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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안에서
출 25: 23-30
오늘 본문은 성소에서 첫 번째로 등장하는 떡 얹어 놓는 상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겼을까요?
그저 「법궤」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연상하면 됩니다.
우선 높이가 같고,
금으로 된 테두리가 있고,
고리와 채가 있으며, 위에 무엇을 놓아 둘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한 조각목으로 만들고 정금을 입힌 것도 같습니다.
이렇듯 법궤와 같으면서도 넓이와 길이는 작고, 또 성소 안에 있다는 것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니 「상」이라고 할 때 생각나는 구절은 없는지요?
시 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즉, 교제의 의미가 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된 후 원수의 후손인 사울 왕의 손자(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자기 왕자들과 함께 한 상에서 먹도록 은혜를 베풀었습니다(삼하9:10).
이 덕에 므비보셋은 존귀를 얻었고, 절름발이의 수치를 가리우게 되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왜 떡상이 성소 안에 있어야 되는가?
갈보리 십자가의 대속을 이루신 「관」쓰신 예수님으로부터 「속죄함」을 받았고,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시은의 결과가 있다면 주안에서 주와 함께 한상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화목제물만 되신 것이 아니라 떡상도 되셔서 성도로 하여금 주안에서 하나님을 바라고 즐거워하게 하신 겁니다.
자! 상징적 의미를 보세요.
높이가 법궤와 같다는 것은,
성도가 하나님과 교제할 때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의 인격으로만 가능하다! 함을 증명하고,
그럼에도 넓이와 길이가 작은 것은 온전함을 이루는데는 므비보셋처럼 인생에게는 실패가 있어 절뚝거릴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 중에서 유독 상이 넓이가 「일규빗」이었는데, 「일」은 단합을 의미하기에 만약 일치하지 않거나 단합될 수 없는 곳에는 참 교제가 있을 수 없음을 증명합니다.
모든 성도가 하나님과 일치되어 교제할 수 있음은 예수의 「의」입니다.
모든 성도가 주안에서 일치되어 교제할 수 있는 것은 「믿음」입니다.
기독교가
여타 종교와 갈등하는 것은 교제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일치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이단들을 대적해야 하는 것은 역시 그들과 일치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을 보면,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여치 못한다고 성도의 구별을, 성도의 일체감을 말씀했습니다.
고전 10:20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인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
우리나라의 경우 땅 덩어리가 작은데도 남과 북으로 갈라졌습니다.
더욱이 민족도 하나의 민족인데 갈라졌습니다.
왜요?
남과 북의 이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땅 덩어리의 통일은 쉽습니다.
이념만 맞추면 됩니다
그런데 그게 어려워요.
그러다 보니 이념은 논하지 말고 민족성으로 맞추자, 통일하자 하는 논리가 지금 나온 겁니다.
중요한 것은 평화보다 통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유입니다.
만약 평화만 위하고 통일만 생각한다면 이북의 요구대로 해주면 평화 되고 통일됩니다.
그러나 자유는 없습니다.
왜 6·25를 「동란」이라고 했다가 「자유수호」전쟁이라고 개정하여 세계가 부릅니까?
한 민족의 동란이지만 각기 다른 이념과 체제의 침략 속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자 했던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찌된 영문인지 현충일날 주적인 김정일 답방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통일과 평화만 생각한 무모함입니다.
교회도 가족도 친구도 같습니다.
일치감이 있을 때는 교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에 대하여 방식에 대하여 차이가 있다면 그때부터 교제는 끊어지고 심하면 원수지간이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하나님과 교제가 있기를 갈망하면 할수록 예수님의 「의」로 덧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의는 인정하시질 않습니다.
내 안에 예수님의 보혈, 생명이 있을 때만 예수님을 보아 나를 만나주시고 내게 말씀하십니다.
또한 우리 교우들간의 참 교제가 있기를 갈망한다면 구역이나 전도회가 중요하지만, 진리! 믿음이 같아야 합니다.
고전 1:9 "너희를 부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두 번째는 보호의 의미가 있습니다.
