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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거리와 량 등을 기준하는 정밀도는 거의 같다고 보시면됩니다.
옛날에도 척도는 거의 정확했다고 봐야죠.
수천년 전의 수학은 현대에도 놀랄 일이니까요.
현재에 와서 이름만 바꾸거나 정밀 부분을 약간 손댔다고 보면 될까요?
#1 둔전?
고려사절요 제5권
문종 인효대왕 2(文宗仁孝大王二)
계축 27년(1073), 송 희녕 6년ㆍ요 함옹 9년
○ 여름 4월 서북로 병마사가 아뢰기를, “장성(長城)밖 에 개간한 밭 1만 1천 4백 94경은 가을 수확을 기다려서 군수(軍需)로 지급하게 하소서." 하니, 제가하였다.
○ 夏四月 西北路兵馬使,奏,長城外,墾田一萬一千四百九十四頃,請待秋收獲,以資軍儲,制可。
고려장성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고 지금 랴오닝도 고려때 쭝궈땅인데 장성밖에 농사도 지어
군수용으로 쓰겠다니 고려 문종대왕은 제가制可 한다. 제가制可와 재가裁可는 같은 말이다.
장성밖 경작면적이 무려 11,494경이다. 이걸 평방킬로미터로 환산해 보자.
1경頃 = 100무畝다, 1무畝는 = 100평坪으로 330.6㎡이다.
1무를 200평 하는 곳도 있지만 100평으로 한다.
11,494경頃 × 100 = 1,149,400 무畝 (1무=330.6㎡) =
1,149,400 무畝 × 330.6㎡ = 379,991,640 ㎡ = 379.99 ㎢ ≒ 380 ㎢.. 이다..
김해평야(남한 경남 평야) - [金海平野]브리태니커
낙동강 하구 부근에 형성된 우리나라 최대의 충적평야.구포를 정점으로 김해시 대동면 일대 및 부산광역시 북구가 이 지역에 걸쳐 있다. 전체적으로 남북길이가 18㎞, 동서길이가 16㎞에 달하고 있다.
18 ㎢× 16 ㎢ = 288 ㎢ 가 김해평야다.
예전 면적으로 하면 8.711경頃이고 871,100무畝다.
고려 문종대왕때 장성밖 둔전 1,149,400 무畝 × 330.6㎡ = 379,991,640 ㎡ = 379.99 ㎢ ≒ 380 ㎢
현재 경남 김해평야 18 ㎢× 16 ㎢ = 288 ㎢ = 388,000,000 ㎡ ÷ 330.6㎡ = 871,143무畝
고려때 둔전 380 ㎢ - 국내 최대 김해평야 288 ㎢ = 98 ㎢(이건 뭘까?)
장성 밖 둔전은 어디?
#2 주나라 주척(or 고구려)=조선 주척
자尺 즉 도량형은 그 시대의 패권을 잡은 자가 정하는 겁니다.
주나라에 주척이 있었고 그 주척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쓰이던 자입니다.
현재는 양이의 기준을 따르죠.
현재의 패권은 양이입니다.
그래도 피는 속일 수 없죠. 아직까지 근, 말, 접, 자, 평 등은 계속 쓰고 있죠.
하지만 쭝궈는?
자尺 - 파란백과
길이를 재는 단위. 척(尺)이라고도 한다. 치의 10배이고, 1m의 10/33이다. 한국에서는 예로부터 열손가락의 폭, 팔길이, 걸음폭을 길이의 기준으로 하였으나 정확하지 않아 표준척도를 정할 필요를 느꼈다. 이에 고구려 때에는 중국 은(殷)나라의 척도인 기전척(箕田尺)을 들여와 표준척도로 사용하였고, 통일신라 때에는 당(唐)나라의 당대척(唐大尺)과 주척(周尺)이 기전척과 같이 통용 되었으나, 조선시대부터는 명(明)나라의 영조척(營造尺)이 주척과 함께 사용되면서 기전척·당대척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또 세종 때는 용도에 따라 조례기척(造禮記尺)·포백척(布帛尺)·황종척(黃鐘尺) 등도 사용되었다.
조선때 쓰던 자尺는 주척周尺이라 한다. 주나라때 쓰던 자尺란 말이다.
그리고 고구려를 말하고 당을 말하며 신라를 말한다.
고구려 주나라 은나라는 꼭 같이 붙어 다닌다.
주척은 조선 선대왕조가 쓰던 자尺고 자신들이 쓰던 자라 주저없이 주척周尺이라는거다.
글고 고구려는 은나라의 기전척箕田尺을 썼다한다. 자는 은나라 태사 기자의 기箕자다.
조선과 고구려는 하은주 없이는 할 말도 없는지 말만 하면 하은주 얘기다.
글고 파란 백과는 기전척箕田尺이 은나라 척도(도량형)라 한다.
전편에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건국되고 기자가 무왕에게 홍범구주를 알려주고
동래하여 기자조선을 건국했다니 은나라 태사 기자의 척도가 은나라 척도였던 거다.
#3 1ft=1자?
기전척의 용도는 영조척營造尺인데 건축등 각종 생산에 쓰이던 기준척이다.
수당때도 당대척 주척 고구려척이 쓰였다면 척도가 통일되었다는 건데 교묘하게
천자국과 제후국을 섞어 동격인듯 혼란을 주며 각기 척도가 다른 자였다는 뉘앙스다.
고구려가 은나라 척도인 기전척을 쓰다가 주척을 썼다는건 세월이 흘러 척도의
변화가 생겼다는 거고 이는 고구려의 척도가 그 이후 기준이 됐음을 의미한다.
영조척[營造尺]
목수가 쓰던 자로 목공척(木工尺)이라고도 한다. 주로 부피의 측정, 병기(兵器)·선박의 건조, 건축, 특히 성곽의 축조 등에서 많이 사용하였다. 본래 당(唐)·수(隋)나라에서 사용한 당대척(唐大尺)·주척(周尺)과 고구려척(高句麗尺) 등이 이러한 용도에 사용되었다.
