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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2. 묵상글 들 ( 부활 제5주일-사랑해서 남주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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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2.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활 제5주일-사랑해서 남주나?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공통어는 주님 안에 머묾이고
그래서 부활 제5주일 주제도 주님 안에 머묾이겠습니다.
나그네와 순례자의 영성을 살아야 하고, 그래서 매일 떠나야 하는
우리 프란치스칸들은 이 말씀을 듣고 어떻게 해야 하나,
머문다면 어디에 머물러야 하나 즉시 생각게 됩니다.
물론 우리는 오늘 주님 말씀에 순종하여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머물지 말고 떠나야 합니다.
같은 주님께서 또한 가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떠나야 할 때는 떠나야 하고,
머물러야 할 때는 머물러야 하는 것인데
그래도 주님의 가장 강력한 명령은 당신을 따르라는 것이고,
주님을 따를 때 이 '떠남과 머묾'이 동시에 실현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따라서 가는 것이기에 당연히 머물지 않고 계속 가는
것이고, 혼자 제멋대로 가거나 주님을 떠나서 가는 것이 아니라
같이 가는 것이고, 늘 주님 곁에 머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름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말 그대로 주님을 졸졸 따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분의 명령과 삶을 따르는 것인데, 물론 둘 다 사랑입니다.
먼저 졸졸 따르는 사랑은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랑이요,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아 내가 충만해지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병아리가 닭을 쫓고, 아이가 엄마 치맛자락을 붙잡고 따라가듯
그 목적 자체가 주님 사랑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것이요
그 사랑 안에 머물고, 그 사랑으로 내가 충만해지기 위한 것이기에
철저히 나를 위한 것이고 나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가 당신을 떠나지 말고 머물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없으면 당신이 허전하거나 아쉬어서서가 아니라 철저히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하라시는 것이니 주님 안에 머무는 것을
마치 우리가 주님께 선심쓰듯이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주님의 명령과 삶을 따르는 것은 보다 성숙한 사랑으로서
받은 사랑을 나누기 위해 이웃을 찾아가는 사랑이요,
받기만 하던 사랑이 주는 사랑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아이였을 때 엄마의 치맛폭을 떠나지 못하던 것이
사춘기를 지나면 차츰 친구와 더 많이 어울리고
사랑의 짝을 찾아가는 것처럼 우리의 사랑도 성장하면
주님 사랑 안에 머물지만 않고,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합니다.
그런데 이것도 실은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공부해서 남주지 않는 것처럼 사랑해서 남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하면 내 안에 있던 사랑이 빠져나가 그에게 다 가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고 오히려 더 사랑으로 내가 충만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신비입니다.
돈은 주고나면 내게 없고 그에게 있지만
사랑은 줘도줘도 내 안에서 넘치고 그를 채우는 것입니다.
내가 그를 채우면 하느님 사랑이 나를 채우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라고 얘기하는 오늘 요한 1서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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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2. 부활 제5주일. 고도미니코 신부님.-터키 에페소 기도의집
2021년 5월 2일 부활 5주일(생명주일)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 당신과 우리가 사랑안에 하나로 서로 결합되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때에는 포도나무와 같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지녀 다른 이들에게 베푸는 마음을 지니기도 하다가 다른 때에는 누군가에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으려는 전적으로 외부에 의존하는 가지와 같은 마음을 지닐 때도 있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 바르나바와 사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들어가서 주님의 제자들과 어울리려 하였지만 모두 그를 믿지않고 두려워하여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울은 가지와 같은 존재가 되었기에 포도나무와 같이 의지할 누군가가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먼저 바르나바가 그의 포도나무가 되어 줍니다. 바르나바는 사울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그를 지지해 줍니다. 바르나바는 사도들을 설득하여 사울을 제자 공동체에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 이후 사울에게 제자 공동체는 포도나무와 같은 존재가 되었고 공동체에 가지와 같이 소속되어 친교를 나누며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게 됩니다.
이처럼 사울이 포도나무에 떨어져 나간 가지처럼 말라 죽을 상황에서 바르나바와 제자공동체는 그의 포도나무였습니다. 이런 믿음과 사랑에 힘입어 사울은 가지에서 포도나무와 같은 존재로 거듭나게 됩니다. 사울은 자신의 포도나무에서 사랑, 기쁨, 평화의 열매를 맺어 모든이에게 희망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제 2독서에서 요한 1서는 단죄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라고 얘기합니다. 단죄 받는 사람은 사랑이라는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가 말라 비틀어져 죽어가는 존재가 됩니다. 사랑받고 사랑으로 결합될 때 사도 바오로 처럼 사랑, 기쁨, 평화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한국교회는 죽음의 문화가 만연한 오늘의 사회를 생명의 문화로 건설해 나가자는 뜻에서 5월 첫주일 을 생명주일로 지내고있습니다. 생명의 문화는 다름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격려와 칭찬은 아첨이 됩니다. 사랑이 없는 꾸지람과 충고는 비난이 됩니다. 사랑이 없는 관심은 간섭이 됩니다. 사랑이 없는 정의는 폭력이 됩니다. 사랑이 없는 존중은 시기와 질투가 됩니다. 사랑이 없는 겸손은 교만이 됩니다. 사랑이 없는 나눔은 인색이 됩니다. 이처럼 사랑이 단절되어 아첨, 비난, 시기, 질투, 교만 등으로 만연이 되어 그 어디에서 사랑을 찾아 볼 수 없을 때 이것이 죽음의 문화입니다. 이런 죽음의 문화의 결과로 고통받는 이들, 가난한 이들, 억압받는 이들, 소외된 이들이 생겨납니다. 이런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바꾸려면 우리 각자는 포도나무이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포도나무이신 주님의 사랑을 바라봅시다. 그 분의 사랑안에 머무를 때 우리 또한 다른이의 포도나무가 되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 스스로가 메마른 가지 체험을 해야 합니다. 사랑이 단절되어 외로움, 불안, 절망, 괴로움, 고통으로 영혼이 메말라 죽어갈 때 그분의 사랑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죽음의 체험을 통해서 참사랑의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가지처럼 메마른 이들의 심정을 깊이 이해하게 되고 존재 깊은 곳에서 사랑이 흘러나와 함께 아파하고 고통을 나누고 그들의 버팀목이 되어 줄 수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말한 참된 사랑의 의미를 실천하며 사람을 살리는 작은 일꾼이 되시길 바랍니다.
“자기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나 함께 있을 때나 똑 같이 그 형제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그 형제 앞에서 사랑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을 뒤에서 말하지 않는 종은 복됩니다”
고 도미니코 o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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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2. 부활 제5주일. 키엣 대주교님.
불필요한 가지는 잘라 버려야 합니다
나무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원합니다. 꽃과 열매는 정성과 사랑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잎이 푸르다고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고 볏잎이 푸르다고 좋은 벼를 수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잎과 줄기보다 중요한 것이 열매인데 곁가지를 얻노라 정말 중요한 것을 잃는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삶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영적인 삶을 포도나무 가지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삶
포도나무와 가지는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보여줍니다. 형식적인 하나가 아닌 하나의 생명으로 결합된 하나가 중요합니다. 마치 나무와 가지가 서로 붙어 수맥을 통해 같은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형제 자매와 함께하는 삶
포도나무와 가지는 하나이자 전부입니다. 가지는 줄기와 뿌리로 이어져 하나의 나무가 됩니다. 오직 하나의 수맥, 하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따라서 생명이신 주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이기적인 개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함께하는 삶의 결과는 열매입니다.
나무는 생명수인 수액을 공급하고 가지는 그것을 받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가지에서 꽃이 피고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가지는 나무 줄기에 꼭 붙어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불필요한 가지는 잘라내야 수액이 낭비되지 않습니다. 잎이 푸르고 무성하며 가지가 많은 나무는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결코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열매를 맺기위해서는 불필요한 가지치기가 필요하지만 수맥을 상하지않게 잘라야 영양분이 흘러갈 수 있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포도밭이 언제나 푸르고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포도밭 주인이 정성을 들이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죽고 사라지는 인간이 아니라 풍성한 열매를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포도나무가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있는 것처럼 인간이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과의 친밀함
가지가 포도나무와 붙어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삶의 원천이신 주님과 함께 있을 때, 주님과의 완전한 일치가 이루어질 때 내 마음속에 계신 그 분의 의지대로 우리의 모든 것이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나를 치장하는 불필요한 가지를 잘라내야 합니다
너무 많은 가지는 성장을 방해합니다. 내 뜻대로 마구 자라고 있는 가지들을 잘라주어야 주님의 뜻대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영혼 깊숙히 들어갈 수 있도록 겉치례를 잘라내야 합니다. 소박하고 겸손한 마음을 얻기 위해 과장된 권위를 잘라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실패를 통해 마음속 곁가지들을 잘라내도록 인도하십니다. 타인의 비판과 오해, 의심과 배반 등을 통해 필요없는 곁가지를 잘라내야함을 일깨워주십니다. 필요없는 가지를 잘라내는 고통을 통해 변치않는 이익을 줄것입니다.
예수님과 아버지 하느님과의 일치된 삶은 우리가 본 받아야할 모범이십니다. 주님의 뜻을 찾기 위해 기도하고 그 뜻에 순종할 때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진정한 포도나무이신 주님,
저희가 진실로 주님과 하나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저희가 주님의 뜻대로 신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저희에게 해로운 것을 잘라내야 함을 알게 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주님과의 친밀함을 방해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2. 잘라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3. 주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항상 잘라낼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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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2. 부활 제5주일.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이날치라는 밴드의 노래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판소리인데 판소리 같지 않으며, 너무 신나서 저절로 어깨가 들썩입니다. 그래서 어떤 밴드인지 인터넷을 살펴보니, 보컬 4명이 모두 국악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노래도 실제 판소리를 편곡해서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판소리를 고리타분하고 지루한 음악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이지만 사랑하기가 힘들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날치의 노래는 젊은 아이들도 좋아하고, 심지어 가사를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인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유의 음악을 이렇게 바꿔도 되는 것일까? 전통에 어긋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의문을 이날치 구성원 중 한 명이 인터뷰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흥선대원군, 고종 때 했던 판소리와 정조 때의 판소리가 같을까요? 아니란 말이죠. 지금 제가 즐기는 게 21세기의 판소리라고 생각해요. 갓 쓰고 도포 입고서 하는 것도 21세기의 판소리고, 이날치가 이렇게 하는 것도 21세기의 판소리인 거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전통에 맞지 않는다고, 전통을 끊는 것이라 말할 수 없겠지요. 새로운 세상에 새롭게 맞춘 바로 ‘나’의 모습이 정답입니다.
