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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기획연재 -미국의 여성 불교>
가부장제 이후의 불교
(Buddhism after Patriarchy)의 소개 (3)
글 | 송광섭 (대한불교 조계종 국제포교사
가부장 제 이후의 불교(Buddhism after Patriarchy)에 대한 소개
이 책에서 저자는 수년간의 열정적인 연구와 경험을 명확하게 정리하고, 명쾌하고 독창적이며 합리적인 주장을 제시하며, 학자와 실무자인 여성만이 적절하게 인식 할 수있는 중요한 질문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명확하게 묘사 된 페미니스트 이론적 자세와 함께 텍스트 작업과 역사적 / 인류 학적 관점을 적절히 결합하여 제시하므로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귀중한 개념 정립과 그들 사이의 분별력있는 비교를 제공하고 있다. 주요 불교 개념에 대한 페미니스트적인 분석은 탁월하며, 특히 이타심, 감정, 비 이중성과 관련하여 남녀의 성별 문제의 논증은 이 책의 중심이다. 불교를 만나는 많은 서양 여성들이 겪는 이러한 불쾌한 문제는 여기서 매우 신중하고 철저한 독창적인 주제로 다루고 있다. 그로스가 불교 전통에 공개적으로 전하는 예언의 목소리는 많은 감동을 준다. 이 책은 많은 불교도와 학생들, 학자, 일반인들에게 실질적이고 지금 필요하며, 지적인 수련에 여러 가지로 방법을 줄 수 있고 불교 수행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번호에서는 마지막으로 4장 남녀를 아우르는 진리로서불교 재평가를 위한 제언을 연재한다.
제4장
불법은 남녀 모두를 포함한다 ;
중성적인 불교 재건을 위하여
14. 평결 및 심판 (Verdict and judgement): 회고 ; 전망
불교와 불법에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재평가에서 두 가지 중요한 주제가 나타 났으며, 불교사를 통하여 불교에서 여성의 역할, 이미지, 생활과 경험의 선례가 무엇인지 연구되어 왔다. 불교 수행과 교육을 통하여 남녀간의 성 정체성 문제에 대한 주요 의미도 논의되어 왔으며, 이제는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를 요약하고 가부장제도 성립 이후의 미래 불교를 전망 해 볼 때다. 우리는 오늘 날 까지역사적 기록이 이어지는 것을 지켜보았고, 인간의 성적 차별을 다루는 적절한 방법들에 대해 무엇을 암시하는지를 알기 위하여, 삼법륜의 주요 가르침을 분석하고, 전반적으로, 우리가 성 정체성에 대한 불교적 태도에 대해 어떤 평결을 내릴 수 있을까 하는 주제를 고려할 것이다.
과거 불교 수행의 기록이 왜 있는 그대로인지, 우리가 불교 가르침의 분석에서 도출한 함축적 의미들이 왜 그렇게 많은 방법으로 모순되는지를 설명할 수 있을지 반문해 보아야 한다. 불교의 미래에 이를 수정하기 위한 중대한 개념적 재정립 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상상하거나 기대할 만한 근거가 있는가, 불교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비평에서 비롯된 불교 전통 재건에 적합한 주요 지침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연구 해 보아야 한다.
평결(Verdict): 관점과 수행의 실행 사이에서 허용될 수 없는 모순
전반적으로 고려해 볼 때, 불교에 대한 견해는 삼법륜에서 각각의 주요한 가르침에서 표현된 바와 같이 불법의 본성은 남성 이나 여성의 속성을 갖는 것이 아니다. 이 견해는 두번째 법륜에서 나타나는 공의 가르침과, 제일 법륜의 무아 와 불성에 대한 세번째 법륜으로 함축 되어 있다. 불교의 주요 가르침 중, 성적인 불평등이나 성적 정체성 속성에 따른 서열 체계를 뒷받침하는 것은 없다. 그 대신 이러한 핵심적 가르침을 인간의 성차별에 대해 어떻게 가장 잘 고려하고,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들과 연결시켜야 한다. 불교 세계관과 윤리는 성차별보다 성평등, 성적인 역할론과 이에대한 고정관념에 관하여, 엄격하고 변화 무쌍한 성 정체성 특유의 규범과 행동을 가진 유연성과 변화성 향상에 더 잘 적응한다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적어도 불교의 세계관과 주요 가르침의 측면에서 놀랍게도 불교는 성별에 대한 편견이 없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공에 대한 가르침을 제외하고, 불교 전통 자체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성적 정체성들에 대한 어떤 연관성도 만들지 않았다. 그 대신 불교도들이 자신들의 성 정체성에 대해 설명하고 정당화하려 할 때, 그들은 인과 관계에 관한 이 일반적인 진술을 여성의 어려운 상황이 부정적인 업보와 이전의 악행의 결과라는 주장으로 해석하면서 업력(카르마)에 대한 범인도적이고 불교도 이전의 관념에 의존해 왔다.
