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야 할 한국교회 위인들 [38]
유관순(柳寬順, 1902-1920)②
만세 시위가 예정된 4월 1일이 되자 천안시 병천에서 3천 명이 모여 만세 운동을 했는데, 조병옥 아버지 조인원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했고, 이어서 유관순이 독립을 위한 연설을 했습니다. 이때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 열사도 만세 운동을 함께 이끌었는데, 유관순을 포함해서 모두 현장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유관순의 어머니와 숙부도 참여했고, 결국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한 주요 인물 19명이 일본 경찰에 의해 죽었습니다. 유관순은 공주법원에서 5년 형을 받고 항소해서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 형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감옥에 있는 동안 3·1운동 1주년이 된 1920년 3월 1일 서대문형무소 안에서 옥중 만세 시위를 벌였습니다. 당시 스승이었던 이화학당 박인덕 교사에게 “선생님 저는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칠 각오를 했습니다. 2천만 동포의 십분의 일만 순국할 결심을 하면 독립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라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박인덕은 나중에 친일로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박인덕 역시 만세 운동을 이끌었던 인물이었기에 투옥되었고, 석방된 후 배화학당의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여성 계몽운동을 이어갔으나 1941년부터 친일로 돌아섰습니다. 유관순은 옥중 만세 운동을 이끈 죄로 심한 고문을 당했지만, 오히려 재판을 거부하면서 “나는 대한 사람이다. 우리나라를 위해 독립만세를 부른 것도 죄가 되느냐! 너희는 나에게 벌을 줄 권리가 없고 나는 너희 왜놈들에게 재판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외쳤습니다. 결국 극심한 고문으로 1920년 9월 28일 숨을 거두었습니다. 훗날 홍창석 목사는 “유관순은 교회에서 나서 교회에서 자랐고, 교회에서 배웠으며 만세운동을 하다가 죽어 교회가 그녀를 장사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참고도서> 김재현, 『 한반도에 새겨진 십자가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