2. 자 = 척(尺)
자는 손을 폈을 때의 엄지손가락 끝에서 가운뎃손가락 끝까지의 길이에서 비롯된다. 자의 한자인 ‘尺’은 손을 펼쳐서 물건을 재는 형상에서 온 상형문자(象形文字)이며, 처음에는 18cm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이 차차 길어져 한(漢)나라 때는 23cm 정도, 당(唐)나라 때는 24.5cm 정도로 되었으며, 이보다 5cm 정도 긴 것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고려 및 조선시대 초기까지는 32.21cm를 1자로 했으나, 세종 12년의 개혁시에 31.22cm로 바꾸어 사용해 오다가 한말(1902년)에 일제의 곡척(曲尺)으로 바뀌면서 30.303 cm로 통용되었다. 1963년 계량법이 제정되어, 현재는 거래 ·증명 등의 계산단위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1자=1척 = 10치[寸] = 10/33m = 30.30 cm
조선때 쓰던 도량형 즉 자尺가 주척周尺이라 한다. 주나라가 쓰던 자란 말이다.
조선이 주나라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알수있는 해주는지 알수있고 조선실록으로 확인해준다.
그리고 주나라와 고구려를 말하고 당과 신라를 말하며 또 조선을 말한다.
주나라와 고구려는 천년이나 차이가 나는데 왜 꼭 같이 붙어다니는지 알다가도 모를일이다.
주척은 조선의 선대왕조부터 쭉 쓰던 자尺이며 자신들이 쓰던 자라 주저없이 주척周尺이라 하는거다.
그리고 고구려때 은나라때 기전척箕田尺을 썼다고한다. 근데 箕자가 기읍에 살던 은나라 태사 기자 箕자를 쓴다.
조선 고구려는 주나라와 은나라 얘기 없이는 아무것도 없는지 말만했다 하면 하은주 얘기부터 나온다.
주척周尺은 1자가 20.78cm이고 6자가 1보이고 300보가 1리다. 현재 쓰는 1자는 30.03cm다.
1ft가 30.48cm인데 요거이 바로 1자尺란 말과 비슷해 보이지 않은가?
만주 너머 오랑캐들이 조선의 도량형을 기준으로 했고 지금도 그 여파가 남아
꼭 자기들이 독창적인듯 하며 쓰는 피트가 바로 조선이 쓰던 주척의 길이와 넘 비슷하다는 거다.
암튼 지금 1자는 30.03cm다.
1902년 일제의 곡척에 따라 바뀌었다 하는데 일제가 독자적인 도량형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인가?
일제가 쓰던 도량형은 조선의 도량형이니 우리가 쓰던 한척 30.03cm는 조선의 1자라고 봐야한다.
20.78cm × 6척 = 124.68 cm ×300보 = 374m = 1리
21.82cm × 6척 = 130.90 cm ×300보 = 392m = 1리
30.03cm × 6척 = 180.18 cm ×300보 = 540m = 1리
#4 길이 단위
1. 치 = 촌[寸]
척관법(尺貫法)에 의한 길이의 계량단위인 자[尺]의 보조계량단위 촌[尺]의 순수한 우리말.
1치 = 1.1930inch = 3.0303cm
2. 자 = 척(尺)
자는 손을 폈을 때의 엄지손가락 끝에서 가운뎃손가락 끝까지의 길이에서 비롯된다. 자의 한자인 ‘尺’은 손을 펼쳐서 물건을 재는 형상에서 온 상형문자(象形文字)이며, 처음에는 18cm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이 차차 길어져 한(漢)나라 때는 23cm 정도, 당(唐)나라 때는 24.5cm 정도로 되었으며, 이보다 5cm 정도 긴 것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고려 및 조선시대 초기까지는 32.21cm를 1자로 했으나, 세종 12년의 개혁시에 31.22cm로 바꾸어 사용해 오다가 한말(1902년)에 일제의 곡척(曲尺)으로 바뀌면서 30.303 cm로 통용되었다. 1963년 계량법이 제정되어, 현재는 거래 ·증명 등의 계산단위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1자=1척 = 10치[寸] = 10/33m = 30.30 cm
3. 보
보통 장년 남자의 발걸음이 기준이 된다. 이 방법은 중국에서 시작된 것으로 처음에는 1보의 길이가 주척(周尺) 8척이었으나, 춘추전국시대에는 주척 6척 4촌, 후에 주척 6척, 주척 5척으로 바뀌어 사용되었다. 한국에서의 보는 토지측량에도 사용되던 중국과는 달리 처음에는 단지 거리측량에만 사용되었다. 그 후 중국의 제도를 본따 1보를 표준척도의 6척으로 하였으며, 견포의 길이를 재는 데도 사용하였다. 그 뒤에도 몇 차례 보의 길이가 바뀌었지만 1444년(세종 26) 이후로는 다시 6척이 1보가 되었다.
1보 = 6척 = 181.80cm = 1.82m
4. 장 (丈)
중국 주(周)나라에서는 8척을 1장이라 하고, 성년 남자의 키를 1장으로 보았다(당시의 1척은 지금의 1척보다 작았다). 사람의 키만한 길이를 '한길'이라고 하는 것도 거기서 유래된 듯하다.
1장 = 10자[尺] = 3.03m
5. 길
원래 사람의 키를 기준으로 한 것인데, 차차 길게 잡아 8척(자) 또는 10척을 한 길이라 하게 되었다. 물건의 높이나 깊이를 어림잡는 데 쓰인다.
강물이나 바닷물의 깊이를 잴 때에는 fathom(패덤)의 역어로서 쓰이는 일도 있는데 이 경우의 한 길은 6ft(1.83m)에 해당한다.
