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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집회서의 말씀 2,1-11
1 얘야, 주님을 섬기러 나아갈 때 너 자신을 시련에 대비시켜라.
2 네 마음을 바로잡고 확고히 다지며 재난이 닥칠 때 허둥대지 마라.
3 주님께 매달려 떨어지지 마라.
네가 마지막에 번창하리라.
4 너에게 닥친 것은 무엇이나 받아들이고 처지가 바뀌어 비천해지더라도 참고 견뎌라.
5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된다.
질병과 가난 속에서도 그분을 신뢰하여라.
6 그분을 믿어라, 그분께서 너를 도우시리라.
너의 길을 바로잡고 그분께 희망을 두어라.
7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그분의 자비를 기다려라.
빗나가지 마라.
넘어질까 두렵다.
8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그분을 믿어라.
너희 상급을 결코 잃지 않으리라.
9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좋은 것들과 영원한 즐거움과 자비를 바라라.
그분의 보상은 기쁨을 곁들인 영원한 선물이다.
10 지난 세대를 살펴보아라.
누가 주님을 믿고서 부끄러운 일을 당한 적이 있느냐?
누가 그분을 경외하면서 지내다가 버림받은 적이 있느냐?
누가 주님께 부르짖는데 소홀히 하신 적이 있느냐?
11 주님께서는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죄를 용서하시고 재난의 때에 구해 주신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9,30-37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30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31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33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34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35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36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37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은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에 대한 말씀이고, 뒷부분은 수난과 죽음을 향하여 가는 예수님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는 제자들에게 행하신 “가장 큰 사람”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에 대해 논쟁을 벌인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르 9,35)
이는 ‘첫째’가 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첫째’가 누구인가를 가르쳐줍니다.
나아가, ‘진정한 첫째’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꼴찌’가 되고 ‘종’이 되는 길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꼴찌가 된다는 것’과 ‘종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꼴찌가 된다는 것’은 자신을 타인보다 ‘뒤에’ 두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자신을 ‘중심’이 아니라 ‘주변’에 두는 사람이요, ‘으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미천한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지 자신을 앞세우지 말라고만 하지 않으십니다.
나아가서, 남 ‘밑에’ 두라고 하십니다.
‘모든 이의 종이 되라’ 하십니다.
‘종’이 되되, 지체 높은 이들의 종이 아니라 ‘모든 이의 종’이 되라 하십니다.
곧 미천한 이들의 종도 되라고 하십니다.
‘종이 된다는 것’은 자신을 타인보다 아래에 두는 일입니다.
자신을 채우려 하지 않는 사람, 곧 자기 실현을 내려놓은 자요, 오히려 타인의 실현, 곧 주인의 뜻을 실현하는 일을 하는 일이요, 자신이 아니라 주인을 섬기는 일이요, 주인을 위하여 자신을 바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르 9,37)
곧 어린이처럼 무력하고 미천한 이를 받아들여 섬기는 일이 바로 ‘당신을 받아들여 섬기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 예고하신 무력한 어린이처럼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게”(마르 9,31) 될 바로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과 연관됩니다.
곧 그렇게 ‘무력한 당신’을 받아들이는 일이 ‘당신을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일이 될 것’(마르 9,37 참조)이고, 바로 그렇게 하는 이가 ‘첫째’가 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높아지고 ‘갑’이 되어 지배하고자 하는 이 시대에 ‘을’이 되어 섬기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진정한 첫째’가 되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사실 이는 세속 정신이 다스리는 이 세상에 대한 일종의 반역이요 혁명입니다.
그러나 ‘섬김’이 다스리는 ‘섬김의 나라’에서는 ‘섬기는 이’가 첫째가 될 것입니다.
곧 ‘섬김’은 ‘사랑’이 다스리는 하느님 나라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르 9,35)
주님!
자신을 앞세우지도, 위에 두지도 않게 하소서.
이기기보다 질 줄을 알며, 억누르기보다 뒤집어쓸 줄을 알고, 업신여기기보다 존경하게 하소서.
