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인물 탐구 - 한명회, 이징옥, 이시애
■ 송도 계원에도 들지 못한 한명회
한명회(韓明澮, 1415~1487)는 조선전기 계유정난의 설계자로서, 성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한명회는 또한 두 딸을 예종과 성종에 들이면서 왕의 장인으로서, 지략으로 당대 권력의 정점에 위치하였다. 그는 만년에 한강변에 압구정을 지었다. 한명회는 과연 말년을 갈매기와 함께 보내려고 했을까? 한명회의 본관은 청주이다. 젊었을 적에 불우하게 살았으며 4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개성의 경덕궁 문지기가 되었다.
명절을 맞아 관료들은 만월대에 모여 유쾌하게 놀았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모두들 언약하기를 "우리들은 모두 남쪽에서 이곳 개성으로 와서 벼슬하게 된 고향 친구들이다. 오늘 우리는 계모임을 만들어서 영원한 우의를 다지자!"고 하였다.
외로움을 느낀 한명회도 이 계모임에 넣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였지만 모두들 흘깃흘깃 쳐다보기만 하고 허락해 주지 않았다. 한명회를 무시했기 때문에 끼워 주지 않은 것이다.
그 이듬해가 되자 세상이 바뀌었다. 계유정난 때 세조를 도와 공을 세운 한명회는 일등 공신에 녹훈되었을 뿐 아니라 부원군이 되어 그 권세가 막강하게 되었는데 지난날의 송도 계원들은 모두 힘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하여 조그만 세력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자를 일컬어 '송도 계원'이라고 부르는 말이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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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랑캐들을 벌벌 떨게 한 이징옥
이징옥(?~1453)의 본관은 양산이다.
형 이징석은 18세, 징옥은 14세 때의 일이다. 어머니가 두 아들에게 산돼지가 보고 싶다고 하였다. 두 아들은 집을 떠났다. 형 징석은 산돼지를 잡아서 돌아왔고, 징옥은 이틀 뒤에 맨손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의아해 하며 이징옥에게 물었다.
"사람들의 말이 형의 용맹이 너보다 못하다고들 하는데 어찌하여 너의 형은 돼지 한 마리를 잡아왔는데 너는 이틀 후에 오면서 빈 몸으로 왔느냐?"
"어머니 문 밖을 보십시오"
어머니가 문 밖으로 나가 보니 마당에 큰 산돼지 한 마리가 누워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징옥은 어머니가 산 산돼지를 보고 싶어할 것이라 생각하고 밤낮으로 추격하여 그 돼지가 기진맥진했을 때를 기다려 사로잡아 온 것이다.
언젠가 이징옥은 길을 가다가 슬피 우는 젊은 부인을 만났다. 징옥이 그 까닭을 물었다.
"저의 남편이 호랑이에게 물려 갔습니다. 그 호랑이가 지금 대밭 속에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징옥은 팔을 걷어붙이고 즉시 대밭으로 들어갔다. 칼로 호랑이 배를 갈라 보니 고기가 아직 소화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징옥은 그 고기를 보자기에 싸서 부인에게 주었다. 부인은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하였다. 이징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이징옥의 아내가 집안의 가난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기를 원했으므로 이징옥은 억지로 붙들지 않고 가게 내버려 두었다. 뒤에 이징옥이 영남 절도사가 되었는데 그때 그의 아내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 지 오랜 뒤였다. 이징옥은 사냥해서 얻은 수백 마리의 짐승을 시집간 아내 집으로 보내 주었다.
이징옥의 무용은 따를 사람이 없었으므로 중국인이나 오랑캐들이 모두 겁을 내었다. 그는 육진을 설치하는 데 큰 공을 세워 김종서에게 극진한 사랑을 받았다. 김종서가 죽음을 당하고 세조가 왕위에 올랐을 때 이징옥은 함길도 절제사로 있었다. 이징옥을 제거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세조는 이징옥에게 서울에서 내려간 박호문에게 절제사의 자리를 넘겨 주고 서울로 돌아오라는 명을 보냈다. 박호문에게 절제사의 자리를 넘겨준 이튿날 이징옥은 생각했다.
