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의 식탁이 멈춘다면
주민현
자전거를 타고 미끄러질 때
운동장이 기울어져 있다는 걸 알게 되지
한쪽 눈을 감고 타도 좋아
기울어진 세계를 살아가기 위한 규칙
그러나 오늘은 우리의 식탁을 멈추고서
부드러운 날씨로 상을 차리겠네
유치원의 문을 닫고서
푹신한 구름으로 운동장을 만들겠네
계산원이 없다면 마트는
항의와 전화로 창문에 조금씩 금이 가겠지
아무도 간호하지 않는다면 아이를 보지 않는다면
공장으로 출근하지 않는다면
여성들이 일을 멈춘다면*
세상의 절반으로만 눈이 내리겠지
세상에 의자가 없다면
모두가 엉거주춤 서 있는 우스꽝스러움
신발을 만드는 사람이 사라진다면
맨발로 길을 걸어가는 슬픔
세상의 절반이 멈춘다면
신호등은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겠지
기울어진 운동장에 서서
녹슨 철봉에 귀를 대고 있으면
구름과 함께 천둥이 몰려오는 소리
운동장을 가로질러 아이들이 뛰어오는 소리
뒤돌아보면
마트에서 유치원에서 병원에서
엉거주춤 서서 일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눈을 감으면
운동장 위로 비스듬히 쌓아 올린 의자들
발로 차면 그 의자들 굴러떨어지는 소리
눈을 뜨면 기울어진 얼굴 위로
고독한 맨발 같은 눈이 내리지
* 아이슬란드 여성총파업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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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현 / 1989년 서울 출생. 아주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7〈한국경제신문〉신춘문예 시 당선되어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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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 감상
오늘 우리의 식탁이 멈춘다면 / 주민현
홍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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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1
19.02.26 13:10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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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홍철기 시인에게
명시 발굴하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식탁을 위해서 여성들도 참여할 수밖에 없는 시대,
오늘 우리의 식탁이 멈춘다면
아이의 모유가 없어진다면
아이의 입이 없어진다면 - - -
사유의 폭이 한없이 날아갑니다
좋은 시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해피! 이구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명시라기 보다는 제가 읽은 시중에서 그냥 소개해드린 거라 온전히 제 취향입니다. 이런 시도 있구나 하는 것도 있을 수 있죠. ^^; 햐피님의 글에서 저또한 사유의 폭이 넓어짐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