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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처녀 비유(1) :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
마태복음 25장 1-13절 / 1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3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 새 8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달라 하거늘 9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본문의 시작을 ‘그 때에’라고 하고 있어서 앞 문장과의 연관에서 이 말씀이 주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그 때에’는 ‘임자의 임함’(마 24:37, 39),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마 24:42), ‘인자가 오리라’(마 24:44)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에서 보는 예수님이 영광중에 올 때인 재림의 때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영광중에 올 ‘그 때에’ 제자들에게 무엇을 할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인가 하면 24장 24절에서 말씀하신 “깨어 있으라”를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깨어 있는 자는 천국에 데려감을 당하지만 깨어 있지 않은 자는 내버림을 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열 처녀 비유’를 가지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천국은 열 처녀가 저마다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것에 비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천국은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자신이 올 그 때까지 깨어 있는 자, 곧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 속에 있는 자만을 데리고 함께 들어가십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그 때까지 깨어 있지 않았던 자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들은 문 밖에 쫓겨난 신세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열 처녀 비유’를 가지고 처녀들을 둘로 나누어서 이 사실을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로 말입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이 열 처녀는 각각 자기들이 남편으로 삼은 신랑들을 맞으러 나갔다는 것을 이야기 해주시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처녀는 숫자가 열인데 신랑은 열이 아닌 하나, 곧 한 분입니다. 그렇다면 신랑을 맞으러 나간 이 처녀는 신랑의 아내가 되는 신부를 가지고서 비유를 든 것이 아니고, 다른 처녀를 가지고 비유를 든 것입니다. 보통 이 열 처녀의 비유에서 등에 기름을 채워 신랑이 올 때까지 불을 밝히고 있다가 신랑을 맞이한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간 신부로 말하고, 등에 기름을 채워 놓는 준비해 놓고 있지 않다가 신랑을 맞이하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는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참여하지 못한 자들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또한 열 처녀를 그리스도인, 또는 교회로 말하면서 깨어 있어 등불을 준비에 있은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갔으나 그렇지 않은 미련한 다섯 처녀는 신랑과 함께 참여하는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말하기도 하고,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를 주께서 오실 때까지 성령 충만해 있은 교회와 그렇지 못하고 있은 교회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과연 열 처녀 비유에서의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는 그러한 사람들이겠는지요. 먼저 비유로 말씀해 주신 열 처녀에 대한 사실 여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에 열 처녀를 신랑을 맞이하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는 여인인 신부로 이해한다면, 참으로 이상한 전개가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신랑을 맞이하기 위하여 기다리는 신부 중에서 어떤 신부는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일이 있게 되는 상황 속에서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신부가 있게 되는 전개가 되기 때문입니다. 해서, 신랑의 신부가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신부와 그렇지 못하는 신부가 있게 되는 논리가 되고 맙니다. 그런데다가 이 신부를 그리스도인, 또는 교회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럴 경우 주님의 교회인 그리스도인 중에서 그리스도의 신부로 혼인잔치에 참여 받은 자들이 있게 되는가 하면 그렇지 못하고 밖으로 쫓겨남에 있는 자들이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소위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구원을 상실하는 자들이 있게 되는 큰 오류에 있게 됩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드신 열 처녀는 예수께서 자신을 신랑으로 등장시키면서 자신의 신부된 자들 중에서 마침내 신랑과 함께 혼인식에 들어가는 신부가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하여 신부가 누릴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자가 있다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하나 된 몸에 있는 예수님의 신부가 되는 성도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서 열리게 되는 혼인잔치에 참여 될 것인데, 그렇게 예수님과 함께 혼인잔치에 참여함에 있는 기다림에 있던 자들 중에서 어떤 사람은 마침내 혼인잔치에 참여되고 어떤 사람은 혼인잔치에 참여되지 못하는 일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신부로 모두가 하늘의 혼인식에 들어가게 됩니다.