자신을 낮추되 작은이나 무능한 이에게도 낮추고, 타인을 섬기되 낮은 이나 힘없는 이도 섬기게 하소서.
자신을 실현하기보다 자신을 내려놓고,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세상에서는 꽃찌 천국에서는 첫째>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주님의 이 말씀은 첫째가 되기 위해 작전상 꼴찌가 되라는 말씀일까요?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 잠시 패자가 되라는 그런 맥락에서 말입니다.
그런 맥락이라면 주님의 가르침답지 않고 결코 그런 뜻이 아닐 겁니다.
그런 것이라면 이 세상에서의 첫째와 꼴찌 얘기지요.
그러나 제 생각에 주님 말씀의 뜻은 이 세상에서 첫째는 하느님 나라에서 꼴찌고, 사람들 가운데서 첫째는 하느님 앞에서 꼴찌라는 뜻일 겁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서 첫째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꼴찌가 되라!' 이 말씀이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서로 섬기는 사랑>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수난과 죽음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제자들은 마땅히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 너머의 부활을 보지 못하고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기 전에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인정받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면서도 예수님의 마음을 읽지 못했으니 예수님께서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입니다”(마르 9,34).
이 물음은 창세기 3장 9절의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하는 물음이나 카인에게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는 물음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네 속을 살펴보아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네 마음의 중심이 어디 있는가를 살피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큰 사람은 단순히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품이 큰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높은 자리를 희망하고 있었으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복음적인 삶을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고민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자들의 속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랑으로 서로 섬기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섬긴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대접받기는 쉬워도 상대방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내 중심이 아니라 상대방을 중심으로 나의 것을 양보한다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6-7)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는 것입니다.
다 퍼 주고도 적게 준 것이 아닌지 걱정하는 것입니다.
성당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나의 친절한 말이나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을까요?
우리 모두는 서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이 세상에서 마음의 평화와 위안을 누리려 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바람과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의 보이는 평화를 갈망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을 바라십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의 일시적인 수고와 땀, 희생의 봉헌을 새롭게 하십니다.
주님을 차지한다면야 종이면 어떻고 꼴찌면 어떻습니까?
결국 모든 것을 얻은 것인데 말입니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은 한이 없으십니다.
그분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사람에게 관심 없는 사람은 하느님에게도 관심 없다>
어느 성당에 가건 조금은 이상하다고 여겨지는 신자분들이 한둘씩은 있습니다.
제가 오산 성당에 있었을 때 한 자매님이 그러한 분이셨습니다.
미사 중간에 항상 씩씩하게 들어와서는 다른 사람이 앉아 있는 자리가 자신의 자리라며 비키라고 하고 미사 분위기를 부산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또 특별히 담배 피우는 것을 싫어해서 사제가 담배 피우는 것만 보아도 바로 빼앗아서 발로 밟아버렸습니다.
그분은 버스를 탈 때도 도로 한복판으로 뛰어 내려가 달리는 버스를 세워 잡아 타기도 하였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교구에서도 유명한 분으로 통했습니다.
많은 신자는 그분을 보면 인상을 찌푸리고 심지어 소리까지 치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분을 보면 궁금해집니다.
‘왜 저렇게 되셨을까?’
지금은 고인이 되셔서 제가 그분에게 물어보고 알았는지, 아니면 그분을 잘 아는 분에게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분은 매우 똑똑한 분이었고 남편에게 심한 학대를 당하여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사실입니다.
남편이 담뱃불로 학대를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나니 그분이 가엾게 여겨지고 회복되시기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제가 본당 사제로 온 이후에는 매우 차분해졌다는 소리를 들어서 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저 사람 왜 저래?’라고 끝내는 사람은 자신에게서 나오기 싫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왜 그러는지 알려고 해야 합니다.
알면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면 사랑하게 됩니다.
