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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의 “상속자”란,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함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본문 17절에서,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합니다. 성령은 또한, 이러한 상속자로서의 성도의 확신이 흔들리거나 혼돈이 생길 때 마다,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시고 확신하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인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가 됩니다. 얼마 전 뉴스에서, 어떤 아이가 생후 1개월도 안 되어, 수 억의 재산을 물려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부잣집에 태어난 사람을 “금수저”라고 부르며 부러워합니다. 하지만, 성도인 우리는 그들과 비교할 수 없는,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며, 창조주이시고, 섭리자의 상속자입니다. 그러니, 첫 사람인 아담으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의 자리에 있던 우리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상속자의 자리로 옮겨 주셨으니,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고난을 받으심으로, 내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감사한 일이며, 또,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으니 감사한 일입니다. 이것을 기억한다면, 성도된 우리는 앉으나 서나, 집에 있을 때나 밖에 있을 때나,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뿐 아니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감당하신 거룩한 고난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 땅에 계실 때, 십자가의 고난에 대하여,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렇게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이 염려스럽고, 걱정되지만, 우리는 참여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광만 취하고, 고난을 피하고자 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지 않았음을 스스로가 인정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것은, 성도인 우리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감당하신 거룩한 고난에 성도인 우리도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도로서 고난을 받는 것이 힘들게 여겨지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상속자라는 신분에 의해,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게 되리라는 것을 생각할 때, 현재의 고난을 극복할 수 있고, 성도인 우리는 더더욱 우리가 참여하게 될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에 우리의 모든 소망을 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속자는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통해 주어지는 특권이자 책임이며,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누리게 될 하나님의 축복과 영광을 담보로 하는 성도된 자의 신분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찬양을 하거나 복음성가, CCM을 부를 때, 온갖 감정을 잡으며 부른다고 해서, 상속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과 겸손의 모습을 드러낸다고 해서 상속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이렇게 해야 하지만, 그것을 행하는 우리 속에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복음이 굳건하게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엡 3: 6에서,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력으로 노력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다가오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새 생명을 베푸셨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이며, 하나님의 상속자로서의 자리로, 영원한 생명을 소망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이렇게 큰 은혜를 받았음을 기억하여,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하시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2 - 13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께 빚진 자입니다.
본문 12절을 보시면, 그 시작을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이는, 성도가 다시는 죄의 종이 되어 육신을 따라 살수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어, 본문에서의 “빚진 자”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짊어지신 십자가의 빚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본성인 육신의 정욕에 따라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 7: 21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고 합니다. 우리 안에는 언제나 두 가지의 선택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하느냐? 악을 행하느냐?의 선택입니다. 이것을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으로 말하는 데, 이것이 우리 안에서 항시, 대립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럼, 성도된 우리는 이 양자의 대립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 것을 생각할 때, 성도된 우리는 성령의 소욕을 선택하고,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육신의 욕정을 따라 살 수 없는 겁니다. 그러기에, 성도란,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며, 생활하는 모든 것이, 그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성도는 하나님께 빚진 자라는 성도로서의 정체성을 가집니다. 롬 14: 8을 보시면, 사도바울은 성도의 정체성에 대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합니다. 그럼, 우리가 왜 계속해서 하나님께 빚진 자가 될까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빚지게 하는 요인이 무엇입니까? 본문 12절의 끝부분을 보시면,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고 함으로, 우리 안에 있는 “육신의 정욕이요, 욕심이며, 안목의 자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담이후로 우리 안에 자리잡은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그 본성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육신의 정욕에 대해 경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은혜의 빚을 진 성도로서의 합당한 삶의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롬 8: 6을 보시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합니다. 이어, 본문 13절을 보면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성도가 육신대로 살며, 방종하는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럼, 요 3: 16을 보시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이 약속을 오해하기에,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고 하지만,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혜를 오해하는 자들입니다. 감사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진정, 십자가의 은혜를 알고, 감사한다면,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 수 없으며, 자칫 육신의 정욕을 따랐다고 해도, 그것을 깨닫게 되면, 곧 바로 돌아서서 회개하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 굳건하게 세울 것입니다. 다윗을 보면, 그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기에, 육신의 정욕을 따라 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단 선지자로 인해 자신이 육신의 정욕에 따랐음을 지적받았을 때, 그는 핑계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자신을 하나님 앞에 굳게 세웠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 성도의 모습이며,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십자가의 은혜에 대해 진정으로 감사하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는 지금, 무엇을 따라 행하고 있습니까? 이제 우리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음을 기억하여, 우리에게 있는 육신의 정욕에 따라 살아가는 옛 습관을 행함으로 편안함을 따를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우리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하나님의 상속자로서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4 - 15절을 보시면,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우리가 성도입니다.
