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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연안이씨(延安李氏·연안이씨: 연안을 본관으로 하는 이씨 가문)
자: 중서(仲舒·중서: 버금 중〔仲〕, 펼 서〔舒〕)
호: 식산(息山·식산: 쉴 식〔息〕, 산 산〔山〕 → ‘쉬는 산’, 은거와 수양을 연상시키는 호)
생몰: 1664~1732
여기서 출생지는 조금 조심해야 합니다.
일부 상주 지역 자료와 연구 소개에서는 “서울에서 태어났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최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물 항목은 그의 출생지를 ‘미상’으로 표시합니다. 대신 그의 집안이 여러 대에 걸쳐 서울에서 살았다고 명확히 기록합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또 학술연구에서는 이만부가 생애 전반 약 34년을 한양에서 살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KCI)
따라서 학술적으로 가장 안전한 표현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만부의 정확한 출생지는 현재 확정하기 어렵다. 다만 연안이씨 근기남인 명문가에서 태어나 한양에서 성장하고 생애 전반을 서울에서 보냈다.”
즉 ‘서울 출생’이라고 단정하기보다는 ‘서울에서 성장한 근기남인’이라고 쓰는 편이 더 엄밀합니다.
2. 그의 집안 자체가 근기남인의 핵심 가문이었습니다
이만부가 근기남인이라고 불리는 가장 강력한 근거가 바로 가계(家系·가계: 집 가〔家〕, 계통 계〔系〕 → 한 집안의 혈연과 계보)입니다.
할아버지는 이관징(李觀徵)이고, 아버지는 이옥(李沃)입니다. 할아버지 이관징은 이조판서를 지냈고, 아버지 이옥은 예조참판을 지낸 고위 관료였습니다.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승지 이동규의 딸이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리고 이 집안은 단순히 남인에 속한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아예
이만부의 가문은 근기남인의 명문
이라고 규정합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더구나 아버지 이옥과 할아버지 이관징은 숙종 초 남인이 분열될 때 청남(淸南·청남: 맑을 청〔淸〕, 남녘 남〔南〕 → 서인에 대해 비교적 강경한 태도를 취한 남인 세력) 쪽에 있었습니다. 이옥은 허목·윤휴 등과 함께 송시열을 강하게 처벌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여기서 이만부의 정치적·학문적 배경이 상당히 선명해집니다.
서인·노론계 ↔ 남인계
그리고 남인 내부에서도
탁남(濁南·탁남: 서인 처벌에 비교적 온건) ↔ 청남(淸南·청남: 비교적 강경)
이라는 격렬한 정치적 갈등 속에서 성장한 것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15세 소년이 아버지의 유배를 따라갔습니다
1678년, 이만부가 15세 때 중요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아버지 이옥이 송시열의 강경 처벌을 주장하였다가 탁남 세력의 반발을 받아 북청(北靑·북청)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어린 이만부는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여러 해 아버지를 모시면서 공부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 경험은 이만부의 인생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학문 ↔ 정치
도학 ↔ 당쟁
선비의 이상 ↔ 현실 정치의 비정함
을 직접 보았습니다.
아버지 이옥은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기사환국: 기사년에 정권이 크게 바뀐 정치적 변동)으로 풀려났고 다시 관직에도 진출했지만, 이만부 자신은 결국 과거와 벼슬에 적극적으로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몰두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디지털 인문학 센터)
따라서 이만부의 은거를 단순히 “벼슬이 싫어서”라고 볼 수 없습니다.
가족이 직접 겪은 당쟁의 상처가 그의 산림학자적 삶을 선택하는 하나의 중요한 배경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마지막 부분은 그의 생애 정황에 근거한 해석입니다.
4. 그의 학맥도 근기남인의 중요한 흐름과 연결됩니다
이만부의 학문을 이해하려면 정시한(丁時翰)을 반드시 보아야 합니다.