떡상인 만큼 떡12개를 두 줄로 나누어 쌓도록 했는데, 물론 이 떡은 이스라엘의 12지파 곧, 오늘날의 교회, 성도를 지칭합니다.
왜 유독 보호의 의미가 있느냐하면은 금테 외에도 손바닥만한 「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금테가 관 쓰신 예수님을 의미하고 있다면 「턱」은 교회와 성도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주님의 통치 내지는 능력으로 볼 수가 있는 겁니다.
일반적인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잔디밭에 무언가 테를 둘렀다면 「출입금지」시켜 잔디를 보호하겠다는 것이요,
애기 난 집에 금줄을 둘리면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 시켜 부정을 막겠다는 의지이듯이,
금테! 장식이기보다는 마귀의 침입을 막는다는 방어적 기능의 의미요 따라서 턱은 보호적 기능의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과연 무엇을 지키고자 하심입니까?
무엇보다도 주안에 머물고 있는 성도 개개인의 생명 그리고 평안 등을 지키고 계십니다.
요 10:28-29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명심하십시오!
누구 나가 아닙니다, 언제든지가 아닙니다.
주안에 있는 성도만 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은 성도와의 교제를 은밀한 교제로 여기셔서 이 교제가 방해받고 싶지 않으신 겁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기도하는 중에 지키십니다.
예배 중에, 묵상 중에 보호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쉬며, 평안을 누리고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떡상은 「예수님 품」혹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입니다.
찬송가 536장
이 곤한 인생이 쉴곳은 없는가
저 높은 산과 깊은 물 나 쉴 곳이 어딘가?
나 애타 바라는 참 안식 무엔가
나 일생 편히 살다가 죽는 것 아니라
이 눈물 골짜기 저 너머 위에는
끝없는 사랑만으로 쉴 곳이 있도다
내주의 품안에 참 안식 있으니
그 사랑 길이 누리며 영원히 살리라
모든 인생이 공통된 소원은 「평안」입니다.
그런데도 평안이 없습니다.
잘못된 길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평안이 없으리 입니다.
죽음만 있으리 입니다.
그러나 주안에 있으면 안식이 있으리 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디에 계십니까?
여러분의 심령의 상태가 주안에 있는가? 아니면 주 밖에 있는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주안에 있으면 평안 있습니다.
주안에 있으면 기도 응답 있습니다.
주안에 있으면 기적도 있습니다.
주안에 있으면 형통도 있습니다.
주 밖에 있으면 이 모든 것이 없습니다.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으로 오라고 부릅니다.
성령님은 주안에 거하여야 한다고 나를 부릅니다.
우리 삶의 희비가 엇갈리는 일은 바로 이러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주안에 있습니다.
중국에 살든 미국에 살든 심지어 감옥에 있든 주소지는 달라도 거주는 주안입니다.
생명의 떡 예수
25: 23-30
23. 너는 조각목으로 상을 만들되 장이 이 규빗, 광이 일 규빗, 고가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
24. 정금으로 싸고 주위에 금테를 두르고
25. 그 사면에 손바닥 넓이만한 턱을 만들고 그 턱 주위에 금으로 테를 만들고
26. 그것을 위하여 금고리 넷을 만들어 그 네 발위 네 모퉁이에 달되
27. 턱 곁에 달라 이는 상 멜 채를 꿸 곳이며
28. 또 조각목으로 그 채를 만들고 금으로 싸라 상을 이것으로 멜 것이니라
29. 너는 대접과 숟가락과 병과 붓는 잔을 만들되 정금으로 만들찌며
30. 상 위에 진설병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찌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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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 문을 통하여 바깥뜰인 외소에 들어서면 번제단이 있고, 물두멍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외소에서 내소인 성소에 들어서면 금빛이 찬란한 광경에 경탄을 금할 수 없게 된다고 했습니다. 성소의 외부는 검은 해달 곧 물개 가죽으로 덮어서 초라하기 그지없었지만, 성소의 내정으로 들어서면 등대와 떡상과 향단이 모두 정금으로 되어 있는데다 등대에서 비추는 빛으로 말미암아 휘황찬란하다고 하였습니다. 성소의 외부가 초라한 해달의 가죽으로 덮여있음은 초라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하고, 성소의 내부가 모두 찬란한 금으로 되어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신성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성소 안에 있는 첫 번째 성구인 순금 등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등대는 금을 쳐서 곧 두들겨서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고난 없이 희생 없이는 빛 된 생활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순 없을까.
