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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0: 9-23 술 맡은 관원장이
모세는 본문에서 요셉이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을 해몽하고 요셉의 해몽대로 이루어진 사실을 기록합니다.
1. 본문 9-13절은
"(9) 술 맡은 관원장이 그 꿈을 요셉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가 꿈에 보니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10)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11) 내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내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 의 손에 드렸노라
(12) 요셉이 그에게 이르되 그 해석이 이러하니 세 가지는 사흘이라
(13)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하리니 당신이 이왕 에 술 맡은 자가 되었을 때에 하던 것같이 바로의 잔을 그 손에 받들게 되리이다"입니다.
1) 요셉은 짐작해서 일러주는 다른 해몽가들처럼 아마도 무엇일 것이다 라고 어림 잡아서 짐작을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계시에 의해서 그 꿈의 해석을 확실하게 일러줍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세 가지'를 '3년' 이라 말하지 않고 '3일' 이라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이 같이 하고 있기 때문에 요셉은 주저하지 않고 인간의 본성을 훨씬 능가하는 능력으로 꿈을 해석해 나아갔습니다.
요셉은 술 맡은 관원이 벌써 복직된 양 그에게 자기 문제를 부탁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자기가 해석하는 바는 확실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네가 나에게서 들은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올 것이라고 확신하라' 고 일러 주는 방식입니다.
미래에 일어날 모든 일에 대해서 현재에 다 되어진 것같이 생각하고 말하는 그의 태도를 보면 그가 얼마나 하나님 말씀을 존중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또 그 말씀을 전하는 일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2) 그러나 요셉이 자기 예언에 대가를 요구하고 있는 점은 이상하게 생각될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은사를 파는 자처럼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벌써 하나님께서 자기를 어떻게 구원 하실지 그 방법에 대한 확신이 서 있었던 것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런 하나님의 방법을 거역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요셉의 밝은 미래에 대한 확신이 주님의 손으로 그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요셉의 어린 때부터 큰 통치권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많은 곤경과 또 위로와 위안이 전혀 없었던 그런 처지에서도 요셉을 떠나지 않고 계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해방을 시도할 수 있는 이 기회는 분명히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그 기회를 이용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등 놀랄 일이 못됩니다.
"당신의 머리를 들고" 라고 표현되는 말은 낮고 천한 지위에 있는 한 사람을 들어 올려서 명성을 얻게 해 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라고 했을 때 이는 바로가 당신을 이 암담한 감옥에서 당신을 데려 내어 갈 것이라는 말도 되고 바로가 감옥에까지 전락한 당신을 옛날 당신의 직위에 복직시킬 것이라는 말도 되는 것입니다.
2. 본문 14-15절은
"(14) 당신이 득의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이 집에서 나를 건져내소서
(15)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치 아니하였나이다"입니다.
'은혜를 베푼다' 또는 '친절을 베푼다' 라는 말이 유대인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말이긴 해도 여기에서 요셉은 이 말을 통하여 자기 슬프고 고통스런 처지를 암시하여 술 맡은 관원의 마음을 움직임으로서 자기를 도울 수 있도록 주선하게 하려 했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그는 자기가 아무 죄도 없이 감옥에 갇혔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술 맡은 자로 하여금 결백한 자를 돕는 일을 거부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물론 아주 사악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후원자를 만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집요하게 구원을 요청함으로써 자기가 응당 받아야 할 처벌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를 바라는 일은 그 자체가 결코 좋은 일이 못되며 남 보기에도 싫고 수치스런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은 자기 처지를 충분히 설명하고, 또 잘 설명함으로써 술 맡은 관원으로 하여금 자기 결백을 확신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3. 본문 16-18절은
"(16) 떡 굽는 관원장이 그 해석이 길함을 보고 요셉에게 이르되 나도 꿈에 보니 흰 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고
(17) 그 윗 광주리에 바로가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식물이 있는데 새들이 내 머리의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더라
(18) 요셉이 대답하여 가로되 그 해석은 이러하니 세 광주리는 사흘이라" 입니다.
떡 굽는 관원장은 요셉이 해몽하는 그 방법과 성실성에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단지 요셉이 자기 동료에게 기쁜 소식, 반가운 소식을 알려 주는 것을 보고는 자기도 마음속으로 그런 해석을 바라면서 요셉에게 해몽을 부탁했습니다.
사실상 많은 사람들이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알고 싶어하거나 또는 우리 주님의 뜻에 따르기 위해서 주님의 뜻을 알려고 하는 경우보다는 단지 자기들이 생각하고 꿈꾸는 일에 대한 만족을 얻기 위하여 열심히 그리고 다급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자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가르침이 자기들의 바램과 어긋났을 때는 상처받은 마음과 슬픔을 안고 말씀에서 떠나가게 되는 법입니다.
떡 굽는 관원장이 꾼 꿈 해몽은 즐겁고 기쁜 것이 아니라 가혹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요셉은 자기 자신에게 알려진 것을 어물어물 얼버무리지 않고 그 내용을 정확히 알려줍니다.
요셉은 하나님께 위임받은 대로 그 관원장에게 자기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했습니다.
선지자들이나 선생들은 이 같은 과단성을 지니어서 자기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죽음을 내린 자들에게는 그것을 올바로 알려주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에게 좋은 말과 아첨의 말을 해 주기를 원합니다.
