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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믿음의 실상 2:14~19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산 믿음의 실상 2:20~26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3 이에 성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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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헐벗고 양식이 없는 형제자매에게 필요한 것을 주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무익합니다. 하나님을 믿은 아브라함과 라합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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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2:14∼20)
성도의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구원에 대한 감격으로 선을 행합니다.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아는 만큼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도 행함이 따르지 않는다면 아직 구원의 감격을 제대로 체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형제자매가 헐벗고 주리면 도와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형제자매의 어려운 형편을 보고도 구체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십자가의 가르침을
욕되게 하는 것이며 죽은 믿음에 불과합니다. 그 믿음으로는 능히 자신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을 진실로 알고 믿는 사람은
그 사랑을 행동으로 나타냅니다.
- 묵상 질문: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 적용 질문: 형제자매의 어려움을 돕는 데 주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행함으로 온전해지는 믿음(2:21∼26)
믿음과 행함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한 속량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이로써 죄인인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롬 3:21~28).
야고보가 말한 행함은 예수님의 속량을 믿고 이에 대한 감사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때에도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21절).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이삭을 제단에 바쳤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행동이 일치하고, 그 행동으로 믿음을 보였기에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고 여겨 주셨습니다. 기생 라합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정탐꾼들을 보호해 주었기에,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온전해지고 선한 열매를 맺습니다.
- 묵상 질문: ‘의롭다 하심’을 받은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행했나요?
- 적용 질문: 믿음대로 행하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 우선 실천할 일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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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14~26절
신앙과 행위의 일치는 하나님 말씀을 일상에 적용함으로 가능하다. 야고보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빈부 차이로 발생하는 차별과 위선이다. 형제나 자매가 먹을 것이 없고 의복이 없는데 그들에게 평안히 가라고 말하는 것은 위선적 신앙이고, 그 믿음은 거짓이다. 이는 예수님이 주신 사랑의 율법을 위반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형제와 자매의 궁핍과 고통에 민감해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종교적 위선이다. 예수님은 위선적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이라고 강하게 질책하셨다.(마태복음 23:27-28) 신앙과 행위의 일치는 야고보서 신학의 정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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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고 함을 받습니다. 행위는 분명히 은혜의 근거가 아닙니다. 하지만 행위는 은혜와 믿음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우리를 선한 행동으로 이끌어 가기 때문에, 우리는 듣기만 하고, 말로만 생색을 내는 것이 아니라 선한 행동으로 믿음을 고백합니다. 야고보는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행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은혜로부터 나오는 순종의 삶을 살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되돌아볼 때 우리의 연약함과 불순종한 모습을 볼 때 좌절하게 됩니다.
러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회개하고 성령을 의지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순종하는 행동입니다. 머리로 알고 말로만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력 있는 순종의 첫걸음을 시작해야 합니다. 생명력 있는 순종은 씨를 뿌려 싹이 나고 성장하여 열매를 맺는 것을 보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의 분량대로 순종의 기쁨을 행함으로 누려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는 불신자와 같은 삶을 거부하여 참된 믿음의 결과로 나타나는 행함의 기쁨을 일상의 삶 속에서 풍성히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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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새 생명을 얻은 새 언약 백성은 그 마음에 진리의 말씀이 심긴 사람들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결코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되고 최고의 법, 사랑과 긍휼의 법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어서 진정한 믿음, 진정한 경건은 반드시 그 말씀에 순종하여 실천하는 행동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교회의 형제들을 향해, 믿음이 있다고 말을 하면서도 행하지 않으면 유익이 없다고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유익 없다’는 것은 ‘구원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음으로 새 언약 백성이 되어 마음에 말씀이 심긴 성도는 반드시 그 믿음이 마음을 변화시키고 마음의 변화는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당장 입을 옷이 없고 먹을 음식이 없는 사람에게 “평안하십시오. 몸을 따뜻하게 하십시오. 배부르게 드십시오.”라고 말하면서도 몸에 필요한 것을 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행동으로 열매 맺지 않는 믿음은 그 자체로 죽은 믿음입니다(약 2:14-17).
야고보 사도는 어떤 사람이 “당신은 믿음이 있다고 하고, 나에게는 행동으로 실천한 일이 있습니다.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 당신의 믿음을 나에게 보여주십시오. 나는 내가 실천한 행동으로 내 믿음을 당신에게 증명하겠습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을 예로 들면서, 믿음에는 반드시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어서 야고보 사도는 ‘귀신들의 믿음’을 예로 듭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는다고 신앙고백을 하며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은 믿고, 그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워 떱니다. 그러나 귀신들은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지 않고 의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믿음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그들을 결코 구원할 수 없습니다(약 2:18-19).
