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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17일(오순절 후 열여섯 번째 주일)
마가복음 7:1~13
입술로만 하나님을 공경하는 위선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본문접맥식 주제설교
who?
소설 <빙점>의 저자로 알려진 미우라 아야코는 수필집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은혜에 익숙해지는 것은 무서운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하나님, 아무쪼록 은혜에 익숙해지지 않도록 인도해 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 남편에 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병약한 나와 결혼해 준 남편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그런데 결혼 생활에 익숙해진 지금 나는 처음의 그 고마움을 다 잊어버리고, 남편에게 화를 내거나 제멋대로 행동하는 버릇없는 여편네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인간의 마음 중에서 가장 먼저 늙는 것은 마음이라고 합니다. 혹시 우리가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버리고, 황폐해진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김은호, 「땡큐 바이러스」, 두란노, 2013; 「생명의 삶」, 두란노, 2017년 10월호, 119에서 재인용.
오늘 본문에서는 정결에 관한 논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 1절에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 중에 몇 명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계셨던 곳은 갈릴리 지역이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에서 행하셨던 많은 기적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정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과연 제자들의 손이 얼마나 더러웠기에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손을 부정하다고 비난했을까요? 과연 여기서 말하고 있는 ‘부정한 손’은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우리는 자칫 이 상황을 손을 씻지 않은 채로 음식을 먹는 비위생적인 상황이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부정’은 이러한 비위생적인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다분히 제의적인 상황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서, 레위기에 보면 만일 죽은 사람이나 동물의 사체가 그릇이나 옷 같은 물건에 떨어지면 그 물건도 역시 부정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 만일 어떤 사람의 몸에서 비정상적인 피나 고름이 나오는데, 그 사람이 손을 씻지 않고 어떤 물건을 만졌다면 그 물건 역시 부정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반드시 부정해진 물건을 물로 씻어 정결하게 만들어야 했습니다(레 11:32; 15:11~12). 이러한 레위기의 규정은 위생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제의적인 정결의 문제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켜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또 그들은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몸에 물을 뿌리거나, 시장에서 사온 물건에 물을 뿌렸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음식을 먹을 때 사용하는 잔과 주발과 놋그릇까지 물로 씻어 정결하게 했습니다.
3절에 의하면,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철저히 지켰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장로들’은 ‘직책으로서의 장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장로’는 ‘조상들’을 의미합니다. 즉, 바리새인과 모든 유대인들이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잘 씻는 것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자랑스러운 관습이었던 것입니다(류호성, 「생명의 삶 플러스」, 두란노, 2019년 1월호, 178).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관습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의 눈에 씻지 않은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 제자들의 모습이 어떻게 보였을까요?
what's problem?
그들은 다음과 같이 예수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평소 예수님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의 부정함을 빌미로 예수님의 권위에 도전하였습니다.
전통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전통은 어느 날 갑자기 세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분명 후대들이 지켜야 할 가치가 있기 때문에 전통으로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전통을 지키는 사람과 지키지 않는 사람을 구별하게 될 때 발생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을 지킴으로 자신을 거룩한 조상들과 하나로 연결시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전통이 거룩함의 기준이 되는 순간, 그것을 지키는 사람은 거룩하게 되고, 지키지 않는 사람은 부정하게 됩니다(김호경, 「생명의 삶」, 두란노, 2014년 7월호, 108).
심지어 예수님과 함께 동행 했던 제자들이 조상의 전통을 지키지 않자, 바리새인들은 제자들마저 부정한 사람들로 취급해 버렸습니다. “나는 전통을 지키지 않는 사람과는 같은 편이 될 수 없다.”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꾸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들과만 가까워지고, 연대하려고 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이 둘 사이의 간격은 점점 더 넓어지고 맙니다. 소위 ‘성과 속’이 철저히 분리되고 맙니다.
이런 생각을 지닌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은 교회 안에만 존재하시고, 교회 밖에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게 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교회에 나와야만 하고, 우리가 교회 밖 일상생활에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여기게 됩니다.
이처럼 ‘성과 속’을 철저히 구분하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만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이 세상 그 어느 곳이든 존재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교회에 나와야겠지만, 우리는 일상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일상의 삶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예전에 어떤 분으로부터 ‘9시부터 9시까지’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교회 봉사에 열심인 젊은이들끼리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주일 오전 9시에 교회학교 예배 모임부터 시작합니다. 분반 공부가 끝나면 잠간 교사 회의에 참석했다가 급히 성가대 연습실로 가야 합니다.