예수님을 반대했던 종교지도자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은 전통이라는 율법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주님의 모습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포도나무이신 주님께 꽉 붙어 있는 모습입니다.
주님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라고 했습니다. 포도나무에서 떨어진 가지가 과연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열매 맺기를 원한다면 그 포도나무에서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만약 자신이 생각하는 모습과 다르다면서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간다면 큰 손해를 입는 것은 가지인 자기 자신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꽉 붙어 있어야 합니다. 시대에 따라서 많은 것들이 변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변화에 맞춰서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과거에 매여 있으면서, 주님을 의심하고 주님과 함께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아브라함 시대에는 아브라함에게 딱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 이사악 시대에는 이사악에게 딱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 야곱 시대에는 야곱에게 딱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는 바로 ‘나’에게 딱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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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자. 삶은 우리에게 고통과 아픔만을 안겨 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랑이라는 묘약을 더불어 안겨주었다(백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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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감사한 선물
이제 고령이신 언론인이며 문학 평론가이신 이어령 선생님께 다음과 같은 질문을 기자가 했습니다.
“뒤늦게 깨달은 생의 진실은 무엇인가요?”
선생님은 곧바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집도, 자녀도, 책도, 지성도, 분명히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다 선물이었다는 거죠. 우주에서 선물로 받은 이 생명처럼,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게 다 선물이더라고요.”
큰 공감이 가는 말씀이었습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내 것을 지키겠다는 노력을 얼마나 많이 하게 됩니까? 그러나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다 감사할 일이며, 기쁘게 나눠줄 수 있는 사랑을 간직하게 됩니다.
세상에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삶을 마쳤을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심지어 내 몸뚱이조차 못 가져갑니다. 결국 ‘내 몸’이라 불리는 이 몸도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다 감사한 선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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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2. 부활 제5주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의 내용은 포도나무와 그 가지에 관한 내용이다. 복음의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비유는 잘 알려진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평범한 내용 같지만, 그것은 훨씬 더 풍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교회는 "주님께 대한 두려움"과 "성령의 역사"로 성장한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보다도, 주님께 대한 성실성, 즉 주님께 대한 두려움과 성화하시는 성령의 힘, 즉 성령으로 가능하다. 포도나무의 비유는 역시 이것을 말한다. 바오로 사도가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고 복음을 전했지만 예루살렘 교회와 일치하려고 한 것은(1코린 9,1), 성령의 특은이 교회 밖에서나 교회를 거슬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서 주어진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의 모든 카리스마를 다 해도 그 그늘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위대한 바오로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에 대한 삶의 모습은 '말로서가 아니고 행동과 진실에 의한 상호신뢰와 참된 사랑으로' 사는 모습(1요한 3,18)이어야 한다. 그래서 어떤 가지도 자기 탓이든, 타인의 잘못이든 간에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가서는 안 된다.
복음: 요한 15,1-8: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1절) 아들은 우리가 아들 안에서 열매를 맺도록 우리에게 참 포도나무가 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포도나무라 하시며 그분과 성령 안에서 결합한 이들은 가지라고 하신다. 가지들은 포도나무와 연결됨으로써 포도를 맺는다. 우리는 삶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며 살아가야 한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마음에서 사악한 씨앗을 없애고, 말씀의 쟁기로 우리 마음을 갈아엎고, 계명의 씨앗을 뿌리시고 열매가 맺히기를 기다리신다.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2절) 가지들은 열매를 맺고 자라는 데 필요하다.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가지들은 모두 잘리고 만다. 예수님의 복음이라는 포도나무도 세상 곳곳으로 심어졌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예루살렘은 그래서 버려지고 말았다. 사랑에서 나오는 선행으로 우리가 단단히 결합하지 못하면 우리가 가지라고 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죽은 가지가 될 것이다. 그런 가지는 잘릴 것이고, 농부는 잘린 가지들을 쓰레기처럼 태워 버릴 것이다. 열매를 맺는 가지는 아버지의 세심한 보살핌으로 더 큰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신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3절)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은 각 사람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가 그 사람의 숨겨진 뜻을 하느님 앞에 드러내어, 성령을 통해 인간의 헛된 욕망에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대어 깨끗하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열매를 맺도록 덕에 도달하게 할 것이다. “내 안에 머물러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4절) 가지가 포도 줄기로부터 생명의 수액을 받지 못한다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우리도 우리를 기르시는 분과 결합하여 있다면 생명을 주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그분 안에 확고히 머물러야 한다. 왜냐하면 가지는 자신 생명의 수단이 되는 것을 줄기에서 취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제자들 안에 머무시는 것은 제자들을 위한 것이다. 가지가 잘려도 줄기에서 새로운 가지가 움터 자라지만, 잘린 가지는 뿌리와 떨어져 죽고 만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5절) 가지가 줄기에서 생겨나듯, 주님으로부터 우리도 그분의 은총을 받아 부활과 구원의 뿌리로 지닌다. 아버지께서는 농부로서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육체인 포도나무를 보살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나약하기에 선을 하려 해도 선을 베푸시는 분 없이는 아무것도 완성에 이를 수 없다.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다. 그때 그는 많은 열매도 적은 열매도 맺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무르도록 하는 것이다. 그분의 말씀은 모자람이 없는 자산이며 모든 풍요로움의 근원이다. 그분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삶 속에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이 아니다. 뿌리로부터 생명을 끌어 올리지 않는 죽은 가지와 같다. 우리는 언제나 그분의 말씀 안에 머무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8절)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의 삶이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한다는 것이다. 그 영광은 하느님의 영광이지 사람의 영광이 아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여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해 드리는 것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이다.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때, 아버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 영광을 나 자신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 그 영광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그분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복음에서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하신 것이다. 그런 선행이 인간의 힘만으로는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시는 것은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때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에페 2,10)라고 한다.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알 수 있는 것은 그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다. 즉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진정으로 형제를 사랑하는지에 달려있다.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으려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때 가능하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내용이 우리의 삶 속에 잘 드러날 수 있도록, 그래서 초기 교회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우러러보았던 것 같이 사랑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노력하고 늘 기쁨을 누리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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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2. 부활 제5주일.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제2독서에서 요한 사도는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라고 권고합니다. 실천이 없는 사랑은 알맹이 없는 사랑 곧 껍데기만 남은 가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성경을 펼치면 온통 ‘사랑’에 대한 이야기인 듯합니다. 신부님들의 강론이나 여러 신앙 강좌의 주제 또한 사랑에 대한 것이 가장 많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주변에서 귀가 따갑도록 듣는 말도 사랑이고 인기 많은 대중가요의 주제로도 사랑은 단골 메뉴입니다. 사랑하고 있을 때 이런 노래를 들으면, 더 가슴이 뛰고 기쁩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이 세상은 온통 사랑이라는 말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너무나도 흔해 쉽게 휴지통에 버리는 휴짓조각처럼 널려 있기도 하고, 내가 가진 것만 사랑이고 나머지는 아니라고 쉬이 판단해 버리기도 합니다. 요즘 사회에서 사랑은 점점 사라지고 경시되며, 유치한 것으로 치부되기도 합니다. 사랑보다는 돈과 명예 그 밖에 많은 물질적인 것에 사랑의 자리를 양보하고 “사랑이 밥 먹여 주니?”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랑은 어떤 것인가요? 오늘 복음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다음 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예수님께서는 사랑 그 자체이시기에 당신과 함께 머무름이 참사랑임을 알고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무른다면 이 사랑은 머무름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몸소 보여 주신 자기 증여의 삶 곧 이타적인 삶으로 이어져, 사랑을 말로만이 아니라 직접 실천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우리는 사랑함으로써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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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2. 부활 제5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에서 발행된 신용카드를 미국에서 사용하려고 하니 스마트폰에 인증번호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컴퓨터에서 보안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발행된 신용카드를 한국의 사이트에서 사용하려고 하니 미국 카드회사의 보안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합니다. 컴퓨터에서 사용하려면 인증번호나 보안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합니다. 몇 번 시도를 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무통장 입금을 하니 결재가 가능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연결되는 많은 길이 있습니다. 무료로 사용하는 것도 있지만 광고 없이 보거나,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보기 위해서는 매월 회비를 내는 곳도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기위해서는 나만의 길을 열어야 합니다. 나만의 길을 열기 위해서는 ‘비밀번호’를 만들어야 합니다. 비밀번호가 발전해서 지문인식도 있고, 홍채인식도 있고, 목소리 인식도 있습니다. 비밀번호는 잘 간직해야 하고, 가끔씩 변경해 주어야 합니다. 외부로 노출되는 경우에는 신분이 노출되는 피해를 입기도 하고, 경제적인 피해를 입기도 합니다. 가끔씩 비밀번호를 잃어버려서 문을 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비밀번호를 모아서 보관할 필요도 있습니다.