불교 전파의 역사에서 널리 퍼져 있는 여성에 대한 태도는 언제나 모호하고 모순적이었고, 보다 규범적이고 수승한 성품을 소유한 여성들은 불교에서 가장 높은 목표를 달성하는 남성들만큼 충분히 능력이 있다. 그러나 불교는 지적및 영적 체계로서의 일반 기관이 아니라, 장엄한 수도원과 대학에서 보존되고 전파되어 왔었다. 따라서 성 정체성 문제에 대한 주요 불교 교리의 함축적 의미를 분석하고, 이에 대한 불교적 태도와 관행의 역사를 고찰한 결과. 관점과 수행 사이의 거대하고 동의할 수 없는 갈등이 불교에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불교의 역사적 형태에서 이러한 악순환은 여성의 정신적 능력이 제한되어 있으며 여성에게 가능한 영역이 생식 및 가사 노동이라는, 상대적으로 비평가된 영역이라고 믿도록 여성들을 능력을 사회화 하여 왔다.
회고(Looking backward): 불교 내부의 가부장제에 대한 설명
불법에서는 기본 교리적으로 성 정체성 면에서 불평등이 아니기 때문에, 불교 신자들은 그들의 성적 차별과 남성 지배에 대한 변명이 신에 의해 밝혀지거나, 그들의 신화의 모델을 사회적으로 반영하고있는 근거가 다른 종교들에 비해 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불교 신자들이 역사적으로 성적 정체성을 둘러싼 그들의 제도와 태도를 성적 차별화 제도를 통하여 만들어 왔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그러한 요인들은 현재 남성 지배를 계속하려는 그들의 욕구를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불교 과거의 이러한 태도와 제도의 근원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불교가 역사에 등장할 무렵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마도 인간의 생물학적 구조내부에 가부장 제도가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가부장 제도 이전의 사회와 종교는 남성 지배적인 기관들에 의해 오랫동안 유지해 오고 있었다. 그리고, 분명히, 불교는 그것을 의심하거나 반대하기 보다는 그 환경에 적응했다. 불교 내에서 남성 지배에 대한 이 설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가부장제가 실제로 역사적 현상이라는 페미니스트적 역사 분석의 결론이다. 가부장제를 어떤 조건이 있을 때 생겨나고 조건이 없어질 때 사라지는 역사적 현상으로 보는 것은 기본적인 불교 가르침과 잘 일치하고 있다. 상호 의존적 공생이라는 불교의 가르침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사건들의 모든 것이 이전의 행위에 대한 업보에 대한 결과로서, 절대적이고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정확히 페미니스트 역사가 가부장적 사회적, 종교적 형태에 대해 주장하는 모든 것들이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는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불교는 공정성과 정의의 결과가 아니라 마음가짐, 인식, 분리와 평온의 결과였다. 인생에서 자유로운 해방은 단순한 사회적 형태가 아니라 삶 자체을 포기함으로써 촉진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므로, 더 좋고 더 나쁜 사회 형태에 대한 문제는 불교 신자들에게 거의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을 비난하지 않았고, 단순히 그들은 수도승들에게 전쟁에 참여하는 행동을 허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군인은 인간의 영적 해방을 가져온 안정된 정신적 상태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경제적 착취는 비난받지 않았으며, 승려들은 탐욕과 애착이 경제 활동을 동반할 가능성이 너무 높았기 때문에 경제적 자급자족을 포기했다. 전통적으로 성적 정체성에 기인한 사회계층의 소멸 효과와 수승한 여성 계몽가 들이 없었기 때문에 불교가 겪었던 손실을 격으면서, 불교 교리의 관점이 아닌 일종의 사회적 비판과 자아 비판을 수용하여 왔다.