여기의 비유에 묘사된 혼인잔치에 있는 준비는 예수님 당시에 근동에서 행해지고 있는 혼인식의 풍속을 가지고 비유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혼인식 전날 밤에 신랑 집에서 기다리는 들러리 처녀들을 언급하고 계신 것입니다. 혼인식을 갖게 되면 신랑은 신부를 데리러 가기 위해 들러리가 되는 친구들과 함께 신부 집으로 갔고, 신부는 자신의 들러리 역할을 하게 되는 친구들과 그들을 맞이하여 들이게 되는데 신부의 들러리가 집 밖으로 나가서 등을 들고 있다가 신랑과 그의 일행이 도착하면 맞아들입니다. 그런데 신부의 들러리가 등을 들고 기다리고 있다가 신랑을 맞이하는 것에 있게 되는 것은 유대인에게서 혼인식은 하루가 시작되는 저녁때에 있게 되는데 해가 진 이후에 시작이 되는데다가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신부 집에 가는 시간이 정확히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들러리들이 신랑을 맞이하여 집안으로 들이기 위해서는 신랑이 온다는 소리를 듣게 될 때 등불을 켜서 맞이해 나가야 합니다. 하여, 신랑이 늦어져 더디 오더라도 불이 꺼지지 않게 기름을 충분히 채워놓고 기다리게 됩니다. 그때의 시대는 오늘날처럼 전기가 있고 전기 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집안 모든 곳에만 아니라 집 밖에의 길거리에도 해가 떨어지면 자동으로 전기가 들어와 전등이 켜지는 때가 아니었습니다. 집 밖에는 그야말로 깜깜한 암흑천지입니다. 그러기에 신랑이 온다는 소리를 듣게 되면 켜진 등불을 들고 집 밖에 나가 환히 비춰 신랑이 오는 것을 보며 맞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등에 기름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신랑을 맞이한 신부의 들러리는 신랑을 신부에게로 안내하게 되며, 신랑은 신부의 집에서 혼인식을 치르는 것에서 종교적 의식을 비롯한 여러 예식을 행합니다. 그 모두가 끝나면 신랑은 자신의 들러리와 함께 신부와 신부의 들러리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혼인잔치를 베푸는 데 통상 여러 날 행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시작된 혼인잔치는 신랑의 가족과 하객, 그리고 신부의 가족과 하객, 여기에다가 손님들과 행인들까지 참여하여 함께 축하의 잔치를 즐겼습니다. 보통 결혼식에는 연회와 노래, 춤이 함께했는데 이것은 혼인잔치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혼인잔치는 신랑과 신부 양가와 양가의 마을 온 주민들이 함께 기뻐하며 즐기는 축제의 자리였습니다.
그러한 것에서 있게 되는 혼인잔치를 비유로 들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랑을 기다리고 있는 신부 집에서는 신부의 들러리인 열 명의 처녀가 문 밖에서 등불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밤이 되고 점점 깊어져도 신랑은 아직 혼인식 자리에 모습을 나타내고 있지를 않았습니다. 신랑이 도착하면 혼인식이 시작되고 여러 날 동안 잔치가 벌어지게 됩니다. 마침내 신랑이 신부 집에 도착할 때는 그동안 신랑이 오기만을 기다려온 신부의 들러리가 뛰어나가 신랑과 그의 들러리로 온 친구들을 크게 환영하여 맞이해 들여서 신부에게로 인도합니다. “그 때에…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에서의 열 처녀는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서 언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혼인식을 치르며 혼인잔치를 주관할 신랑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마침내 오신 신랑과 함께 신부에게로 인도할 처녀인 들러리를 가지고서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그렇지 못하는 미련한 다섯 처녀를 말씀해 주시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의 재림에 이를 때까지 제자들이 어떤 자들로 있어야 할 것인지를 알려주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을 말씀해 주시는 구절이 ‘열 처녀 비유’인 마태복음 25장 1-13절에서 마지막 구절인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이것을 말씀해 주시는 비유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열 처녀 중에서 다섯 처녀는 슬기롭게도 등에 기름을 충분히 채워 놓고 신랑이 오기만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다섯 처녀는 미련하게도 등에 기름을 채워 놓고 있지를 않은 상태에서 신랑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으나 기름을 채워 놓고 있어야 하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신랑이 밤이 늦도록 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기다리는 중에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열 처녀 모두가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밤중에 “신랑이 온다. 나와서 맞아들여라”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러자 잠들었던 열 처녀는 정신이 번쩍 들어 모두 일어나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등불로 문 밖을 밝히며 신랑을 맞이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등에 기름을 채워 놓지 않은 미련한 다섯 처녀의 등은 불이 깜박거리며 힘이 약해져 점차 희미하게 꺼져갔습니다. 이때에서야 미련한 다섯 처녀는 비로소 자신들이 등에 기름을 채워 놓는 일을 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당황하며 난처해했겠습니까? 그러자 미련한 다섯 처녀는 등에 기름을 채워 놓은 슬기로운 다섯 처녀에게 자신들에게 기름을 좀 나눠달라는 부탁을 하였습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그 부탁을 받고서 대답을 하였습니다. “우리 것을 나누어 주면 우리마저 기름이 부족하게 되어 얼마 지탱을 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니 그보다는 차라리 가게에 빨리 뛰어가서 너희가 쓸 기름을 사오는 것이 낫겠다.”
