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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니체
Zarathustra's Vorrede.
1.
Als Zarathustra dreissig Jahr alt war, verliess er seine Heimat und den See seiner Heimat und ging in das Gebirge. Hier genoss er seines Geistes und seiner Einsamkeit und wurde dessen zehn Jahr nicht müde. Endlich aber verwandelte sich sein Herz,
차라투스트라의 서설(序說)
1.
차라투스트라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그는 그의 고향과 고향의 호수를 떠나 산 속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그는 스스로의 정신과 고독을 누렸으며, 그렇게 보낸 10년 동안 조금도 지루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내 그의 심정에 변화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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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 철모르는 시절이 지나고 젊음의 최정점을 지난 나이.
치기어린 행동도 아니고 충동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본격적으로 인생을 살아나가기 시작하는 시기에 차라
투스트라는 자기 고향을 떠난다.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가는 것이 아니라 산맥(Gebirge)으로 간다.
첩첩산중으로. 자기만의 인생을 살기 위해서 깊은 산 속으로 간다. 그리고 거기에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스스로의 정신과 고독을 누’린다.
이전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없다. 자기 고향에서 계속해서 살았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자기 ‘고향과 고향의 호수’를 떠난다.
고향을 떠나는 것은 부모와 친척과 친구들 그리고 아는 모든 이들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
자기 혼자 있기 위해서는 자기 스스로 단절을 감행해야 하는 것.
그런데 ‘고향의 호수’를 떠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고향의 호수와 함께 하는 동안에는 ‘스스로의 정신과
고독’을 누릴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인데.
고향의 호수를 떠났을 때에 스스로의 정신과 고독을 누릴 수가 있게 된다.
호수 앞에 섰을 때 거기에 비치는 하늘을 보면서 또 다른 하늘이 있음을 보지 않을 수 없는데, 이 하늘과 또
다른 하늘을 보면서는 ‘고독’의 참된 의미를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호수에 하늘이 비치는 것처럼, 호수에 비친 자기 자신을 보면서는 스스로의 고독을 누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기 고향을 떠나면서 굳이 ‘고향의 호수’를 떠났다고 하는 것.
깊은 산중에 동굴에서는 자기를 비쳐볼만한 것이 없으므로 진정한 고독을 누릴 수가 있었을 것.
고독(Eimsamkeit)은 자기의 그림자나 호면에 비친 상과 같은 또 다른 자기도 없이 오직 홀로 있음을 가리키
는 것.
왜 이 상태를 누리려고 할까. 고독만이 아니라 ‘정신과 고독’을 누리기 위해서 깊은 산 속으로 떠난다.
고독과 정신을 같은 경지로 이야기한다. ‘정신’은 육체와 대를 이루는 정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의 생각에만 집중한다는 뜻이 아닐까. 자기가 하는 일을 다른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과 관련시키지
않고 자기만의 생각을 끝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 아닐까.
정신과 고독을 누리면서 조금도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다. 이 과정은 지루할 것이라는 생각이 보통 사람들이
가지는 생각인데, 그런 보통 사람들의 생각을 넘어서고 있다.
정신과 고독이 함께 있기 때문에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닐까.
정신과 고독을 누린다는 것은 정신이 고독을 감싸 안고, 고독이 또한 정신을 감싸 안음을 가리키는 것.
정신도 외롭지 않고 고독도 외롭지 않다.
나 자신은 나의 정신과 고독을 나와 떼어 놓고 볼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것.
나와 함께 있으나 나와 분리된 나의 정신과 나의 고독을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나의 본모습을
볼 수 있는 것.
나는 나의 정신 혹은 나의 생각의 끝에서 나의 고독과 맞닥뜨릴 때 나는 온전한 나와 만나게 되고, 그때에
비로소 마음(Herz)이 움직일 수 있는 것.