작년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주로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집에 머물면서 작은 텃밭을 가꾸었습니다. 상추, 깻잎, 고추, 파, 방울토마토, 호박, 오이를 심었습니다. 올해도 땅을 일구고, 거름을 주었습니다. 모종을 심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매일 아침 밭에 물을 주었습니다. 30분 정도 물을 주면 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견디어 냈습니다. 고추나 오이는 지지대를 세워야 했습니다. 줄기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여린 모종이 조금씩 자라면서 줄기가 커지고, 잎이 돋아납니다. 예쁜 꽃들이 하나둘 피고, 꽃이 진 자리에 작은 열매가 생기는 것을 봅니다. 손톱만한 것들이 점점 자라서 알찬 열매를 맺습니다. 물과 햇빛 그리고 정성이 함께하면 이웃과 나눌 수 있는 풍성한 먹거리가 되었습니다. 상추는 신기하였습니다. 잎을 따서 먹으면 곧 다시 잎이 나왔습니다. 올 여름에도 물을 주고, 관심과 정성을 기울이면 알찬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머물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전해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회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녔습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고 ‘회개’하였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 사도는 이제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닭이 울면서 베드로 사도는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한 베드로 사도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초대교회의 두 기둥인 바오로와 베드로 사도는 회개함으로써 복음의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행동’입니다. 텃밭은 며칠만 물을 주지 않으면 시들어서 말라 버립니다. 틈틈이 잡초를 뽑아 주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머물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늘 ‘겸손’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늘 ‘십자가’를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늘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겸손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의 사랑은 죄인까지도 품어주는 사랑입니다. 나를 미워한 사람까지도 용서해 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수난과 고통까지 감수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끝까지 믿어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열정적인 사랑입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는 사람은 물가에 심어진 나무처럼 생기가 돋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는 사람은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고 해도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악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친교는 구체적인 우리의 행동과 사랑을 통해서 드러나야 합니다.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를 통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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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2. 부활 제5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제자되어 참으로 살기
- 공동체 삶의 축복 -
한 번 뿐이 없는 유일회적 삶에 누구나의 소망은 참으로, 진짜 살기일 것입니다. 임종을 맞이하여 후회없는 만족한, 행복한 삶을 살았다 고백할 수 있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요. 주님 앞에 갔을 때 주님께서 묻는 단 하나의 질문은 ‘행복하게 살았느냐?’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의 그날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행복하게 사는 것이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참 아름다운 하느님의 선물, 신록의 계절 5월 성모성월에 계속되는 부활축제 시기요, 하느님 주신 생명의 선물에 감사하며 참으로 행복하게, 살도록 우리를 분발케 하는 참 좋은 부활 제5주일, 생명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 예수님 말씀도 참 정답게 들립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참으로 농부 하느님을 가장 많이 닮은 이들이 지상에서 농사에서 전념하는 농부들일 것입니다. 땅처럼 푸근하고 넉넉하고 한없는 인내심을 지니고 기다리며 때에 맞게 농사일에 전념하는 그대로 하느님을 닮은 농부들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믿는 이들은 '삶의 농부'라 해도 좋겠습니다. 엊그제 고추, 상추, 파, 오이, 가지, 토마토, 야콘 모종후 적기에 내려 메마른 대지를 촉촉이 적신 단비를 통해 새삼 우리 하느님은 최고의 농부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채소 농장을 하는 농부 스테파노 수사님, 이런 농부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을 깨달으며 찬미와 감사의 삶을 사는 분들이 참으로 사는 이들입니다. 어제 한 달에 한번 방문하여 성사를 보는 형제님과의 만남도 잊지 못합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하기에 덥석 안으며, ‘이렇게 주님을 만나고 있지 않습니까!’ 답변하며 깨달았던 진리입니다. 주님을 만나면서 모르는 경우는 얼마나 많겠는지요. 바로 살아있는 형제들을 통해서, 아름다운 자연을 통해서, 또 이 거룩한 성사를 통해서 만나는 살아 계신 주님이십니다.
어제는 미국 뉴튼 수도원에서 20년 동안 항구히 정주중인 반가운 손님 마티아 수사님이 방문하여 저녁 식사후 떠나니 이 또한 형제를 통한 주님과의 만남이겠습니다. 얼른 정원에서 함께 찍은 사진과 더불어, ‘뉴튼 수도원 마티아 사도 방문 축일 기념’이란 말마디를 전송하니 마음 흐뭇했습니다. 또 어제 명동성당에서는 참으로 주님의 종으로 사셨던 정 추기경님의 장례미사가 있었고, 고 김수환 추기경님과 함께 소개된 ‘추기경의 묘비명’에 대한 일간신문 기사도 이채로웠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묘비는 사목 표어이던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와 평소 좋아한 성구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가 추모객을 맞이한다. 지난 27일 선종한 정진석 추기경의 묘비명은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bus Omnia)이다. 실제 고인은 장기와 가진 것 모두를 내주고 떠났다.”(5.1경향22면)
참으로, 진짜 삶을 살면서 우리에게 참 삶의 지표를 보여준 두 분의 추기경입니다. 과연 어떻게 각자 나름대로 참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공동체와 더불어,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를 통해서입니다. 참 포도나무가 상징하는 바 공동체 예수님이요, 우리는 모두 그 지체들입니다. 그러니 말 그대로 공동체 삶의 축복입니다. 네 측면에 걸친 공동체 삶의 축복 원리를 소개합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입니다.
너무 잘 잊고 지내는 하나라는 자각입니다. 사람은 섬이 아닙니다. 사람은 혼자 구원받지 못합니다. 더불어의 구원입니다. 잘 깊이 들여다 보면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각자도생의 고립단절은 스스로 자초한 지옥입니다. 함께 더불어의 삶이 바로 하늘나라 천국입니다. 결국 하나가 지칭하는 바 주님입니다. 포도나무가 상징하는 하나인 주님입니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너희는 내가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은 바로 주님 참 포도나무에 가지로 붙어 있음에 대한 증거입니다. 참으로 주님께 하나로 연결되어 붙어 있을 때 참으로 살아 있는 것이요, 영이자 생명이신 말씀은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하여 점차 주님을 닮아 참 나를 살게 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 안에 하나임을 깨닫게 합니다. 참으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성체를 받아 모시며 주님의 한 지체임을, 한 형제임을 깨닫는 우리들입니다.
둘째, 우리는 다양합니다.
공동체의 다양함이 축복이자 부요입니다. 획일화의 일치가 아니라 다양성의 사랑의 일치입니다. 서로 틀린 것이 아니라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바로 서로 다름을 너그럽고 넉넉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입니다. 보십시오. 우리 수도자들은 물론 모두의 모습이 다 다릅니다. 그대로 5월 신록의 나무들 같고 꽃같습니다. 신록의 색깔도 다 다르고 꽃들도 다 다릅니다. 꽃의 크기, 모습, 색깔, 향기가 다 다르듯 사람도 똑같습니다. 꽃같은 인생, 꽃처럼 고유의 크기와 모습, 색깔과 향기로 참으로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이런 더불어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공존공생, 상호보완의 공동체 삶이 바로 하늘나라의 실현입니다. 이런 다양한 형제들이 하나 되어 갈수록 점차 공동체를 통해 또렷이 드러나는 참 포도나무 예수님 모습입니다. 나무만 보고 숲을 못보는 일이 없도록 항상 공동체의 큰 그림을 통해 예수님 얼굴을 바라봐야 하겠습니다.
바로 제1독서 사도행전의 사도들의 공동체가 그 다양성의 모범입니다. 바르나바, 사울을 비롯한 제자들이 다 다르지만 주님 안에서 참 아름다운 형제애의 일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형제들이 곤경중인 사울을 보호하는 배려의 사랑이 감동적입니다. 이런 사도들의 참 포도나무 예수님 공동체를 통해 일하시는 성령의 열매가 참 풍요롭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제 교회는 온 지방에서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지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났다.’
셋째, 우리는 하나 안에 머물러 열매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머무르다는 말이 오늘 복음에 무려 8회 나옵니다. 늘 공동체 안에, 주님 안에 머물러 시냇가에 뿌리 내린 나무처럼, 관계의 뿌리, 믿음의 뿌리, 사랑의 뿌리 를 깊이 깊이 내리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공동체 안에, 예수님 안에 정주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 중심에 머물러 깊이 뿌리내리는 정주의 삶이 없어 그리도 두려워하고 불안해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 안에 머물러 깊이 믿음의 뿌리 내리고 살 때 안정과 평화에 감사와 기쁨입니다. 예수님의 간곡한, 금과옥조의 말씀이 그대로 진리입니다. 그대로 참 삶의 진리를 보여줍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리리라.”
이래야 비로소 참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 머물고 주님은 우리 안에 머무르는 상호내주의 일치는 바로 사랑의 일치를 뜻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주님을 떠나 뿌리없이 잘린 가지처럼 가짜의 헛된, 유령같은 거짓된 삶을 살아가는 지요! 주님이 아닌 엉뚱한 세상에 머물러 살기에 끊임없는 불안에 두려움입니다. 주님과 상호내주의 일치를 이루며 참으로 살아갈 때 그대로 소원 성취의 삶이겠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정말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을 몰라서 불평 원망이지 주님을 알면 찬미와 감사뿐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리시는 심판이 아니라 주님 안에 머물지 않아 스스로 자초한 심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 안에 머무를 때 구원이요 주님을 떠날 때 심판이니 구원과 심판은 선택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주님과 상호내주의 사랑의 일치, 관상의 일치는 자연스럽게 이웃사랑의 열매를 통해 표현되고 검증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요한은 우리 모두 행동으로 표현되는 사랑을 촉구합니다. 그대로 우리 모두를 향한 간곡한 호소입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이기적 탁한 맹목적 욕망의 늪 같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과 애착의 끈적끈적한 불순한 사랑이 아니라, 우리 수도자들이 실행하는 아가페 깨끗한 형제적 사랑입니다. 인간 자체에 대한 존중과 배려, 공감과 연민의 무사無私한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집착하지 않는 사랑, 생명을 주는 아가페 깨끗한 사랑입니다. 바로 다음 주님의 사랑의 계명을 준수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 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주님과 상호내주의 일치의 사랑은 그대로 깨끗하고 무사한 형제사랑으로 표현되고 이런 형제사랑의 실천은 주님과 상호내주의 사랑을 더욱 깊이함을 봅니다. 주님은 마지막으로 참 삶의 결론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결국은 사랑의 열매입니다. 꽃 사랑은 열매 사랑으로 드러나야 비로소 참 사랑, 참 삶임을 입증합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사랑의 열매, 구원의 열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공동체의 일치를 굳건히 하시고 우리 모두 성령 충만한, 사랑의 열매 풍성한 진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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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2. 부활 제5주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가정과 혼인’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
<5월의 첫 주일인 오늘은 주교회의에서 정한 생명 주일입니다.