판단만 하면서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은 자신이 옳다는 것을 그 사람을 통해서 증명하려는 것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린이처럼 보잘것없는 사람을 알려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알려고 하는 사람이고, 예수님을 알려고 하는 사람은 아버지까지 사랑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면 하느님께 관심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술품에 관심이 없으면서 예술가에게 관심이 있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제가 하는 묵상에 관심이 전혀 없으면서 저에게 관심이 있다고 하는 말도 저는 믿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 말씀에 관심이 없으면서 성체 성사엔 관심이 있다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말씀에 관심이 없다면 성체에도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이유는 나 자신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를 교만이라고 합니다.
‘피아니스트의 전설’이란 영화에서 주인공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배에서 내리지 못합니다.
배에서 태어나 평생 배에서 살았는데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사는 세상으로 내려가기가 두려운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듯 자신이 아는 세계가 안전하다고 생각하여 벗어나려 하지 않습니다.
결국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그 사람과 그 사람이 속한 세상을 알아야만 하는데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음이 밝혀지는 게 두려워 사랑을 포기하게 됩니다.
결국엔 알고 싶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준 책이 저에게는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입니다.
당시 누구나 볼 수 있는 성물방 책방 코너에 꽂혀 있었지만, 그 책을 빼서 읽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성경은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라고 전합니다.
그들은 묻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묵상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깨달으면 내가 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알게 되면 효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라는 감옥에서 벗어나려면 어린이를 먼저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받아들인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알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그분이 만드신 작은 것들에 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먼저 알기 위해 질문을 던져봅시다.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런 사람!>
예수님과 제자들이 카파르나움으로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앞장서 가시고, 제자들이 약간의 거리를 두고 뒤따라 갔었는데, 제자들 사이에서 참으로 민망하고 볼썽사나운 장면이 연출되었습니다.
제자 열둘 사이에서 누가 서로 높은가 하는 문제로 길거리에서 한바탕 다툰 것입니다.
앞서가시던 예수님께서 그들의 미성숙한 모습을 놓칠 리가 없었습니다.
즉시 날카로운 질문 하나를 던지셨습니다.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마르코 복음 9장 33절)
부끄럽기도 하고 어색했던 제자들이 입을 열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 예수님께서는 즉시 분위기를 파악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지네들끼리 서열 정리하느라, 서로 얼굴을 붉히며 길거리에서 대판 싸운 것입니다.
아직도 갈길이 먼 미성숙한 제자단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노출시킨 것입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의 신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분 가르침의 핵심적인 요지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스승님께서 조만간 유다나 로마 제국을 능가하는 강력한 대제국을 건설하리라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당연히 그 왕국이 서면 미리 한 자리 확보하기 위해 서열 다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고 있는데, 다들 김치국부터 벌컥벌컥 한 사발씩 들이킨 것입니다.
기가 차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즉시 특별 정신교육을 실시하십니다.
자리에 앉으신 스승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불러 제자들 앞에 세우신 다음, 그를 꼭 안아주고 나서,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르코 복음 9장 35~37절)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외쳐도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해, 그들의 자존심까지 긁어가시며, 강도 높은 특별 정신 교육을 실시하신 것입니다.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기는 시, 순수한 사랑의 언어로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는 시로 유명한, 존경하는 나태주 시인의 시 ‘그런 사람으로’를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그 사람 하나가
세상의 전부일 때 있었습니다
그 사람 하나로 세상이 가득하고
세상이 따뜻하고
그 사람 하나로
세상이 빛나던 때 있었습니다
그 사람 하나로 비바람 거센 날도
겁나지 않던 때 있었습니다.
나도 때로 그에게 그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보고 또 보아도 보고 싶은 사람이 아닐까요?
틈만 나면 ‘내가 누군지 알아?’하고 나대는 사람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습니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사람은 다시 상종하고 싶지 않습니다.
엄청 높고 대단한 사람과의 만남 역시 그리 달갑지 않습니다.
불편하고 어색하기만 합니다.