또 대다수의 지도자들이 타락한 세상 욕구를 그대로 들어 주는 경향으로 기울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외곡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난이나 힐책을 무릅쓰면서라도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여러 가지 잘못을 지적하고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명령에 따라서 자기가 가르칠 방법을 짜 놓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요셉은 양면성을 항상 구비하고 있는 예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어떤 사람에게 복을 줄 수 있는 것은 예언자의 권한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일러 주시는 대로 솔직하게 대변하는 것 외에 그가 할 일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많은 포도주와 기름과 곡식을 약속하는 예언자들을 택하면서 항상 거룩한 예언자들에게는 대항해서 맞서왔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자들은 공포와 저주밖에는 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불평은 예언자 미가에 관한 기사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언자들은 자기들에게 어떤 미움과 위험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단호히 선포하기 위하여 세상에 보내졌기 때문에 그들은 이 일을 해 내는 것입니다.
4. 본문 19-22절은
"(19)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끊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하더니
(20) 제 삼일은 바로의 탄일이라 바로가 모든 신하를 위하여 잔치할 때에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으로 머리를 그 신하 중에 들게 하니라
(21)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하매 그가 잔을 바로의 손에 받들어 드렸고
(22) 떡 굽는 관원장은 매어 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 입니다.
본문 19절은 원문으로 볼 때 다른 부가적인 설명이 없으면 두 가지 뜻으로 애매 모호하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나쁘게도 또 좋게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마치 아무개를 '중요시하다' 고 우리가 말했을 때와 같은 것입니다.
본문에는 '당신으로부터' 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말한 것은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어올리고 그 머리를 잘라 낼 것이다' 라는 암시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셉이 두 사람에게 일어날 일을 예언해 준 사실을 언급하면서 모세는 예레미야서에 기록되었듯이(28:9) 요셉이 진실한 하나님의 예언자인 것을 증언하려 하고 있습니다.
때로 예언자들은 하나님께서 내리시기를 보류한 징계를 사람들에게 위협하기도 합니다.
그런 일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런 예언에는 어떤 조건이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 종을 통해서 단호히 예언한 모든 사실들은 결과적으로 꼭 일어나리라는 말씀으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이 요셉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기록에 의하면 바로는 잔치를 크게 열어 자기 생일을 축하했습니다.
이런 풍습은 왕 뿐 만이 아니라 평민들 사이에서도 널리 행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풍습이 올바른 목적으로 지켜진다면 정죄 할 수는 없습니다.
즉 자기들을 지으시고 기르시며 수없이 여러 가지 복을 주고 계시는 은혜의 아버지, 하나님께 이런 잔치를 통해서 감사 드리는 그런 풍습 말입니다.
반면에 조상들이 이렇게 순수한 뜻으로 지켜오던 풍습을 후대에 들어서면서 그 뜻이 외곡되고 부패되는 것이 바로 타락한 세상의 풍물입니다.
그래서 잔치를 여는 듯이 쾌락과 방종을 위한 것이 되고 자기들의 호화로움을 자랑하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자기들의 생명의 창조자를 생일 잔치를 통하여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잊기 위한 잔치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건한 욥은 자녀들이 자기들끼리 생일 잔치를 치르고 난 다음에 꼭 정결을 위한 제의식을 가져야만 했습니다(욥1:1-5).
4. 본문 23절은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었더라" 입니다.
1)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잊은 사실은 요셉에게는 견디기 힘든 시험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자기를 감옥에서 아무 탈 없이 출옥시켜 줄 한 변호인을 만났습니다.
특히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은혜로서 베풀어주신 기회라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은 자기 구출을 분명히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매 시간 간절히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2년이 지나도록 바라던 소식이 없자 모든 희망이 다 사라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 지금까지 맛보았던 어떤 실망보다도 더 큰 실망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감옥생활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그 때를 우리 마음대로 정하는 것보다 더 부적당한 것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랜 기간동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일부러 걱정과 불안 가운데 놓아둠으로서 그들이 그런 고통스런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는 사실이 진실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깨닫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외에 이런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은 요셉을 영어(囹圄)의 몸으로부터 자유케 할 뿐만 아니라 영광을 얻게 하는 독특한 역사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만일 술 맡은 관원장이 자유롭게 풀려 나자마자 요셉을 기억하고 그의 석방을 위하여 노력하고 그 결과로 요셉이 풀려났다면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요셉의 석방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사람의 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믿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진술에 의하면 술 맡은 관리는 요셉을 잊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 자신이 비난과 힐책을 받을까 염려되고 왕에게 귀찮은 일이 되지 않을까 염려되어서 감히 요셉의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결백한 사람을 배반하여 죽게 내 버려 두는 것이 자기들이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느니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 궁중 조신들의 일반적인 풍조입니다.
2) 요셉은 사람과 사람들의 뜻 안에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안목과 사람들의 의지 안에 속한 인물이 아닙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안목과 하나님의 의중에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책하시고 부르신 인물이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을 인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그분의 뜻대로 그분의 의지대로 밀어 올려서 쓰실 인물입니다.
요셉 뿐 입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존재입니다.
우리의 직분이 우리의 은사가 우리의 헌신과 순종이 그런 종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함으로 일생을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