교구장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이 모든 교구민들에게 보내는 생명 주일
메시지를 전해 드리겠습니다. 이는 ‘가정과 혼인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통하여 최근 우리 사회의 생명 현실과 관련한 시대의 징표를 식별한 메시지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한국 주교회의가 정한
제11회 생명 주일(5월 첫 주일)을 맞으면서 저는 ‘가정과 혼인’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확인하고 성, 사랑, 생명에 관한 주제를 함께 성찰해보려고 합니다.
또한 이는 3월 19일부터 보편 교회가 시작한 ‘사랑의 기쁨인 가정의 해’를
보다 의미 있게 보내는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지난해 국회에 발의된 차별금지법안과 초등학생 대상 성교육 교재 배포 등
몇몇 사건들을 계기로 성소수자, 동성애, 혼인의 의미 등 인간의 성(性)을
둘러싼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특히 차별금지법안의 일부 조항에 드러나는
‘젠더 이데올로기’와 여성가족부가 추진하는 ‘비혼 동거’와 ‘사실혼’의 ‘법적
가족 범위의 확대 정책’은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서 보편적인 가치로
여겨졌던 것과는 매우 다릅니다. 또한 이런 이념들은 가정과 혼인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신앙과 윤리관과도 어긋납니다. ‘젠더 이데올로기’는 남녀의 생물학적인
성의 구별을 거부하고 자신의 성별과 성적지향을 선택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이념입니다.
이는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다르게 창조하시고 서로 협력하며 조화를 이루게 하신
창조주의 섭리를 거스릅니다. ‘동성애’로 이해되는 ‘비혼 동거’와 ‘사실혼’을 법적 가족
개념에 포함하는 것도 평생을 건 부부의 일치와 사랑, 그리고 자녀 출산과 양육이라는
가정의 고유한 개념과 소명을 훼손할 수 있습니다. 이에, ‘가정과 혼인’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공식 입장을 분명히 전하며 여러 가지 논란에 대해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할 판단과 실천에 대해 성찰하고자 합니다.
남자와 여자, 몸의 의미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 1,27)
라는 성경 말씀처럼 인간이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된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사실입니다. 이 구분은 타고난 몸을 토대로 하는 것이지,
사회나 문화가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물론 염색체나 신체 발달상의 어떤 이유로 이런 구분이 모호한 때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예외적인 경우가 남성과 여성이라는 근본적인 구분에 변화를
줄 수는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의 몸은 단지 생물학적인 물질에 불과한 것이 아닌, 지성과
정서와 자유를 지닌 영적이고 인격적인 몸입니다. 따라서 타고난 몸의 남녀 구분에도
영적이고 인격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남녀의 구별은 각 사람이 성장하고 인격적 친교를
맺으며,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데에 중요한 토대가 됩니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서로를 보완해주고 협력하는 가운데 함께 인격적인 성장을 이루며 충만한 삶을
살아가도록 이끄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가부장 문화 아래
성차별의 구실이 되고, 또한 문화적으로 남녀의 성적 차이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시선이 있었다고 해서, 그런 이유로 남자와 여자의 구별과 다름이 가진 풍요로운
의미를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남성과 여성은 부부로서 자신을 상대방에게 전적으로 선물로 내어주는 인격적 사랑의
행위를 통해 둘이 한 몸이 되며, 이를 통해 새로운 생명, 새로운 인격체를 낳습니다.
한 남성과 한 여성의 인격적 친교는 사랑과 생명의 공동체인 가정의 토대가 되며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가운데 부모와 자녀의 사랑으로 확장되고 더욱 성숙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이는 큰 신비입니다.”(에페 5, 31-32)
인간의 동등함, 부당한 차별의 반대
모든 사람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엄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권리는 누구도 제외되지 않고 동등하게
주어집니다. 생명과 안전, 주거와 고용, 교육과 의료 등 인간의 삶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공동선에 참여할 권리는 모든 사람에게 보장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각 사람이 인종,
출신국가, 성별, 피부색, 종교 등은 물론 동성애와 같은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
등을 이유로 부당한 차별이나 폭력적인 언사나 행동을 당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동성애 성향 때문에 내적 시련을 겪는 이들에게 친절과 존중,
관심과 배려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에 근거한 부당한 차별의 반대를
동성혼 등을 용인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도 안 됩니다.
성향과 행위의 구별
특히 ‘젠더 이데올로기’에서 사용하는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이라는 표현에는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용어는 한 사람이 타고난 몸과 그가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성적인 성향을 분리하여 사용되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즉 타고난 몸은
객관적으로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되고, 남성의 몸과 여성의 몸이 서로를 향하며
결합하는 것이 자연법의 질서이지만, ‘젠더 이데올로기’는 객관적인 몸의 질서와는
다르게 자신의 성적 성향이나 성별을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가톨릭교회는 객관적인 몸의 질서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동성애 등
이러한 성향 자체를 “객관적인 무질서”로 바라봅니다.
또한 어떤 성향을 지닌 것과 개별적인 그 행위를 하는 것은 구별됩니다.
동성애 성향을 지닌 것은 자신의 선택이 아닌 경우라도, 그 행동은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으므로 그 행동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생각하고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성행위를 위해 동성을 선택한다는 것은 성에 관한
창조주의 계획”과 “그 풍요한 상징과 의미를 무효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성애 행위처럼 성적 행동이 타고난 몸의 객관적 질서와 인격적 의미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몸은 단지 이기적으로 이용되는 도구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물론 이성 간의 성행위에서도 서로의 몸을 인격적으로 대우하지 않거나 자신을
전적으로 내어주지 않는다면, 같은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혼인과 가정, 객관적 인정
혼인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지속적이고 전적인 결합으로,
“서로를 완성하고, 관심과 배려, 그리고 출산을 통해 자연스러운 인생 여정을
걷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에 속합니다. 혼인이 사회적·법적 인정과 보호를 받는
이유는 혼인과 가정이 사회의 기본 단위로서 사회 구성원을 사랑 안에서 낳고
길러냄으로써 사회의 안정과 지속에 반드시 요청되는 ‘공동선’에 기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성애 행위에는 참된 일치와 생명 출산, 남녀 간의 상호보완성이라는
의미와 가치가 빠져 있습니다. 즉 동성 간의 성적 관계는, 혼인과 가정이 토대로 하는,
몸의 결합과 출산이라는 객관적 의미가 구조적으로 빠져 있으므로 ‘혼인’이라고
불릴 수 없으며, 이는 부당한 차별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만일 두 사람의 주관적인
애정만을 조건으로 동성 간의 혼인을 사회적·법적으로 인정한다면, 혼인이 지닌
고유한 의미는 훼손되고 공동선에 기여하는 혼인의 가치는 사라질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동성 간에는 불가능한 자녀 출산을 위하여, 인공적 생식 기술을
이용하거나 자녀 입양을 하려고 한다면, 이는 부모 사랑의 결실로 태어나
“한 아빠와 한 엄마를 갖고 싶은 자녀의 선택권을 침해”하고, 그들의 전인적 성장에도
지장을 초래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자녀 성교육, 인격적 사랑의 교육
교회는 “교육에 대한 부모의 권리와 의무는 최우선적”이고 본질적이라고 말합니다.
성교육 역시 부모의 일차적 책임이며 “참되고 완전한 인격 훈련을 목표로 하여”
“부모의 면밀한 감독 아래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 사회의
성교육에서는 혼인 밖에서의 성관계를 용인하면서, 원하지 않는 임신을 예방하는
방법에 대한 교육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에는 성과 인간관계가 지닌 의미와 가치에 대한 가르침이 종종 결여됩니다.
성은 인격을 구성하고, 인간이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고 타인과 관계를 맺기 위해
요구되는 근본적 요소이고, 생명 전달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에, 성교육은 인격적
사랑의 교육이자 생명 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부모님들은 가톨릭교회의
정신에 따른 인격적 성교육 프로그램인 ‘틴스타(TeenSTAR)’에 자녀들이 참여하는데
적극적인 관심과 노력을 보여주시길 요청합니다. 아울러 본당의 사목자들도 부모님들을
도와 이러한 프로그램이 청소년들에게 제공되도록 더욱 애써주시기를 바랍니다.
참된 자유의 의미
우리가 사는 현대는 개인의 자유, 자유로운 선택, 자기결정권을 강조하는
‘자유의 시대’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개인주의
사고방식은 성과 사랑과 혼인 그리고 가정도 개인의 행복을 위한 도구처럼 여기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자유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자유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며, 양심의 판단과 진리에 봉사하고, 공동선을 보존하고
실현할 때 비로소 정당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까지 성찰해 온 사랑과 참된 성의 의미, 가정과 혼인의 가치를
보존하고 실현하는 ‘책임 있는 행위’ 안에서 정당한 자유를 향해 나아갑시다.
우리는 불완전한 인간이지만, 이와 같은 가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성적인 본성과 사랑의 능력이 단순히 욕구나 감정에 머물지 않고
하나의 ‘덕’으로 성장하여, 더욱 충만한 삶을 향해 나아가도록 주님의 도움과 은총을
청합시다. 아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 자유를 육을 위하는 구실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하신 계명입니다.”(갈라 5,13-14)
2021년 5월 2일
천주교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위원장 겸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
추기경 염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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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2. 부활 제5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요한 15,1-4).”
1)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이 말씀에서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라는 말은, ‘나에게 붙어 있긴 하지만’,
즉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고 자처하긴 하지만’이라는 뜻입니다.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루카 13,25-26).”
여기서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라는 말은, 그들이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신 것도 아니고, 또 ‘이웃과 함께’ 먹고 마신 것도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만 먹고 마신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주님 앞에서’ 먹고 마신 일은 주님과 아무 상관없는 일이고,
죄를 지은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라는 말은,
그들이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을 보긴 했지만, 그 가르침을 듣고
실천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모습을 구경만 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주님의 집에 들어갈 자격을 얻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조금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마태 7,21-23).”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기적을 일으켰는데도
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일까?
예수님의 말씀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그들이 한 일들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의 이름으로’ 그런 일들을 하긴 했지만, 그들이 한 일들은 자신의 뜻을
이루려고(자기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한 일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한 예언은 예언이 아니었고, 마귀를 쫓아낸 것도 아니었고,
진짜 기적을 일으킨 것도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속이는 짓을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 죄’, 즉 신성모독죄를 지은 자들이고,
사람들을 속이는 죄를 지은 자들입니다.