전망(Looking forward): 의심스러운 우연
2500년 동안 불교 수행이 가부장적 환경과 수행 체계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변화가 가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순전히 어리석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기본적으로 남녀간의 성 정체성이 확립된 사회적 계급 내에서, 품계의 배열에 관한 불교 관습에서 변화가 가능한 한, 그들은 불교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통에 의지하여, 불교에서 안정되고 권세를 소유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갑자기 그토록 오랫동안 지배해 온 관점과 수행체계 사이의 거대한 모순을 알아차리고 그 이상을 실현하도록 변화를 추구 할 수 없다. 오히려 불교보다 더 큰 역사적 경향과 사회 발전 추세는 모든 전통적인 종교에 대하여 분명하게 영향을 미치며 불교계에도 힘을 실어줄 것이다.
다양한 비젼과 왕성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많은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은 결국 그녀를 개혁하려는 시도를 포기한다. 그 원인은, 전통, 그 상징 체계와 세계관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그것의 제도적 구조 안에서 변화를 위해 일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너무 많은 피로와, 가슴 아프고, 좌절과 외로움을 개인에게 가져 오기 때문이다. 현대의 두 가지 주요 역사적 힘은 성적 정체성에 관한 불교적 견해와 관습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며, 그들은 함께 중요한 도전과 약속을 제시한다. 첫째, 가부장제를 그럴듯하고 견딜만 한 상태로 유지한 원인과 조건이 마침내 스스로를 지치게 하고 있다. 둘째, 불교는 더 이상 지적, 정신적 고립에서 발전하지 않고 서구 종교의 예언적 목소리와 페미니즘을 접함으로써 상호 변혁을 겪고 있다.
서구 불교 신자들은 가부장적 기준이 강한 한 문화권에서 자라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에서 철학적으로 새로운 사상이 생겨나고 있다. 가부장적 기준이 다른, 그러나 똑같이 강한 다른 문화권으로부터의 종교에 점점 더 많이 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형태의 가부장제에도 충성하지 않는 입장이 나타나게 되었다.
불교 신자들에게 있어서, 서구 가부장제의 종교적 기반은 더 이상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없다. 그러나 동시에 서양의 불교 신자들은 아시아 문화 가부장적인 모든 짐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자유는 부분적으로 불교 학자들이 문화적 습관과 불법의 구분을 회피하고 조심하는 것에 기인한다. 그들은 그들의 학생들이 티베트인이나 일본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불교 신자가 되는 것을 원한다. 그들 대부분은 여성에 대한 차별은 불교 교리가 아니라 문화적 편견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심판(The judgement): 불교내에 존재하는 중성적(Androgynous) 비젼
불교의 교리, 포교 모델을 고려하고, 불교의 핵심 개념을 분석함으로써 도출된 결론은 불교의 진리와 수행및 실천 사이에 커다란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불교 재건의 첫 번째 주제는, 성 정체성을 둘러싼 불교 관행을 개혁하는 것이다. 그러한 재건에 대한 지침은 꽤 간단하다. 남녀간에 성 평등을 의무화하고 제도화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을 불교 생활과 제도의 구조에 완전히, 철저한 방식으로 변화시켜 완성하는 것이다. 성 평등을 의무화하는 것은, 그것을 모든 불교 신자들의 규범적 의무로 간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다른 모든 윤리적, 대인 관계적 규범과 피해야 할 행동의 목록을 포함하는 올바른 행동의 범주 아래 팔정도의 수행에 포함될 수 있다.
앤드로지(Androgy)라는 용어는 애매하고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의미를 보다 신중하게 정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페미니즘에 관한 방법론적 부록에서 언급했듯이, 이 책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로서 안드로지의 의미는 남녀 모두 혹은 중립이다. 학문적인 방법, 인간성의 모델, 의식의 형태로서 남성적 관습을 세계관, 문화, 역사의 중심에 두어 여성을 소외시키는 안등주의나 남성 중심의 선민적 배타 의식과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그것은 남성도 여자도 아니고, 어느 쪽도 아니다라고 하는 성중립적 모델과 이상과는 화연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다.