예배가 끝나면 점심 먹고 잠시 쉰 뒤에 성가대의 오후 연습이 있습니다. 연습이 끝나면 오후 모임과 교사 훈련 프로그램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어서 저녁 식사, 그리고 주일 저녁 예배가 이어집니다. 예배가 끝나고 인사를 나누다보면 밤9시가 됩니다.
물론 처음에 일을 할 때는 주님을 위해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조금씩 일의 양이 늘어나면서 일에 대한 부담감이 마음을 억누르게 됩니다. 점차 기쁨은 사라지고, 분주한 마음은 조급함으로 바뀌게 됩니다(박정관,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 생명의 말씀사, 2015; 「생명의 삶」, 두란노, 2014년 7월호, 109에서 재인용).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연 이러한 봉사를 주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주님을 위한 일인지, 아니면 나 자신을 위한 일인지 잘 분별해야 합니다. 주님은 나의 봉사를 받으시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을 기뻐 받으십니다.
여러분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문제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과연 예수님은 그들의 문제를 무엇이라고 지적하셨을까요?
what?
예수님은 그들에게 두 가지 문제점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외식(外飾)했습니다.
과연 외식이 무엇입니까? 원래 ‘외식’이라는 단어는 연극에서 여러 차례 가면을 써야 하는 배우를 가리키는 단어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단어는 ‘겉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김호경, 「생명의 삶」, 두란노, 2014년 7월호, 108).
예를 들어, 조상들이 정해놓은 규정에 따라 손을 꼼꼼히 씻더라도, 그 사람 마음에 부정한 것들이 가득하다면 이 사람은 부정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손을 깨끗하게 씻음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정결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싶어 한다면, 이 사람의 행동은 ‘외식’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예로 드셨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이사야 29:13).”
과연 이사야의 예언이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어떻게 연관이 됩니까?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입술로만 하나님을 가까이했을 뿐,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계명을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잘못 가르쳤습니다.
과연 바리새인들이 자신의 정결함을 위해 음식 먹기 전에 손을 씻었던 규례가 구약시대에도 나올까요? 놀랍게도 구약시대에는 그러한 규례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장로들의 전통이라고 자부심을 느꼈던 이 규례는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어떤 학자들은 아마 이 규례가 헬라문화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크레이그 키너, 「IVP 성경배경주석」, 정옥배 외 역, IVP, 1998. 176).
분명한 것은 구약시대에 자신의 정결함을 유지하기 위해 손을 씻는 행위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전통이라고 생각하고 자부심을 가졌던 그 일이 실제로는 그들의 조상과는 관련 없는 이방문화의 영향으로 생겨난 일이었습니다.
만일 우리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고, 단지 형식에 매여 입술로만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고백한다면 주님의 책망을 피하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켰습니다.
예수님은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렸던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비판하셨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계명’은 무엇이고, ‘사람의 전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는 계명이었습니다. 이와 반대로 ‘사람의 전통’은 ‘고르반’ 전통이었습니다.
과연 고르반이 무엇입니까? 고르반은 하나님께 바쳐진 헌물이나 예물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서원 형태로 바쳐진 것입니다. 원래 고르반은 하나님을 섬기는 좋은 뜻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하나님을 섬긴다면 명분으로 부모님을 부양하는 일을 회피하는데 악용되었습니다(김호경, 「생명의 삶」, 108).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부모님을 공양하기 위해 필요한 물질을 대신 하나님께 드린다고 서원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하나님께 드린 예물의 소유권은 성전이 갖게 됩니다. 대신 그 예물을 바친 사람은 그 예물에 대한 사용권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당시에 악한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려고 자신의 재산을 성전에 고르반으로 드렸습니다. 고리고 부모를 공경하지 않았습니다(류호성, 「생명의 삶 플러스」, 179).
이런 사람은 두 가지 유익을 누릴 수 있었는데, 첫째는 사람들에게 경건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둘째는 그 재물의 사용권을 계속 자신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자신의 재물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류호성, 「생명의 삶 플러스」, 179).
쉽게 말하자면, 약삭빠른 사람들은 고르반 제도를 악용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한 사람이라는 세간의 칭찬도 얻고, 부모를 공경을 소홀히 할 수 있는 명분도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위선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행동이라고 비판하셨습니다.