욕심도 없이 어둔 세상 비추어 온전히 남을 위해 살듯이,
그러나 나는 주는 것보단 받는 것 더욱 좋아하니,
나의 입술은 주님 닮은 듯하나 내 맘은 아직도 추하여
받을 사랑만 계수하고 있으니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
우리 모두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살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해 봅니다.
성소는 창문 하나 없는 집이어서 칠흑처럼 캄캄한 곳인데, 이 순금 등대에서 비취는 빛으로 말미암아 금빛이 찬란하게 빛나는 밝은 곳이 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등대는 죄악으로 어두워진 세상에 참빛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등대가 어두운 성소 안을 환하게 밝히듯이,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빛으로 오셔서 죄로 어두워진 세상을 밝혀 주신 의의 태양이셨습니다. 이 세상 신인 사단이 믿지 아니한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해서 죄로 어두워진 세상에, 죄와 죽음과 절망을 몰아내고 인류에게 밝은 구원의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어두운 죄악 속에서 살며 인생에 대하여 절망과 신음 가운데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그의 인생은 흑암에서 광명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이렇게 분명한 생의 전환점이 있는 성도라야 참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하는 세상의 빛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죄로 어두운 세상을 더욱 어둡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의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려드리는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시기를 다시 한번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은 성소 안에 있는 성구 중 떡상에 대하여 살펴보면서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1. 떡상의 모양
떡상의 모양은 가로 100cm, 세로 50cm, 높이 75 cm의 크기입니다. 이 떡상 역시 조각목을 금으로 싸서 만들었습니다. 그 위에 12덩이의 떡을 6개씩 두 줄로 나란히 놓았습니다. 이 떡은 매 안식일마다 바뀌었습니다. 바뀌어진 떡은 성소 안에서 제사장들이 나누어 먹었습니다. 떡상의 사면 주위에는 떡이 떨어지지 않도록 손바닥만한 턱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2. 떡상의 의미
떡상은 성소와 그에 따른 모든 것들이 그런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데, 특별히 그것이 제사장들의 양식이 되었다는 점에서 ‘생명의 떡’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성도들의 ‘생명의 떡’이 되십니다. 곧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는 절대적인 양식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입을 옷과 쉴 수 있는 집, 그리고 배부르게 할 양식만 있으면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들은 결코 우리에게 진정한 생명을 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찾아오게 될 죽음을 면하게 해줄 수도 없습니다. 그것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단지 인간의 불완전한 생명을 잠시 연장시켜 주는 것뿐입니다. 결코 영생을 주는 참 양식은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참 양식은 오직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 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떡상 위의 떡은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말하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양식이요 영혼의 양식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어떻게 압니까? 만일 성경이 없다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압니까? 어떻게 주님을 믿습니까? 어떻게 주님의 구원을 받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그러나 죄인이기 때문에 용서받아야 하고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먹어야 할까요? 떡상은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영혼이 건강할 것인지 그 비결을 가르쳐 줍니다. 구약과 신약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1)성령의 조명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등대와 진설병상을 서로 마주 대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은 등대의 불빛이 항상 떡상을 향하여 비추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떡이요,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의 양식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받을 때에 성령의 밝은 조명과 감화가 없으면 참된 양식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성령께서 밝히 조명해주시고, 설교를 들을 때 성령께서 잘 깨닫게 해주시도록 기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 송정 중앙 교회 성도들이 설교를 들을 때마다 성령께서 학자처럼 알아듣고 깨닫게 해주시기를 축원합니다.