15. 중립주의(Androgynous) 수행 기관;
신도, 수행자와 요가수행자의 문제들
페미니스트적 불교 재건은 두 가지 이유로 일상의 관습과 제도적 형태에 관한 발전적 제안을 통하여 시작 될 수 있다. 첫째, 그들은 성 정체성에 관한 불교 이론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의미가 결여 되어 있다. 둘째, 그러한 명백한 문제들은 불교 교리에 대한 무지보다 안등주의에서 기인되어 더 쉽게 나타나고 있다. 대개 사회나 인간 의식 영역에서 남성 우위의 경향은 미묘하게, 교리적 공식보다 더 명백하고 더 거부감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기독교 페미니즘이 옹호하고 있으며, 여성의 종교적 서품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남성적인 교리의 언어가 문제의 원인이 되고, 남성 사제지간이 그런 종교적 효과를 독점하고, 여성적인 교리언어를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게 그것을 받아들인다.여성들은 평등한 인간이 되기 위해, 남자들이 항상 누려왔던 것과 같은 동등한 권리를 필요로 하고 원한다. 이때는 대부분 사회적 게임의 룰이 서 있는 그대로의 적당하다고 가정하더라도, 문제는 그동안 여성의 사회적 행동들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자유주의, 혹은 동등한 권리를 가진 페미니즘은 가부장제에서 벗어나려는 첫 번째의 반항적인 움직임이다. 남성들에 의해 쓰여진 이 게임의 규칙은 가부장적이고 성 정체성의 기본적 역할을 하는 문화에서 남성의 가치를 반영하는 남성 규칙이다. 그들이 처해있는 현상처럼, 그들은 반드시 매우 완벽하거나, 인간적이거나, 제정신인 것은 아니다. 이러한 남성 우위의 규칙을 수정하는 것은 공식적인 지침만 바꾸는 것이 아니며, 비록 그것이 중요한 단계지만, 그것은 결국 사람들이 왜 그러한 행동을 하는지, 어떻게 자신의 사회적 행동에 대한 계획을 세울 것인지, 그리고 행동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철저하게 분석하는 것을 포함한다.
상호 비경쟁력 극복: 중립적인 신도 집단의 불교
일반적인 종교로서 불교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한 불교 체제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두가지의 문제들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첫째로, 현대 서구 세계에서, 페미니즘에 의해 제기된 문제들에 적용된 기준이 없더라도, 불교 자체 내에서, 건전한 종교로서 불교 생활을 위한 새로운 길을 만들 수 있는 모델을 제공하여야 한다. 두번째 문제는 가부장적 제도하에서의 성적 역할에 의해 조성된 불만족을 넘어, 여성주의적인 무난한 중성주의 비젼과 일치하는 불교적 스타일을 만드는 것에 관한 것이다.
명상과 철학적인 전문가들은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서는, 고전 불교 수행에서 중요시 하던 수도원 엘리트의 수행 생활 양식과 불교의 단순한 윤리적 규율을 지키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고전 불교는 일반 평민사회와 수도회 사회 사이의 깊은 공생 관계를 촉진하고, 평신도들이 궁극적인 깨달음을 향해 일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고 있다.
자유로워지기 위한 견성을 얻기위해서는 충분한 공과와 충분한 지혜를 축적할 필요가 있었다. 부유한 서양인들이 불자가 되고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생활의 부유함과 무관하게, 불교를 자신의 선택의 종교로 삼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부분 비록 불교를 신봉하지만 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학문, 실천, 윤리의 전면적인 규율로서 그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진지한 불교 공부와 실천에 대한 약속을 하는 과정에서 승려나 수녀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가부장제 이후의 수도원 생활: 전통 불교의 진수 재건
현재 전통 불교가 남성보다 우위에 있는 수도원적 제도에 크게 의존하는 것은 무엇보다 불교가 가부장적 종교라는 피상적인 관념에 그 책임이 있다. 전통적인 불교 교단에서 이러한 남성 지배, 거의 남성 독점 행위는 모든 종교적인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자주 경험되는 익숙한 고통을 만들어낸다. 가장 최근에, 그 개혁은 단지 여성들이 편견이나 차별 없이, 불교를 보존하고 전파하는 데 주로 책임이 있는 전통 불교, 수도원, 교육 기관의 핵심으로 완전히 들어가게 할 것이다. 개혁은 매우 불안정하고, 전통적인 불교 교계와 큰 연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개혁주의자 들은 불교 지도자들의 개혁이나 불교 종파 내에서 개선되는 속도가 느린 것에 극도로 낙담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와 동등한 권위와 위신을 가진 사람이 단순히 최근의 불교계에서 비구니의 법계 처리 방식이 부적절한 불교의 행위라고 선언하고, 적어도 그의 명령이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직접적인 조치를 취하라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크게 환영을 받을 것이다. 아시아 수도원보다는 서구적인 수도원이 이 혁신을 위한 선구적인 장소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런 곳 중 하나는 노바스코샤에 있는 감포 애비인데, 수녀와 승려 모두 합숙 훈련을 하고 시설 개선을 위해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다. 수도원의 십중팔구 수장이 티벳 비구 스님이 만, 법납과 권위에 있어서 최고 원로 수도 승려는 학문 전수와 교육계에서 강의 기술로 널리 존경 받는 미국 국적의 비구니 스님이다.