정시한은 근기 퇴계학의 중요한 학자였으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정시한의 문하에서 이만부가 배출되었다고 명시합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연구자들은 이만부의 학통을 대체로
퇴계 이황
↓
한강 정구
↓
미수 허목
↓
우담 정시한
↓
식산 이만부
라는 근기남인계 학맥과 연결해서 설명합니다. 동시에 처가를 통해서는 이황→류성룡 계열의 영남 학문과도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KCI)
그러므로 이만부의 학문은 애초부터 한쪽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근기남인의 허목·정시한 계열과
영남남인의 이황·류성룡 계열
이 그의 안에서 만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KCI)
5. 1697년, 그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이동이 일어납니다
이만부는 1697년(숙종 23), 34세 무렵 서울을 떠나 상주로 이주합니다. 학술연구에서도 그의 생애 전반 34년을 한양, 후반을 영남에서 보냈다고 정리합니다. (KCI)
정착지는 상주의 노곡(魯谷·노곡: 노나라 노〔魯〕, 골 곡〔谷〕) 일대였습니다.
이곳에 약 1700년 무렵 식산정사(息山精舍·식산정사: 마음을 수양하고 학문을 닦는 식산의 정사)를 조성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천운정사(天雲精舍·천운정사: 하늘 천〔天〕, 구름 운〔雲〕, 정사 정사〔精舍〕 → 하늘과 구름 속에서 학문을 닦는 집)는 그 공간의 일부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곳은 단순한 집이 아니었습니다.
독서 + 강학(講學·강학: 익힐 강〔講〕, 배울 학〔學〕 → 학문을 함께 배우고 토론함) + 후진교육 + 벗과의 교유 + 자연 완상
의 공간이었습니다. (DBpia)
6. 왜 서울 사람 이만부가 상주로 내려왔을까요?
이것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이만부는 류성룡의 증손녀와 혼인 관계를 맺었고, 이를 비롯한 영남 남인가문과의 혼맥과 학문적 교유가 상주 정착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KCI)
즉 그는 아무 연고도 없이 상주로 간 사람이 아닙니다.
이미
근기남인 가문 ↔ 영남남인 가문
사이에 혼맥과 학맥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상주는 이만부에게 단순한 피난처가 아니라 근기남인의 학문을 영남의 퇴계학과 연결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7. 상주에 내려온 뒤에는 사실상 ‘영남 학자’가 됩니다
상주로 내려온 뒤 이만부는 영남의 대표적인 학자들과 폭넓게 교류합니다.
특히 갈암 이현일(李玄逸) 계열의 학자들과 깊이 교류했습니다. 이만부는 자신이 세운 「천도유경설(天道有敬說·천도유경설: 하늘 천〔天〕, 길 도〔道〕, 있을 유〔有〕, 공경 경〔敬〕 → 천도의 작용에도 ‘경’의 의미가 있다고 보는 학설)」을 이현일에게 물어 검토받기도 했습니다. (KCI)
상주에서는 권상일과도 교유했고, 홍여하·이구 계열의 후손들과도 관계를 맺었습니다. 근암서원의 증축과 강학 활동에도 관여한 것으로 연구됩니다. (KCI)
그래서 일부 연구자는 이만부를 아예 “근기남인에서 영남남인으로 전향한 인물”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KCI)
그러나 저는 ‘전향’이라는 표현보다
“근기남인 출신으로서 영남남인 사회에 정착하여 양쪽을 연결했다.”
라고 표현하는 것이 그의 복합적 위치를 더 잘 설명한다고 봅니다.
실제로 2023년 연구도 이만부를 “근기남인과 영남남인을 통섭한 학자”로 규정합니다. 통섭(統攝·통섭: 거느릴 통〔統〕, 잡을 섭〔攝〕 → 서로 다른 것을 아울러 묶음)이라는 표현이 아주 적절합니다. (KCI)
8. 그의 학문은 퇴계를 존숭했지만 상당히 독창적이었습니다
이만부는 주염계·정호·정이·장재·주자를 존숭했고, 특히 퇴계 이황을 정주학의 적전(嫡傳·적전: 정통으로 이어받은 계승자)으로 높이 평가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주리적(主理的·주리적: 주인 주〔主〕, 이치 리〔理〕 → 기보다 리의 도덕적·원리적 역할을 중시함) 성향을 보였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러나 그는 단순한 ‘퇴계 학설 암송자’가 아니었습니다.