이 말을 들은 미련한 다섯 처녀는 달리 방법이 없으므로 기름을 사러 갔습니다. 그 사이에 신랑이 왔습니다. 등에 기름을 준비하고서 신랑이 오기만을 기다렸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를 하러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문은 잠겼습니다. 그런 뒤에 미련한 다섯 처녀가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문이 잠긴 것을 보고는 다급한 목소리로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습니다. “주님(주인님), 주님, 문이 닫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들어갈 수 있도록 문 좀 열어 주세요.” 그러나 신랑이 안에서 말하였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마치시면서 제자들에게 해 주고자 하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예수님은 “너희는 내가 말하는 비유를 귀 기울여서 잘 들었느냐? 그렇다면 항상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고 있지 않느냐?” 하는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의 열 처녀 비유에서 예수님이 말씀해 주시는 핵심은 예수님이 언제 오시는지 그 날과 그 시간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 상태 속에서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중에 있는 항상 깨어 준비하고 있는 슬기로운 자들을 이야기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여, ‘깨어 있는 것’을 ‘슬기로움’, 곧 ‘지혜로움’으로 연관시켜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등에 기름을 준비하고 있는 것에서 하셨습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등에 기름을 충분히 채워 놓고 신랑을 기다림에 있은데 따라 늦은 밤중에 오는 신랑을 맞이하여 집안으로 들였고,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해 놓고 있지 않다가 신랑이 온다는 소리를 듣고서야 기름을 사러 가게에 다녀오는 중에 문이 닫혀 들어오지 못하게 된 것은 신랑이 ‘깨어 있으라’고 하신 그 깨어 있음에 있어 신랑을 맞이함에 있어야 할 준비에 있은 슬기로움과 그렇지 않은 미련한데 따른 것입니다. 하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깨어 있어라”라고 하시는 말씀은 “너희는 미련한 자가 되기 말고 지혜로운 자가 되어라”라고 하시는 말씀과 같습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 예수님은 이 각각의 서로 다른 사람으로서의 열 처녀에게 각각 그들에게 합당한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에게는 신랑과 함께 들어가 혼인식에 참여하며 잔치의 즐거움에 있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에게는 그들의 문을 열어달라는 외침의 간청에 도무지 그들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이처럼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는 슬기로움에 있는 ‘깨어 있어라’고 하신 깨어 있는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야겠습니다. 깨어 있을 것을 말씀하신 것은 문자적으로는 ‘정신을 차리고 있으라’, ‘주의하라’는 의미입니다만, 이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을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에서부터 시작되는 종말론을 강론해 주시는 것에서 사용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 성을 방문하는 마지막 시기에 있는 상태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함,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은 크고 견고함, 그리고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예수님께 그 모습을 보실 것을 말하였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제자들에게 그들이 보는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 얹혀 있는 것이 없을 정도로 심하게 훼파되는 무너짐에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알아 듣지를 못하므로 그런 일이 언제 있을 것인지, 그리고 과연 그 일이 일어난다면 주님이 다시 오시는 세상 끝 날에나 있을 것인데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징조로 어떤 것이 있을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무너짐과 세상 