이렇게 움직이는 마음의 변화는 변할 수 없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갈대와 같은 마음이 아니라 강철과 같은 마음. 정신과 고독을 누린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
이 마음은 확고부동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
갑자기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지만 참되고 온전한 나가 결정한 것이므로 갑자기 이루어졌다고 해도 틀림이
없는 것.
- und eines Morgens stand er mit der Morgenröthe auf, trat vor die Sonne hin und sprach zu ihr also:
"Du grosses Gestirn! Was wäre dein Glück, wenn du nicht Die hättest, welchen du leuchtest!
Zehn Jahre kamst du hier herauf zu meiner Höhle: du würdest deines Lichtes und dieses Weges satt geworden sein, ohne mich, meinen Adler und meine Schlange.
Aber wir warteten deiner an jedem Morgen, nahmen dir deinen Überfluss ab und segneten dich dafür.
―그리하여 어느 날 아침, 먼동이 트자 그는 일어나 태양을 향해 걸어 나가 이렇게 말했다.
“그대, 위대한 천체여! 만일 그대가 비춰 주어야 할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대의 행복이란 대체 무엇이겠는가!
지난 십 년 동안 여기 내 동굴을 찾아 올라와 비춰 주었다.
나와 나의 독수리 그리고 뱀이 없었더라면, 그대는 빛과 그대의 행보(行步)에 싫증이 났으리라.
그러나 우리는 아침마다 그대를 기다려 그 넘치는 풍요를 받아들였으며 그 대가로 그대를 축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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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변화가 일어나자 차라투스트라는 태양을 향해 마주 서서 말한다.
태양에게 자기의 계획을 말하고 내려가게 된다. 그는 태양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태양을 ‘위대한 천체’라고 한다. 태양이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태양이 햇볕을 비춰줄 수 있어서가 아니다.
태양은 그 빛을 비춰줄 수 있는 대상인 자기가 있었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한다.
태양이 위대한 것은 상대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태양에게서 ‘넘치는 풍요’를 받고 그
대가로 태양을 축복했다고 한다.
이렇게 맞상대가 있는 태양은 위대한 천체라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없었다면 태양은 행복하지도 않고, 날마다 하는 일에 싫증을 느끼는 그렇고 그런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차라투스트라가 있음으로 해서 태양은 행복하고 위대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서로 대등하게 맞서서 대등하게 주고받을 수 있는 상대가 있는 이를 위대하다고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오직 태양만이 자기의 상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차라투스트라가 10년 동안 조금도 지루함을 느끼지 않았듯이 태양도 차라투스트라의 동굴을 찾는
일에 싫증을 느끼지 않았는데 자기와 함께 자기의 독수리와 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살아있는 생물인 독수리와 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 것인데, 차라투스트라와 함께 태양 빛을 받은
독수리와 뱀은 무엇인가.
하늘 가장 높은 곳을 나는 새인 독수리와 땅에 배를 대고 다니는 뱀.
하늘과 지상의 대표자로서의 독수리와 뱀.
그리고 하늘과 땅의 중간에 위치한 깊은 산 속의 동굴에 있는 차라투스트라.
태양이 이 셋을 비추는 것은 온 천지를 비추는 것과 같은 것. 차라투스트라가 있는 곳에 온 천지가 있다
는 것.
독수리를 긍지의 상징으로, 뱀을 지혜의 상징으로 보기도 한다. 독수리나 뱀은 자신의 분신과 같은 존재
일텐데, 자신을 독수리와 뱀과 함께 취급하는 것은 인간의 위치를 다시 설정해 놓은 것이 아닐까.
동물로서의 인간이므로 독수리와 뱀과 자신을 ‘우리’(wir)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동물로서의 인간을 인식함으로써 새로운 출발선에 설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Siehe! Ich bin meiner Weisheit überdrüssig, wie die Biene, die des Honigs zu viel gesammelt hat, ich
bedarf der Hände, die sich ausstrecken.
Ich möchte verschenken und austheilen, bis die Weisen unter den Menschen wieder einmal ihrer Thorheit und die Armen einmal ihres Reichthums froh geworden sind.
