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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라
마가복음 16:1~8
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4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프랑스의 소설가 빅토르 위고가 저술한 <레 미제라블>에서 주인공 장발장은 조카가 7명이나 돼서 생활이 무척 힘든 과정을 겪어야 했습니다. 가난으로 인해 여러 날 조카들이 굶게 되자 그들을 위해 빵을 훔치다 걸려 5년 형을 받은 장발장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진열장에 놓여 있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맛있는 빵이라도 내가 그것을 먹지 않으면 내게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법을 어기면서까지 빵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가슴 아픈 사연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 속담에 ‘그림의 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이용할 수 없거나 차지할 수 없는 경우를 이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부활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죽었다 살아나신 부활의 소식을 전해 듣고 그것인 내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부활이라도 내게는 가치도 없고 의미도 없을 것입니다.
엄청난 돈을 내고 명화를 사들이는 이유도 전시장이나 박물관에 가면 얼마든지 감상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소유욕 때문입니다. 전 5:11 “재산이 많아지면 먹는 자들도 많아지나니 그 소유주들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소유를 지니고 있더라도 그것을 누리지 못한다면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전해지는 말씀으로만 그친다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내가 긴밀하게 연계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하면 믿을 수 없는 기적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나 2천 년 전에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은 그 부활이 내게 영향을 미치고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죽어도 살아날 수 있다는 확증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후 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참믿음이요 산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내 안에 성령으로 함께 하시므로 부활의 능력을 행하시는 능력으로 확증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말씀에서 예수님이 성경대로 부활하신 모습과 이를 목격한 세 여인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는데, 두 명의 마리아와 살로메입니다. 실은 이 여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기 위해 무덤을 찾았던 것이 아니라 죽은 예수님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고 천사로부터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들었고 보았다 할지라도 그 부활이 내 것으로 체험되지 않는다면 호기심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살아나심이 우리에 복음! 즉, 기쁜 소식이 되는 이유는 그 부활이 예수님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부활의 능력은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근거는 우리가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되심을 믿고 회개할 때 성령이 임하게 되는데 바로 이 성령을 통하여 부활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부활의 능력은 하나님의 사랑의 교제로부터 시작합니다.
롬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마침’이란 헬라어 ‘텔로스, τέλος’를 사용하였는데 이 단어는 ‘하나의 단계가 끝나고 다음 단계가 시작되는 전환점, 중심점, 정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시고 그 완성된 것을 믿음의 사람에게 옮기셔서 계속해서 이루시기를 원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율법의 완성은 무엇을 말할까요?
마 22:37~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율법을 통틀어서 요약하자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율법의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이루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의 성령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 성령을 믿음의 성도에게 베풀어 주셔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의 의지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게 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다만 우리가 행하여야 할 것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마치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 사도 요한은 늘 예수님의 가슴에서 뛰고 있는 심장 소리를 들으려고 예수님을 가까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23절의 다음 내용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풍속은 사람들이 식탁에 앉지 않고 왼팔에 의지하여 옆으로 누워서 먹었다고 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에게 가장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라는 표현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사랑을 사모하였던 사도 요한은 주님께 많은 사랑을 받은 요한은 ‘사랑의 사도’(the Apostle of Love)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고, 요한복음과 요한 1서, 2서, 3서, 요한계시록 등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형제간의 사랑’ 등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고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즉 성령은 내 안에서 부활의 능력을 베푸시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영성가인 리차드 포스터는 <기도로의 초대>라는 글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먼저 조금만 마음을 열어도 우리에게 달려오신다. 하나님은 사정없이 우리 뒤를 추적하는 하늘의 사냥개에 비유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하고 마음의 문을 열 때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사랑 충만’입니다. 복음 전도자 무디(D.L.Moody)는 언젠가 뉴욕 거리를 지나가다가 엄청난 하나님 사랑의 실제에 압도되어 혼자 있을 만한 처소를 얻기 위하여 친구 집으로 달려갔다고 합니다.
그는 거기서 두 시간 동안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의 물결이 자기를 향해 계속해서 밀어닥침을 경험하였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영혼을 뒤흔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지는 경험을 통하여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생명체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서 성취되므로 부활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본문 1절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 등의 여인들이 새벽 미명에 예수님의 시신을 이틀 전에 넣어둔 무덤을 찾아갔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손에 향품 등을 들고 아직 어둑어둑한 새벽에 무덤에 찾아온 것입니다. 아마 그 여인들은 금요일 오후부터 온통 무덤 속에 안장된 예수님을 생각하다가, 안식 후 다음날 새벽같이 무덤으로 달려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의 무덤은 땅을 파고 매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굴 속에다 시체를 안장하고, 동굴 문을 막아 놓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안장된 동굴은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부자가 큰 바위를 징으로 쪼아 만든 인공동굴이었습니다. 후에 자신이 죽었을 때 사용하려고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아직 한반도 사용한 적이 없는 묘지였습니다. 그 동굴에 예수님이 안장되어 이틀 밤을 지내신 것입니다. 그 무덤 앞에는 로마 병사들이 교대로 삼엄한 경계를 하며 무덤을 지키었습니다.
