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공간 서재
허 열 웅
사람들은 서재를 흔히 책이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더 넓게 생각하는 사람도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공간 정도로 생각한다. 서재는 책을 읽고 글만 쓰는 장소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창조적인 개성을 지닌 공간으로 의미가 더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초등학생이나 중고교생의 방에 책이 아무리 많고 넓어도 서재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문학가나 철학자의 서재에서 창조적인 사유를 자극하고 조성하여 모든 학문적 성과와 정신적인 성찰이 대부분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 신문에 “화가 밥 딜런, 자기만의 방”이란 그림이 실려 있다. 낡은 호텔 방, 한 남자가 작은 책상에 놓인 타자기 앞에 앉아 있다. 짐은 보이지 않는다. 배경은 머릿속에 있다. 유명가수이며 시인이고 화가인 그는 쓴다는 행위의 외로운 동작을 그린 그림이다. 2016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지만 창작활동보다는 노래와 그림에 몰두하여 미국과 영국에서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그는 60년 대 민권과 반전운동의 상징이었으며 그의 노래가 전 세계적으로 1억장 이상 팔렸다.
오래 전에 심리학자 프로이트 서재를 사진으로 본 기억도 떠오른다. 그가 40여 년 동안 사용했던 서재에는 사방 벽면에 책이 있고 공간 중심에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어 보통 서재와 비슷했다. 하지만 그는 이 공간에서 인류의 정신이 분석되고 체계를 수립할 수가 있었다. 이렇게 일관되게 집중하며 헌신적인 희생을 통하여 인류에게 이바지하게 만든 공간이 바로 서재인 것이다. 러시아 시인 브로드스키는 국가지도자를 뽑을 때 정치적 강령대신 그가 서재에서 읽은 도서목록을 판단기준으로 삼는다면 나라의 불행이 줄어들 것 이라고 했다.
나의 서재는 남서쪽으로 창이 넓게 트인 장소다. 멀리 수리산이 가물가물 솟아있고 바로 앞에는 평평한 동산도 보인다. 오후가 되면 금빛 햇살이 유리창에 부딪쳐 흩어지는 그리 넓지 않은 곳이다. 이곳은 나의 영혼의 방이고 사유를 낳는 출산의 공간이다. 때로는 지친 심신을 편히 쉬게 하고 나를 돌아보는 속 깊은 성찰의 공간이기도 하다. 또한 내가 가야할 올바른 방향을 정하는 지점이 되기도 한다. 나는 그 동안 시를 쓰다가 시조로 방향을 바꾸기도 했고 소설을 써 본다고 힘겹게 매달리기도 했으나 재능이 부족했다. 결국 살아온 삶을 형상화하여 기록하는 수필의 역에 도착하게 만든 나침판의 역할을 해준 곳이 서재다.
수필은 연상聯想과 인과因果의 세계지만, 시는 단절과 비약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봄’에 대한 글을 쓴다고 할 때 봄에서 연상되는 낱말들을 쭉 써본다. 그렇게 나온 낱말들로 문단을 나누어 조리 있게 나열하는 것이 산문이라면, 그 낱말들을 다 빼고 봄에 대해 쓰는 것이 詩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은 세상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 아니라 허구를虛構를 구성하여 기승전결起承轉結로 마무리를 잘 하면 되는 글이다. 그래서 자기 적성에 맞는 분야를 선택하여 시인이나 소설가, 수필가등의 길을 가야한다.
시인 서정주와 소설가 김동리는 당대 문단계의 첫 손꼽히는 문필가였다. 어느 날 소설가인 김동리도 시를 쓰고 싶어 한 편을 써 가지고 서정주를 찾아갔다. 아우님, 나도 시인이 될 수 있나 시 한편 써 갖고 왔으니 봐 주소 했다. 그래요, 한번 읽어보소, 하자 김동리는 목청을 가다듬어 “꽃이 피면 벙어리도 우는 것을”하며 첫 구절을 읽자마자 서정주가 무릎을 탁치며 됐습니다. 아주 잘 쓰셨습니다. 하자 아니 한 구절을 들어보고 어찌 아는가, 하며 다시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 “벙어리도 꼬집히면 우는 것을” 으로 읽자, 뭐라고요? 꽃이 피면이 아니라 꼬집히면 이라고요, 그래 벙어리가 꼬집으면 울지 않겠는가, 서정주가 눈을 크게 뜨며 꽃이 피면이 아니라 꼬집히면 이라고요? 한숨을 크게 쉬며 성님은 아무래도 소설만 써야 쓰것소, 하면서 외면을 했다는 일화가 있다.
수필가이며 번역가였던 전혜린은 1955년 서울대학교 재학 중 독일로 유학을 간 수재였다. 그녀는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와<미래완료의 시간 속에>를 출간하였고 많은 작품을 번역하여 많은 독자들의 호응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일생에 한 번 아니 한편만이라도 좋은 글을 쓰고 싶다고 갈망했다. 그만큼 글쓰기에 만족이란 있을 수 없고 힘 든다는 의미다.
프랑스의 미래학자 ‘자크 아탈리’는 코로나 이후 시대에는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될 것 같다고 했다. 타인보다 스스로에 몰두하면서 창의적 활동을 하는 사람이 많아져 간다고 보았다. 오늘 날 근무시간의 단축과 생활이 여유로워지자 자기 계발에 힘써 예술의 각 분야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부쩍 늘고 있다. 특히 글 쓰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독자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이 저자가 되어간다. 오늘도 나는 좁은 서재의 쉼터 같은 공간에서 쓰고 지우며 시간을 보낸다. 내가 살아온 흔적과 기록들이 모여 있는 공간, 직장 은퇴 후 가장 많이 시간을 보낸 곳, 아직도 이루지 못한 글다운 글을 쓰지 못해 하루의 대부분을 머물러 있다. 나이가 들면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보다 나 자신을 잘 아는 일이다.
세상에는 서재를 지닌 사람과 준비되지 않은 사람과 필요 없는 사람도 있다. 다만 서재는 책을 읽고 사유를 낳는 출산의 방이 되지만 피곤한 영혼이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될 수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서재를 창조의 공간으로 활용되었으면 좋겠다. 내 삶의 사이클이 흐트러지거나 집중력이 산만해질 때마다 서재에 들어와 나를 추스린다. 영혼을 충전하고 재생하며 창조적인 사고를 잉태하는 하는 서재에서 하루가 저문다. 석양에 물든 해가 어둠 속에 묻히면 서재는 또 다른 빛을 밝히고 별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살아온 이야기를 엮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