2)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이 말씀에서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이라는 말은, ‘포도나무가 주는
생명력을 가지 쪽에서 능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으로 해석됩니다.
(나무에 붙어 있긴 하지만, 나무가 주는 생명력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가지는,
앞의 2절에서 말한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가 되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동적으로 생명력을 받아들이는 노력을
‘머무르다.’ 라는 말로 표현하십니다.
신앙인이 구원의 열매를 맺으려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 방법은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머무른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실천하면서,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배반자 유다는 예수님 곁에 있었지만, 즉 예수님에게 붙어 있었지만,
언제부터인지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습니다.
몸만 함께 있었고, 마음은 떠나 있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마태 3,11-12).”
예수님 안에 잘 머물러서 열매를 맺는 사람은 겉과 속이 모두 충실한
‘알곡’이고, 예수님 안에 머무르지 않아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은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보일 뿐이고 아무런 쓸모가 없는 ‘쭉정이’입니다.
신앙생활을 겉으로만 잘하는 것은,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잘한다고 인정을 받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또 자기 스스로 ‘나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위선과 교만은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우리는 항상 ‘지금 나는 알곡인가, 쭉정이인가?’를 잘 반성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이만큼 했으면 충분하다.’ 라고 말할 수 없는 생활입니다.
할 만큼 했다는 자만심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쭉정이로 살았다고 해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쭉정이 같은 생활을 했더라도
회개하고 알곡으로 변화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바로 지금이 기회입니다.>
3)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라는 말씀은 ‘약속’이고,
“내 안에 머물러라.” 라는 말씀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당부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가
아니라, “내가 이미 너희 안에 머무르고 있으니 너희도 내 안에 머물러라.”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1요한 4,19).
따라서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무르는 것은
이미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시는 주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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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2. 부활 제5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신부님.
“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오늘은 부활 제 5 주일이며, 생명주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바오로의 회심이 그 자신에게 있어서 얼마나 단호하고, 결정적인 사건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참으로 그의 회심은 죽음을 담보로 한 회심이었습니다. 그의 회심은 신앙이 하나의 장신구가 아니라, ‘신앙이 아니면, 삶이 의미도 없다.’라는 실존적 선택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윤리 도덕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이토록 사도 바오로에게 목숨을 불사하게 한 신앙의 진리는 무엇이었을까?
이 진리에 대해서, 오늘 <제2독서>에서 말해줍니다. 곧 “말로써가 아니라 행실과 진리로써 사랑합시다.”(1요한 3,18)라는 사도 요한의 말은 단지 언행일치의 윤리도덕 차원의 차원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진리로써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적 속성인 “진리로써 사랑한다.” 것은 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그 근거를 오늘 <복음>에서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은 단지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비유가 아니라, “참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비유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참”이라는 형용사가 붙어서, 예수님의 진리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참된 진리는 “참 포도나무와 가지와의 관계, 곧 참 된 진리이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이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여덟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 “머물다”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신비스런 단어인 “머물다”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오늘 <복음>에서는 우선적으로 “붙어있음”을 말합니다. 곧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서, 다른 데서가 아닌 바로 그 포도나무로부터 수액을 받아먹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마치 물고기 물을 떠나면 죽음이듯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머물다”는 말은 뗄레야 뗄수 없는 “상호 불가분의 긴밀한 관계”로 ‘붙어있음’ 말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포도나무에 “붙어있다”는 사실만으로는 결코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뭇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다하더라도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잘려져 불에 태워져버리기 때문입니다. 결국, 붙어있되, “열매를 맺는 이”라야 “머물러 있는 이” 입니다.
따라서, “머물다”는 말의 의미는 단지 그분께 ‘붙어있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열매 맺으실 수 있도록 자신을 비워드림이요, 그분의 말씀의 권능이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허용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참 생명’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요, 그분과 결합하여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코린토인들에게 보내는 둘째 편지>에서 말합니다.
“주님과 결합하는 이는 그 분과 한 영이 된다.”(1코린 6,17)
그러기에, “머물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상호내주 혹은 상호공유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 벌리는 역동적인 활동이 벌어지는 ‘상호 친교’요, ‘상호교제’요, ‘상호교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오늘 <예물기도>에서는 “거룩한 교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사도 베드로가 밝히듯,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2베드 1,4). 참으로 하느님께서는 하찮은 우리에게 영광의 관을 씌어주셨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는 신비로운 방식으로 우리 안에 계시며 활동하십니다. 참으로 우리는 참 포도나무이신 그분과 이토록 신비롭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공동본성”(Connaturality)에서 오는 앎에 경탄하여 탄성을 질렀습니다. “아, 우리가 하나라는 걸 그토록 모르는가?” 바로 이 ‘공동본성’이 우리에게 신적 진리, 참된 진리를 가능케 하는 자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자리가 신적 진리로써 사랑이 피어나는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스런 참 사랑, 하늘스런 참 생명이 피어나는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토마스는 ‘공동본성에서 오는 사랑의 지혜, 하느님 사랑으로 주어지는 신적 지혜 혹은 관상’이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신적 진리, 참된 진리에 참으로 머물러 있고,
열매를 많이 맺을 수가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오늘 <복음>에서 찾아본다면, “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곧 가지는 나무에 속해 있을 뿐 스스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가지가 나무를 지탱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가지를 존속시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또 열매를 맺으실 수 있는 그분께 승복하여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라야, 참된 사랑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단지 붙어있어야 할뿐만 아니라, 좀 더 적극적으로 머물러 있어야 할 일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 내주하신 그분의 수액을 받아 마시며, 말씀 안에 머물고, 사귀고, 교제하면서, 당신께서 열매를 맺으시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늘 사도 바오로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요한 15,4)
주님!
당신께서는 무너뜨리지만 열매를 맺어주셨고
부서뜨리지만 새싹을 틔워주셨습니다.
이토록 제 자신이 부서지고서야, 제 자신을 건네주고서야,
당신께 머무르는 법을 배워갑니다.
꽃이 지듯, 제가 무너지는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게 하소서.
열매가 떨어지듯, 제가 사라지는 것을 서러워하지 않게 하소서.
오늘도 떨어져야 머물게 되는 이 신비로운 사랑 앞에
떨어지지 못함이 부끄럽고 죄송스러워 고개를 떨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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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2. 부활 제5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 안에 머물러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당신 안에 머물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이미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머무십니다. 이 시간 주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는 은총이 충만하길 기도합니다.
어두울 땐 안 보이는 것들이 불을 켜면 나타납니다. 눈 감았을 땐 안 보이던 것들이 눈을 뜨면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마음 없을 땐 안 보이던 것들이 마음을 두면 나타납니다. 사실 없는 것도 마음 두면 나타나고, 있는 것도 마음을 없애니 사라집니다. 마음을 두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너무도 다릅니다. 마음 두는 것에는 시간도 거리도 필요 없습니다. 아무리 멀리 떨어지고 아무리 오래 되어도 마음을 두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사실 마음에 두면 눈을 감아도 보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나요? 아내, 남편, 아니면 자식, 부모? 형제, 이웃, 재물, 명예...“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습니다.”마음 둘 자리를 잘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2,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고 하셨습니다. ‘머물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머문다는 것은 얼마나 자주 미사를 참례했고 얼마나 더 많은 묵주기도를 드렸는가로 분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것은 그분의 사랑과 선을 내 영혼 안에 받아들이고 나아가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함께야). 마음을 두어 그가 바라는 것, 기뻐하는 것을 행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오늘 2독서의 표현을 빌면,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3,24). 그리고 마침내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실천하기 때문에 청하는 것은 다 그분에게서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요한15,7).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큰 기쁨을 줍니다. 그러나 그분 안에 머물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아내 된 사람은 남편에게 마음을 두고, 남편 된 사람은 아내에게 마음을 두어야 ‘이심전심’, 마음이 통합니다. 그래야 가정이 화목합니다. 그러나 동상이몽도 있으니 걱정입니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서로에게 지킬 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 부부로써 신의를 지키는 것, 스승에 대한 존경, 그리고 제자에 대한 사랑, 이웃에 배려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일상 안에서의 계명입니다. 이것을 지킬 때 주님으로부터 더 큰 복을 얻게 되고, 청하는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신 말씀은 달리 말하면,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이 청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모님을 ‘은총을 가득히 받은 복된 어머니’라고 칭합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복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엘리자벳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령 복되십니다.”“믿으셨기에 복되신 분!”하고 말합니다. 성모님께서는 믿으셨기 때문에 복되십니다. 우리도 먼저 믿음으로 주님 안에 머물러야 하고, 믿음으로 청해야 소망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하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그분 말씀을 가슴에 품고 그대로 행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간직하며 사는 것입니다.
어느 통계를 보니까 남자는 가장 이상적인 배우자로 ‘친구 같은 아내’, ‘현모양처’형을 선호하고, 여자는 가장 이상적인 배우자로 ‘가정적인 남편’, ‘카운셀러 남편’을 꼽았습니다. 그리고 남편 된 사람이 듣고 싶어 하는 소리는 ‘당신을 믿어요!’이고, 아내 된 사람이 듣고 싶어 하는 소리는 ‘당신 너무 힘들지?’랍니다. 다시 태어나도 현재의 배우자를 선택하겠느냐? 는 질문에 남성은 71.5%가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여성은 50.4%만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부부 불화가 생기는 원인으로는 남편과 아내 모두 서로의 일로 가정에 충실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답이 45%로 가장 많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탓이 상대방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정을 이루는 부부도 서로의 관심이 다릅니다. 이 다름 안에서 하나가 되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가슴에 모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으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항상 예수님의 마음을 품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한 생애를 흔들림 없는 믿 음으로 예수님 곁에 서 계셨던 성모님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라고 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나무에서 가지가 영양을 공급받는 것이지, 가지가 나무를 풍요롭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열매는 가지에 달리지만, 가지가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제자들 속에 주님께서 함께한 것은, 제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함께 하는 것과 달랐습니다. 그야말로 주님께는 이득도 없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가지 하나를 잘라버린다면 여전히 그 포도나무에서 다른 가지가 돋아날 것입니다. 스승은 제자를 버리지 못하지만, 제자는 스승을 등지고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려진 가지는 뿌리에서 분리되므로 살 수가 없습니다. 가지는 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 없이 가지는 절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님 안에 머물지 않으면 결코 주님의 일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혹 무엇인가에 성공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주님과의 일치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내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디에 머물러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주님을 믿는 이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천상의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31-34).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고달픔만 더하고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주님의 뜻 안에 머무르지 못하고 내 뜻을 먼저 찾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무엇이든 청하여라.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말씀에는 관심이 있지만, 바로 그 앞부분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하는 말씀을 간과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이 먼저입니다.