2)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
떡상의 진설병은 고운 가루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부서지고 깨지고 녹아져서 완전히 소화되도록 진설병을 만들었습니다. 말씀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곧 로고스와 레마입니다. 성경 전체 66권의 말씀은 로고스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 내게 힘을 주고 능력을 주는 내게 가루가 되어 소화된 말씀만 레마입니다. 자동차가 많아도 내 자동차만 내 것입니다. 강물에 그토록 많은 물이 흘러도 수도꼭지를 통하여 내 입에 들어온 물만 내 물입니다. 그러므로 로고스가 레마가 되어야 합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님이 수정 예배당을 지을 때 너무나 힘이 들어 포기하려 할 때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는 말씀이 레마로 들려왔습니다. 그는 이 말씀을 붙잡고 끝까지 승리하였습니다.
방탕했던 어거스틴은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씀이 레마가 되어 회개하고 성자가 되었습니다.
루터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 레마가 되어 ‘이신득의’의 진리를 깨닫고 종교 개혁의 봉화를 높이 들었습니다. 레마로 먹지 아니한 말씀은 먹으나 마나입니다. 레마로 먹은 말씀만이 내게 생명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3)나누어 먹어야 한다.
떡상의 진설병은 제사장들이 나누어 먹었습니다. 구약에서는 만나 가루를 모아서 떡 덩어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오병이어를 가지고 오천 명이 같이 나누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기에 나누어 먹어야 합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나누어 먹어야 합니다. 떡상 위에는 12개의 떡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12 지파를 의미합니다. 만일 지금 하나님께서 성막을 다시 계시하신다면 떡상 위에 24,000개의 떡을 올려놓으라고 하실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24,000의 종족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반드시 들려져야 합니다. 떡상의 진설병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의 떡을 나누어 먹어야 한다는 교훈이 들어있습니다.
4)순수한 말씀만 사모해야 한다.
떡상 위에는 진설병 외에 다른 떡을 올려놓아서는 안됩니다. 진설병 외에 다른 떡을 성소 안에서 먹어서도 안됩니다. 오직 진설병, 오직 예수, 오직 성경, 오직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것이 더해져도, 있는 것이 빠져도 안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오직 만나만 먹었습니다. 그것은 세미한 가루였습니다. 그것으로 떡을 만들면 바로 진설병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른 것을 보태 먹기를 바랐습니다. 고기를 바랐고, 채소를 원했고, 과일을 그리워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잔인한 형벌을 받았습니다.
음식 문제를 제일 먼저 일으킨 이들은 잡족이었습니다. 광야교회만 그런 것이 아니라 현대 교회도 항상 잡족들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성령 받은 이들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초신자들이 문제를 야기 시키지 않습니다. 성령도 받지 못하고 초신자도 아닌 이들이 언제나 문제입니다. 이들은 음식문제 때문에 불평하면서 하나님의 주시는 만나 외에 다른 것들을 섞어 먹기를 바랐습니다. 마늘, 부추, 생선, 외, 수박 등은 땅에서 나는 것 즉 인본주의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본주의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진설병, 오직 만나만 구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메추라기를 구했다가 결국에는 음식이 되지 못하고 고기가 이빨사이에서 씹히기도 전에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영의 사람은 오직 진설병 곧 그리스도의 말씀만으로 살아야 합니다. 철학이니 사상이니 하는 잡된 것이 섞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에서는 순전한 예수님의 말씀만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으로 건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집에 조금도 인본주의가 섞이지 않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5)항상 먹어야 한다.
진설병은 하루 24시간, 1주 7일, 1년 365일, 늘 떡상 위에 차려져 있어야 합니다. 잠시라도 떡상이 비어서는 안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잠시도 우리에게서 떠나면 안됩니다. 우리는 날마다 생명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만나를 주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고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모두가 꿀 섞은 과자 같다고 야단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중에 만나가 기름 섞은 과자 같다고 혹평을 하면서 고기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꿀 섞인 과자 맛이 비린내 나는 과자 맛으로 변질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영혼이 건강한 증거입니다. 그리고 육신의 건강을 위해 우리가 하루 세끼씩 꼭꼭 밥을 챙겨먹듯이, 우리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매일 먹어야 합니다. 등화가친의 이 계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많이 읽어서 우리 모두의 영혼이 토실토실하고 건강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6)주일마다 새 양식을 먹어야 한다.