야고보 사도는 믿음이 있어야 믿음으로부터 나온 행동이 뒤따르고,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진정한 믿음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야고보는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믿음이 헛되다는 것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인 이삭을 제단에 바쳤을 때, 그 행동으로 인해 하나님께 의인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믿음으로 행동으로 나타났고, 그 행동으로 인해 믿음이 온전해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뢰할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인으로 여겨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 믿음을 행동으로 보여드렸을 때, 하나님은 그를 의인으로 인정해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믿으니 이 일을 의롭게 여기셨다”는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졌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런 사실은 사람이 단지 믿음만으로는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았는지 확증할 수 없고, 그 살아있는 믿음에 행동이 뒤따를 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약 2:20-24).
또, 마찬가지로 여리고 성에 살던 기생 라합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하나님을 믿은 뒤, 믿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걸고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숨겨주고 도망칠 길을 안내해주었습니다. 라합이 믿음의 눈으로 정탐꾼들을 바라보고 그들을 대접했을 때, 하나님은 라합의 행동을 통해 그녀의 믿음을 보시고 의인으로 인정해주셨습니다.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약 2: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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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과 결과
우리의 삶 속에서 원인 없는 결과가 없고, 모든 일의 결과에는 원인이 반드시 존재합니다. 우리 속담에도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랴라는 말이 있는 것과 같이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반드시 존재합니다. 신앙 생활 속에도 원인이 되는 것이 있고 그 원인에 따른 결과가 반드시 존재합니다. 새가족이 믿음의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면, 그 믿음의 성장의 원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며 그 결과는 영생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는 믿음을 가진 성도의 삶의 열매, 즉 결과가 선행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행하는 여러 일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구체적으로 믿음을 가진 성도는 그 믿음의 결과로 선한 일, 선행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의 조건
왜 믿음을 가진 성도는 선행이라는 결과가 있어야만 할까요?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누구의 구원입니까? 자신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가진 믿음은 나를 구원하게 됩니다. 하지만 내 믿음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내 믿음에 따른 나의 행동이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내 믿음보다도 나의 착한 행동을 통하여 예수를 알게 되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라합
오늘 본문에는 믿음과 그에 따른 결과로 구원을 받은 두 사람이 나옵니다. 먼저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그 믿음을 기초로 하여 믿음의 행동을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와 같은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상속자가 종인 엘리에셀이라는 생각을 더이상 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실 아들을 인내하며 기다렸습니다. 또 본문의 21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야고보서 2: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고 믿음을 따라 행동했는데,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여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치려고까지 하였습니다. 이삭을 번제로 바치면 더이상 아들이 남지 않기 때문에 가문이 끊어질 수도 있겠지만, 수많은 자손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서 과감하게 순종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의롭다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입니다. 그녀는 여리고 성 전체가 이스라엘과 전쟁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상황 속에서, 여호수아가 보낸 두 정탐꾼을 숨겨 주었습니다. 두 정탐꾼을 숨겨 주는 상황 가운데 고백한 라합의 고백은 여호수아 2장 9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여호수아 2:9,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라합은 하나님께서 온 땅을 주관하시며 여리고를 비롯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주셨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기초로 정탐꾼을 숨겨 주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배반하는 것과 같은 행위였지만,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믿고 행동으로 그 믿음을 과감하게 옮겨, 자신과 가족들 모두를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였습니다. 이같은 라합의 행함에 대하여 본문 25절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2: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하나님을 믿었던 라합은 그 믿음의 결과로 정탐꾼들을 숨겨 주고 자신의 집의 창문으로 줄을 달아 탈출시키는 행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믿음은 선행을 가져 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순종한 것이나 라합이 정탐꾼들을 탈출시킨 행동은 모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는다고 말한다면, 곧 행동이라는 결과가 반드시 있어야 온전한 믿음이고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결론적으로 26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야고보서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우리의 믿음을 선한 행동을 함으로써 나타내는 오늘이 되길 바랍니다. 믿음으로 나를 살리고, 행함으로써 다른 이들을 살려 내어, 행함이 있는 살아 있는 믿음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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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14~26절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이는 삶❞
✔ 어떤 삶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까?
➲ 구체적인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14~17절).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는지(14절)묻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말은 하지만 정작 그런 사람들이 필요한 것을 주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17절)입니다. ]
사람들은 자신들의 입술을 통해서 고상하고, 품위 있고, 아름다운 말들을 하려고 합니다.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 이러한 행동이 신앙이 좋고, 나쁨을 가늠하는 척도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말하는 사람 앞에는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지체가 서 있는데 말이지요.. 행함이 없는 말들은 빈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아무런 유익과 위로를 주지 못합니다.
믿음의 말과 믿음의 행동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그 믿음이 구원을 가져다 줍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만 하지 말고, 묵묵히 믿음의 행동을 삶의 자리에서 보여 주어야 합니다. 믿음을 가졌다 하면서도 실천하지 않고 사는 이중적인 모습을 가진 내 자신을 꾸짖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구체적인 행동으로 믿음을 보여 주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행함으로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18~20절).