6. 리 (里) = 마장(馬丈)
1리 = 1,296자 = 1,296×1자(10/33m) = 12,960/33m = 0.392km = 약0.4km
#5 만리장성≠완리창청
고려사절요 제4권
덕종 경강대왕(德宗敬康大王)
계유 2년(1033), 송 명도 2년ㆍ거란 중희 2년
○ 평장사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북쪽 경계에 관방(關防)을 새로 설치하게 하여, 서해 가의 옛 국내성(國內城) 경계로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 위원(威遠)ㆍ흥화(興化)ㆍ정주(靜州)ㆍ영해(寧海)ㆍ영덕(寧德)ㆍ영삭(寧朔)ㆍ운주(雲州)ㆍ안수(安水)ㆍ청새(淸塞)ㆍ평로(平虜)ㆍ영원(盈遠)ㆍ정융(定戎)ㆍ맹주(孟州)ㆍ삭주(朔州) 등 13성을 거쳐, 요덕(耀德)ㆍ정변(靜邊)ㆍ화주(和州) 등 3성에 대어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니, 길이가 천여 리에 뻗치고 돌로 성을 만들었으며 높이와 두께가 각각 25척이었다.
○命平章事柳韶,創置北境關防寧起自西海濱,古國內城界,鴨綠江入海處,東跨,威遠,興化,靜州,寧海,西德,寧朔,雲州,安水,淸塞,平虜,寧遠,定戎,孟州,朔州,等十三城,抵耀德,靜邊,和州等三城,東傳于海,延?千餘里,以石,爲城,高厚,各二十五尺。
고려때 유소가 쌓은 성의 지명이 아래 조선때 지명과 하나 틀리지않고 그대로 나온다.
고려 : 위원 흥화 정주 녕해 녕덕 녕삭 안수 청새 평로 녕원寧遠 정융 맹주 삭주 등 13성 거쳐 요덕 정변 화주..
조선 : 위원 흥화 정주 녕해 운주 녕삭 안수 청새 평로 녕원寧遠 정융 삭주 등 13성 거쳐 동해.. 다.
고려의 천리장성은 고구려의 천리장성에 이어져 더 길어져 수천리이고 조선의 만리장성은
단군조선 고구려 고려 조선를 거치며 루적되어 장성 길이가 무려 만리가 된다하여
만리장성이라 한거다. 그 위치 길이 높이가 다 기록되었으니 다른말이 필요 없을게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조선의 만리장성이 위치 거리 크기가 기록되어 있는걸 보자.
세종 88권, 22년(1440 경신 / 명 정통(正統) 5년) 2월 18일(신묘) 2번째기사
우의정 신개가 함길·평안 양도의 부방, 입보 등의 폐단과 비변책에 대해 상언하다
<전략>
삼가 《고려사(高麗史)》를 상고하오니, 덕종(德宗)이 평장(平章)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처음으로 북경(北境)의 관방(關防)을 설치하게 하였는데, 서해(西海) 바닷가의 예전 국내성(國內城) 지경의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위원(威遠)·흥화(興化)·정주(靜州)·영해(寧海)·영삭(寧朔)·운주(雲州)·안수(安水)·청새(靑塞)·평노(平虜)·영원(寧遠)·정융(定戎)·삭주(朔州) 등 13성을 거쳐 동해(東海)에 이르는 수천 리를 뻗어 돌로 성을 쌓았는데, 높이가 25척이요, 넓이도 그와 같았으며, 무릇 끝에서 끝으로 가려면 석 달이나 걸렸습니다.
謹按《高麗史》, 德宗命平章柳韶, 創置北境關防, 起自西海濱古國內城界鴨綠江入海處, 東跨威遠、
興化、靜州、寧海、寧朔、雲州、安水、靑塞、平虜、寧遠、定戎、朔州等十三城, 東傳于海, 延?數千里, 以石爲城, 高二十五尺, 廣如之。 首尾凡三朔程。<중략>
의주(義州)로부터 경원(慶源)에 이르는 사이에다 장성(長城)을 쌓는다면 만세의 이익이 될 것입니다.
自義州至慶源, 起築長城, 則可爲萬歲之利矣。
<중략>
중국의 장성(長城)이 비록 만리(萬里)라고 하오나, 산해위의 관(關)을 보오면 사람이 통행할 수 있는 곳에만 쌓은 데에 그쳤으니, 반드시 도로의 평탄하고 험한 것을 논하지 아니하고 모두 쌓은 것입니다.
中朝長城, 雖云萬里, 以山海衛關觀之, 止於人行可通處築之, 未必不論夷險而皆築也。
<하략>
【태백산사고본】 28책 88권 17장 B면
【영인본】 4책 269면
【분류】 *군사-부방(赴防) / *군사-관방(關防)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위의 실록을 보며 높이 넓이로 크기는 있는데 거리는 수천리로 전제 련장을 알 수 없을거다.
하지만 만리장성 위치 크기 련장이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함 보자..
만리장성 위치는..
서해 국내성 지경의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이 시작이고 종점은 위원 정주등 13성을 거친다.
만리장성 크기는..
높이 25척.. 넓이도 같은 25척이다.
만리장성 길이는..
시작에서 끝까지 석달로 90일 거리다.. 이게 조선의 만리장성 거리다.
이제부터 하나하나 풀면서 가보자.
조선의 장성이 13성에 거쳐 수천리나 되고 단가 센 돌로 쌓은 석성石城이라 했고
높이가 25척 넓이도 같다고 했고 끝에서 끝을 가면 석달三朔이나 걸린다고 했다.
높이가 25척이고 넓이도 같다고 했으니 세종대왕때 영조척 31.24cm로 한다.
25척 × 31.24cm = 7.81m 다. 높이도 폭도 7.8m다..
거리는 당시 영조척 1자 31.24cm니 1리×1,296자 = 404.87m가 1리이고 만리면..
① 31.24cm(1자) × 1,296자 = 404.87cm(1리) × 10,000리 = 4,048.7km 다.
지금은 거리가 3,927km가 만리다. 비슷하지 않남?
일제 총독부때 1자는 지금과 같은 30.03cm로 제정됐는데 이때 손댔다고 가정하면..
② 30,03cm(1자) × 1,296자 = 392.727cm(1리) × 10,000리 = 3.927.2km다.
석달 거리를 시간으로 다시 계산해 보면 90일이라 했으니 시간이 있어야 한다.
요즘 성인기준 도보 시간은 1.4m/s로 1시간 도보 거리는..
1시간 × 3600초 × 1.4m/s = 50,401m 로 대략 1시간에 5.0401km를 간다.
