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금반初 김팔룡 교장 나무판 교실에 분필 없애 편백나무 욕조 시설까지… 먼 곳서 전학생 찾아들어
2007년 9월 경남 함양군 휴천면 금반초등학교에 부임한 김팔룡(60) 교장은 난감했다. 전교생 18명으로 군내(郡內) 13개교 중 꼴찌였다. 이런 식이면 '폐교(廢校)'는 시간 문제였다. 1947년 지리산의 관문 삼봉산 오도재 기슭에 문을 열어 2000여명의 졸업생을 낸 학교의 운명이 기로에 서 있었다.
김 교장은 오일창 당시 교육장과 머리를 맞댔다. "도시 학생 상당수가 아토피 질환으로 고생한다지요."(오 교육장) "일본에서는 아토피 아이들이 시골 학교를 찾아 치료하고 공부한다던데…. 아! 우리도…?"(김 교장) 전국 최초의 '아토피 제로(zero) 특성화 학교'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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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팔룡 교장 / 함양 금반초등학교 2학년 교실에서“아토피 피부염에 대해 누가 설명해 볼까”질문을 던지자 아이들이 손을 번쩍 들었다. 맑은 환경에서 밝 은 친구들과 함께 생활하며 아토피 아이들은 몸과 마음의 건강을 함께 찾고 있었다.
금반초교 교사(校舍)는 단층이다. 다른 학교 절반 크기 교실에서 적게는 세 명, 많게는 일곱 명이 공부한다. 교실 벽과 천장에는 낙엽송 재질의 나무판을 덧대 미세 먼지를 막았다. 교실에는 분필 가루도 없다. 6학년 담임 서춘래(45) 교사는 연두색 칠판에 무공해 수성 잉크펜으로 판서했다.
"먼지에 민감한 아이들을 위해 교실마다 공기 청정기와 진공청소기를 놓았습니다. 벽에 전자 온도·습도계도 보이시죠?" 서 교사를 따라 건물 뒤로 갔다. '치료실' 팻말이 붙은 방문을 열자 알싸한 향내가 퍼졌다. 사우나에 있을 법한 편백나무 욕조로, 아토피 아이들이 사용하는 샤워 시설이다.
소문이 퍼지며 작년부터 도시의 아토피 아이들이 하나 둘 전학오기 시작했다. 올 전교생 31명 중 아토피 아이들은 모두 11명이다. 경남 산청과 통영, 멀리는 서울·인천·대구·부산 등 대도시에서도 찾아왔다. 팔뚝 피부가 허옇게 일어나고 얼굴이 시뻘겋게 붓고 짓물러 터진 아이들이었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나고 자란 도시와 시골 아이들이 잘 섞여 지낼 수 있을까. 김 교장의 걱정은 기우(杞憂)였다. 초미니 학교에 다니며 사람이 그리웠던 시골 아이들에게 아토피 전학생들은 반가운 친구가 됐다. '무공해' 친구들과 같이 뛰고 깔깔거리며 도시 아이들의 마음도 활짝 열렸다.
서 교사가 '아토피여 안녕!'이란 제목의 파일을 들고 왔다. 아토피 피부염 상식부터 '아토피 친구를 생일잔치에 초대할 때 상차림'처럼 생활 속에서 활용하는 내용까지 담긴 20주짜리 교재였다. 그는 "친환경 시설보다 중요한 게 옆 자리 친구의 어려움을 이해하는 배려심"이라고 했다. 금반초교는 앞으로 2년 동안 경남도 교육청이 지정한 환경성 질환 연구 학교로 운영된다. 보건실에는 아이들 병력(病歷)과 알레르기성 질환에 대한 가족력(家族歷), 아토피 증상 부위가 기록된 파일이 있었다.
5학년 건우(11)의 차트에는 '봄과 환절기에 특히 심하다' '우유와 달걀에 민감' '시험을 앞두거나 불안하고 긴장했을 때 증세가 심해진다'고 적혀 있었다. 며칠 간격으로 증상 변화를 기록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얼굴의 각질이 적어진 상태임. 얼굴 부위만 드레싱하고 나갔음'(7월 2일), '증상이 심하지는 않지만 날씨가 더워 가려움이 유발될 가능성 있어 목욕 예정'(7월 5일), '내일 시험 때문에 오늘을 쉬고 내일 시험친 후에 목욕 예정'(7월 14일)….
16일은 건우가 이곳에 온 지 1년째 되는 날이다. 어머니 김청희(43)씨는 "여기 오기 전까지 한약·양약·생약치료에서 미술·심리치료까지 10년 동안 안 해 본 게 없다"면서 "나병 환자를 치료하는 병원에 다닌 적도 있다"고 했다. 얼굴에 진물이 줄줄 흐르고 냄새까지 나는 아들을 같은 반 친구들은 '괴물' '외계인'이라 놀려댔다고 한다. 밤새 긁적이던 아들은 아침이면 곯아떨어져 등교를 못하기 일쑤였다. 아토피에 좋다는 시골 황토방을 찾아다니다 함양 금반초등학교를 만나게 됐다는 김씨는 "이제 마음을 놓았다"고 했다.
2학년 담임 이상수(57) 교사는 "약물치료보다 중요한 게 스트레스 없는 생활"이라고 했다. 이 교사는 매주 4번 방과 후 수업시간에 '숲 속 치유 교실'을 열어 아토피 아이들과 학교 뒷산에서 1시간 정도 산책한다. 날이 좋으면 삼봉산에 올라 피톤치드 삼림욕과 바람을 쐬는 풍욕(風浴)을 한다. 손뼉을 치고 깔깔거리며 스트레스를 확 날려버리는 웃음 치료도 빼놓지 않는다.
"즐겁게 생활하는 아이들 몸에선 면역력을 키우는 물질이 팍팍 나오나봐요. 처음 올 때 짜증이 가득하던 아토피 아이들의 표정이 이렇게 환하게 바뀌었잖아요."
11일 점심시간 급식 메뉴는 보리밥과 청국장찌개, 삶은 우엉잎과 양상추, 쇠고기 불고기와 김치였다. 가급적 유기농 채소나 텃밭에서 직접 기른 채소를 먹는다고 했다. 학교 건물 옆 장독대의 간장과 된장, 고추장도 아이들 급식에 쓴다고 했다. 후식은 참외 두어 조각이었다.
김 교장은 "주변에서 '아토피 아이들 천국'이라고 좋게 말씀하시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면서 "전임 보건교사와 영양교사가 없어 걱정"이라고 했다. 외지에서 오는 아토피 아이들이 느는데 보호자와 함께 지낼 숙소가 충분치 않아 마을 빈집에 살거나 읍내에서 방을 얻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김 교장은 10여 가족이 머무를 수 있는 원룸형 기숙사 건설 공사를 늦어도 9월에는 시작하겠다고 했다. 그의 정년은 2012년 2월까지다. 그는 15일 스승의 날에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교장실 벽에는 '작은 학교, 큰 열정(small school, big passion)'이란 글귀가 붙어 있었다.
"뻘건 얼굴로 기가 팍 죽어 전학 온 아토피 아이들이 뽀얀 얼굴로 활짝 웃으며 졸업하거나 집에 돌아갈 때 최고로 신납니다. 올 여름방학 때 1주일에서 열흘 정도 '숲 속 치유 캠프'를 열어요. 함양IC에서 10㎞ 떨어졌으니 그리 멀지 않죠? 꼭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