또한, 돌문은 크고 무거웠기에 한두 명의 힘으로는 도저히 열 수도 없었고, 로마 황제의 봉인이 찍혀 있었기 때문에 어느 사람도 돌문을 열고 감히 시신을 꺼내 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안식 후 첫날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하였을 때 이미 무덤 문이 열려있고 흰옷 입은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막 16:5~6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고 합니다.
돌문이 열렸다는 것은 부활의 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신 예수님의 능력은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거칠 것 없이 치워버릴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보이신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이란 마치 보리밟기에 나타나는 생명의 신비를 연상하게 합니다. 겨울철의 대표적인 밭농사 작업의 하나로 추운 겨울 날씨 때문에 보리밭이 얼어서 부풀어 오르거나 너무 따뜻하여, 보리가 웃자라는 것을 막음으로써 보리의 성장을 돕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보리밭 밟기는 보리의 생장력 강화를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는 사람들은 어떤 어려움과 환난, 그리고 시련을 맞더라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고후 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내가 어려움을 당하여도 이것을 이길 힘을 준 것이 믿어져 답답해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있다면 내 안에 성령으로 주어진 부활의 능력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돌침대에 관한 내용에 대하여 요 20: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성전 지성소에 놓여 있는 법궤를 연상하게 합니다. 히 9:3~5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고 했습니다.
법궤에 들어 있는 것은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의 영적 의미는 하나님의 약속 말씀에 따라 택하신 자녀들에게 생명을 얻게 하고 부활에 이르도록 하는 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 법궤를 덮고 있는 뚜껑을 시은좌라고 합니다. 베풀 시(施), 은혜 은(恩), 자리 좌(座)라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천사들을 통하여 공급하게 될 것을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부활하시므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고후 1: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든지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을 믿고 기도하면 반드시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면 내 안에 성령으로 부활의 능력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저는 농촌에서 목회할 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늘 부족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는 말씀이 성령으로 제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품고 기도할 때 신기하고 놀랍게 천호동에 사시는 한 성도로부터 매달 돈과 쌀, 그리고 필요한 생필품을 부목사로 부임할 때까지 공급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사들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요 부활의 능력이기도 합니다.
세 번째는 삶의 현장에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부활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막 16: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지난 시간에 함께 살펴본 막 14:28 절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실망하여 갈릴리로 떠날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확실한 사랑의 표현을 위하여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에 가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말을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전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갈릴리에서 너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신 이유는 넘치는 사랑으로 격려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는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예수님께 자기의 두드러진 믿음과 결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의지가 약하여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다릅니다. 나는 의리도 있고 결단한 것에 대하여 굳건하게 실천할 수 있는 결단과 끈기가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의지가 산산이 무너졌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후 너무나 자신이 한심하고 부끄러워 예수님을 떠나 갈릴리 바다로 고기 잡으러 귀향하였습니다. 그런 그들을 책망하기 위하여 갈릴리로 가신 것이 아니라 회복시키려 예수님은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이른 새벽에 그들을 찾았을 때 밤새 그물을 바다에 던졌지만, 허탕이었습니다. 낙담하고 실망한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는 명령을 하십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였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생선과 떡으로 그들의 허기진 배를 채우셨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세 번 하시면서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후 예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능력입니다.
잠 24: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번번이 쓰러지고 넘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부활의 주님은 성령으로 내게 위로하시고 다시 일어서게 합니다.
저 역시 수많은 시련이 닥칠 때 낙심하여 좌절할 때가 많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오뚝이 잘 아실 것입니다. 밑을 무겁게 하여 아무렇게나 굴려도 오뚝오뚝 일어서는 어린아이들의 장난감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녀들이 세상에서 승리의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유일한 힘은 부활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넘어질 것 같은데 또 일어나고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달려 갑니다.
부활의 능력이란 오직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생명체로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 속한 생명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을 얻도록 하는 것이 부활의 능력입니다. 천국에 대한 확실한 소망이 있고, 천국이 믿어지고 그 나라를 향하여 헌신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은 내 안에서 성령으로 부활의 능력이 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출발하여 약속의 말씀이 믿어지고 그 말씀이 하나씩 내 안에 성취하여 내 안에 주님의 영 성령이 함께하심이 믿어지고 세상을 이기고 마귀의 권세를 무찌르게 되므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