선지자 및 예언자: 요기니족과 가부장제 이후의 불교
인도와 티베트 불교에서는 요기족과 요기니족 수련자가 출가 수도승도 아니고 일반인도 아닌 사회 활동을 하는 수행 활동을 하고 있다. 그들은 보통 평신도들보다 정신적인 규율과 자기 계발에 더 외곬으로 헌신했고 사회의 관습, 특히 사회적 계급과 청교도적인 행동 규범을 혐오하고 있다. 그들은 영적 규율과 깨달음에 일생을 바쳤지만, 그들 역시 수도승적인 규율에 따라 살지 않았다. 그들은 수도원보다 동굴을 선호했고 수도원 규약에 의해 금지된 많은 활동에 참여하였고, 그들의 수행 양식은 불교에 있어서 상당히 개방적인 모델을 제공하고 있다. 구체적인 그들의 세부 수행 방법과 내용들은, 개인의 영적 발전과 불교의 발전에 대한 영웅적인 헌신을 당대에 적합한 방향으로 보여 준다. 또한 문학 작품에서 그들의 수도 생활을 안드로이드적인 방식으로 기록하지만 여성들이 최고의 수행양식으로 추구했던 범 불교적인 수행 양식이다.
16. 중성적인 견해: 불법의 언어적 표현에 대한 관심
불교 전통에서 이미 언급된 수행 양식의 실체를 단순히 그 교단의 규모를 확대하기 위해서 혹은 과장하여 덧붙이는 것은 불교를 냉철하게 다시 생각하게 하는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현재까지, 그러한 재구성이 시도된 경우는 거의 없지만, 그러한 시작은 반드시 공손하고, 일시적이어야 한다. 페미니스트 요기니들의 설법은 이미 존재하는 불교적 지혜에 권위를 부여해 줄수 있으며, 페미니스트적 용어가 아니라 불교적 용어로 설명되어야 한다.
승가로 피난 간다: 관계와 견성
내 생애를 통하여, 불교와 페미니즘의 상호작용이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불교 목표를 달성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불교 신자들이나 비 불교인이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불교의 실체에 있어서 불교 공동체가 훨씬 더 중심적이고 결정적이다. 불교에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부처, 달마, 승가라고도 하는 삼보이다. 삼보로 귀의하는 행위는 멀리 떨어져 있고 지리적으로 분리된 종교의 모든 형태에서 발견되는 몇 안 되는 특징들 중 하나이다. 이 삼보의 실체는 매우 기본적이어서 모든 형태의 불교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된다. 외부인이나 내부인 모두 승가를 수행의 중심으로 제시하고, 부처와 불법의 포교에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불교에 관한 교과서에서 다양한 종교 철학을 어느 정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으나 불교 윤리는 거의 언급되지 않고 불교 공동생활에 대한 묘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모든 불교 국가의 화려한 불교 미술은 다양한 불상의 중심성을 증명한다. 거대하고 방대한 불교 문학은 달마의 셀 수 없이 많은 철학적 기본적 의미를 탐구한다. 대중들의 헌신적인 수행 관습은 수백만 시간을 명상하는 데 소비하고, 일반 대중들에게 견성 성불에 대한 지향을 가져다 준다. 비록 모든 사람들이 승가를 찾아 귀의하지만, 이 의지처의 의미를 탐구하는 데는 거의 관심이 없다. 나는 이것을 고전 불교의 여러 가지 중심적이고 기본적인 개념과 연결시켜 이에 대한 고정화된 개념에 대한 결론을 도출하고 싶다. 불교에서 오래된 전통의 중심 개념인 상호 의존적 공동수행(pratityasamutpada)은 모든 것이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는, 인과 관계의 밀도있고 완전히 상호 연결된 관계망을 설명한다.
이러한 목록 중 하나는 불법을 촉진하는 세 개의 수레바퀴, 삼법륜, 이라고 불리는데, 전통적으로 공부, 실천, 생계 활동 등으로 열거되어 있다. 이 주제의 발상은 일방적 유행이 아닌 원근적으로 불교를 실천할 수 있는 균형 잡힌 생활 방식에 필요한 모든 기본 사항을 포함시키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삼법륜이라는 사실 관계, 생계, 그리고 수행이라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공부와 실천은 두 가지가 아니라 하나의 추구인데, 이것을 종합하여 함께 영적인 규율을 이루어 왔다.
