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한 없이 가을을 마주하고 이제 떠나보낸다... 보령임운석 여행작가
손목에 찬 것은 시계일 뿐, 시간이 아니다. 그러니 그 누구도 시간을 쥐락펴락할 수 없으며 시간의 주인공이 될 수도 없다.
저무는 가을이 속절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가장 아름다운 시절, 저무는 가을을 아쉬워하며 보령으로 떠난다.
짧지만 긴 여운이 있는 산책길
충남 보령시 오천면으로 향하는 길, 열어둔 차창으로 갯내가 밀려온다. 오천면은 천수만 물길이 내륙으로 깊숙이 파고드는 곳이다. 오천면에 오천항과 조선시대 해군기지였던 충청수영성이 있다. 충청수영성은 현재 1.3km의 성벽과 서문인 망화문, 진휼청, 장교청, 복원한 영보정이 남아 있다. 오천항은 백제 때 회이포라 불리는 교역항구로 쓰이다가 고려와 조선 시대엔 군사 요충지로 명성을 쌓았다. 구한말에는 이양선을 감시하는 역할을 했다. 최근엔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촬영지로 소개돼 찾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주차장에서 망화문을 지나 곡선으로 이어진 성벽을 따라 걸으면 오천항 풍경이 한눈에 담긴다. 크고 작은 어선을 비롯해 이국적인 요트까지, 마치 주차장에 주차한 차들처럼 배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다. 가끔 어선들이 드나들 뿐 시간이 멈춘 듯 움직임이 없다. 성곽을 걷다가 처음 마주하는 건물은 흉년에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진휼청이다. 그 뒤편 가장 높은 자리에는 영보정이 있다. 최근에 복원된 까닭에 예스러운 멋은 덜하지만 정자에서 보는 풍광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을 것이다.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은 보령에 오면 이 정자에 오르기를 소원했다고 하니 당시에도 절경으로 손꼽혔나 보다. 충청수영성은 천천히 걸어도 20여 분이면 끝나는 짧은 구간이지만 바다를 마음껏 품을 수 있어 여한이 없다.
‘당신은 꽃과 같다’, 플라워 카페 리리스
계절의 변화에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이럴 땐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 한잔을 즐기며 여유를 즐겨볼 일이다. 혼자여도 좋고 마음이 통하는 이와 함께여도 좋다. 개화예술공원은 총 18헥타르 규모로 모산조형미술관, 세계 최대 규모의 조각공원, 화인음악당, 허브랜드로 이뤄져 있다. 너른 야외에 설치된 조각공원에는 조각상, 시비 등 총 1,500여 점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관람객들은 마치 울타리 없는 갤러리를 찾은 듯 호사를 누린다. 산책로는 숲과 연못을 가로지르며 이어진다.
공원 입구에서 들어와 왼쪽 끝으로 가면 카페 ‘리리스’가 보인다. 예쁘고 아기자기하게 꾸민 정원이 여심을 저격한다. 하지만 아직 감탄하기엔 이르다. 카페 안으로 들어가면 탄성이 절로 나오기 때문이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각종 화사한 생화 장식으로 눈이 휘둥그레진다. 은은한 조명과 어우러진 알록달록한 꽃들은 조화가 아닌 생화 드라이플라워다. 꽃이 가장 화려할 때 수분을 증발시켜 만드는 드라이플라워는 절정의 순간에 성장을 멈춰버려 매력적이다. 카페를 찾은 사람들은 천장과 벽면을 가득 채운 꽃장식을 보느라 바쁘다. 구역마다 조금씩 다른 인테리어 콘셉트로 장식돼 셀카 삼매경에 빠진 사람도 많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계속 색다른 공간이 나오기 때문에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메뉴도 독특하다. 어떤 메뉴를 시켜도 꽃이 함께 나온다. 꽃밭을 연상케 하는 와플, 꽃잎 아이스크림 등 먹기가 아까울 지경이다. 각종 드라이플라워 제품과 허브 향수도 함께 판매한다.