본문 14절을 보시면,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영,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자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가장 선하고 좋은 길로,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은, 성도된 우리가 무엇에 의해 살아가야 하는 지에 대한 중요한 포인트가 됩니다. 이것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세상 사람들이 삶에 중점을 두고 살아가는 도덕이나 자신을 위하고, 세상을 위하는 어떠한 결정에 중심을 두게 두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 또한 하나님의 뜻에 맞을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육신의 정욕에 따를 수도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별세의 사람으로서, 우리 삶의 기준점을 그들과 달라야 합니다. 우리 삶의 중요한 포인트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성도로서의 삶의 중요한 포인트에 대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즉,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성령께 우리 삶의 포인트를 두어야 합니다. 성도된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하나님의 상속자로서의 축복된 삶을 살아가려면, 성령의 인도하심에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하나님과 상속자의 관계요, 하나님의 양자의 관계임을 시인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 12: 2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합니다. 이어, 본문 15절을 보시면,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는 것”은, “종의 영”이라는 어떤 영적인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정욕을 따르는 죄에게 끌려가며, 종 노릇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 7: 24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며, 거룩한 탄식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며 행하고 싶은 데, 우리의 육신이 정욕에 젖어서, 정욕을 따라 생각하고 행하는 것에 대해 탄식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탄식을 세상 사람들이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곁을 떠난 사람들이 하겠습니까? 여러분,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며,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들이게, 세상에 대하여 우리는 별세의 사람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거룩한 탄식이 본문에서 말하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의 의미입니다. 그러기에, 성도인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겁니다. 성도인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은 두려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항상 가까이서 우리를 사랑하며, 우리를 도우시며,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혜와 긍휼의 하나님입니다. 시 143: 10에서 다윗은,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라고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본성인 육신의 정욕을 따라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함으로, 평탄한 길로 인도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 평탄한 삶, 형통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를 상속자로 삼으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뜻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자력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의 상속자로서의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6 - 17절을 보시면,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양자된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본문 16절을 보시면,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성도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긴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친 자녀가 아니라 양자라는 겁니다. 이것을 증언하는 분이 성령이시기에, 본문 앞의 15절에서는 성령을 “양자의 영”으로 부르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 1: 12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합니다. 죄인된 우리가 죄인의 자리에서 벗어나 의인에 자리에 이르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은혜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믿기에 교회에 나왔지, 내가 결정해서, 교회에 나와 하나님께 예배드리지”라는 것은, “나는 아직 하나님의 양자가 아니기에, 하나님의 상속자가 아닙니다”라는 것과 동일한 말이며, 생각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것에 대해, 유대인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성도임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의 첩경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인식에서 시작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며,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탄식하며,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십니다. 그러기에,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을 인식할 수 없고,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음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이어, 본문 17절을 보시면,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로서,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이에 대해, 갈 3: 29을 보시면,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도 기꺼이 동참해야 합니다. 이제, 성도된 우리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된 존재로서 하나님의 상속자임을 기억하여, 하나님의 상속자로서의 기쁨과 감사 속에 거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