1시간 도보거리는 5.0401km이고 하루 8시간 걷는다면 43.208km..
5.0401km/일 × 8시간 = 43.208km.. 석달이면 90일이니..
③ 43.208km /일 × 90일 = 3,888.72km가 나온다.
1시간 도보거리 5.0401km로 하루 10시간 걸어 50.401km를 90일 가면..
④ 5.0401km/일 × 10시간 × 90일 = 4,536.09km..
마이 나왔다 평균 로동이 8시간이고 10시간도 갈 수 있으니 8~10간 평균은..
⑤ 5.0401km/일 × 9시간 × 90일 = 4,082.481km.. 다.
요즘 성인 도보 10시간은 45.3609km로 만천리가 넘고 8시간은 3.972.8km로 좀 짧고
9시간은 4,082.481km로 적당해 세종조때 영조척 길이 4,048.7km와 가장 가깝다.
일제때 도량형 ≒ 세종대왕 영조척 ≒ 90일 이동거리는 비슷하다.
3.972km ≒ 4,048km ≒ 4,082km ≒ 10,000里
.. 만리다..
세종대왕때 당시 기준인 영조척을 썼고 영조척으로 90일 거리는 4,048km이고
당시 조선의 만리성주변 사람들이 한결같이 만리라고 했고 또 요즘 하루 걷는 시간을
8~10시간으로 하고 평균 9시간이로 4,082km 영조척과 가장 근접하니 기록은 사실이다.
암튼 걸어서 석달 즉 90일을 가면 만리를 간다는 조선왕조실록은 사실이다.
또 군대보병이 완전군장 행군할때 하루 행군 거리를 평균 40km로 잡는다.
물론 산악 평지 평균한 거리지만 만리장성같이 인공 지형이 있으면 더 많이 걷는다.
⑥ 40km/일 × 8시간 × 90일 = 3,600km 9천리로 만리에 근접한 조선의 만리장성이다.
세종대왕때 영조척의 만리 4,048 km와 성인 하루(8~10시간) 걷는 거리 4,082 km는 대동소이다.
더군다나 완전군장한 보병이 10일 걸리니 90일 거리는 3,600 km 로 산악지형과
완전군장을 감안하면 대략 90일이면 예나 지금이나 만리 거리를 이동할 수 있다는 거다.
소수점 이하 절사하고 다시 정리하면
① 세종대왕때 기준 영조척으로 만리는 4,048 km다.
② 일제때 조선총독부때 기준척으로 만리는 3.927 km다.
③ 지금 성인 하루 8시간 걷는 속도로 90일 거리는 3,888 km다.
④ 지금 성인 하루 10시간 걷는 속도로 90일 거리는 4,536 km다.
⑤ 지금 성인 평균 9시간(8~10시간) 걷는 속도 90일 거리는 4,082 km다.
⑥ 군대 보병 완전군장 하루 8시간 걷는 속도로 90일 거리는 3,600 km 다.
만리장성이 걸어서 석달 거리라는 모호한 기록은 총독부에서 편수된걸로 보이는데 걸어서
석달이며 거리는 만3천리로 기록된걸 삼천리를 삭제하고 만리만 남겨 추정치로 보이게 한거다
그래도 90일 기록이 이렇게 살아있어 만리장성을 조선꺼로 남겨둔게 얼마나 고마운감?
조선왕조실록이나 각종 공인된 고문서가 편수를 거쳐도 골격은 이렇듯 훌륭하다.
암튼..
조선왕조실록의 만리장성 기록은 허튼 소리나 쭝궈 완리창청이 아닌 조선의 만리장성이었다.
조선의 만리장성은 황해도 린산군 서쪽에서 시작해 의주 삭주등 13개 성을 지나
함길도 정평도호부까지 인데 높이는 7.5m이고 거리는 도보로 석달걸리는 거리로
약 만리이며 이걸보고 조선사람들은 만리장성이라며 사람들 사이에 구전되었다.
암튼 도보로 석달 거리 만리장성은 고려때 기록을 그대로 옮겨와 수천리라 한거고
만리장성 주변의 민가 주민들은 만리쯤 되니 걍 뭉뚱그려서 만리장성이라 했던거다.
그래서 조선중앙정부 백성들의 회자되는 말을 민가에서 전하기를 만리장성이라는 거다.
천여리 = 약 1,000리 ≠ 수천리 = 1,000리~9,999리..
천여리는 약 천리란 말이고 수천리는 천리가 넘으면 수천리인데 9,999리도 수천리란 거다.
아래 쭝궈 완리창청 내용이다.
쭝궈 빠다링의 완리창청(만리장성).
팔달령이란 산등성이에다가 관광용으로 맹근 쭝궈 완리창청이다.
저게 장관으로 보이고 저걸 경계로 오랑캐와 싸웠다고 생각하면 전투개념도 모르는거다.
어떤 지휘관이 군사를 델꼬 저 험한 저지역에서 말타고 전투를 하겠남?
강원도 철책도 저런데 명나라때 저 정도라면 시대를 한참 앞서간거라고?
강원도 철책은 소대규모이고 많아야 중대규모 전투이고 대대규모 전투는 지형적으로 어렵다.
쭝궈 완리창청에서 전투가 소대 또는 중대 규모 전투라면 저 뻘짓을 왜 하는감?
쭝궈군대 같으면야 크고 넓고 많은거 자랑하느라 저기서 전투할지 모른다.
하지만 보통 지휘관이면 저 산악지형을 피하고 침투하기 좋은 평지를 선택해 진군할거다.
전쟁이란 상대국을 략탈하거나 전략적 요충지일 경우에 험한 지역이라도 목숨걸고 싸운다.
근데 저 지형에서는 침략하다가 가만 둬도 굶어죽는다. 빠다링 지역 자체가 요새다.
저런 산밖에 없는 지역 넘어서 뭐 어쩌겠다는 건감?
멀어도 랴오닝으로 우회하는게 더 빠르겠다.
이거이 완리창청 올라가는 사람들의 행렬인데 바닥 돌을 눈여겨 보기 바란다.