보라! 너무 많은 꿀을 모은 꿀벌이 그러하듯이, 나는 나의 넘치는 지혜에 지쳤다.
내게는 그 지혜를 갈구하며 내미는 손들이 필요하다.
나는 베풀어주고 싶고 나눠주고 싶다. 사람들 중에서 현명한 자들이 다시 한 번 그들의 어리석음을
깨달아 기뻐하고, 가난한 자들이 다시 한 번 그들의 넉넉함에 대해 기뻐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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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을 ‘너무 많은 꿀을 모은 꿀벌’과 같다고 한다.
그런데 꿀벌이 너무 많이 모으는 그런 일을 하지는 않는다.
자연과 동물은 언제나 적당한 선에서 만족한다. 적당한 선에서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는 인간 밖에는
없다.
차라투스트라가 자기가 너무 많은 지혜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가 인간이라서 깨달은
것이 아니라 독수리와 뱀과 같은 동물과 같이 있었고 동물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인간은 과도한 상태에 있음을 알지 못하는 존재, 가지면 더 가지려고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인 자신을 ‘너무 많은 꿀을 모은 꿀벌’에 비유하고 있는 것은 뭔가 맞지 않는다.
꿀벌은 너무 많은 꿀을 모으지 않는다.
자기에게 ‘넘치는 지혜’가 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차라투스트라가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자기 자신을 너무 많은 꿀을 모으는 꿀벌에 비유하고, 자기에게 ‘넘치는 지혜’가 있다고 자처하는 이
차라투스트라는 <아직> 충만한 지혜를 가지지 못하였음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자기가 모든 것을 깨닫고 사람들에게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눠주려고 사람들에게 내려가는 것은 일방적
으로 베푸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보이는 차라투스트라의 이 부족한 부분이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과정을 통해서 채워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진정으로 충만한 지혜를 가진 자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나눔을 통해서 진정한 완성을 이루게 될 것이다.
넘치는 지혜에 지쳤다(überdrüssig)는 언급도 이 지혜가 참된 지혜가 아님을 말해준다.
차라투스트라를 향해서 내미는 손들은 차라투스트라에게서 넘쳐나는 지혜를 얻어가는 것이 아니라
차라투스트라에게 부족한 부분들을 가져가는 셈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자기의 부족한 부분들을 덜어내는 것이고 사람들은 차라
투스트라에게서 지혜를 얻어 그들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게 되어 차라투스트라와 사람들 모두 온전한
지혜를 가지게 되는 것, 그것이 차라투스트라가 바라는 바가 아닐까.
Dazu muss ich in die Tiefe steigen: wie du des Abends thust, wenn du hinter das Meer gehst und
noch der Unterwelt Licht bringst, du überreiches Gestirn!
Ich muss, gleich dir, untergehen, wie die Menschen es nennen, zu denen ich hinab will.
그러기 위해서 나는 저 깊은 밑바닥으로 내려가야 한다.
저물 무렵 그대가 바다 저편으로 떨어져 아래의 세상을 비춰줄 때 그러하듯이, 그대 풍요로운 천체여!
나는 그대와 마찬가지로 하강(下降)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내려갈 세상의 인간들이 그렇게 부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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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넘치는 지혜’를 베풀어주고 나눠주려 한다.
‘넘치는 지혜’라고 자부하는 것 자체가 이미 부족한 지혜라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자기의 지혜가 부족한 지혜라는 것을 감지하고 있다.
자기의 ‘넘치는 지혜’를 베풀고 나눠줌에 있어서 태양이 높이 떠올라서 빛을 비추는 것처럼 하지 않는다.
차라투스트라는 ‘저 깊은 밑바닥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말한다.
자기가 밑바닥으로 내려가는 것은 저 태양의 모범을 따르는 일이라고 한다.
‘바다 저편으로 떨어져 아래의 세상을 비춰줄 때’ 태양이 하는 것처럼 차라투스트라도 태양과 마찬가
지로 ‘하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것을 잘 알고 있다.
