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安東都護府. 西去柳城郡二百七十里,管兵八千五百人,馬七百疋.[通典]
안동도호부는 서로가면 유성군에서 270리 거리에 있고 영병은 8500명에 말은 700필이다.
b) 초기 안동도호부를 설명하는 사료들.
▶②北蕃地理志曰, 興中府在中京東三百里, 北至潢水四百里契丹界, 西北松陘嶺奚界, 西南至建州六百里, 東至遼河三百里, 東北至白川州七十里, 東南至安東都護府二百七十里. 興中縣本漢柳城縣地.[遼史拾遺卷十三 志第二]
북번지리지에서 말하길 흥중부는 중경에서 동으로 300리이고 북으로 황수에 접하는데 거란의 경계이다. 북서로 송경령 해의 접경이다.서남으로 건주 600리이며 동으로 요하 300리,동북으로 백천주 70리 ,동남으로 안동도호부270리,흥중현은 본시 한나라 유성현이었다.
▶ ④興中府, 營州地. 漢末烏桓鮮卑所居. 唐平盧軍節度使治所. 今號興中府. 東至遼河三百里, 西至中京三百里, 西南至建州六十里, 北至湟水四百里(舊契丹界). 西北至松徑嶺百里(舊奚界). 東南至安東都護府二百七十里, 號平壤城. 東北至白川州七十里.[武經總要前集 卷十六下 宋曽公亮等撰 邊防 北番地]
흥중부(興中府)는 영주 땅이다. 한말에 오환과 선비가 거주하였다. 당의 평로군절도사(平盧軍節度使)의 치소였다. 지금은 흥중부(興中府)라 한다. 동쪽으로 요하까지 3백리이다. 서쪽으로 중경까지 3백리이며, 서남으로 건주까지 60리이며, 북으로 황수(湟水)까지 4백리이며, 서북으로 송경령(松徑嶺)까지 1백리이며, 동남으로 안동도호부까지 270리인데, 평양성이라 한다. 동북으로 백천주(白川州)까지 70리이다.
첫번째 그림에서 중심이 흥중부로 되면서 요하와 안동도독부가 동쪽에서 300리 이내로 위치하는 반면에 서쪽으로 중경이 중흥부와 300리 떨어져 있으며 동서가 대칭이되고 있고,건주에 대한 서술이 60리와 600리 로 나뉘어져 거리상 10배 차이이다.
宋白曰, 營州東南二百七十里有保定軍舊安東都護府.[資治通鑑 胡三省注]라지만 요사지리지에서 建州에 保精軍이 있다하는데 保定軍과 같은것 아닐까?
무경총요와 요사지리지의 기술과 조금 틀리지만 요사지리지상 중경 서남에 건주가 보이는데 서쪽 방향은 어느정도 일치한다고 볼수있고 .흥중부 동에 요하가 300리 거리에있고 동남 270리엔 안동도독부가 위치한다.
c)후기 안동도호부를 설명한것으로 보이는 사료들.
▶⑥柳城郡東至遼河四百八十里. 南至海二百六十里. 西至北平郡七百里. 北至契丹界五十里. 東南到安東府二百七十里.[通典]
유성군 동에 요하가 480리지점에있고 남으로 바다에 260리거리이며 서로 북평군으로 700리 ,북으로 거란의 경계인데 50리,동남에 이르면 안동도호부 270리이다.
▶⑦高宗總章元年, 置安東都護府於平壤城. 上元元年, 徙遼東郡故城. 儀鳯二年, 又徙新城. 開元二年, 徙平州. 天寶二年, 徙遼西故郡城. 疑此時已徙平州. 宋白曰, 營州東南二百七十里有保定軍舊安東都護府.[資治通鑑卷二百五 唐紀二十一 胡三省注]
고종 총장원년.평양성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상원원년 요동군고성으로 옮겼다.의봉2년 다시 신성으로 옮기고 개원2년 평주로 옮기고 천보2년 요서의 고군성으로 옮겼는데 아마도 平州일것이다.송백이 말하길 영주 동남 270리에 옛 안동도호부인 보정군이 있다.
▶⑧柳城 四至八到 : ... 東至遼河(闕), 南至海三百四十里, 西至平州七百里, 北至秦長城二百七十里, 至契丹界濕水四百里, 東南至保定軍, 舊安東都護二百七十里, 西南至平州七百里.[太平寰宇記卷七十一 河北道二十]
유성은 동으로 요하, 남으로 340리에 바다가 있고,서로 평주 700리,북으로 진장성 270리, 거란의 경계 습수가 400리,동남으로 보정군 구 안동도호부가 270리,서남으로 평주 700리이다.