끝날을 하나의 사건으로 두고서 그 사이에 있게 될 그들에게 있을 일을 알려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에 의해 임재해 계시지 않을 것임을 현시적으로 나타내 주시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야 할 하나님의 통치가 성전을 통해서 행해지지 않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서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가 행해지지 않는 건물로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2차 성전 파괴 사건은 그리스 제국이 넷으로 분열되었던 시기의 셀류쿠스 왕국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에 의해서 성전에 제우스 신상이 세워지고 돼지 피가 뿌려지는 등 짓밟혀지고 더럽힘을 받음에도 그들에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에서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교회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이 기록이 과장되었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나, 민간인까지 합산하여 1,100,000명에 달하는 유대인이 죽었으며 이 사망자 중 상당수는 로마인들이 가지고 온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어갔습니다. 그리고 97,000명이 노예가 되었으며, 많은 사람이 지중해 주변 지역으로 피신하여 흩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바벨론 유슈에 의해서 있었던 유대인의 디아스포라는 다시 있게 되어 1948년에 이스라엘이 국가로 회복되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재난을 겪을 것에서 예수님은 전쟁, 기근, 지진에서 겪는 온갖 재난으로 산으로 도망하는데 집 안에 있는 물건을 챙기며, 옷을 입을 여력이 없어 모든 것을 놔두고 서둘러 몸만 빠져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는데, 아이를 가진 여자들과 갓난아기가 딸린 여자들은 불행을 배나 더 겪는 처지가 되고, 겨울이나 안식일에 피난 가는 일이 없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혹독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반드시 있을 것이지만 그것으로 끝이 온 것은 아니니, 그 모든 재난은 단지 재난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하여서, 재난이 계속되어 갈 것임을 말씀하셨는데, 이는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으로 인자의 오심이 있게 되는 세상의 끝날이 되어서야 끝날 것이었습니다.
그러할 것인데 예수님은 이렇게 예루살렘 성전의 무너짐으로부터 시작하여 온 세상으로 확대되어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되어 있게 되는 재난 속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겪게 될 것을 알려주십니다.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의 출현에 의한 미혹 받음(마 24:4-5, 11),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이유로 고통과 죽임을 당할 것이며 온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것,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죄 가운데 다시 빠져 들어가 서로 배반하고 미워함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 그리스도에게서 떠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을 말씀하여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권능으로 그들의 구원 얻는 믿음을 견인해 가실 것을 알려주셨습니다(마 25:13). 이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모두 찾아 부르심으로 구원의 충만수에 이를 때까지 계속될 것이며, 그렇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모두 구원하시는 천국 복음의 사역이 마쳐지는 그 날은 세상 끝이 되는 때가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마 24:14).
하여 예수님은 열처녀 비유에 이르기까지 반복하여 강조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인자(주님)가 오실 것이며,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니 너희는 깨어 있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마지막 방문하시는 것으로 이제 십자가에 달려 대속물이 되시는 구속주의 죽음을 당함에 있게 됩니다. 하지만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영광스런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면서 세상 끝날이 이르기까지 자신의 제자들과 그들을 통해 세워나가실 믿는 자들, 곧 교회와 함께 하시면서 주께서 주신 생명 얻는 구원의 믿음을 견인해 가십니다. 그러니 열처녀 비유를 들어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있을 이 모든 일을 깨달아 알겠느냐? 그러니 너희는 내가 세상에 다시 올 때까지 깨어 있어 맞이함에 있는 준비에 있어라. 깨어 있어 나를 맞이함에 있는 너희를 데리고 하나님 나라에서 베푸는 잔치에 참여하게 하겠다”고 말입니다.