세상의 인간들은 태양의 이러한 일을 ‘하강’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내려간다(untergehen)는 말 또는 하강(Untergang)이라는 말은 ‘세상의 인간들’ 즉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현명한 자들과 자신의 넉넉함을 알지 못하고 있는 가난한 자들이 태양이 바다 저편
으로 떨어지는 일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다.
‘내려간다’ 혹은 ‘하강(=내려감)’이라는 말은 ‘올라간다’ 혹은 ‘상승’(=올라감)에 반대되는 말이다.
이제 차라투스트라가 내려가게 될 세상의 사람들은 태양이 올라가서 비추는 것만을 비추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태양이 내려가서 비추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차라투스트라는 태양이 내려가서 비추는 것처럼 자기도 내려가겠노라고 말한다.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을 아는 태양을 향해서 ‘그대 풍요로운 천체여!’ 라고 말한다.
‘풍요’는 올라감의 이면에 해당되는 이 내려감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세상의 사람들은 이 태양의 풍요로움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현명하지만 자기에게 어리석음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가난하지만 자기에게 넉넉함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므로 저들에게는 기쁨이 없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저들에게 태양의 풍요를 가르쳐주기 위해서 태양처럼 솟아오르는 것이 아니라 태양
처럼 하강하는 것이다.
세상의 사람들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차라투스트라는 자기 자신에게 있는 ‘넘치는 지혜’를 이 ‘하강’을
통해서 ‘넘치는 지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지혜, 참된 지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말하자면, 참된 지혜에 도달하지는 못하였으나 참된 지혜에 이르는 길은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하강을 통해서 차라투스트라는 온전한 지혜의 사람이 될 것이고, 사람들도 역시 온전한
지혜의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상승과 하강을 알고 있는 태양과 같이 풍요로운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세상의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참된 지혜자가 되고자 하는 진정한 구도자인 것이다.
So segne mich denn, du ruhiges Auge, das ohne Neid auch ein allzugrosses Glück sehen kann!
그러니 나를 축복해 다오, 지극히 큰 행복조차도 시기함이 없이 바라볼 수 있는 그대, 고요한 눈동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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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 ‘고요한 눈동자’(ruhiges Auge)라고 부른다.
태양은 지극히 큰 행복도 시기함이 없이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고요’하다고 한다.
‘시기심’이 없는 것이 고요함의 요체.
시기심은 부러워하는 것. 부러워하지 않는 것은 자기에게 만족하고 있기 때문. 너무 많이 가지고 있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게 가지고 있기 때문.
자기 자신은 자기 자신으로 족하기 때문에 지극히 큰 행복을 구하지도 않고 그것을 가진 자를 시기하고
부러워하지도 않는다.
이 고요한 눈동자는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객관적이지만 주관적인 것.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 ‘고요한 눈동자’에게 자기를 축복해 달라고 한다.
이 고요한 눈동자에게서 그 ‘고요’를 전수받고자 함이 아닌가. 지금 세상의 사람들에게로 가려고 하는
이 차라투스트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시기심을 없애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기심은 자기 자신의 본래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게 하는 것.
나의 고요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면 내가 보는 모든 이들과 모든 것들도 역시 비뚤어져 보인다.
온 세상이 왜곡되어 보이게 되면 내가 나누어주고자 하는 지혜도 왜곡된 것이고 나 역시도 왜곡된 것
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참된 지혜자가 되는 길은 막혀버리게 된다.
차라투스트라가 태양의 시기심이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은 그에게 태양이 가진 ‘지극히 큰 행복’을
시기심을 가지고 보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태양을 부러워하고 있지만 그 태양을 향해서 ‘나를 축복해 다오’라고 함으로써,
태양이 자기보다 우위에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시기심을 가지지 않고 자기 자신을 보게 된다.