▶ 그러나 요사지리지에서 중경의 柳城을 보면
成州,
興府軍,節度。晉國長公主以媵戶置,軍曰長慶,隸上京。復改軍名。統縣一:同昌縣。
興中府。
本霸州彰武軍,節度。古孤竹國。漢柳城縣地。(중략) 元魏取為遼西邵。隨平高保寧,置營州。煬帝廢州置柳城郡。唐武德初,改營州總管府,尋為都督府。(중략): 興中縣。本漢柳城縣地。(중략)
開泰二年以羅家軍置。隸中京,後屬。
安德州,
化平軍,下,刺史。以霸州安德縣置,來屬。統縣一:安德縣。
統和八年析霸城東南龍山徒河境戶置。初隸乾州,更屬霸州,置州來屬。
바로 요나라 興中府가 바로 營州이고 柳城이다.
위의 지리비정에서 안동도호부를 설명하는 글은 4개의 글중에서 2,4,6,8번 글에대하여 검토를 해야한다고본다.내용을 보면 2,4번 내용과 6,8번의 내용이 다르다 아마도 시간이 흐른후에 영토 변경을 기술한것으로보고 당이 668년에 정하였던 그것이 아니라고 본다.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것은 고구려 영토라서 수나라가 보지도 못한 북평군을 평주라고 했다하니 실소를 금치못하는 내용이고 결국 그들의 지리지는 대부분이 점유하지 못한 지역을 그들의 영토로 집어넣은것이다.
- 安德府
훗날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를 요나라가 멸망시키면서 고구려의 핵심 강역을 모두 차지했다. 요나라는 옛 왕검성(평양성)이 있던 지역에 부를 설치했는데, 그 명칭이 ‘안덕부(安德府)’이다.
(위 추리도의 흥중부 아래 유주 오른편에 안덕부가 있다-운영자 )
요나라에서 설치한 ‘안덕부’는 말할 것도 없이 고조선으로 부터 내려오던 ‘안덕향’이란 지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요나라의 ‘안덕부’는 「왕검성 ‧ 평양성 ‧ 안시성」이 있던 지역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현재는 그 일대가 ‘安德’이 아닌 ‘승덕(承德)’과 ‘승덕시’라는 지명으로 바뀌어 있으니 결국 ‘승덕’이라는 이름도 고대 ‘안덕향’에서 유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안시성은 옛 안촌홀이며 환도성(丸都城)이라고도 한다.” “安市城舊安村忽 或丸云都城” (인용글)
문제의 핵심은 기준점인 遼水이고 이는 어느시대 기록에서 든지 동쪽 300리에 위치하였다.
검토가 필요하지만 만약 永定河로 비정한다면
상류를 기점으로 한다면 산서와 가까운 현 북경근처 좌편 아래(보정.신성)에 안동도호부가 있을것이고
하류를 기준으로 한다면 북경 남부 안차 고안 지역등이 될것이다.
따라서 고조선의 수도이자 고구려의 평양성은 지형상 북경평야의 북부지역(북경북부 회유남,창려,영평은 고조선 당시 해중이거나 개펄이었다)에 있어야하고 압록수(羊河 추정)에서 동남으로 1000여리 떨어진 지역이어야 한다.
심제.
첫댓글 고구려의 수도 평양에 668년 설치된 안동도호부가 어찌하여 후기에는 예상하지도 않은 현 천진부근 발해만 연안지역(중국 역사지리학 거두)이라고 표기한 것은 아주 의미심장하다. 80년대 국사책에서는 단지 요동지역으로 옮겼다고 만 배웠는데? 안동도호부 지역내에 石城(대청광여도)이라는 지명이 존재하는 것은 671년 신라와 당의 전투지역 『삼국사기』卷第七 新羅本紀 第七 文武王 十一年 夏六月 遂與唐兵戰於石城斬首五千三百級獲百濟將軍二人唐果毅六人. 그리고 676년(十五年) 秋九月二十九日 李謹行率兵二十萬屯買肖城我軍撃走之得戰馬三萬三百八十匹其餘兵仗稱是. 羅唐의 최후의 전투지 매초성의 위치를 찾는 단초가 될 것이다.
중국 사서를 읽을 때,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올바른 지명을 찾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위사를 삽입시켜놨기 때문입니다.
특히 지명의 경우 위치 변이를 위해 거리 수치를 삽입시켰지요. 고지도는 몽땅 명 대 초에 제작된 것이지요. 우적도도...
예, 맞습니다. 지명이동이 되지않은 사서정보로 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