성스러운 전망과 일상 생활
영적인 신성스러움과 소위 보통의 존재 또는 일상 생활의 관계는 다양한 종교적 전통에 있어서 관계 설정이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이며, 이를 위한 해결책은 복잡한 불교의 종교적 전통과 불교 조직 내에서 다양한 면을 보인다. 그들은 두 개의 영역이 붕괴되고 상호 소통 되는 것에서부터, 서로 반발 상충하는 것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가 보아온 것처럼, 불교에서 그들은 종종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여겨져 왔고, 불교는 종종 보통의 중생들 생활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데, 적어도 평범한 삶이 가정과 생계 문제에 관여하고 있다. 그러나 가부장제 이후의 불교에서는 다음과 같이 페미니스트적 가치관, 그리고 평범한 삶에 대한 전통적인 평가를 피할 수 없게 될것이다.
가치관의 전환만큼 급진적인 것은 요구되지 않는다. 생업을 통하여 수행하고, 자신의 주위 환경과 직계 가족을 돌보는 것과 같은 매일의 활동은 자본주의에 대한 열등하지 않은 생활 방식으로 평가될 필요가 있다. 불교에서의 세계속의 속세에서 자유라는 비전은 수도원뿐만 아니라 사무실이나 보육원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보육원이나 사무실에서 자유를 잃고 자질구레하고 사소한 일, 무관심하고 사리에 불 분명해지면, 일상적인 활동에서 신성함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윤회적 운명에 따른 존재로서 애착과 애틋함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영적 규율: 세상을 새롭게 하는 비전과 초월
가부장 적이고 성실한 불교는 정신적 규율 제정을 통한 정신적 변혁에 계속 집중하여야 하는 가장 어려운 문제가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적절하고 도움이 되는 영적 변혁의 개념화와 영적 규율의 성과와 결과는 그대로 유지될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현재 적절한 영적 규율로 규정되어 있는 실천과 목표가 불교계 전체에서 나온 것인가 하는 견해도 발생하게 된다. 영적인 규율이 너무 미묘하고 자기 기만이 너무 쉽기 때문에, 이러한 의문들은 어느 쪽이든 양단을 자극하고 있다.
항상 자기 기만이 수행에서 위협이 되기기 때문에, 현재 남성들이 만든 영적 규율의 프로그램은 정말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을 수도 있으며, 페미니스트적 비판과 재구성은 완전히 빗나갈 수 있다. 영적인 규율은 언제나 깨달음과 통찰력을 날카롭게 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같은 영적 규율에 관한 질문을 하고 동등한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모든 수행에서 명상 수련이 중심이며, 심지어 유일한 가치 있는 인간의 활동중의 하나이다. 전통적인 불교 문헌들이 깨달음에 도움이 되고 사물들을 명확히 보는 데 도움이 되는 유일한 영적 규율에 대한 확신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다양한 종류의 명상 중에서, 어떤 것들은 다른 것들보다 인간의 호감과 청렴성의 확장에 더 도움이 있을까? 티베트 불교에서는 오랜 기간 고립이 일상적이며, 수도 선승들은 오랜 수행 기간 동안 계속해서 기본적 욕구에 대한 자제를 한다. 아내와 갓 태어난 아이를 버린 싯다르타 고타마는 어떨까? 또한 티베트인 선생님 밑에서 공부하며, 현대 서양 여성들에 관한 논문을 읽을 때도 나는 감흥이 없었다. 그 이유중 하나는, 일년 중 많은 시간 동안 고산에서는 눈이 쌓이기 때문에 수련의 관행으로 손이 닿지 않는 티벳 동굴에서 고독한 명상을 일상적으로 하고, 그후 12년 동안 뉴욕 주의 한 휴양 오두막집에서도 수행은 계속 되었다.