시기심을 해소하는 길은 상대의 우위를 인정하는 것임을 알게 해준다. 상대의 우위를 솔직하게 인정
하고 그와 같아지고자 할 때 ‘고요한’ 상태가 될 수 있는 것. 고요한 상태에서라야 참된 지혜자가 될 수
있는 것.
Segne den Becher, welche überfliessen will, dass das Wasser golden aus ihm fliesse und
überallhin den Abglanz deiner Wonne trage!
Siehe! Dieser Becher will wieder leer werden, und Zarathustra will wieder Mensch werden."
- Also begann Zarathustra's Untergang.
넘쳐 흐르고자 하는 잔을 축복해 다오.
그 속에서 황금빛 물이 흘러 나와 그대 열락의 반영을 온 누리에 실어 나르도록!
보라! 이 잔은 다시 비워지고자 하며,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인간이 되고자 한다.
― 이리하여 차라투스트라의 하강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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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Becher)은 넘쳐흐르려는(will) 의지를 가지고 있고 다시 비워지려는(will) 의지를 가지고 있다.
이 잔은 차라투스트라가 들고 있는 잔이다.
그런데 차라투스트라의 의지와는 별개로 잔은 자기 의지를 가지고 있다.
지금 이 잔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인데, 그로 보면 이 잔은 지혜의 잔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의 지혜와 자기를 별개로 본다. 자기의 지혜를 자기가 볼 수 있다. 그만큼 객관화된 지혜를 가리
키는 것.
객관화되었다고 하지만 이 지혜는 차라투트라<의> 지혜이므로 주관화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이 지혜는 객관-주관을 넘어선 하나의 실체로 존재하는 것.
그래서 이 지혜는 나와는 별개로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또 한편에서 보면 나의 의지와
이 지혜의 의지는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이다.
태양을 향해서 이 <절대적으로 상대화된> 이 지혜를 축복해 달라고 한다.
태양이 축복해 주면 태양의 ‘열락’(Wonne)이 이 잔에서 흘러나오는 물에 비치면서 온 누리에 퍼지게
될 것이라고 한다.
태양의 축복이 이 지혜를 태양과 같이 만들어줄 것이라는 소원이 담겨 있다.
자기의 지혜가 태양과 같이 아래의 세상을 비추기도 하고 떠올라 위의 세상을 비추기도 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는 자기가 그와 같이 되기를 원하고 있음을 뜻한다.
이 잔이 비워지고자 한다고 말한다. 자기의 지혜를 다 쏟아버리기를 원한다.
여기 깊은 산 속에 동굴에 십년 동안 있으면서 가득 채워진 지혜가 흘러나가면서 태양의 열락을 비치고
아래의 세상의 사람들은 태양의 열락을 보게 될 것이다.
지혜가 다시 비워졌을 때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지혜가 다 비워지는 것과 차라투스트라가 인간이 되는 것이 같은 것으로 나온다.
이곳에서 10년간 있으면서 가득 차게 된 지혜를 다시 비워버리면 다시 10년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지만 원래의 모습은 아닌 것이다.
인간에서 다시 인간으로. 그러나 똑같은 인간은 아니다.
지혜로 가득한 인간에서 지혜가 비워진 인간으로 되는 <과정에서> 태양의 열락을 비쳐주는 매개체가
된다. 이 과정을 거쳐서 인간은 참된 인간이며 참된 지혜자가 될 수 있다는 것.
차라투스트라는 10년 전의 인간과 다름이 없는 인간이 되려고 한다.
10년 전의 인간과 이 인간은 같은 인간인데 다른 인간이 아닐 수 없다.
차라투스트라는 한 인간이 되려고 한다. 세상 속에 있는 한 사람이 참된 지혜자라는 뜻이 아닐까.
그저 하나의 인간(Mensch)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미 지혜의 길에서 벗어난 것이 아닐까.
2.
Zarathustra stieg allein das Gebirge abwärts und Niemand begegnete ihm. Als er aber in die
Wälder kam, stand auf einmal ein Greis vor ihm, der seine heilige Hütte verlassen hatte,
um Wurzeln im Walde zu suchen. Und also sprach der Greis zu Zarathustra:
2.