그리고 저 경사도를 봐라 저 경사를 전투중에 군수품 보급은 일일이 사람이 했다는 건감?
아니면 우마차에 실고 다니며 공급했다는 건감? 우마차가 다니고 말이 다닐 수나 있겠남?
저렇게 능률 떨어지는 성에서 무슨 방어를 하고 전투를 한단 말인감?
관광객들 보고 크고 넓고 많은 쭝궈에 뻑 가라고 맹근 느낌 팍팍 들지않남?
보기좋으라고 뻑 가라고 맹근 관광지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거다.
이거이 저 계단을 확대한 사진이다. 계단 벽돌 사이는 시멘트로 메워져 있고 관광객들 행보로
벽돌이 다 닳아 납작해졌는데 이음부분 시멘트 역시 1824년 영국의 조셉 아스프딘이 맨든거다.
벽돌의 수명은 대략 30년인데 요즘 황토 벽돌은 백년까지 간다고 한다.
그렇담 저 벽돌은 길게 잡아도 백년밖에 안됐고 백년 안팎 근래에 축조됐다는 거다.
근데 완리창청 대부분과 관광지는 저 벽돌과 같고 수명도 건축년대도 다 비슷해 보인다.
수명이 길어야 백년이니 완리창청 저 벽돌은 1912년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근데 완리창청과 쯔진청등 관광지 고건축물이 명나라때 건축물이라고라? ㅋㅋ
그리고 또 기회되면 성벽 아래로 내려가서 기초석을 보기 바란다.
보기에도 너무나 깔끔해 세월이 비껴간 풍우에도 멀쩡한 완리창청 기초석을 보게 될게다.
물론 저 장소는 관광객들 주머니 터는거 말고는 아무 목적이 없다.
암튼 쭝궈 베이징의 빠다링(팔달령) 청청(장성)은 쌓은지 50년 안팎되는 최신형으로
사진을 통해봐도 깊은 산속에 장성을 쌓아야 할 리유가 필요도 없는데 있다는 거다.
벽돌도 얼만 안되어 보이고 제일밑 기단석은 최고 50년을 넘지 못하는 최근 돌이다.
조선의 북경성과 장성의 단단한 성벽은 양이 대포에 무너지며 조선도 같이 무너진거다.
양이 8개국은 그렇게 오랑캐 왜구를 벗고 신사로 다시 나서 폼잡고 다닌다.
물론 실력도 있다.. 실력없음 되나.. 실력없었음 벌써 만주밖 오랑캐 지역으로 쫒겨났지..
쭝궈런들 살아날려니 무리 수 두는 거고 그래서
쭝궈 완리창청을 댑따 늘려서 경제위기로 움추려든 쭝궈런들 기 한번 살려준다.
몇해전만 해도 단뚱에서 한반도로 내 달리던 완리창청이 이젠 무딴장 쪽으로 꺾어버렸다.
급하게 고무줄로 맹근 완리창청인가 보다. ㅋㅋ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용감하게 이북으로 내달리던 완리창청이 갑자기
쭝궈쪽으로 도망이나 가다니 쭝궈가 이북 겁내긴 마이 겁내나 보다. ㅋㅋ
범법하고 대가리 쳐들면 바로 조지는 이북이니 겁날만도 할게다. ^^
쭝궈 뚱베이꽁청과 완리창청 련장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거도 쭝궈 구라와 현실을 직시하는 조선중앙정부 사람들의 차이다.
조선중앙정부 사람들은 실력이 있어 포장없이 자신만만 했던거고 쭝궈런들은
실력이 없어 포장하고 구라치며 만리장성을 5만4천리장성으로 늘려가며 구라치고 있는거다.
크고 넓고 많은 구라를 빼면 껍데기도 없는 쭝궈란걸 잘 알기 땜이다.
기록이 있는 뻔한 력사적 사실도 구라치는 쭝궈런인데 우리가 넘 크게 봐준거다.
이거이 역시 쭝궈 구라 크고 넓고 많은 구라에 속아 넘 당연스럽게 인정한다는 거다.
그거이 쭝궈 땅덩어리 보고 놀란 우리가 크고 넓고 많으면 좋다는 인식이 한몫 한거다.
또 북경성이 베이징으로 북경성은 쯔친청(자금성)으로 짝퉁됐고
자연호수 쿤밍호는 인력으로 팠다는 구라가 정설이 되고 만리장성도
경부고속도로 보다 현저히 적은 인력으로 죽을 고생하며 쌓았다는 짝퉁 쭝궈다.
동원인력 ;만 리 장 성 : 년 50만명.. - 위키백과
경부고속도로 : 년 890만명.. - 위키백과
ㅋㅋ
#6 북경성 ≠ 자금성(베이징성)
세종때 주척의 길이가 20.78cm 라니까 이걸 거리의 기준을 삼는다.
김경선의 연원직지와 계산기정(43리) 이의현의 경자연행잡지 등 연행록에는
북경성의 둘레가 40리라 했고 또는 43리라고도 하는데 걍 40리로 봤을때
지금 쭝궈런들이 베이징에 정해놓은 성터와는 너무 다르다.
북경성은 40리로 15km가 되고 남쪽의 겹성도 28리라 했으니 겹성만 해도 둘레만 약 10.5km나 되는 큰 성이다.
박지원을 비롯한 연행록이란 문서는 서장관이라는 직책의 공무원이 동행하며 기록하는 문서로
국가에서 기록하고 관리하는 문서이므로 조선관료가 잘못듣거나 오판을 하고 잘못적지는 않았을거다.
잘못될 확률은 북경성이 오끼나와에 있을 확률보다 훨씬 떨어지고 더 낮아 보인다.
조선의 관료들은 과거를 통해 선발된 우수하고 존심 강한 고급두뇌들이었다.
그런데도 북경성의 크기를 잘못기록한다면 차라리 북경을 잘못찾아 갔다는 말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연행록의 기록의 잘못은 확륙 0 라고 봐도 된다. 양이와 왜놈들이 고친부분은 빼고..
쭝궈런들은 대략 아래 베이징 성터의 크기가 원나라 대도의 크기라고 한다.
