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는 믿음의 출발이다
(눅 17 : 11~19)
두 번째, 감사는 선택입니다.
본문말씀 17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열 사람 중에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아홉이 예수님께 오지 않고 돌아간 것도 선택이고 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시 돌아와 감사의 고백을 한 것도 선택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인생에서 감사하며 살겠다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냥 감사도 아니고 미리하는 감사입니다.
오병이어 기적을 볼 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다고 제자들이 한 어린 아이의 도시락을 가지고와 주님 앞에 섰습니다.
그러면 남자면 5,000명이 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빌립은 이들을 먹이려면 적어도 300데나리온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도시락 하나를 가지고 누구와 함께 나눠먹겠습니까?
혼자 먹기에 족한 상황에서 나오는 것은 원망뿐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상황을 보시고 낙담하시지 않으시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이것을 통해서 복을 허락해주세요 라고 감사했습니다.
감사가 이렇습니다. 그래서 감사는 하는 사람의 선택의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면 돈이 많은 부자와 가난한 자, 누가 더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감사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가난한 자와 부자가 감사를 한다고 하지 않고 감사할 사람이면 감사하는 것이고, 원망과 비판을 하는 사람이 원망과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많은 선택 중에 자신이 감사를 선택할 줄 알기를 원합니다.
미리 감사한 것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기 이전에 예수님은 하나님께 미리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미리 감사함으로 나사로가 살게 된 것입니다.
미리 하는 감사는 난간과 어려움을 뚫고 나가는 능력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감사는 선택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새 날을 주시고 예배하게 하시고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어서, 매순간 하나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어서, 가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과 감사하는 것, Think와 Thank와의 어원은 같습니다.
그래서 감사는 선택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감사는 생각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감사가 없는 사람이라면 생각이 없다고 봐야 합니다.
두 종류의 성도가 있습니다.
청소년기에 아이들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이 모습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분들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옆에서 기도하는 자를 위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나보다 낫다고, 왜 그런가? 이유를 물어보니, 자신의 자녀가 아파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당신의 자녀는 살아서 속이라고 썩히지만 나에게는 그럴만한 자녀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신발을 사주지 않는 다고 원망했더니 그 옆에 다리가 없는 사람이 서 있더랍니다.
신발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옆에 있는 사람은 신발을 신을 수 있는 발이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억울하다고, 나만 없다고 하지 않고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고 와도 감사가 입에서 저절로 나오는 경우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후배 목사가 있습니다. 배가 참 많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배를 보면서 정기검진을 다녀왔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합니다.
왜 안 갔냐고 물어봤더니 검사를 했을 때에 결과가 안 좋을 것 같다는 짐작 때문입니다.
만약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을 통해 “아무 이상이 없고, 먹는 것만 줄이시면 됩니다.”라고 말해줬다면 홀가분할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건강만 가지고도 충분히 감사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받는 다면 조건과 상관없이 충족함 그 자체로 감사하는 것이 성도가 해야 할 일입니다.
감사는 감추지 않고 표현 할 때에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런 행동은 배워야 합니다.
특히 내가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편지를 보내는 것, 좋은 예입니다. 아니면, 감사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좋습니다.
감사는 표현할 때에 능력이 나타납니다.
마귀는 감사를 표현하지 못하게 만들고 잘못된 것은 표현하게 합니다.
내가 없는 소리했냐? 이것은 집고 넘어가야 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기가 막히실 것입니다.
매일 감사는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 이런 것 왜 저에게 주셨습니까?
왜 그러셨습니까?
저에게 감정이 있으십니까?
욥기서 13장 3절을 보면,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께 변론하려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욥의 삶에 있어서 그가 하나님께 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가 사라지고 섭섭했던 것을 붙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감사함은 표현 돼야 합니다.
미국 뉴욕 양키스에 전설적인 4번 타자가 있습니다.
베이브 루스라는 사람인데, 루게릭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많이 들어본 이름일 것입니다.
루게릭이란 병이 있기 때문에 루게릭이라는 더 유명합니다.
1903년에 태어나 1941년에 죽었습니다.
베이브 루스와 함께 유명했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통상 타율이 3할 4푼입니다.
베이브 루스는 홈런을 많이 쳤지만, 타율은 이 사람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가 유명했던 이유는 철인입니다.
2130경기를 연속 출전했습니다.
아픈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한 해에 200경기를 뛰었다면, 10년을 뛰어야 2000경기입니다.
거의 20년 넘게 경기에 임했습니다. 아픈 적도 없이... 그래서 철인입니다.
루게릭(Lou Gehrig) 2130경기의 기록이 깨지는 데, 56년 걸렸습니다.
1995년, 볼티모어의 칼 립켄 주니어에 의해 깨졌습니다.
하지만, 두 번이나 MVP를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이상이 나타난 것은 1938년이었습니다.
갑자기 근육이 사라지는 병이 생겼습니다.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운동 기능을 하는 근육이 사라짐으로 어떤 병명도 붙일 수 없어서 그냥 루게릭병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은퇴 경기 그 해에도 2할 9푼을 쳤습니다.
그의 마지막 경기, 자신이 병에 걸려 38살로 생을 마감해야 할 텐데 야구장에서 루게릭은 연설을 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일일이 감사했습니다. 감독에게도 동려에게도 표 파는 사람, 스낵 파는 사람에게도 감사했습니다. 바로 루게릭입니다.
감사는 선택이라고 루게릭이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야구 잘하는 사람, 병에 걸린 것을 기억합니다.
하지만 더 기억돼야 할 것은 감사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입을 벌려 상대방에게 인증 샷을 날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 사람에게 기억이 될 만한 이야기를 그 사람에게 남겨주는 것이 감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감사는 사람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은 가만히 있다고 감사할 수 없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의 최선의 모습은 믿음인 것입니다.
10명의 나병환자 중 단 한 사람만 예수께 돌아와 그 발 앞에서 감사함을 외친 것은 그에게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말씀 18~19절을 보면,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감사함을 전하고자 온 사람에게 예수님은 믿음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믿는 다는 것은 감사하는 사람의 또 다른 증거입니다.
그리고 감사는 기적과 은혜와 풍성함과 새로움을 연출해줍니다.
감사는 믿음의 출발입니다.
모든 성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아는 자가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에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감사함으로 믿음을 선택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행위임입니다.
오늘 어떤 제목이 감사가 되겠습니까?
나를 향한 계획과 사랑 그리고 삶, 뒤를 돌아보면 여러 가지 일들이 있지만 미리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지금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감사를 미룬다면, 그만큼 후회할 시간이 많기 때문입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최선을 다하며,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주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PS.
무가치한 일에 시련을 주시지 않는다
한 어린 소녀가 그녀의 음악 교사에게 피아노를 치면, 손가락이 아프다고 말했더니,
그 선생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아픈 줄은 나도 알지만, 손가락이 튼튼해지기도 한단다. "
그래서 소녀는 다음처럼 대답하여 옛 부터 지금까지의 교훈을 요약했습니다.
"선생님, 튼튼하게 만드는 것은 모두가 아픈 것 같군요.“
- 송태승 목사의 ‘징계의 복’에서 -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의 고통을 결코 헛되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슬픔 중에서도 당신을 신뢰하는 자들을 매우 사랑하시며, 고통의 통로로 다가오는 귀중한 영혼을 강하게 하십니다.
오늘도 징계의 사랑을 깨닫고 인내로서 아름답게 살아가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무가치한 영혼에게 시련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