18절을 통해 야고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보이지 않는 믿음은 우리의 행함을 통해 입증이 된다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보이리라...’고 말하면서 믿음과 행함을 분리하여 설명하는 자에게 그 증거를 나타내 보이라고 호되게 질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행함은 믿음으로부터 온 열매입니다. 즉, 행함은 구원의 도구가 아니라 믿음의 증거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 요소는 된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귀신들도 하나님의 권위 앞에서 두려움을 보이기 때문(19절)입니다. 그러므로 ‘허탄한 사람’(20절)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라고 가르쳐도 끝까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허탄한 사람’입니다.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를 통해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내가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는 나의 삶을 통해 나타나는 것을 통해 증명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단순히 지적으로만 수긍하고 인정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곧 죽은 믿음입니다. 행함이 없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헛것 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바늘에 손가락을 찔리면 ‘아야’하고 반응이 나타나야 건강한 사람입니다. 건강한 믿음의 사람이란 그리고 진짜 믿음의 사람이란, 결과론적으로 행함으로 반응이 나타나는 사람입니다. ‘말쟁이’라는 평가보다 ‘행동 쟁이’라는 평가를 받도록 행함이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순종으로 믿음이 자라야 합니다(21~26절).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대로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는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과 행함이 결코 분리 되지 않았습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어느니라...’(22절). 야고보서의 주제성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모든 행위는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행함으로 이어질 때, 갑절의 은혜가 있고, 산 믿음이요, ‘하나님의 벗’라고 불리우는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23~24절). 기생 라합은 아브라함과 대조적인 여인입니다. 그녀는 이방인이고, 기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의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녀는 믿었고, 그 믿음이 행함과 연결되어 나왔다는 것입니다. 결국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 역시 죽은 것입니다(25~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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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많이 읽고, 많이 암송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물론,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는 꼬~옥~ 필요한 것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행함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그 모든 행위들이 헛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몸과 영혼이 하나인 것처럼 믿음과 행함 역시 하나임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순종하고 있음을 행함을 통해 들어 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믿음과 행함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굳이 앞면의 형상이 무어냐고 물으면 ‘믿음’이며, 그러므로 뒷면의 형상은 말하지 않아도 ‘행함’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말씀 앞에 온전한 순종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을 수 있기까지 내 자신의 신앙이 자라가도록 노력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믿음이 바탕이 된 행함을 통해 아름다운 삶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으로 살아갈 뿐만 아니라 말씀을 지식으로만 머리에 쌓아 두지 말고, 행함과 실천으로 진실하고 살아 있는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약 2:14~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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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4,20,26절
말과 행실이 다른 것이 ‘가장된 경건’이라면(1장 26,27절) 말만 하고 행함이 없는 것은 ‘거짓 믿음’입니다. 행함 없는 믿음은 부족하거나 연약한 것이 아니라 숫제 믿음이 아닙니다. 열매 없는 나무처럼 아무 유익이 없고, 숨 쉬지 않는 몸처럼 죽은 믿음일 뿐입니다. 믿음은 관념이 아닌 관계이고 신념이 아닌 신뢰이기에 거창한 이론이 아니라 진실한 행함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15~17절
평안을 기원하면서 헐벗은 지체의 필요에 눈감는 무정함을 지적합니다. 나누고 베풀지 않으면서 기도만 하는 이중성에 대한 질책입니다. 믿음과 행함처럼 기도와 삶도 분리될 수 없습니다. 기도한 대로 살아야 하고, 사는 만큼 기도할 수 있습니다. 말만 하고 사랑하지 않는 것이나, 기도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것은 선의를 가장한 위선일 뿐입니다. 말로 실천을 대신하면 죽은 언어이고 죽은 믿음입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위기를 넘길 수 있도록 어서 지체에게 손을 내미십시오.
18~20절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사람을 예로 들어, 행함과 믿음을 구분하려는 시도를 반박합니다. 믿음과 행함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순종으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의 방식’이라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닌, 자기 충족적 신념일 뿐입니다. 지적 동의나 감흥도 믿음이 아니며, 올바른 지식이 항상 올바른 삶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실천하지 않는 그 지식이 나와 남을 차별하는 교만한 도구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알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진리대로 살지 않는다면 그 믿음도, 인생도 허탄할 뿐입니다.
21~25절
아브라함과 라합은 행함으로 참 믿음을 보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외모(혈통, 신분, 성별 등)가 아닌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임을 입증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치라는 요구에도 주저 없이 순종하여 참 믿음을 입증했고, 라합은 목숨을 건 행함(여호수아 2장 11절)으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보였습니다. 이것이 구원 얻는 믿음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내 믿음의 산 증거는 무엇입니까?
새벽 근무후
퇴근하셔서 함께 동역하신 조은숙성도님 ,심지가 견고한 임혜영성도,주님의은혜에 감사가 넘치는 백성희성도 오늘 있어야할자리에서 승리했습니다~~
살전2:4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