반면에 어린이 같이 작고 겸손한 사람, 어깨에 힘을 뺀 사람, 순수하고 소박한 사람, 틈만 나면 밑으로 내려가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시다. 가장 큰 사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세 번씩이나 예고하셨습니다.
그것은 그 일이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고, 제자들이 그 일에 동참할 수 있도록 그들을 미리 준비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제자들 쪽에서 생각하면, 우선 먼저 마음의 준비를 하는 시간이 필요했고, 단계적으로 믿음과 깨달음을 향해서
나아가는 과정이 필요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두 번째 예고 말씀’과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다투었다는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를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현세적인 생각만 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이야기로 생각할 수도 있고,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 참여하기 위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만난 여러 가지 걸림돌들을 극복해야만 했음을 나타내는 이야기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도들은 처음부터 사도로 ‘완성’된 사람들이 아니라, 많은 노력을 통해서 그 완성에 ‘도달’한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렇게 노력하는 과정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인은 어느 날 갑자기 신앙인으로 완성된 사람이 아닙니다.
긴 시간 동안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신앙의 완성에 도달하는 사람입니다.
언제 어떻게 도달하는지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과정 자체를 면제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수난 예고 말씀’은 ‘부활 예고’를 겸한 말씀입니다.
사실은 ‘부활’을 더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들이고, 하느님이 아니라 사탄의 지배 아래에 있는 자들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고,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
(요한 8,44ㄱ)
따라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으신 일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 아니라 악마와 그것의 추종자들이 한 일입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일이 다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기는 합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도 하느님의 뜻이라고 표현하긴 하는데, 하느님의 진짜 뜻은 수난과 죽음이 아니라, 부활과 승리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로써 죽음의 세력을 멸망시키신 분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시련’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거나 신앙생활의 필수 요소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시련을 겪으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고난과 시련을 만날 때, 그런 일들을 잘 극복해서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려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마태 10,23).
‘시련’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징이 아닙니다.
우리가 고난과 시련들을 극복하려고 애를 쓸 때 우리를 지켜 주시고 도와주시는 것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징입니다.
‘시련’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길이라는 표현도 좋지 않습니다.
어떤 고난과 시련을 만나든지 간에 피하지 않고 정면 돌파하는 것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다는 말은 그들이 부활 예고 말씀은 흘려듣고 수난 예고 말씀만 들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부활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의미 없고 가치 없는 희생일 뿐입니다.
아직 부활 신앙이 없었을 때의 제자들의 모습과 부활을 확신하게 되었을 때의 그들의 모습은 확실히 다릅니다.
그들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새롭게 변화된 것은 부활 신앙 덕분입니다.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을 했다는 것은(마르 9,34) 그들 안에서의 서열이 정리되어 있지 않았음을 나타내기도 하고, 제자들 모두가 각자 자기가 가장 높은 사람이 되고 싶어 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고작 열두 명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그들의 욕심은 겨우 열두 명밖에 안 되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되려는 욕심이 아니라, ‘예수님의 나라’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되려는 욕심이었습니다(마르 10,37).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르 9,35)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첫째가 되려고 하지 말고, 꼴찌가 되려고 노력하여라.”, 즉 “높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여라.”입니다.
예수님의 나라는(하느님 나라는) 스스로 높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 사람은 들어갈 수 없는 나라, 예수님처럼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고, 하느님의 뜻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중심의 삶 - 지혜 훈련의 달인 그리스도 예수님>
“주님께 네 길을 맡겨라.
그분이 몸소 해 주시리라.”
(시편 37,5)
내일 2월22일은 재의 수요일로 사순시기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이제 바야흐로 지혜 훈련의 시기가 시작된 듯 합니다.
지혜 역시 훈련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은 얼마나 지혜의 훈련이 잘된 분인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지혜 훈련의 달인이자 하느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집회서의 내용은 지혜에 대한 가르침을 모아 놓은 듯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몸소 익힌 지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련 속에서 주님을 경외함”이란 소주제로 전개되는 사순시기를 앞둔 우리에게도 참 적절한 지혜로운 가르침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중심의 삶에 적절한 지혜로운 삶의 자세입니다.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는 주옥같은 내용이라 전문을 공부하는 마음으로 인용합니다.