더 가관인건 각 시대마다 성터가 겹치기도 했고 연행기의 기록처럼 겹성이 되기도 했다.
아래 그림은 쭝궈런들이 베이징성이라고 하는 성의 둘레 그림이다.
왼쪽은 쭝궈런들이 그린 성 배치도이고 오른쪽은 구글에서 가져온거다.
다시 지도의 선(도로)따라 대략 성곽을 그려봤다.
선따라 그려보니 위의 구역은 약 23.92km로 64리가 나오고 아래구역은 약 22.23km 로 59.4리가 나온다.
중간의 담장 선은 겹쳐도 위에 성과 아래성은 다르니 둘레도 따로 재어보니 46.15km로 123.3리가 나왔다.
역시 큰 대륙기질의 쭝궈런들인가? 아니면 일단 크게 내질러 놓고 수습은 나중에 하자는 심산인가?
쭝궈런은 대륙기질이 있어 도시를 만들어도 일단은 엄청 크게 만들어 놓고 보자 식이었나 보다.
위 아래 두개를 다른 구역으로 나누지 않고 둘레만 합하니 32.69km로 87.4리가 된다.
두 구역을 나눠 둘레를 재면 23.92km와 22.23km 로 46.15km 가 되고 123.4리가 나온다.
더군다나 1자의 길이도 30.03cm가 아닌 20.78cm로 했는데도 이렇다.
조선의 관료들이 쓴 연행록이 말한 40리와 남쪽의 겹성 28리 해봤자 68리 밖에 안된다.
두 구역 중에 겹성을 빼도 87.4리가 나오는데 그래도 연행록의 기록과 비슷하다 할텐가?
그러나 연행록에는 북경성은 둘레가 40리고 남쪽의 겹성은 28리라고 분명히 나눠 명시했다.
원나라 대도의 크기가 28.7km라 하니 76.7리로 성터라고 하는데
재어보면 32.69km로 무려 3.99km로 10.7리나 차이가 난다. 물론 중간경계선을 포함하면 더 된다.
중간경계선까지 포함하면 오차는 무려 30리 가량 차이가 난다.
기록을 잘못하고 잘못 들어도 이렇게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그리고 세월의 차이를 두고 북경성에 가는 조선 관료들이 이렇게 똑같지 틀리기는 어렵다는 거다.
그런데 쭝궈런들이 역사속의 북경성을 대충 그려놓고 구라치는 이 지도를 보고
무지 큰 쭝궈 성의 규모를 상상하며 바로 경복궁을 떠올린다. 그리고 우리아해들 바로 쫀다..
쯔진청을 구경하다가 보면 쭝궈들 빼지않고 자랑하는 말들이 있다.
"한국이 자랑하는 경복궁은 쯔진청 화장실 보다 작다.."
이 말을 듣는 우리 아해들 뚜껑이 머리끝까지 열린다. 그리고 광분하기 시작한다.
짝퉁쭝궈라 사람을 죽이는 멜라민도 가짜우유 가짜생선을 만드는 나라라고 광분한다.
그런다고 우리 경복궁이 쯔진청처럼 갑자기 커지지는 않는다.
또 "베이징은 서울보다 몇배나 더 크고 인구도 삼천만이 넘는데 서울은 작은 도시다."
쭝궈들이 한국사람에게 컴플렉스 느낄때 습관적으로 하는 말들이다.
보기엔 속까지 까만 쭝궈런이라 자국열등함을 외국인에게 화풀이로 그러는거 같다.
암튼 국민총생산량도 쭝궈가 많고 한국 상인들이 중궈에 많고 무한발전하는 쭝궈가
얼마 지나지않아 한국을 따라 잡을거라고 하고 또 그런 생각도 드는 우리 아해들이다.
그러고 나면 쭝궈들이 뭔가 있는거 같아 슬그머니 겁도나기 시작한다.
이때 쭝궈들 허풍에 속아 쫄았다는 걸 우리 아해들이 알턱이 없다.
이런 아해들에게 조선사 얘기를 좀 해주면 긴가민가 하면서도 그렇길 바라는거 같다.
물론 쭝궈에 뻑이 간 아해들에겐 안먹힌다. 자기가 보고 들은게 있어서.. 좀 어렵다..
쭝궈는 넓고 크다는 쭝궈런들의 잘난척에 딱 한마디면
쭝궈런들 꿀먹은 벙어리 만들수 있는데 알고 있으면서도 몰라서 속아넘어가는거다.
간단하게 경복궁이든 창덕궁이든 덕수궁이든 경희궁이든 사진 한장이면 게임 끝이다.
바로 당가라는 이 닫집..
왕이 앉는 자리에는 저렇듯 속집같은 지붕이 또 하나있다.
저거이 바로 우리 나라에만 있는 닫집이라 하는거다.
아니.. 불당에도 공자사당에도 있다.. 부처도 공자도 왕과 동급이라 그렇다.
대웅전의 부처가 해모수란 말도 있는데 대웅이란 큰곰을 쓰는걸 보면 전혀 아닌말은 아닌듯 하다.
대웅은 한웅 또는 단군할배라고도 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고려때 불화의 부처 주인공이 고려왕이라는 사람도 있다.
암튼 이 닫집은 아무데나 있는게 아니라 천자나 천자와 동급인 인물에게만 있다.
부처 공자는 죽은 신이지만 천자는 살아있는 신적인 존재다.
경희궁의 조선왕 자리다. 위에 닫집이 화려하다.
계단을 비롯해 나무로 대강 만들고 자리가 좀 작은 모조품이지만 그래도 중요성한건 다 있다.
있는 집안은 뭐가 달라도 다르고 아무리 쪼그라 들어도 그 중요한걸 귀찮아 하질않고
버리지않아 아니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지고 있다.
이 사진은 근정전의 옥좌다.
조선왕은 이런 자리에서 정사를 보던 천하의 천자였다고 말없이 가르쳐준다.
쭝궈런들은 송판으로 대강 짜 맞춘 자리라고 우습게도 보겠지만 아는 쭝궈런은 등에서 식은땀 흐른다.