사도로서의 직무를 수행하게 되는 제자들에게서 “깨어 있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름에 있는 것은 그들에게 맡겨진 천국 복음의 전파에 있음으로써 예수님께서 “내 교회를 세우겠다”(마 16:18)라고 하신 사명을 수행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사역에 의해서 온 땅에 세워진 그리스도의 교회에게서 “깨어 있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름에 있는 것은 무엇이겠는지요. 그들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10:32-33)는 말씀에 따른 그리스도를 시인함에 있습니다. 이는 “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라고 하신 말씀에 의한 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주신 것에서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 이름을 의존하며 따름에 있는 믿음입니다. 그들을 주남께서는 주님의 오심으로 도래한 천국에 대해 항상 깨어 준비하고 있는 상태에 있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그들의 믿음의 주로부터 천국에 깨어 준비하고 있는 자가 될 것을 감독과 그 지휘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천국에 대해 아무런 인식 없이 무감각 하게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며, 이는 천국 백성 된 자신의 존재성을 잊고 살아가는 태만이 됩니다. 그러기에 주께서는 자신이 함께 하는 자들을 슬기로움에 있게 하십니다. 해서 미련한 다섯 처녀의 운명이 아닌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운명에 있게 하신 주님을 찬양케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주님의 피 값으로 산 자가 되지 못한 자들은 미련한 다섯 처녀의 운명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니, 결코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운명에 있을 수가 없게 주님이 그들 앞에 오시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슬기로움에 있는 ‘깨어 있어 준비하는 자’로 있게 하시는 일을 하나님의 영이시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하십니다. 성령님은 믿는 자 안에 거하시면서 주께서 오실 것에 깨어 있어 준비 속에 있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주님이 오실 그날까지 그분의 기다림 속에 있는 신앙에서 겪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교회가 어떤 믿음에 있었는가를 말한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장차 자신들을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에서 구원하여 주실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믿고서 그 예수께서 하늘에서 다시 오실 날을 열렬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살전1:10).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을 기록하기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 라고 하면서 주님의 오심에 대한 이 열렬한 기다림에 있는 슬기로움에 있었으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계22:21)이라고 기원하였습니다. 주님의 오심에 깨어 있어 맞이할 준비에 있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함께 하시는 것으로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이신 예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시면서 자신들을 천국에 들이시기 위하여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을 알고 깨어 준비에 있는 자는 그 깨어 준비함이 예수님을 믿는 자로 살아가는 자신의 전 생활에 스며들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일에 있든지 간에 주님의 인도와 도우심을 따르며, 그래서 어떤 상황에 부딪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일의 상황에 있든지 간에 그 모두에서 주께서 자신을 부르신 부르심의 상태에서 자기 생을 따로 갖지 않고 주신의 주가 되신 예수님을 항상 기억하고 생각하며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참조, 고전7:17-24). 그런 그에게서는 주님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여 자기 생을 따로 챙기고자 하는 딴 주머니를 차는 것이 없습니다. 자신의 믿음의 주이신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을 알고 주와 함께 그와 함께 그의 나라에 들어갈 기다림의 열망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잘 나타내 주는 말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가 한 말입니다.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는 1517년에 시작하여 1546년에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쉼 없이 자신의 길을 달렸습니다. 그렇게 하여 30년에 걸친 종교개혁이라는 큰 싸움을 다 마치고 1546년 2월 18일, 64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는데, 그는 다음과 같은 신앙 표어 속에서 살았습니다.
“어제 주님이 돌아가셨고, 오늘 부활하셨으며, 내일 다시 오실 것처럼 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