차라투스트라는 홀로 산을 내려갔으며, 그와 마주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숲속으로 들어섰을 때, 갑자기 한 노인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숲속에서 풀뿌리를 구하
려고 자신의 성스러운 오두막집에서 나와 있던 노인이었다.
그런데 그 노인은 차라투스트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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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홀로(allein)’ 아래로 내려간다. 왜 홀로 내려가는 것이 강조가 되는가.
자기와 함께 있던 독수리와 뱀이 함께 하지 않는 것.
자기가 들고 있던 잔이 함께 하지 않는 것. 이는 역설적으로 독수리와 뱀과 그 잔이 자기와 하나가 되어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숲속까지 내려가는데 아무도 마주친 사람이 없다.
무인지경을 지나고 있다. 숲속에서 한 노인이 차라투스트라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숲(Wald)과 산맥(Gebirge)와 사람들의 세상이 높이를 달리하면서 나타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가 10년 동안 있었던 깊은 산속 혹은 산맥의 동굴 속에서 참된 지혜를 깨닫는다.
그것은 ‘신은 죽었다’는 것을 아는 것인데, 차라투스트라는 이 노인과 헤어지면서 이 숲(Wald)에 있는
노인이 신은 죽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노인은 인간을 사랑하여 이 숲에 들어왔다가 자기 나름대로 참된 신을 만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숲은 신을 만나는 곳. 그러면 더 깊은 산 속은 신이 죽었음을 알게 되는 곳.
그러면, 저 아래 인간 세상은 참된 의미의 신이 없는 곳.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는 것처럼, 차라투스트라는 숲(Wald)에서 신을 만났고, 산맥(Gebirge)에서
신을 죽였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차라투스라는 신은 죽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
이 노인은 신을 만났으나 신을 죽이지 못한 상태에서 신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신을 찬미하고 있는 것.
찬미하는 신을 죽일 수는 없을 것.
이 노인은 차라투스트라에게 ‘인간들이 있는 곳으로 가지 말고 숲속에 머물러라!’ 라고 말한다.
이 노인이 있는 숲은 신을 찬미하는 곳. 인간 세상은 신이 없는 곳.
산맥은 신의 죽음이 있는 곳. 신을 만나면 신을 죽이는 것은 우상으로서의 신을 죽이는 것을 뜻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야 한다.
신을 만나면 신이라는 우상을 죽일 때에 우상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
참된 신은 우상숭배하듯이 숭배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차라투스트라는 신을 죽인 것이 아니라 우상을
깨부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노인은 숲속 오두막집에서 풀뿌리로 연명하면서 신을 찬미하고 있으며 인간 세상으로 내려가려고도
하지 않고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참된 깨달음이 아니라는 것.
인간 세상에서 숲으로 들어가고 다시 거기에서 깊은 산맥으로 들어가서 신을 만나고 신을 죽이고 신의
죽음을 깨닫고 다시 인간 세상으로 내려가야 하는 것.
그것이 참된 지혜자, 참된 구도자의 행로라는 것. 우상을 깨부수었기 때문에 차라투스트라는 스스로
신이 되려고 하는 시도를 하지 않을 것이다.
신을 죽이지 못한 자, 즉 우상을 깨부수지 못한 자는 스스로 신(우상)이 되려고 하다가 그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되는 것.
Nicht fremd ist mir dieser Wanderer: vor manchen Jahre gieng er her vorbei. Zarathustra hiess
er; aber er hat sich verwandelt. Damals trugst du deine Asche zu Berge: willst du heute dein
Feuer in die Thäler tragen?
“이 방랑자는 내게 낯설지 않구나. 여러 해 전에 그가 이곳을 지나간 적이 있다.
그의 이름을 차라투스트라였다. 그러나 그는 모습이 변했구나.