오늘은 주님 안에 머물러 꼭 풍요로운 결실을 맺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정 안에서, 일터에서 주님 안에 머물러 기쁨을 누리시길 빕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 머물지 못한 일은 헛수고임을 일찍 깨우쳤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의 마음으로 행할 수 있는 은혜가 넘쳐나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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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2. 부활 제5주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 안에 머물러라."(요한15,4)
예수님께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들어, 우리가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는 가지가 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15,5)
5월은 '가정의 달'이고, 5월의 첫 주일인 오늘은 한국 천주교회가 우리 안에 널리 퍼져 있는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바꾸고,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참된 가치를 되새기고, 이를 수호하기 위해 정한 '생명주일'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손수 만드신 당신의 모든 창조물을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참 좋다."고 하셨고,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당신의 피조물들을 잘 돌보라고 하셨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피조물을 절대로 죽여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의 모습인 죽음의 문화가 깊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자살, 살인, 낙태, 이혼, 칠죄종, 생태계 파괴 등등
'코로나19'는 이러한 죽음의 문화가 낳은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생명의 시작은 가장 작은 단위의 교회인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때문에 가정생활의 주역인 부모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의 나의 모습은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시작되었고, 가정 안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모습입니다.
가정이 살아나야 교회도 세상도 살아납니다.
부모가 살아나야 자녀들도 살아납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3,18)
가족이 특히 부모가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할 때, 가정과 교회와 세상이 살아나고, 생명의 문화가 시작될 것입니다.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농부이신 하느님 아버지 안에 머무는 신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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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2. 부활 제5주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머무름"을 이야기하십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요한 15,4)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머무르라고 하십니다. 머무름은 예수님이 여러 차례 반복하실 정도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머무름은 일방적이지 않고 상호적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머무르고 또 예수님도 우리 안에 머무르시니까요.
머무름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영의 활동이라 자유롭기에 반드시 어떤 도식 하나만 존재하는 건 아니지만, 대개 기도는 주님 앞에서의 일방적 독백이 상호적 대화로 넘어가다가, 신뢰와 사랑이 깊어지면서 침묵으로 흐르고, 결국 서로에게 머무름으로 이어집니다. 이제 기도는 어떤 행위에서 그저 존재하는 자체가 되어갑니다.
기도 안에서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시는 그분 안에 머무르고 또 그분에 대해 아는 바에 머무르며 그 사랑에 머무르는 것이 관상기도일 것입니다. 머무름은 고요하고 정적으로 보이나 그 침묵 아래는 거대한 역동성이 해류처럼 흐릅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요한 15,3)
말씀이 우리를 정화합니다. 말씀에 머무르는 이는 말씀이신 예수님께 머무르는 것이고, 머무름으로 우리 존재에 새겨지고 물든 그 말씀이 우리를 깨끗하게 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요한 15,7)
주님 안에 머무르고 그분 말씀 안에 머무르는 이의 기도는 그분의 뜻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미 그가 깨끗하게 되었고, 그의 바람이 주님의 바람과 일치하기 때문이지요. 그가 바라는 것이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과 일치하니 그대로 이루어짐은 놀라운 일이 아닐 겁니다. 주님께 머무르는 이의 기도가 자기 정욕이나 탐욕, 저주나 오만에 기인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머무름은 반드시 선하고 진실된 열매를 맺습니다.(요한 15,5 참조)
제2독서에서도 머무름을 말씀하십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3,24)
요한 서간의 저자는 믿음과 사랑을 머무름의 방식으로 꼽습니다. 즉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1요한 3,23)입니다. 주님을 믿는 이는 이미 주님 안에 있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이도 마찬가지지요. 그는 "행동과 진리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의 방식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주님과 서로에게 머무름으로써 사랑이 되어 갑니다.
제1독서에서는 머무름으로 회득한 사랑이 열매를 맺는 일화가 등장합니다.
"모두 그를 두려워하였다. 그가 제자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르나바는 사울을 받아들여 사도들에게 데려가서 ... 이야기해 주었다."(사도 9,26-27)
사도행전 저자는 바르나바를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사도 11,24)이라고 전합니다. 믿음과 사랑은 주님께 머무르는 이의 특징이며 그에게 머무르시는 성령이 그 증거입니다.
사울은 기를 쓰고 새로운 길에 들어선 이들을 단죄하고 박해하였기에 그가 어떤 신적 체험을 했건 여전히 두려운 존재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를 당신의 구원 계획을 위한 도구로 세우시기 위해 사람들에게 신망이 큰 바르나바를 쓰시지요.
사울에 대해 바르나바가 보여 준 관대한 수용력과 신뢰는 그가 사울 안에 머무르시는 주님을 알아보는 시선에서 나옵니다. 이미 그 자신이 주님 안에 머무르는 존재이기에 가능한 은총이지요.
"이제 교회는 ...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지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났다."(사도 9,31)
주님께 머무르는 이는 다른 이들을 머무름으로 초대하여 교회를 더욱 영적으로 변화시킵니다. 평화와 굳셈, 경외와 성령의 현존은 주님께 머무르는 이들이 맺는 역동적인 열매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당신 사랑 안에 머무르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 말씀을 품고 그분 사랑의 품에 깊이깊이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애틋하고 애잔한 자애의 눈길에 자신을 온전히 놓아두고, 깨끗하고 거룩하게 해 주시는 그분 손길에 우리 영혼과 육신을 기꺼이 내어맡깁시다.
주님께 머무르고, 주님께서 그 안에 머무르시는 영혼은 행복합니다. 그는 이 힘겹고 버거운 세상살이 안에서도 사랑이 되어 가는 중이니까요. 주님과의 상호적 머무름으로 참행복지수를 높여가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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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2. 부활 제5주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생명 주일)."내 안에 머물러라."(요한 15, 4)
머무는 곳에
마음이 있다.
머물러야
서로를
알 수 있다.
머무름은
나눔이다.
나누지
않고서는
깊어질 수 없는
우리들
관계이다.
머무름은
만남이다.
함께하는
참된
기쁨이다.
머무름은
열림이다.
열매가
열리고
마음이
열린다.
머무름을
통하여
삶을
가르치시는
주님이시다.
머무름으로
사랑은
시작된다.
머무름이
우리를
이끌고 간다.
주님은
머무름이시다.
머무름이
우리를
품어준다.
머무름이
행복이다.
우리 삶이
가야할 방향은
다름아닌
머무름이다.
머무름은
마르지 않는
생수이다.
생명이
있는 곳에
머무름도
있다.
머무름으로
우리를
살리시는
주님이시다.
머무름이
우리를
채워주시고
도와주신다.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머무름의
은총이다.
은총가득한
머무름의
신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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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2. 부활 제5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지나친 기도 지향의 위험성 : 기도의 맛을 잃게 만들 수 있다>
오늘 복음도 성 목요일 만찬상에서 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권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당신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나무에 붙어있지 않은 가지는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무언가 이뤄내려는 시도는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의 능력을 무력화시키는 행위입니다.
제가 주님께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너에게 다 주었다.”라는 말씀을 듣고, “이제 제가 무엇을 해 드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네가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나에게 붙어있기만 하여라.”라는 대답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감히 하느님께 무언가 해 드릴 수 있다고 착각하고 스스로 무언가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필요로 하시는 유일한 것은 성령의 열매를 맺어주는 것뿐입니다.
성령의 열매란 ‘사랑, 기쁨, 평화’입니다. 만약 기도하고 나서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마음이 자라남을 느낀다면 기도를 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았던 것은 어떤 사람들은 성당에 오래 다닐수록 기도하는 시간이 짧아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방에서도 할 수 있고 나름대로 기도의 방법이 있을 수는 있지만 ‘기도의 맛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기도의 맛은 기도 안에서 얻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가 아닌 다른 것을 바랄때 잃게 됩니다.
마치 과자를 먹을 때 단 맛을 원했는데, 짭짤한 맛이었을 때 깜짝 놀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짭짤한 것도 맛이 있습니다. 다만 자신이 원했던 맛과 다를 때 그 과자가 싫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기도가 짧아지는 가장 큰 이유는 기도를 자기의 욕구를 채우려는 도구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만날 때 다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 자체가 목적이듯, 기도에서도 마찬가지로 가장 큰 문제는 ‘지향’입니다.
기도지향은 자칫 기도의 목적을 퇴색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미사 때나 기도 때 지향하는 것들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그 기도가 들어지면 이제 행복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욕구는 블랙홀과 같아서 주님께서 그것을 들어주신다고 해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저도 살아오면서 그런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저에게 가장 많은 원망을 하는 사람들은 제가 가장 많은 도움을 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저를 떠나갑니다. 많이 들어주면 그만큼 많이 요구하게 되고, 그 많은 요구를 더는 들어줄 수 없는 처지가 되면 쓸모없는 도구처럼 버려지게 됩니다. 이것이 어떠한 지향을 목적으로 기도하는 이들과 주님 사이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만둣가게 주인이 제때 따듯한 식사를 하지 못하는 환경미화원과 부랑자들에게 ‘사랑의 만두’를 공짜로 나누어주었습니다.
어느 정도 선행을 계속하다가 주인이 만두를 더는 공짜로 주지 못하겠다고 하자 그간 만두를 얻어먹던 사람들이 거칠게 항의를 하였습니다. 대놓고 욕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만두 말고 돈으로 달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모두가 이른바 착하고 순진한 서민들이었습니다.
이들을 악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청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청하는 것을 들어주면 이제 상대가 감사해야 할 사람이 아닌 호구로 여기게 됩니다.