개나리꽃보다 더 노란 세상, 청라은행마을
가을이 깊어가는 이맘때 보령에는 붉은 단풍을 능가하는 노란 세상이 펼쳐진다. 청라면에 있는 청라은행마을은 국내 최대 은행나무 군락지 중 하나다. 원래 이름은 장현마을이었는데 마을 곳곳에 심어놓은 3천여 그루의 은행나무 덕에 마을의 이름마저 바뀌었다. 마을에는 수령 100년이 넘는 토종 은행나무 30여 그루가 있어 운치를 더한다. 이들 고목은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면 고색창연한 풍경을 그려내는 일등 공신이다. 수천 그루에 달하는 은행나무는 단순히 보기만 좋은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은행의 70%를 이 마을 한 곳에서 담당한다고 한다.
오래된 은행나무 수령만큼 마을에는 전통 가옥도 여럿 있다. 그중에서도 조선 후기 한옥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신경섭 가옥은 청라은행마을을 대표하는 곳이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됐으며 나무의 결과 단청의 색이 지금껏 잘 보존돼 있다. 신경섭 가옥 입구에는 보호수인 300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굳건히 서 있다. 천년을 간다는 느티나무이니 앞으로 700년도 문제없을 것 같다. 흙 담벼락과 어울리는 기와 담장 안으로 들어가면 너른 앞마당이 나온다. 가옥 안에는 효자 현판이 붙어 있는 정려각과 꽃 모양을 아로새긴 꽃담이 있다.
하지만 이 집의 자랑거리는 무엇보다도 가옥 안팎으로 심긴 은행나무 군락이다. 은행잎이 마당에 떨어져 흡사 노란 카펫을 밟는 기분이다. 한차례 바람이라도 불면 하늘에서도 노란 비가 내린다. 나무 위에도 아래에도 온통 샛노란 색이 흐드러져 마음조차 노랗게 물드는 기분이다. 사진을 찍는 것만으로 아쉽다면 신경섭 가옥에서 700미터쯤 떨어져 있는 정촌유기농원을 찾아보자. 이곳에는 농민가게, 팜 스테이, 캠핑장, 체험농장, 온실, 카페 등 다양한 시설이 구비돼 있다. 캠핑사이트를 예약해 하룻밤 묵으면 은행나무의 노란 세상을 맘껏 누릴 수 있다.
붉은 노을이 꽃비처럼 내리다, 무창포해변
보령에서 색채의 피날레는 무창포해변이다. 서해를 마주한 까닭에 땅거미가 내리는 시각에 해안을 따라 고즈넉한 일몰이 연출된다. 그중에서도 1928년 서해안 최초로 개장한 무창포해변은 무창포 낙조 5경이라 할 만큼 빼어난 풍경을 자랑한다.
제1경 무창포타워에서 보는 일몰은 파노라마 영화를 보듯 시야가 트여 있다. 무창포해변에서 석대도에 이르는 현대판 모세의 기적도 한눈에 관찰할 수 있다. 낙조 2경은 무창포 신비의 바닷길 입구다. 석대도 위로 떨어지는 태양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이다. 낙조 3경은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해넘이 모습이다. 조용한 항구와 등대를 바라볼 수 있어 다채로운 풍경이 더해진다. 무창포 낙조 4경은 하얀 등대에서 바라보는 모습이다. 운이 좋다면 해가 다 떨어지기 전 해와 바다 사이에 그리스 문자 오메가 모양이 그려지는 신비한 오메가 현상을 만날 수 있다. 낙조 5경은 닭벼슬섬으로 무창포 낙조의 최고 절경이다. 섬의 실루엣과 일몰이 어우러져 드라마틱한 풍경을 자아낸다.
무창포의 다섯 가지 낙조 포인트 어느 곳을 택해도 피사체만 약간 다를 뿐 바뀌지 않는 게 있다. 바로 하늘에서 벌어지는 장엄한 색채 마술이다. 그날 온도와 습도, 구름 모양에 따라 빛 번짐은 바뀔 수 있지만, 핏빛으로 물드는 하늘의 매직쇼는 볼 때마다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붉은 꽃비처럼 노을이 내리는 보령 무창포해변에서 색과 빛의 향연에 한없이 빠져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