북경성이 함락되고 짝퉁이 아시아의 맹주로 얼마나 므흣하게 누려온 자리였던가?
자금성 건청궁의 쭝궈왕이 정사를 봤다는 1903년 사진이다.
오래된 사진티만 나고 돈만 들어 보이지 중요한 쭝궈왕 자세는 나오질 않는다.
금단의 도시? 금단의 도시는 개뿔.. 짝퉁의 도시지..
없던놈들이 로또맞아 짝퉁질 하는 냄새 폴폴 풍겨준다.
요즘 사진이다. 태화전의 쭝궈왕 좌석이다.
쭝궈왕이 앉은 좌석은 특실용이 아닌 일반용이라고 말해준다.
중궈들이 감히 조선왕을 흉내내지는 못했을거고 아시아 맹주 하라니
짝퉁이라 어쩔줄 몰라 닫집 대신 편액을 걸어뒀는지도 모른다.
建極授猷건극수유는 천자는 위로는 하늘의 뜻을 따르고 아래로는 민의를 따라야 한다는
뜻으로 적절한 법칙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뜻이라는 말이라한다.
건륭황제가 직접 쓴 편액이라면서 화려하고 돈들여 크게만 꾸며만 놨지 정작 있어야 할건 없다.
이러니 빈천한놈들이 로또맞아 거들먹거리는 짝퉁이라고 놀림받고 그러지..
65년 핵개발 하고 위아래 없이 거들먹 거릴때가 젤 좋은 시절임을 알았을게다.
아무리 좋으면 뭘하나? 지켜 나갈 능력이 없는걸..
뼈대있어 족보있는집과 남의 집 족보사서 있는척 하는 차이지. 괜히 짝퉁이라 할까?
#7 천자 통치지역과 왜(영국)
도청소재지나 군청 현청 소재지 즉 부府 목牧 도호부都護府를
계수관界首官이 통치했는데 공후백자남 같은 량반 즉 귀족이 통치했다.
이들 귀족이 제후이며 각 품계에 따라 그 관할 영역도 달랐다.
천자는 중앙의 사방천리로 전복甸服이고 제후는 전복 밖 사방 오백리로 후복侯服이고
후복 밖 500리는 빈복賓服으로 천자의 통치지역은 여기 까지다.
빈복밖 500리는 요복要服이라 하며 넘 멀어 우호를 맻고 천자를 섬기도록 하고
요복 밖 500리는 황복荒服으로 황량한 지역으로 풍속을 따르게해 섬기도록 한다.
1리 = 1,296자 = 1,296×1자(10/33m) = 12,960/33m = 0.392km = 약0.4km
전복 = 1,000리×0.392km=사방으로 392km(153,664㎢)
후복~빈복 = 1,000리×0.392km=사방으로 392km
요복~황복 = 1,000리×0.392km=사방으로 392km
총 사방으로 1,176km(1,382,296㎢)까지 천자의 손길이 미치는 관할구역
총 사방으로 784km(614,656㎢)까지 천자의 직접 통치지역
총 사방으로 392km(153,664㎢)까지 천자의 직할령 중국
곧 천자의 통치지역은 빈복까지이며 중국에서 사방 2천리 안이다.
천자의 직할령은 중국이며 이는 사방 천리다. 후복 빈복의 제후들이 천자의 신하들로
정권에 충성심 높은 즉 사대교린의 인물인 천자의 가족과 그 추종자로 채워져 있었다.
충청도 같이 천자의 관료가 세수를 점검 납부하는 곳이 빈복까지로 천자 통치지역이다.
유럽에 자그마한 나라가 많고 많이 쪼개진거도 공후백자남의 봉건지역이라 그런거다.
근데 유럽의 자그마한 봉건지역을 통치하던 중앙정부는 없었다는 거다.
즉 조선을 해체하고서야 봉건제후국은 독립이란 이름으로 현재 국가로 태어났다.
독립이란 천자의 제후국 중국의 위성국에서 탈퇴함이 독립이었던 거다.
벨테브레(박연)는 자신의 나라 네덜란드와 하멜을 남만이라 했고 왜어를 쓴다고 했다.
그때 벨테브레와 하멜이 쓴 왜어는 독일어이고 현재도 네덜란드 공식 언어다.
즉 조선왕조실록은 독일과 네덜란드가 왜인이라고 기록했다는 거다.
충남 홍성(홍주)에 정박한 안리 호에 대포와 총기를 갖춘 휴 해밀턴 린제이 경의 영국범선이다.
2천리 밖 황복에서 온 무리일지도 모른다. ^^
영국 선박을 타고 조선에 물건 팔고 비단을 받아 간 왜인을 보자.