그 당시 그대는 그대의 재[灰]를 짊어지고 산으로 올라갔는데, 오늘 그대는 자신의 불[火]을 골짜기로
날라 가려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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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차라투스트라를 ‘방랑자’라고 부른다. 노인은 자신의 오두막집(Hütte)에 거하고 있으므로 방랑
자가 아니다.
방랑자만이 우상을 섬기듯이 신을 섬기지 않을 수 있을 것.
최소한의 주거인 오두막집이지만 거기에 거주하고 있으므로 저 아래 세상의 사람들과는 다르겠으나
역시 거주하고 있음에는 다름이 없는 것. 방랑자가 될 때에 참된 신을 만날 수 있는 것.
노인이 한 번 지나간 차라투스트라를 기억하고 있고 그의 모습이 변했다는 것도 알아본다.
이 노인은 차라투스트라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은 하지 못하는 것을 하는 사람에게 가지는 관심이 아닐까.
차라투스트라가 이 숲을 지나서 산맥 혹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갈 때 차라투스트라가 재를 짊어지고
올라갔다는 것.
이 ‘재’는 무엇일까. 재는 ‘타고 남은 것’을 가리키는 바, 차라투스트라의 30년의 세월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30년의 세월동안 남은 결과가 ‘재’라는 것. <노인이 볼 때에> 그렇다는 것이다.
노인이 아는 한 가장 높은 단계의 앎은 숲에서의 앎이다. 노인의 앎의 수준에서 볼 때 차라투스트라의
인생은 재만 남은 것으로 보였다는 것.
그런데 지금 차라투스트라는 ‘불’을 가지고 있음을 보고 있다.
차라투스트라가 가진 불은 타고 남은 것이 아니라 불타오르는 것.
이 역시 노인의 앎의 수준에서 그렇다는 것. 노인이 볼 때 차라투스트라의 재와 불은 무엇일까.
신을 신봉하고 찬양하는 노인의 앎의 수준에서 볼 때 차라투스트라의 재는 무신앙이고 불은 신을 향한
불타는 열정에 다름 아니다.
노인이 볼 때 차라투스트라가 자기 앞을 지날 때에는 신을 향한 열정이 완전히 식어버려 신앙이 전혀
없는 상태로 보였던 것.
그런데 지금은 신을 향한 열정이 불타오르고 있음을 본다.
그러니까 이 은둔 수도자인 성자(聖者) 노인이 볼 때 차라투스트라는 자기보다 더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음을 첫 눈에 간파한 것이다.
이 노인보다 더 높은 수준의 신앙이 어떤 것인지 이 노인은 알지 못하지만 느끼고는 있는 것.
노인과 차라투스트라는 다른 차원에 속하고 있어서 노인은 차라투스트라처럼 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신을 죽였지만 이 성자 노인이 볼 때에는 차라투스트라야말로 신을 향한 열정에 불타고
있는 사람으로 보였던 것.
차라투스트라의 단계에서라야 신을 죽이고서야 신을 섬기는 일이 가능한 것.
이 성자 노인의 단계에서는 신을 죽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불경이고 가장 큰 죄악일 수 밖에 없는 것.
Fürchtest du nicht des Brandstifters Strafen?
그대는 방화범이 받는 형벌이 무섭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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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가 가진 불은 자신을 위한 불이 아니라 골짜기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
차라투스트라는 지금 불을 지르려고 한다. 태양이 빛을 비추듯이 진리를 나누어주려고 하는데 이 성자
노인은 방화범이 되려고 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방화범에게는 무서운 형벌이 뒤따르게 될 것까지 내다보고 있다.
이 노인이 보는 ‘방화’란 무엇일까.
지금 차라투스트라가 가진 불을 보면서 이 노인은 차라투스트라가 굉장한 신앙을 가지고 있음을 간파
하였는데 이 신앙의 위험성까지 알고 있다.
노인은 신을 죽임으로써 신을 온전히 섬길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신은 죽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지만 차라투스트라의 신앙의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이 신앙의 불은 사람들과는 동떨어진 곳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 노인의 지론.