동굴에서 12년을 보낸 시간과, 인간 관계의 프라이머시(primacy)를 부정하는 것을 포함해서, 심지어 초월하기를 갈망하는 사람들까지도, 사물에 대해 명확하게 알기 위한 사소한 일들과 관습들-그것들을 경험 하였다. 명상 수행을 지속하기 위하여 자신의 에너지를 역방향으로 흐르도록 엄격하게 몸부림쳐야 한다면, 인생에서 너무나 역효과를 가져오는 느낌을 갖는다. 가부장적 종교는 그들의 가부장적 지위를 스스로 제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 전통 안에 남기를 원하는 페미니스트는 신앙에 대해 아무것도 취하지 않고 모든 것을 시험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명상과 영적 규율에 중점을 두는 불교 생활에서 사랑받는 마음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것은 때때로 극단적이고 일방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스타호크(Starhawk)에 의해 윤곽이 드러난 불교와 페미니스트 위카(Wicca)의 차이점 중 일부는 똑같이 세계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불교와 세계 내부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불교 사이의 대조되는 사상으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삶의 측면은, 우리가 그것들 안에서 우리의 편안함을 찾을 수 있게 해주며, 그것은 우리가 그것들을 감상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따라서 어느 정도 수준에서 페미니즘은 단순히 대안적인 태도를 표현한다고 주장할 수 있으며,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호감을 표시하고 있다.
삶의 만족스럽지 못한 것에 대한 미사여구의 집중포화 속에서, 종교를 좀 더 수용하는 방식으로 집중하지만, 이에 대한 대체적인 평가는 특히 불교에서 사실 더 깊고, 더 규범적인 태도로 나타난다. 세상에서 그렇게 많은 고통을 초래하는 모든 혼란과 훼손은 전혀 우리의 본연의 본성이 아니라 불교에 따르면 포장, 이차적인 껍질인 것이고, 이 평가에서 정신적인 필요성은 인간의 선함과 인간의 잠재력에 승복하고 안주할 수 있는 것이다. 삶의 조건은 근본적으로 청정한 정신이고 만족스럽지만, 우리는 그것을 찾고 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영적 규율의 요점은 우리 자신이 완전한 인간이 되도록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몇 년 동안 홀로 지내온 수련 과정이 어떻게 그 목표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불교에서 불법 수행의 요점은 세계 속의 자유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전통적인 불교 명상의 프로그램이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그 목표를 벗어났는가? 이것은 또한 종종 가부장적 세계인 갈망, 불만족, 추구, 초월성, 페미니스트 인정, 즐거움, 공동체, 그리고 각각 주기사이의 갈등의 의미는 무었인가. 극한으로 변화되고 안착하는 것은 결국 불균형과 편중성을 가져온다. 대부분의 서양인들이 불교에 관여하게 된 고전불교와 밀교 에서, 모두가 초월적 충동, 청결과 재조정을 갈망하는 영적 경험의 측면, 반복하는 것보다 살아 있는 것이 더 있어야 한다고 선언하는 영적 경험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세대에서 세대로의 관습적 실존의 똑같은 잘못
이것이 나처럼 가난에 찌든 농촌 처녀를 집을 떠나게 하고, 이해와 변혁을 꾀하게 한 영성이며, 나의 성별과 계급 때문에 나에게 주어진 관습이 불충분하다고 거절한다. 불꽃에 이끌린 나방처럼, 어떤 사람들은 전통적인 존재에 살고 싶어 견딜 수 없을 뿐이고, 끊임없이 그 불꽃을 반복한다. 시대의 무늬의 역할로서, 여성의 성 정체성 역할에 의해 좌우되는 삶, 그리고 그보다 덜한 범위 내에서 남성으로서 성 정체성 역할에 의해 좌우되는 삶은 그러한 삶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조용한 절망의 삶을 영위하여 가고있다.