최근 연구에서는 이만부가 이기론(理氣論·이기론: 이치 리〔理〕와 기운 기〔氣〕의 관계에 관한 이론)을 특정 당파의 도구로 만드는 것을 비판했고, 자신의 독자적인 해석을 제시했다고 평가합니다. (KCI)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당시에는
퇴계학 ↔ 율곡학
남인 ↔ 서인·노론
이 학문과 정치의 경계에서 겹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만부는
“철학은 당파의 무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는 쪽에 가까웠던 학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2023년 연구의 내용을 제가 쉽게 풀어쓴 것입니다. (KCI)
9. 『도동편』은 이만부의 대표작입니다
이만부의 대표 저술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이 『도동편(道東編·도동편: 길 도〔道〕, 동녘 동〔東〕, 엮을 편〔編〕 → 동방 조선의 도학을 모아 엮은 책)입니다.
1708년에 저술한 책으로, 중국의 『성리대전』과 같은 체제를 빌려 조선 성리학자들의 학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려 했습니다. 연구에서는 이를 일종의 ‘조선판 성리대전’이라고 평가합니다. (DBpia)
이것은 단순한 편집이 아닙니다.
중국 성리학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서 한 걸음 나아가
“우리 조선의 학자들은 무엇을 생각했고, 조선 성리학의 계보는 어떻게 이어져 왔는가?”
를 정리하려 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만부는 상당한 자국 학문에 대한 자의식을 가진 학자였습니다. (DBpia)
10. 실학과도 연결됩니다
이만부의 학문은 성리학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가 남긴 전적에는 『태학성전』·『지서』·『향약제명록』·『도동편』·『사서강목』·『역통』·『예기상절』·『독서법』·『독서일기』 등 매우 다양한 저술이 포함됩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그의 학문이 성리학뿐 아니라 국학과 실학적 분야에까지 뻗었다고 평가합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특히 격물(格物·격물: 이를 격〔格〕, 사물 물〔物〕 → 사물과 현상을 깊이 탐구함)에 대한 그의 생각은 후대 성호 이익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연구되고 있습니다. 이익의 격물설 형성 과정에서 윤휴와 이만부의 영향이 중요했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KCI)
따라서 학문적 맥락을 크게 잡으면,
허목·정시한 → 이만부 → 이익 → 성호학파
라는 흐름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단순한 직계 사제계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사상적 영향과 교류의 흐름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합니다. (KCI)
11. 그는 여행하는 학자이기도 했습니다
이만부에게는 또 하나 독특한 면이 있습니다.
직접 다녔습니다.
전국의 산과 강, 명승고적을 찾아다니면서 기록했고 그것을 『지행록(地行錄·지행록: 땅 지〔地〕, 다닐 행〔行〕, 기록할 록〔錄〕 → 여러 지역을 직접 답사하며 남긴 기록)으로 묶었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그는 금강산을 비롯하여 전국 여러 지역을 여행하고 지리·역사·풍속·산수를 기록했습니다. 그의 「금강산기」는 조선 후기 산수유기의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Korea Journal Central)
이 점에서 그는 단순히 책을 읽는 학자가 아니라
독서 ↔ 답사
문헌 ↔ 현장
을 함께 중시한 사람이었습니다.
친구야께서 역사에서 현장답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도 통하는 면이 있는 학자입니다.
12. 무신란 때의 행동도 흥미롭습니다
1728년 무신란(戊申亂·무신란: 무신년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만부는 격문(檄文·격문: 격문 격〔檄〕, 글월 문〔文〕 → 사람들에게 행동을 촉구하는 글)을 지어 창의를 도왔고, 아들도 의병 활동에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KCI)
이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무신란에 일부 영남 남인이 참여했다고 해서
남인 = 무신란 세력
으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만부처럼 남인이면서 오히려 반란 진압을 지지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KCI)
13. 그는 끝내 관직보다 학문을 선택했습니다
1729년 영조는 이만부의 학행(學行·학행: 배울 학〔學〕, 행실 행〔行〕 → 학문과 훌륭한 행실)을 인정하여 장릉참봉과 빙고별제 등에 임명했지만 이만부는 모두 사양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결국 그는
벼슬하는 사대부 ↔ 재야의 산림학자
가운데 후자의 길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현실을 외면한 은둔자는 아니었습니다.