떡상위의 떡은 매 안식일마다 새 것으로 갈아놓았습니다. 이는 우리가 주일마다 새롭게 주님의 말씀을 공급받아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자동차가 달리다가 휘발유가 떨어지면 주유소에 들어가 기름을 공급받고 달리듯이, 우리는 계속적인 능력의 공급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스펄젼 목사의 설교를 듣고 목사가 된 피어스가 후에 스펄전 목사님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목사님! 제가 시계라면 목사님은 태엽을 감아주시는 분이었습니다. 주일마다 감아주시는 태엽의 힘으로 나는 일주일을 넉넉하게 능력있게 살았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그렇게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3. 떡상의 운반
떡상을 운반할 때는 우선 청색보자기로 덮었습니다. 청색은 생명의 색입니다. 그런데 놀라웁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청색을 낼 때에는 물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달팽이를 잡아서 그 피를 색소로 썼습니다. 달팽이 피는 청색이라는 것입니다. 그 청색 보자기 위에 떡을 올려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떡은 생명이다” 곧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다.”는 의미를 강하게 교훈해 줍니다.
그 다음 떡상을 운반할 때는 청색 보자기 위에 진설병을 놓고 그 위에 홍색 보자기를 덮었습니다. 홍색은 피의 색깔입니다. 이 홍색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미합니다. 성경을 깊이 상고해 보면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강물처럼 흐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설병이 청색 보자기와 홍색 보자기 사이에 놓여있다는 것은 그 의미가 분명합니다. 말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묻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묻어있지 않은 말씀은 생명을 살릴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싸지 않은 말씀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보혈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를 보배로운 피라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이나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이 생명의 말씀임을 하나님은 분명하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소 안에 있는 떡상에 대해서 상고해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는 크게 두 가지의 음식이 있습니다.
첫 번째 음식은 살려고 먹지만, 먹으면 죽는 음식입니다.
요한복음 6장은 예수님께서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여 명에게 저녁을 먹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적을 통해 육적 양식을 공급하심과 아울러 영적 양식을 교훈하시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이 기적을 체험한 이후 계속하여 썩어질 양식만을 구하여 나아오자, 예수님은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먹고 일하고 자는 것을 생각 없이 반복하며 사는 동안, 교회 밖의 사람들은 먹으면 죽는 음식 한 가지만 알고 그것을 삶의 의미와 목적으로 삼고 살다가 마침내는 영원히 죽고 맙니다.
두 번째 음식은 먹으면 반드시 사는 음식입니다.
모세 시대의 만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주신 신령한 식물이었지만 먹고 죽은 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먹으면 반드시 사는 생명의 떡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다음 세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이 떡은 먹으면 사는 것입니다. 먹어도 죽는 보통 떡과는 다른 종류입니다. 둘째, 이 떡은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입니다.
셋째, 이 떡은 살아있는 생명의 떡입니다.
그러면 이 떡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는 하늘로서 내여 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일생동안 밥을 먹고 삽니다. 그래서 밥은 생명과 같습니다. 밥을 먹으면 살고 밥을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산 자만이 밥을 먹고 죽은 자는 밥을 먹지 못합니다. 그 때문에 사람은 살기 위해서 먹고 먹기 위해서 일을 합니다. 그런데 살기 위해서 밥을 먹지만, 밥을 먹고 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 그 밥을 먹고 다 죽었습니다. 우리 모두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섭취하여 영혼이 항상 건강하기를 바라고, 참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온전히 믿어서 영원히 사는 복을 다 받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진설병은 성소 곧 하나님 앞에 있는 떡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 앞에 있는 떡은 매안식일마다 제사장들이 먹었습니다. 즉 제사장들은 모든 백성을 대표해서 하나님의 상에 참예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 세상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광스러운 천국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을 예표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하는 제사장들을 자신의 상에서 먹게 하심으로써, 세상 끝날에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과 더불어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는 영광스러운 천국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반드시 영원한 하늘나라의 영광스러운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잔치 자리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잔치 자리와도 비교될 수 없는 참된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자리일 것입니다. 그 자리는 어떤 근심도, 걱정도, 아픔도, 슬픔도, 미움도 없는 완전한 희락의 자리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그 잔치에 참여하여 세세무궁토록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광을 누리며 살게 되시기를 영원한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