영성이 깨어있고, 매일 매일 적멸한 그런 삶을 남기고 싶은 정신적인 충동에, 나는 시각과 고통에 바탕을 둔 비전이 서로 얽혀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변덕스러운 결합은, 사람들을 천국 지향의 초월을 추구하기 위해 관습성을 포기하게 한다. 그리고, 포기, 고독성, 자급 자족등을 미화하여, 페미니스트적 영성은 상쇄적인 무게와 회의론을 제공하고, 지구상 영적 지향의 많은 것들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수행과 행동의 초기에는 어떤 종류의 영적인 규율이든 역효과적이고 지루하거나 무관해 보인다. 그러나 결국, 근본적인 선량함 속에서 우리가 돌아가고 쉴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어려운 곡식을 억제하는 단식에 대한 규율의 필요성은 명백해진다. 그러한 훈육이 없다면, 깊은 평화에 바탕을 둔 사람들을 위해 사소하고 전통적인 반복적인 스타일의 무장을 초월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문제는 일반적 기강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기강이다. 가부장적 한계로 인한 과도한 부분을 진정으로 체계적이고 균형 잡힌 접근으로 분류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가부장제 이후의 또 다른 불교가 해야 할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가부장제 이후의 다른 영역에서 추구하는 동일한 종류의 균형이 여기에 유지될 것이다. 그들이 의지하는 것은 현실의 참여라기 보다는 탈출이나 극복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이 부분을 쓰면서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고군 분투해 온 이 질문들은 더욱 명료하고, 심각해졌다. 내겐 좀 더 생생해 이 원고가 끝난 지 15페이지도 안 되어, 나는 이 어려운 작업에서 나를 괴롭혔던 내 마음의 동반자가 죽은 것을 발견했다. 아주 갑자기, 아주 갑자기, 예고도 없이, 그는 우리 안에 죽어 있었다. 우리는 3년밖에 함께 하지 못했지만, 그 3년은 앞부분에서 발견되고, 그가 내 삶에 들어오기 전에 초안된, 관계와 깨달음에 관한 역사의 진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나는 그가 나보다 스물두 살이나 위였기 때문에, 그 경험을 가까이에 두고 잡았다. 그는 불교 친구, 또래의 젊은 남자들, 고전적인 전통이 이상화하는 기질, 불교의 실천에 대한 나의 강렬한 헌신에 내가 다 팔렸나갔다고 초조해 했다. 이젠 이게 내 연습이야. 이게 내 인생이야, 이러한 경험은 나를 불교적 관행만큼이나 변모시켰지만, 변형된 불교적 실천이 없었다면 이 기회를 나는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그가 죽었을 때 불교 신자들은 그 경험을 다루기 위해 정식으로 수행 연습을 하라고 내게 압력을 가했다. 하지만 나는 느꼈고, 내 감정에 충실했고, 그 순간, 나는 완전히 존재했다. 그리고 어떤 형식적인 연습이든, 마음가짐이든, 시각화든 당장 일어나고 있는 일과는 거리감이 생길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것이 바로 나의 연습이었다. 나는 한 번도 내 경험에 대해 더 자각하고 살아 있음을 느껴본 적이 없는데, 그것은 뚫어질 듯한 홀가분함과 공허함, 그러나 충만함이었다. 나는 또한 수년 간의 공식적인 불교 훈련이 없었다면 결코 그렇게 많이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고 어떻게든 그것을 폐쇄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어느 시점에서는 죽음을 둘러싼 형식적인 불교 관행 수행을 할 때였다. 그들은 절망의 경험을 극복하기를 강요 당했으나 훈련의 충만함 밖으로 나오고, 즉각적인, 인지도와 생생한 존재의 향상을 향하여 노력하였다. 그 경험으로부터, 나는 몇 가지 원칙이 추론될 수 있다고 믿는다. 첫째는 명상에 있어서 형식적인 훈련을 대신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인데, 흔히 자연스럽지 않다거나 곡식을 익힌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한 학문들은 단지 지루하고 힘들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남성주의나 이원론적 영성 스타일의 산물로서 거부될 수 없다.
재탄생으로부터의 자유와 현재 종종 희망하고 있는 결과인, 보이지 않는 존재들과의 의사 소통은 관련이 없어 보인다. 사실 죽음에 대비하기 위해 영적인 규율을 실천하는 전체 지향은 아마도 가부장제 이후의 불교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영적인 규율이 순수와 균형, 평온과 깊은 평화를 증진시킨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동료들과의 의사소통도 충분할 이다. 영적인 규율이 다른 움직일 수 없는 존재감을 우리들 마음에 초래한다면, 그것은 추가적인 보너스가 될 것이지만, 한 사람이 살고 있는 사람들과 의사 소통하고 위로할 수 있는 충분한 감수성을 기르고자 하는 욕구를 무색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끝.
송광섭 / 대한불교 조계종 국제 포교사
본지 편집위원으로 1952년 생이다. 1975년 해군사관학교,
1978년 서울공대 전기과, 1981년 서울공대 대학원, 1989년
미시간대학원, 2001년 웨인 주립대 대학원에서 수학하였다.
1978년부터 해군사관학교 교수부에서 전기공학 교수로 근무
하였으며 해군사관학교 법우회 지도교수를 담당하면서 불교
포교를 하였다. 2003년 해군을 전역하였으며 현재 해군사관
학교 명예교수겸 미해군대 방문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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