에게 복음이 전부가 될 때 그 어떤 고난도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 때문이라면 밝히고 싶지 않은 나의 신분도 기꺼이 밝혔습니다. 그리고 입밖으로 꺼내고 싶지 않은 박해와 고난의 경험도 고백했습니다. 바울처럼 때로는 옥에 갇히고 매 맞고 굶주리고 헐벗었던 내 고난을 복음 전파를 위하여 꺼낼 때, 그 수치는 다른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약재료가 됩니다. 예수님도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해 막대한 손해도 감내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8장 28절 이하에서 귀신 들린자 둘을 구하려고 돼지 떼에 귀신이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돼지 떼 안으로 들어간 귀신은 돼지떼로 하여금 바라로 들어가도록 했고, 그 순간 돼지 떼는 몰살 당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한 영혼의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고백으로 한 영혼을 살릴 수 있는 약재료가 된다면 그것도 감내해야 합니다. 그 어떤 경제적 가치도 영혼 회복의 가치와는 비교할 수 없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영혼 구원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결코 이해타산적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계산기를 두드리는 순간, 영혼을 구원해 하나님 나라 확장을 실현하겠다는 비전을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같이 영혼구원의 가치를 정확히 안다면 어떤 경제적 손실이나 나의 수치스런 고백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기꺼이 감내할 수 있는 믿음의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적용) 내가 복음 때문에,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당한 박해와 고난은 무엇입니까? “또 복음을 전하기 위해 꺼내어 말해야 하는 나의 수치는 무엇입니까?
세째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바울의 자랑은 약한 때 강함되시는 주님에 대한 자랑입니다(28~33절). 바울은 외적으로 고난을 당할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가졌던 마음의 눌림과 염려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눌림이 있다고 합니다. 이는 고린도교인들의 연약함을 걱정하는 영적 아비로서의 부담감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지체들이 처한 상황이 때로는 그를 약하게 만들었고, 때로는 그의 마음을 애타게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당한 고난 뿐 아니라 교회 지체들의 약함까지 함께 짊어지는 모든 일을 자랑합니다. 28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바울이 이런 고생을 한 것은 바로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영적 부담감을 가진 바울은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알기에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자랑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자랑합니다. 29,3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누가 약하면 내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시대를 초월하여 변치 않는 미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강함’입니다. 학벌, 재력, 외모, 가문, 인맥 등 강함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자랑스러움과 부러움과 숭상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덕담으로 ‘힘을 키우라’고 말하고, 또 ‘실력을 키워서 강해지라’고 격려합니다. 반면 ‘약함’은 부끄럽고 불편하며 그래서 언제나 감추고 싶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마디로 강해지길 소원합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겸손하기를,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구하지만 그 전제 조건 역시 ‘강하게 되어서’일 때가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신앙인들이 하나님도 강한 사람을 들어서 일하시고, 이를 통해 영광 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이렇게 강한 사람의 표상이 될 만한 인물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냐민 지파 출신의 사도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이전 이름을 사울이죠)은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진 특권층이었고 학문적으로도 당시 최고의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운 매우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화려한 스펙에 더하여 극적인 다메섹 도상의 회심의 간증 스토리까지 갖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누구도 갖지 못한 삼층천의 영적인 체험까지 그에게 더하여 주셨습니다. 이 때문에 이제 바울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 받는 일만 남은 듯 보였습니다. 이제 간증하면서 세상을 누비고 다니는 간증자로 쓰임받고 많은 사람들이 은혜받으며 구원으로 인도될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울을 들어 쓰기 전에 그에게 너무 자만하지 말라고 육체의 가시를 주셨습니다(고후 12:7) 여기서 ‘가시’라는 표현은 날카로운 창이나 단단한 말뚝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육체의 가시로 인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고, 하나님께 그 약함이 사라지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매달리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가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고후 12:9). 이것은 그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선택하셔서, 바울의 약함을 무릅쓰고도 사용하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바울의 육체적 가시와 같은 약함 때문에, 그 약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과 함께 일함에 있어서 약함은 소극적인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선택의 요인이 된다고 말씀십니다. 이로 인해 바울은 자신의 육체의 가시 즉 자신의 약함을 크게 기뻐하고 그것을 자랑하는 사람으로 완전해 변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기에게 계속 머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의 약함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고후 12장 9절 하반절~10절)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바울은 오늘 본문 30절 말씀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자기가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을 위해 자기가 수고한 업적을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그 가운데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였는지를 자랑합니다. 그것은 약한 나를 통해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주님의 강하심을 자랑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불렀던 복음성가 [약할 때 강함되시네] 찬양을 함께 불러볼까요? (1절) 약할때 강함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주 주나의 모든 것 주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할수 없네 주나의 모든 것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2절) 십자가 죄 사하셨네 주님의 이름 찬양해 주나의 모든 것 쓰러진 나를 세우고 나의 빈 잔을 채우네 주나의 모든 것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바울과 같이 이런 영적 부담감을 가진 성도는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알기에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자랑합니다. 그럴 때 주님이 역사하셔서 강함을 드러내 주십니다. 할렐루야~ 이런 체험들이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적용) 나는 나의 강함을 자랑합니까? 주님의 강하심을 자랑합니까? 생각날 때마다 마음이 약해져 애타는 심령으로 기도하게 되는 지체는 누구입니까?
[큐티인 간증] 내가 제일 잘났어
적용1) 아버지에 대한 상처로 힘들어하는 직장동료에게 제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적용2) 교회 소그룹 모임에서 나의 의를 자랑하지 않고 나의 연약함과 수치를 나누겠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일꾼 바울의 자랑이 우리의 자랑이 되기를 원합니다. 스스로를 높이려는 자기의 의의 자랑을 끊고 이제는 복음과 구원을 위해서 자랑하며, 그를 위해서 나의 약함과 수치도 기꺼이 내려놓고 간증할 수 있는 그런 자로 우리를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때 주님께서 강함을 드러내시며 우리를 연약함 중에도 사용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