'절제사는 무거운 책임이 있는 자리인데 박호문이 소문도 없이 갑자기 와서 그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는 즉시 절제사가 있는 경성으로 달려갔다. 그는 박호문에게, 상의할 일이 있으니 만나자고 불러낸 뒤에 그가 나오자마자 쳐서 죽이고 자기의 부하들을 모아 남쪽으로 향하였다.
"이제 강을 건너가 내가 대금황제가 되면 만족하겠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그 이튿날 행군을 하기로 하였다. 이때 판관 정종이 이징옥을 죽이려고 사람을 지붕 위에 매복시켜 두었다. 밤이 되어 이징옥이 의자에 앉아 잠깐 졸고 있는데 의자 밑에 있던 이징옥의 아들이 갑자기 말하였다.
"꿈에 아버지가 머리에서 피를 흘려 그 피가 다리에까지 흘러 내려 왔습니다"
그 말을 듣고 이징옥은 그것은 좋은 징조라고 말하였는데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종이 군사들을 데리고 돌진해 들어왔다. 이징옥이 그들과 싸워 수십 명을 죽이고 그 자신도 화살에 맞아 죽었다. 그때 그의 나이 24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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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인계를 써서 반란을 일으킨 이시애
이시애(?~1467)의 본관은 길주이고, 벼슬은 회령부사에 이르렀다. 그는 동생 이시합과 함께 반역을 도모했다. 함길도 절도사 강효문이 길주에 도착하자 이시합은 길주의 관기로 있는 자신의 첩 소생 딸을 절도사의 침실에 들여보내어 수청을 들도록 하고 잠긴 문을 안에서 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그 문으로 들어온 반란군들에 의하여 절도사 강효문은 피살되었고, 이시애는 길주를 발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세조는 귀성군 이준을 도총사로 삼고 조석문을 부총사로 삼았다. 귀성군 이준은 겨우 18세였지만 무술과 전략이 있다는 이유였다. 또 허종을 함길도 절도사로 삼고 강순과 어유소를 각각 대장으로 삼아 이시애 난의 토벌에 나섰다.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여러 고을에서 수령을 살해하고 반란군에게 호응하는 일이 일어났다. 함흥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관청을 포위하고 관찰사 신면을 공격하였는데, 신면은 누각에 올라가 방어하다가 힘이 달려 끝내 피살되고 말았다.
조정에서는 관서지방 출신으로 벼슬이 2품에 오른 단천 사람 최윤손을 불러 효유사로 임명하고 함길도로 내려보냈다. 효유사의 임무는 반란군을 회유하고 그곳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있었다. 그런데 막중한 임무를 띠고 내려간 최윤손이 반란군의 편이 되어 조정의 비밀을 그들에게 넘겨주는 불행한 사태가 일어났다.
강순과 허종이 거느리는 관군은 홍원에서 그들과 격전을 벌이고 또 북청과 만령에서도 크게 싸웠다. 반란군은 높은 지역으로 달아나 진을 치고 화살을 비오듯 쏘아 대었으므로 관군이 접근할 수 없었다.
토벌 좌장군 어유소는 작전을 바꾸었다. 정예병을 뽑아 작은 배에 나눠 태우고 풀색, 나무색으로 물들인 옷을 입혀서 보냈다. 그들은 해안을 통해 상륙하여 나뭇가지를 잡고 그들이 있는 곳보다 훨씬
높은 곳을 택하여 그들의 등뒤에서 징을 치고 북을 두드려 소란을 피우도록 작전을 짰다.
등뒤 높은 곳에서 갑자기 북소리와 징소리가 요란하게 나자 적들은 깜짝 놀라 대오가 흐트러지고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이때 뒤따라 도착한 관군의 대부대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머리에 방패를 이고 개미떼처럼 언덕을 기어오르니, 반란군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진용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시애는 급하게 길주로 도망하였다. 그는 가족과 살림을 꾸려 오랑캐 땅으로 도망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길주 사람 허유례가 적장의 부하 이주 등을 꾀어 이시애와 이시합을 생포하도록 하였다.
그들의 머리는 진중에서 끊어져 서울로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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