처음엔 감사한 마음이 들 수 있어도 그 욕구는 블랙홀이기 때문에 더 큰 것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이전의 만족을 느낄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청원 기도를 할 때 주의해야 할 이유가 바로 그것이 주님에게서 멀어지는 이유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호구로 전락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요구를 다 들어주다가는 오히려 상대에게 더 안 좋은 일이 생겨나게 할 수 있습니다.
명나라에 ‘여문의’라는 공정하고 청렴한 재상이 있었습니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에 내려가 살았는데, 어느 날 한 사람이 술에 잔뜩 취해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여 재상은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그의 잘못을 추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사람이 심각한 죄를 짓고 사형을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여 재상은 괴로워하며 스스로를 탓했습니다.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것에 자비를 베푸는 바람에 그가 더 나쁜 상태로 빠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느님께서도 한없이 요구하는 이에게 한없이 베푸실 수가 없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기도의 참맛을 회복하면 나머지 것들은 다 들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묵주기도를 시작하기 전 엄청난 기도지향을 읊는 사람을 보면 ‘기도의 맛을 느끼지 못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그 수많은 미사 지향을 보며 ‘이것을 들어주시지 않으면 미사가 행복할까?’라는 생각도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라고 말합니다.
성령을 통하여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가 맺히면 나머지는 굳이 청하지 않아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미사 지향이나 기도지향에 집중하다 보면 오히려 하느님 나라를 잃고 맙니다. 그러면 청원도 이뤄지지 않고 기도의 맛도 잃어 결국엔 기도에서 점점 멀어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붙어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가리옷 유다의 경우는 잘못된 지향으로 예수님께 붙어있었습니다. 의도가 깨끗하지 못하니 그 가지를 통해서는 좋은 열매가 맺힐 수 없습니다.
말씀은 우리 안에서 세속과 육신과 마귀의 더러움을 씻어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지향이 여전히 돈과 명예와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것에 있다면 그것이 채워질 때까지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가 맺힐 수 없습니다.
분명 우리가 청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청하십시오. 그리고 잊어버리십시오. 기도 때는 제발 지향을 잊어버리십시오. 오히려 기도 중에는 자신이 청하는 모든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청하십시오. 더는 그런 것은 생각나지 않게 되기를 청하십시오.
기도 중에는 그저 주님의 기도에서 청하라고 한 것만 생각하십시오. 주님의 기도 안에 우리가 하느님 자녀로서 청해야 할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그것들만 청한다면 주님은 당신 자녀를 다른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시기 위해 우리가 신경 쓸 모든 것들을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로서 누릴 행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오는 기도의 맛 때문에 점점 더 오래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 곧 하느님 나라만을 청하는 기도가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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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2. 부활 제5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든든한 지주이자 뿌리이신 주님
새벽시장에서 일하시는 한 형제님을 만나 뵙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한때 경기가 좋던 시절도 회상하셨습니다.
장사가 너무나 잘 돼 돈을 일일이 셀 시간이 없었답니다.
할 수 없이 그날 번 돈을 큰 보따리에 집어넣고 발로 꾹꾹 밟았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서 아이들 못 보게 하고는 흐뭇한 얼굴로 돈을 세던 그런 시절도 있었답니다.
안타깝게도 요즘은 경기가 너무 좋지 않아 현상유지만 해도 다행이랍니다.
그래도 한밤중에 물건을 구매하러 올라오는 지방 상인들을 맞이하려 저녁 무렵 가게로 나가셔서
새벽까지 가게를 보신답니다.
계속 건네시는 말씀이 저를 참으로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여명이 밝아올 무렵, 잠시 가게 문을 닫아건답니다.
피곤에 지친 몸을 이끌고 향하는 곳은 침대도 아니요, 사우나도 아니요, 성당이랍니다.
새벽미사가 시작되기 전 그 어둠을 뚫고 몇몇 신자상인들은 성당으로 모인답니다.
그 이른 새벽녘에 미사 전까지 성체조배를 하고, 또 레지오 마리애 회합도 하신답니다.
그런 고된 일상 가운데서도 그분들이 늘 챙기는 곳은 어려운 복지시설입니다.
뭣 하나 더 해주지 못해 늘 안타까워하십니다.
고달픈 일상생활에서도 어떻게 해서든 하느님과 끈을 놓지 않으려는 그분들 삶에서 포도나무이신 주님 안에 머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
모든 시댁 식구들이 사이비성이 농후한 종교를 믿는 집안에 시집가서 오랜 세월 무지막지한 고초를 겪으셨던 한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박해가 컸지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천주교 신앙은 그녀 삶에서 목숨과도 같은 부분이었기에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시댁 식구들은 천주교와 무슨 악연이 있었던지 그녀의 입에서 천주교 '천'자만 나와도 '재수 없다'며 벼락같이 화를 내고 노골적으로 천주교를 반대했습니다.
주일이 되면 시어머니는 강제로 그녀를 끌고 자신들의 집회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절대로 하느님과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시집 식구들의 물샐 틈 없는 감시체제 하에서도 그녀는 은행이나 시장을 오갈 때 생기는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살짝 살짝 가까운 성당을 찾아 성체조배를 하는 등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해나갔습니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그러다가 발각돼 혼쭐이 나기도 했지만 그녀는 또 다른 모습으로 자신의 신앙생활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그 오랜 세월,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녀가 받아왔던 고통이나 수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그토록 참을 수 없는 핍박 속에서도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고 꿋꿋이 살아오신 그 자매님을 바라보면서 신앙이란 때로 목숨을 건 일생일대의 투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그 오랜 고통의 세월을 잘 참아온 그녀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시댁 모든 식구들의 천주교 입교라는 특별한 선물을 마련해주시더군요.
그녀의 독특한 신앙여정을 바라보면서
"내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님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살레시오 회원으로서 아주 부족한 저이지만 늘 애타게 갈망하는 소원 한가지가 있습니다.
세파에 흔들리는 아이들의 든든한 뿌리로 존재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든든한 뿌리인 저를 통해 비쩍 마른 아이들이 왕성하게 영양분을 흡수해서 보란 듯이 한번 일어서게 만들고 싶습니다.
이런 바람은 예수님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길을 잃고 정처 없이 방황하는 백성들의 든든한 지주이자 굳건한 뿌리가 되고 싶으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셨기에 오늘 복음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그분은 영양결핍증세가 심각한 우리에게 매일 영양분을 공급해주시는 생명의 뿌리입니다.
죄와 악행으로 시든 우리 영혼의 가지에도 다시금 생명의 수액을 보내주시는 구원의 근원입니다.
가지가 뿌리 없이 아무런 의미가 없듯이 주님 없는 우리 삶은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어떠한 시련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끝까지 주님 안에 머물러 있기를 기원합니다.
모진 신앙의 박해 가운데서도, 끝도 없는 방황과 좌절 사이를 걸어가면서도, 힘겨운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죽음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끝까지 참포도나무이신 주님께 붙어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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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2. 부활 제5주일 복음. 강 만연 베드로 형제님.
지금까지 도시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농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간접경험으로 농부의 삶에 대해서는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농부는 씨를 부리고 가을에 수확을 하기까지 많은 땀과 수고를 들입니다. 아무리 농사일이 힘들어도 할 수 있는 것은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 때문입니다. 만약 그런 희망이 없다면 농사일을 열심히 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단 농사일만 그런 게 아닙니다. 세상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하는 학생은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가기 위해서 쏟아지는 잠을 참아가며 공부를 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해서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면 그간 노력과 고생은 하나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게 가능하게 되는 건 자기가 노력한 결실이 맺어질 때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느님께서 겨자씨만한 씨를 세상 곳곳에 뿌려놓으셨습니다. 이 씨는 세상의 빛과 등불이 되라고 하는 믿음의 씨앗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이 믿음의 씨앗이 잘 열매를 맺기를 바라실 겁니다. 씨앗은 뿌려주셨지만 가꾸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물도 주고 거름도 주고 해야 합니다. 잡초도 있으면 뽑아야 합니다.
예전에 농사를 짓는 이모님 댁에 가보면 잘은 모르지만 논이나 밭에 이모부께서 잡초를 뽑으실 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잡초를 제때에 뽑아주지 않으면 나중에 애를 먹는다는 것입니다. 농사마다 조금씩은 다르지만 잡초라는 것도 게으름을 피우고 조금 등한시하면 나중에 뽑을 때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어느 정도 제거하기에 편할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 제거하지 않으면 엄청 힘들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농사일은 나중에 수확이나 결과를 보면 얼마나 성실히 일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알 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모부님께서 마산에서 진해로 넘어가는 중간에 신촌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포도 농사를 몇 년간 하신 적도 있습니다. 제가 전문적으로 잘 모르지만 그때 농사를 지으시는 것을 보면 과수원에서 전지가위로 포도가지를 마치 나무 분재를 하듯이 항상 다듬는 것을 봤습니다. 그렇게 해야 알이 토실토실한 포도가 열매 맺을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은 명언이 하나 있습니다. 어릴 때 하신 말씀입니다만, 이모부님께서 말씀하시기로 흘리신 땀방울에 비례해서 나중에 포도나무에 토실토실한 포도 알로 맺힌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사실 틀린 말씀도 아닙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저희에게 심어주신 믿음의 씨앗을 잘 키워서 튼실한 열매를 맺게 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잡초도 제거해야 하고 비료도 줘야 할 것입니다. 잡초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시기, 질투, 욕심,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는 것 다양할 것입니다. 이런 것도 제때에 잘 뽑아줘야 할 것입니다. 또 비료도 줘야 영양이 잘 보충이 돼서 무럭무럭 잘 자랄 수가 있을 겁니다. 이 비료는 마치 기도라든지 이웃사랑 같은 것이 될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게 잘 어우려졌을 때 농작물도 수확이 풍성한 것처럼 우리의 영적인 열매의 결실도 풍성할 것입니다. 노력 없이 좋은 결과는 절대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그런 사람이 되라고 그리스도인으로 불러주셨을 겁니다. 그냥 이름만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오늘 제2독서에 나오는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그리도도인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됐을 땐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가 되어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에 잘려서 나가게 될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열매를 맺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필사적인 노력은 절대 헛수고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마지막에 말씀하신 것처럼 이런 노력은 하늘나라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될 것입니다. 또한 영원한 상급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우리도 이왕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녀가 되고 또 듬직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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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2. 부활 제5주일. 김로마노 형제님.