순조 32권, 32년(1832 임진 / 청 도광(道光) 12년) 7월 21일(을축) 4번째기사
홍희근이 홍주의 고대도 뒷 바다에 정박한 영길리국의 배에 대해 보고하다
공충 감사(公忠監司) 홍희근(洪羲瑾)이 장계에서 이르기를,
“6월 25일 어느 나라 배인지 이상한 모양의 삼범 죽선(三帆竹船) 1척이 홍주(洪州)의 고대도(古代島) 뒷 바다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영길리국(英吉利國)의 배라고 말하기 때문에 지방관인 홍주 목사(洪州牧使) 이민회(李敏會)와 수군 우후(水軍虞候) 김형수(金瑩綬)로 하여금 달려가서 문정(問情)하게 하였더니, 말이 통하지 않아 서자(書字)로 문답하였는데, 국명은 영길리국(英吉利國) 또는 대영국(大英國)이라고 부르고, 난돈(蘭墩)과 흔도사단(?都斯?)이란 곳에 사는데 영길리국·애란국(愛蘭國)·사객란국(斯客蘭國)이 합쳐져 한 나라를 이루었기 때문에 대영국이라 칭하고, 국왕의 성은 위씨(威氏)이며, 지방(地方)은 중국(中國)과 같이 넓은데 난돈(蘭墩)의 지방은 75리(里)이고 국중에는 산이 많고 물은 적으나 오곡(五穀)이 모두 있다고 하였고, 변계(邊界)는 곤련(昆連)에 가까운데 곧 운남성(雲南省)에서 발원(發源)하는 한줄기 하류(河流)가 영국의 한 지방을 거쳐 대해(大海)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북경(北京)까지의 거리는 수로(水路)로 7만 리이고 육로(陸路)로는 4만 리이며, 조선(朝鮮)까지는 수로로 7만 리인데 법란치(法蘭治)·아사라(我斯羅)·여송(呂宋)을 지나고 지리아(地理亞) 등의 나라를 넘어서야 비로소 도착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중략>
○公忠監司洪羲瑾狀啓:
六月二十五日, 何國異樣三帆竹船一隻, 來泊於洪州古代島後洋, 而云是英吉利國船, 故使地方官洪州牧使李敏會, 水虞候金瑩綬, 馳進問情, 則言語難通, 以書字問答, 而國名英吉利國, 又號大英國居蘭墩?都斯?地, 英吉利國愛蘭國、斯客蘭國, 合爲一國, 故稱大英國, 國王姓威氏, 地方與中國一樣, 蘭墩地方七十五里, 國中山多水小, 五穀, 皆有邊界, 近于昆連, 卽雲南省發之一條河流, 英國一所地方, 而入大海。 距北京約七萬里, 水路四萬里, 陸路距朝鮮水路七萬里, 歷法蘭治、我斯羅、呂宋, 越地理亞等國始到。
영국 런던 즉 란돈蘭墩이 75리로 약 29km로 조선 도성 40리 약 16km보다 훨 크다.
란돈은 전체가 75리이고 조선 도성은 성 크기만 40리란 거다. 천자의 직할지역은 사방천리..
란돈이 난돈이라.. 리처드도 이처드로 할 판이다.
이제 두음법칙은 두음을 넘어 후음까지 갔고 중음도 과감히 두중미음법칙 행패다.
또 운남성이 영국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다.
어찌됐건 운남성의 강줄기가 영국을 지나 대해로 들어간다는 거다.
위의 번역엔 '중국과 같이 넓은데'로 나왔는데 원문은 '중국과 같다'고 되어있다.
즉 영국 크기가 '중국과 같다'라는 말을 '넓은데'를 더 해 '중국과 같이 넓은데'로
하여 영국과 같은 중국을 영국이 쭝궈처럼 크다 라는 말로 오해받게 한다.
물론 위의 기록이 같이 있는 연원직지엔 '중국과 같다'로 나와있다.
중국과 같다.. 중국과 같이 넓은데..
본문은 중국과 같다 했으니 영국은 중국과 크기가 비슷하다는 말이다.
물론 여기 중국은 조선의 경기지방을 뜻하고 조선의 중앙정부가 있는 중국이다.
영국 면적은 244,820㎢이고 한반도는 221,336㎢이고 남한 100,210㎢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합하면 한반도 크기만하다.
결국 중국은 한반도 크기만 한데 쭝궈같이 댑다 크다고 우기는 쭝궈런이다.
영길리는 영국이고 애란국愛蘭國은 아일랜드.. 사객란국斯客蘭國은 스코틀랜드다.
이때는 잉글랜드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를 이미 병합했었다는 거다.
국왕을 위씨라고 하는데 위씨는 조지3세의 3남 윌리암 4세를 가르킨다.
여기서도 한문이 뜻글자 이지만 소리글자이고 소리글로 기록된게 여실히 증명된다.
소리도 우리발음에 맞게 썼고 쭝궈 발음과는 좀 마이 다르다.
애란 사객란도 우리말을 양이와 쭝궈 입성발음이 안되는걸 유의해보면 알 수 있다.
애란은 '애'가 늘어 '아이'로 되어 '아이란(드)'로 '드'는 묵음이고 '사객란'은 '스컷란(드)'다.
위씨威氏도 우리 발음으로는 '위'로 발음되지만 쭝궈 발음으로 하면 '웨이'가 된다.
'윌리암'을 '위'로 한건 '독일'을 '도이' 발음과 같은 받침 탈락인 'ㄹ'을 탈락 현상이다.
이름 앞자 '윌'을 취하고 받침 'ㄹ'을 탈락시켜 '위'로 한거와
'도이칠란트'의 '도이'를 취해 독일의 받침 탈락한거나 매 한가지다.
고대 지명 한자는 이렇듯 조선의 중국지방 말고 변두리 지방은 말이 길어서
간단하게 머리글자만 취했던 거다. 엄친아 처럼..
걍 보면 누가 위씨가 윌리암 4세란걸 알 수나 있었을까?
위에 기록만 본다면 절대로 위씨가 윌리암 4세란건 알 수도 없다.
이렇듯 우리 조선사는 이런 과정을 거치며 동방 구석의 은둔의 나라로 식민지가 된거다.
이 짧은 기록에 수많은 조선사의 비밀이 담겨져 있다.
위씨가 윌리암 4세란거도 이때 영국 년도를 보고 윌리암 4세 집권기를 알았던 거다.
그런데 어떻게 윌리암을 위씨로 기록했냐는 말엔 어떤 설명도 없다.
독일이 도이치로 독일로 머리소리와 받침 탈락만 설명해줘도 쉬운데 말이다.
연원직지에는 영국왕 성이 함즉咸?이라는데 무슨말인지 모르겠다.
윌리암즈의 윌리암을 빨리하면 '함'과 비슷한 소리가 나고 즉은 받침 탈락시키면 '즈-S'다.
근데 영국왕 이름이 '윌리암즈'가 아닌 '윌리암'인데..
영국왕도 짝퉁이란 건지..아님 윌리암 4세 시대가 아닌 다른 시대를 바꾼건감?
도대체 알 수 없는 이름이다. 시간이 지나면야 풀리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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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된 댓글 입니다.
닫집은 쭝궈에는 없죠. 사서에 무수히 나오는데.. 닫집은 천자 반열만 있죠.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냥 재미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담에 더 재밌는 글 올리죠.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잘봤읍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보았습니다. 한가지 한가지 찾아내다 보면 뭔가 큰 그림이 나올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