이 신앙의 불이 사람들에게 전해질 때에는 사람들은 이 신앙을 전하는 자를 방화범으로 몰고 죽이게 될
것을 알고 있다.
활활 타오르는 신앙의 불을 가진 자는 결국 자기가 죽인 신과 유사한 길을 걷게 되어 있음을 이 노인은,
내용은 다르지만, 예언을 하고 있다.
wie ein Tänzer?
Verwandelt ist Zarathustra, zum Kind ward Zarathustra, ein Erwachter ist Zarathustra:
was willst du nun bei den
Schlafenden?
그렇다. 나는 알아볼 수 있다. 분명히 차라투스트라다.
그의 눈은 순결하고 그의 입 언저리에는 아무런 혐오의 빛도 숨겨져 있지 않구나.
그러므로 그는 흡사 춤추는 사람처럼 걸어가고 있지 않은가?
차라투스트라는 변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어린아이가 되었다. 차라투스트라는 눈을 떠 깨달은 사람이
되었다. 이제 그대는 잠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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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인 성자는 차라투스트라를 알아본다. 그의 눈이 순결함을 본다.
눈은 마음의 창, 차라투스트라의 내면이 그대로 눈을 통해 드러나고 있음을 본다.
그의 입언저리에는 아무런 혐오의 빛도 숨겨져 있지 않음을 본다.
입으로 하는 말이 그대로 마음의 표현이다.
다른 의도를 숨기고 있지 않다. 이러한 차라투스트라는 춤추는 사람처럼 걸어가고 있다.
자연스럽다는 뜻이 아닐까. 리듬을 타고 있다는 것. 자연의 리듬에 맞추어져 있다는 것.
경직되어 있지 않다는 것. 놀이할 수 있는 인간이 되어 있다는 것.
차라투스트라는 자기가 찬탄해마지 않았던 태양과 같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극히 큰 행복조차도 시기함이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상태가 되어 있다. ‘고요한’ 상태가 되었다.
노인은 차라투스트라가 ‘어린아이’가 되었음을 알아본다. 차라투스트라가 ‘변했다’고 한다.
무엇이 변했는가. 이 노인이 차라투스트라를 본 것은 차라투스트라의 나이 서른 살에 산맥으로 올라갈
때였다. 그리고 십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차라투스트라가 나이 사십이 되어 있어야 하는데 자연적인
흐름을 따르지 않고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것.
장년이 되어 있어야 하는데 어린아이가 되어 있다. ‘춤추는 자’처럼 된 것은 자연의 흐름과 순행하는
것이라면 ‘어린아이’가 된 것은 자연의 흐름과 역행한다.
이 순행과 역행에 차라투스트라의 ‘깨달음’이 깃들어 있다. 자연의 순리를 따르기도 하고 역행하기도
하는 가운데 차라투스트라는 ‘깨달은 사람’이 된다. 진정한 깨달음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
아니다. 순행과 역행을 모두 알 때에 <춤추는 어린아이 사람>이 되어 참된 지혜자가 될 수 있는 것.
차라투스트라에게 이 노인 성자는 ‘잠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고 묻는다.
차라투스트라는 깨어 있는데 잠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갈 필요가 없다는 뜻을 담고 있다.
깨어 있는 사람은 깨어 있는 사람끼리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 노인은 순행만을 알고 역행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노인으로서 늙어갈 뿐, 변하여(verwandeln) 어린아이가 되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
이다.
어떤 사람이 차라투스트라와 같이 깨달은 자가 될 수 있는가.
이 성자 노인과 같이 신을 만나서 신을 숭배만 하는 자는 순행만을 아는 자.
차라투스트라와 같이 신을 만나서 신을 죽이고 신의 죽음을 선언하는 자는 순행과 역행을 아는 자인 것.
* 니체 지음, 두행숙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부북스, 2011)
첫댓글 음~~! 필타를 하시는 건가요? 감동입니다.. 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