부활 제5주일 제1독서 (사도9,26-31)
"그러나 바르나바는 사울을 받아들여 사도들에게 데려가서, 어떻게 그가 길에서 주님을 뵙게 되었고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는지, 또 어떻게 그가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였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하여 사울은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였다. 그리고 그리스계 유다인들과 이야기도 하고 토론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사울을 없애 버리려고 벼르고 있었다. 형제들은 그것을 알고 그를 카이사리아로 데리고 내려가 다시 타르수스로 보냈다." (27-30)
사울이 회심한 직후 하느님께서는 하나니아스를 준비하셨다. (사도9장) 그를 통해 사울에게 세례를 베풀고 성령을 충만하게 하신 후, 그를 다마스쿠스 유대인들에게로 인도하게 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울이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에는 바르나바를 사용하신다. 바르나바(Barnabas)는 히브리어로 '예언의 아들' 이란 의미의 인명이며, 사도행전의 저자는 이를 '위로의 아들'(퓌오스 파라클레세오스 ; 사도4,36)로 번역하였다. 그는 자기 소유의 토지를 팔아 진실하게 헌금으로 드렸을 뿐만 아니라 (사도4,36) 선하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사도11,24)
당시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 의심과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식되었던 사울이 예루살렘 신도의 모임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도록, 바르나바는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중재 역할을 담당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였는지' (27)
'담대히 설교하였는지' 에 해당하는 '에파르레시아사또'(eparresiasato)의 원형 '파르레시아조마이'(parresiazomai)는 '기탄없고 막힘 없는 언변'을 뜻하는 명사 '파르레시아'(parresia)에서 파생된 것으로, 회심한 사울이 복음에 관하여 전혀 거리낌없이 모든 것을 선포하고 가르쳤음을 알 수 있다.
사울이 그렇게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성령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말한다는 것이, 예수를 신성모독으로 죽은 범죄자로 여기던 유대인의 미움을 사며, 목숨의 위험까지도 감수해야 하는 일임을 사울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는 주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령의 능력으로 담대히 말하였다.
바르나바는 사울의 그러한 면을 잘 알고 있었으며,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사울의 이러한 면을 소개함으로써, 사도들로 하여금 사울을 자신의 동역자로 받아들이게 하였던 것이다. 바르나바가 사울을 도운 것은 성령의 감동과 바르나바의 선함 심성 때문이지만, 그는 이미 사울과 잘 아는 사이였다고 볼 수 도 있다.
'그들은 사울을 없애 버리려고 벼르고 있었다' (29)
'벼르고 있었다' 로 번역된 '에페케이룬'(epecheirun)의 원형 '에피케이레오'(epicheireo)는 '~위에'를 뜻하는 '에피'(epi)와 '손'을 뜻하는 '케이르'(cheir)의 합성어로서 '~에 손을 대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어떤 사물을 '손으로 잡는다'는 의미와 더불어(루카1,1), 어떤 것이 이루어지도록 '착수하고 시도한다'는 의미를 지닌다.(사도19,13)
본절에서는 후자의 의미이며, 또 미완료 과거 시제로 쓰여, 죽이려고 수차례 착수했음을 암시한다. 그들은 유대교 교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사울의 주장의 허구성을 밝히고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려 하였으나, 논리적으로 사울을 이길 수 없었던 이들은 과거 다마스쿠스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울을 죽임으로써, 침묵하게 하려는 사악한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형제들은 그것을 알고' (30)
과거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사울은 두려움과 의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사울의 죽음을 무릅쓴 선교 활동을 보고, 형제들은 그를 신뢰하게 되었으며, 이제 그에게 도움을 주는 관계에까지 발전했다.
그들은 불타는 열정과 논리적인 복음의 전파로 유대교에게 큰 타격을 주어, 유대교인들의 제거의 대상이 된 사울이 처한 위험을 알게 되었을 때, 그를 '카이사리아'까지 데려가 멀리 그의 고향인 '타르수스'로 보냈다.
'알고'로 번역된 '에피그논테스'(epignontes)는 '에피기노스코'(epiginosko)의 부정(不定 ;Indefinite)과거 분사이다. 이 동사는 어떤 것을 알되, 정확하고 철저히 아는 것을 의미한다. 예루살렘의 형제들은 사울이 처하게 된 위기와 그의 입장을 정확히 알고, 그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하여 그에게 필요한 도움울 준 것이다.
즉 사울을 예루살렘 성밖으로 내보내지 않으면 그가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할 것을 확인하여 그를 타르수스까지 보낸 것이다.
'형제들'이라고 번역된 '호이 아델포이'(hoi adelphoi)는 '제자들'을 의미하는 '호이 마테타이'(hoi mathetai ; 사도6,1), '성도들'을 의미하는 '호이 하기오이'(hoi hagioi ; 사도9,13)와 함께 새로운 공동체인 그리스도인들의 명칭이다.
'성도들'이나 '제자들'보다는 '형제들'이라는 표현이 사울과 그들과의 관계가 더 가까워졌음을 보여 주기에 적당한 말이다.
부활 제5주일 복음(요한15,1~8)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1)
요한 복음 15장의 '참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와 사랑과 인내에 대한 교훈이 주어지는 내용들은 요한 복음 13장에서부터 17장까지 전개되는 성주간 목요일 밤에 주어진 다락방 이별의 담화의 일부이다.
특히 요한 복음 15장 1~11절은 예수님 당신 자신이 육신적으로는 비록 제자들과 떨어지게 될 것이지만, 영적으로는 하나의 일치된 유기체이심을 보여 주는, 그 유명한 참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이다.
이것은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이 시대에도 예수님과 영적으로 일치를 이루고 있는, 믿는 이들의 상태를 보여 주는 중요한 가르침이다.
예수님께서 '나는 참포도나무요'라고 하실 때, '참'이라는 말을 사용하신 것은 하느님께서 심으신 포도나무인 이스라엘과 참포도나무이신 당신 자신을 의도적으로 대조시키기 위해서이다.
팔레스티나의 특산물이며 매우 흔한 식물이기도 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구약시대 때부터 이스라엘은 주님의 포도나무, 혹은 주님의 포도밭으로 비유되어 있다.
그들은 주님의 포도밭(이사5,1~7)이었고, 주님께서 심으신 좋은 포도나무였으며 (예레2,21), 열매맺는 무성한 포도나무였다(호세10,1).
하느님께서 이 포도나무를 이집트에서 가져다가 팔레스티나에 심으셨다는 시편 저자의 노래(시편80,9)에서 볼 수 있듯이,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의 상징이었다.
마카베오 시대의 화폐에 이스라엘이 포도나무로 표현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과 포도나무를 일치시켰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로 당신 자신이 '참포도나무', '참된 포도나무'라고 주장하심 으로써, 동시에 가짜, 혹은 불완전한 포도나무와의 구별성을 강조하고 있다.
'참'으로 번역된 '알레티네'(alethine; true)의 원형 '알레티노스'(alethinos)는 가짜 혹은 불완전한 것을 의미하는 '프슈데스'(pseudes; pseudo)의 반대로서 '진짜', '순수한', '이상적인'등을 뜻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 내포된 당시 이스라엘의 실상은 무엇인가? 그들은 가짜, 혹은 최소한 불완전한 포도나무라는 것이다.
성경은 주님의 포도밭으로 지칭되는 이스라엘이 열매가 없는, 형편없는 포도나무, 들포도 나무라고 말한다(이사5,2).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하신 주님의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한 불완전한 포도나무였던 것이다.
구약에서는 포도나무의 상징이 언제나 타락의 개념과 함께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사야 예언자가 노래하고 있는 주님의 포도밭에 나타나는 중심 사상은 포도밭이 황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이사16,10).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야생의 낯선 들포도나무로 퇴화되었다고 탄식한다(예레2,21).
호세아 예언자도 헛된 포도나무라고 외쳤다(호세10,1).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참포도나무라고 칭하신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다.
즉 이스라엘 민족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낼 수 없는 포도나무라는 사실이다.
유대인,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마태3,7~10참조).
하느님께서는 그 누구도 민족, 혹은 혈통, 가문으로 만나시지 않는다. 오로지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안에서 개별적으로 만나시는 것이 그분의 뜻이다 (로마2,28.29).
하느님의 약속을 상속으로 계승하게 될 아브라함의 후손은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영적 이스라엘뿐이다(갈라3,7.9).
따라서 모든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머무를 때에만, 희망있는 삶을 살 수 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열매는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만 맺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심오한 진리를 선포하시기 위해, 먼저 당신 만이 유일한 참포도나무임을 선포하신 것이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신지 밝히신 후에, 성부 하느님께서 누구신지를 밝히신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성부 하느님을 지칭하신 '나의 아버지'에 해당하는 '호 파테르 무'(ho pater mou; my Father)라는 호칭은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님만이 사용하실 수 있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독생성자 예수님만이 성부 하느님의 유일한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나의 아버지'라는 호칭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성자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선언하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농부'로 비유되고 계신다.
'농부'에 해당하는 '게오르고스'(georgos; gardener; husbandman)의 기본적인 의미는 '땅을 경작하는 사람'으로서, 신약성경에서는 '농부'(2티모2,6), '포도밭 주인'(포도밭지기)(마태21,33~35) 등을 가리켜서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소유자이면서 동시에 관리인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도 하느님께서는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일치한 가지인 참된 믿는 이들을 더 나은 축복으로 인도하시고,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가차없이 심판하시는 분으로서, 포도나무와 그 가지들을 세밀히 관리하시는 분으로 묘사된다.
한편, 당신 자신을 참포도나무로 비유하시고, 성부 하느님을 농부로 비유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곳 팔레스티나의 주요 농작물 가운데 하나인 포도 재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제자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동시에 이 가르침이 주어졌던 당시의 장소가 성체성사가 이루어진 마르코의 다락방이었다고 할 경우에, 제자들 앞에 '아직 남아 있는 과월절 만찬용 포도주'를 바라보면서 이 가르침이 주어졌다는 것은, 제자들이 잘 알고 있던 친숙한 소재를 사용한 놀라움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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