마가는 3절에서,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유대인들”이라는 표현은 매우 과장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예수님 당시에 모든 유대인들이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 가운데는 장로들의 전통을 다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오지영, 「생명의 삶 플러스」, 두란노, 2019년 1월호, 175).
생각해 보세요. 하루 벌어서 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피곤한 노동자들이 어떻게 매 식사 전에 예식에 따라 꼼꼼히 자기 손을 씻을 수 있었겠어요? 그들은 그렇게 한가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물론 그들이 정결한 삶에 대해 관심이 덜 한 것은 아니었지만, 바쁘고 고된 삶의 현장에서 그들이 원칙대로 규례를 지키기가 쉽지 않아요.
더구나 마가는 바로 앞 장(章)에서 오병이어 사건을 소개해 놓고 있어요. 빈들에서 배고픔을 느끼고 있던 사람들에게 손을 씻는 정결 규례가 그렇게 중요하게 다가왔을까요?
아마 배고픔에 지친 사람들은 손 씻을 겨를도 없이 부정한 손으로 떡을 받아먹었을 겁니다. 남자만 오천 명이이에요. 여자와 어린 아이, 노인들까지 포함하면,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아마 일만 명은 족히 되었겠지요? 그 많은 사람들이 과연 빈들에서 어떻게 손을 씻고 음식을 먹을 수 있었겠어요?
그래서 정결은 손을 씻느냐, 씻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에요. 오히려 정결은 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느냐, 드리지 못하느냐에 달린 문제이지요(류호성, 「생명의 삶 플러스」, 179).
how?
어느 분이 율법주의를 ‘접시돌리기’로 비유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율법주의에 매여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은 성경 읽기의 접시를 돌리고, 어떤 분은 기도의 접시를 돌립니다. 또 어떤 분은 전도의 접시를 돌리고, 어떤 분은 구제의 접시를 돌립니다.
우리들은 온갖 접시를 다 돌립니다. 그런데 접시를 한참 돌리다보면, 저쪽에 있는 접시가 흔들거리며 바닥에 떨어질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재빨리 달려가 그 접시를 다시 돌립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쪽에 있는 접시가 또 흔들거립니다.
이처럼 우리가 모든 접시를 다 돌리려고 하는 것은 엄격한 율법주의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신앙 생활하는 것이 과연 행복할까요? 우리는 언제 접시가 깨어질지 몰라 늘 염려하고 불안해하면서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엄격한 율법주의에 매인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현실적인 타협점을 찾게 됩니다. 어차피 내가 모든 접시를 다 돌릴 수 없다면, 옆 사람보다 한두 개만 더 돌려도 위안이 되고 안심이 됩니다.
아주 큰 접시를 가져와서 돌립니다. 남들에게는 없는 접시입니다. 신유의 능력 접시, 귀신을 쫓는 접시 등을 돌립니다. 남들에게는 없는 은사의 접시를 돌리면서 이것이 의를 행하는 삶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접시를 돌리는 것은 피곤할 수밖에 없고, 혹시라도 접시가 깨어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와 불안이 가시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결국 접시는 언젠가 회전력을 잃고, 바닥에 떨어져 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주의입니다(이상훈, 「세례, 예식에서 복음으로」, 좋은 씨앗, 2017; 「생명의 삶 플러스」, 2019년 1월호, 183에서 재인용).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어차피 깨어지고 말 접시를 불안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까?
제가 설교를 시작하면서 여러분에게 소개해 주었던 소설 <빙점>의 저자, 미우라 아야코의 이야기를 여러분은 기억하십니까? “은혜에 익숙해지는 것은 무서운 것이다.”
인간의 마음 중에서 가장 먼저 늙는 것은 마음이라고 합니다. 혹시 여러분이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버리고, 황폐해진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있지는 않은지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스스로를 돌아보시면 좋겠습니다.
혹시 우리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서, 입술로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위선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 자신을 돌아봅시다. 그리고 우리가 정결한 삶을 추구하되, 손을 씻느냐, 씻지 않으냐의 문제에 집착하기 보다는 나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에 더욱 관심을 기울입시다.
정결함의 기준은 나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느냐, 드리지 못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명품 인생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은혜의 눈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이웃을 바라보는 명품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