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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중 북한군과 중공군 포로들을 수용하던 곳!
대한민국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곳에서 6.25전쟁 당시 포로들의 생생한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곳을 다녀왔습니다. 바로 거제포로수용소인데요. 이곳은 1950년 11월에 설치되어 한국군과 유엔군의 경비 하에 포로자치제로 운영되었습니다. 거제도에 있는 포로수용소로 다함께 떠나 볼까요?
<거제 포로수용소 입구>
거제시 고현동에 위치한 포로수용소는 거제도의 가장 유명한 문화유적지,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고현터미널에서 도보로 30분, 택시로 10분 내외의 거리에 있어 거제도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는 필수코스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6·25전쟁의 참상을 말해주는 민족역사교육장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1983년 12월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는데요. 유적공원은 1998년 9월에 착공하여 1999년 10월 1차로 유적관을 개관하였고, 2002년 11월 완공되었습니다.
거제포로수용소는 6만 4224㎡의 부지로 조성되어 있으며 내부는 분수광장과 철모광장, 흥남철수작전기념비, 탱크전시관, 무기전시장 등이 있습니다. 특히 친공포로와 반공포로 간의 격돌 장면을 첨단 복합 연출기법으로 재현한 포로폭동체험관, 송환심사 과정 등을 영상으로 볼 수 있는 포로설득관 등은 인기 체험관이라고 합니다.
<포로들의 생활상>
대부분의 포로등에는 영어 알파벳으로 'PW'라고 적혀있는데요. 이는 POW : Prisoner of War 전쟁 포로를 줄여서 PW 라고 쓴것입니다. 참고로 그외에 MIA (Missing in Action : 전투중 실종된 병사), KIA (Killed in Action : 전사자), WIA (Wounded in Action : 전상자) 등이 있다고 합니다.
포로들은 수용소 안에서 자생적인 활동을 했는데요. 자신의 특기에 맞게 취사, 공병, 군수 등의 업무를 했으며 일과시간 외에는 운동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활동들은 수용소 관리인의 철저한 통제속에서 이루어져 포로들의 활동은 제한되기도 했습니다.
<포로들의 일상>
포로자치제에 맡겨져 있었으므로 수용소의 질서는 잘 잡혀있었다고 합니다. 전장에서는 생각해볼 수도 없었던 숙사에서 하루 세끼의 식사를 제공받았는데요. 야간 경계근무도 서지 않았습니다. 포로수용소 내에서의 포로들의 일과는 통상 다음과 같았습니다.
오전 5시 30분
<포로수용소 취사장>
포로수용소에서는 매일 94톤의 쌀과 다른 곡물이 소비되고 있었습니다. 세계적인 생산 감소때문에 쌀이 정량이 감소되었어도 다른 곡물이 보충되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식량 전체 양은 줄어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기에 추가해 소고기국, 소금에 절인 쇠고기, 육고기와 야채류, 마른 계란이 지급되었다고 합니다. 음식을 조리하기 위해서 포로들 중에서 요리사를 뽑아서 썼는데요. 그들은 또한 신선한 채소와 깡통에 든 채소, 말린 콩과 완두콩, 후추, 간장, 소금, 1일 10개피의 일제 담배가 든 레이션을 지급받았습니다. 취사장에는 포로들의 모형들이 요리를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실제 요리를 하는 것처럼 꾸며 놓아 이포로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느낄 수도 있었습니다.
<포로수용소 취사장 및 작업실>
유엔군사령부는 포로 처리의 방침을 유엔군의 노동력 활용과 심리전에 두었습니다. 노동이 가능한 포로들은 여러 종류의 작업에 투입되었는데, 그들이 하는 일은 주로 자기들이 쓸 물자의 운반과 도로 보수, 환경 작업 등 경노동에 속했습니다. 그 외에 수용소 내의 고정작업으로 환자 간호, 취사, 목공일, 청소 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과 속에 교양 강좌와 1인 1기의 실기 교육이 포함되어 희망에 따라 참석하기도 했는데요. 작업실 곳곳에는 포로들이 실제 바느질을 하는 모습, 악기를 다루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포로수용소를 다 둘러 보는데 2시간 가량 걸렸습니다. 사진과 유품들이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말해주고 있어서 시간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포로수용소를 돌아다니면서 갖가지 유품들이 실제 전쟁에서 쓰였을까 하는 의문도 가졌지만 체험관 곳곳에 붙여있는 설명서와 포로들을 묘사한 모형들을 보면서 그러한 의문은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60년 가까이 지나 거제도 포로수용소 주변은 너무나 많이 변했습니다. 곳곳에는 아파트단지가 들어섰고 포장된 도로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포로수용소가 말해주고 있는 전쟁의 참혹상은 여전히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었습니다.
(취재:청춘예찬 최종환 대학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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