향약을 만들고, 서원에서 강학하고, 후진을 가르치고, 사회적 문제에 의견을 내고, 역사와 지리를 연구했습니다. 『향약제명록』·『도동편』 등의 저술도 이러한 성격을 보여줍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4. 1732년 세상을 떠납니다
이만부는 1732년(영조 8), 69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의 사후 문집인 『식산집(息山集·식산집: 식산 이만부의 시문을 모은 책)은 1813년에 간행되었습니다. 원집·별집·속집 등을 합쳐 방대한 분량입니다. (Krpia)
그리고 1786년 근암서원에 이구·권상일과 함께 추가 배향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만부는 문경 출신은 아니지만, 문경 유림이 학문적으로 존숭한 칠현 가운데 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5. 그러면 왜 근암서원에서 이만부를 모셨을까요?
여기가 문경 유학사를 연구할 때 아주 중요한 대목입니다.
이만부는 문경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근암서원에 배향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유명한 학자’였기 때문만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그는 상주로 이주한 뒤 문경·상주권의 홍여하·이구 계열 후손 및 권상일 등과 교유하고, 근암서원의 증축 및 강학에 관여했습니다. (KCI)
즉 근암서원은
출생지 중심의 서원이 아니라
학맥·교유·지역 유림의 공론 중심의 서원
이었던 것입니다.
이만부의 배향은 이를 아주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만부의 생애를 한 줄로 연결하면
1664년 근기남인 명문가 출생·한양 성장
→ 1678년 아버지 이옥의 북청 유배를 따라감
→ 당쟁의 현실을 체험하고 과거·관직보다 학문을 택함
→ 정시한 등 근기 퇴계학맥의 영향
→ 1697년 상주 이거
→ 1700년 무렵 식산정사 조성
→ 이현일·권상일 등 영남남인과 깊은 교유
→ 1708년 『도동편』 저술
→ 근기남인과 영남남인을 잇는 가교 역할
→ 1728년 무신란 때 반란 진압 지지
→ 1729년 관직 제수 거절
→ 1732년 사망
→ 1786년 근암서원 추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저는 이만부의 정체성을 이렇게 정리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봅니다
“식산 이만부는 근기남인 명문가에서 성장하여 허목·정시한 계열의 근기 퇴계학을 계승한 남인 산림학자였다. 34세 무렵 서울을 떠나 상주에 정착한 뒤에는 영남남인의 퇴계학자들과 폭넓게 교류하면서 근기남인과 영남남인의 학문을 연결하였다. 그러므로 그를 단순히 ‘근기남인’ 또는 ‘영남남인’ 하나로만 규정하기보다 ‘근기남인에서 출발하여 영남에 정착하고 두 남인 학풍을 통섭한 학자’라고 평가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KCI)
요점 정리
친구야, “식산 이만부는 근기남인인가?” → 네, 분명히 근기남인 출신입니다. 그의 가문 자체가 근기남인의 명문이었고, 아버지 이옥과 할아버지 이관징도 남인, 특히 숙종 초 청남 계열의 정치적 흐름에 있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다만 1697년 상주로 이주한 이후 약 35년 동안 영남에서 살면서 영남남인의 학문과 깊게 결합했습니다. 따라서 이만부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위치는 “근기남인 ↔ 영남남인의 가교”에 있습니다. (KCI)
그리고 출생지는 서울 출생이라고 소개하는 자료가 있지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현재 ‘미상’으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정확하게 글을 쓰려면 “서울에서 성장하여 생애 전반 34년을 한양에서 보낸 근기남인”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만부를 이 관점에서 보면 홍여하·이구·이만부·권상일이 왜 한 근암서원에 함께 모셔졌는가도 훨씬 선명해집니다. 네 사람의 관계를 학맥·당색·교유·근암서원 배향 과정까지 연결하면, 17~18세기 문경·상주 남인 유학의 지도가 거의 완성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