“얘야(My child)”로 시작되는 말씀이 우리 하나하나를 대상으로 하는 듯 합니다.
“얘야, 주님을 섬기러 나아갈 때
너 자신을 시련에 대비시켜라.
네 마음을 바로잡고 확고히 다지며
재난이 닥칠 때 허둥대지 마라.
주님께 매달려 떨어지지 마라.
네가 마지막 날에 번창하리라.
너에게 닥친 것은 무엇이나 받아들이고
처지가 바뀌어 비천해지더라도 참고 견뎌라.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된다.
질병과 가난속에서도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을 믿어라. 그분께서 너를 도우시리라.
너의 길을 바로잡고 그분께 희망을 두어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그분의 자비를 기다려라.
빗나가지 마라, 넘어질까 두렵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그분을 믿어라.
너희 상급을 결코 잃지 않으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좋은 것들과 영원한 즐거움과 자비를 바라라.
그분의 보상은 기쁨을 곁들인 영원한 선물이다.
지난 세대를 살펴보아라.
누가 주님을 믿고서 부끄러운 일을 당한 적이 있느냐?
누가 그분을 경외하면서 지내다가 버림받은 적이 있느냐?
누가 주님께 부르짖는데 소홀히 하신 적이 있느냐?
주님께서는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죄를 용서하시고 재난의 때에 구원하신다.”
(집회 2,1-11)
사순시기 지혜의 훈련 내용이 참 명쾌하고 분명합니다.
말 그대로 하느님 중심의 삶 자체가 지혜로운 삶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십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주님께 매달려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을 믿고, 그분께 희망을 두고, 그분의 자비를 기다립니다.
사실 제 주변에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악조건 속에서도 저를 부끄럽게 하는 이런 지혜의 훈련에 철저한 이들이 꽤 많습니다.
철저히 주님 중심의 삶에 전력 투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대로 치열한 지혜 훈련, 지혜 추구의 삶입니다.
예수님 몸소 지혜 훈련의 달인으로서 그 모범을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십니다.
말 그대로 오합지졸, 동상이몽의 제자들 공동체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하는 예수님의 공동체 삶이 얼마나 어려우셨겠나 능히 짐작이 갑니다.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시는 예수님의 내면은 많이도 착잡하셨겠지만, 얼마나 믿음과 인내, 희망의 내적 훈련이 잘 되셨는지 전혀 동요함이 없이 지극히 침착하게 가르치십니다.
이런 수난과 부활의 예고에도 불구하고 철부지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문제로 논쟁을 벌입니다.
제자들에게 포착되는 바, 경청의 자세가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경청은 제자들의 기본자세입니다.
경청해야 순종할 수 있고 비로소 배울 수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예고 말씀을 마음 깊이 경청했더라면 경솔, 경박하게 누가 크냐는 논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경청과 겸손은 함께 갑니다.
주님은 이어 제자들에게 겸손을 가르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참 영성의 잣대요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첫째가는 제자가 되려하는 자는 꼴찌가, 섬김의 종이,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종과 섬김의, 겸손의 영성이 있을 뿐이요, 직무가 있다면 단 하나 섬김의 직무만 있을 뿐입니다.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어원도 같습니다.
참으로 주 예수님을 닮아 종이 되어 섬김의 영성을 살아가는 겸손한 이에게는 적이 없습니다.
말 그대로 겸자무적謙者無敵입니다.
“종들의 종”으로 정의한 교황에 대한 그레고리오 대종의 언급도 적절합니다.
참 향기롭고 아름다운 사람이, 감동을 주는 사람이 종과 섬김의 영성에 투철한 겸손한 사람이겠습니다.
경청과 겸손에 이어 환대입니다.
참으로 경청과 겸손, 환대의 훈련은 그대로 지혜의 훈련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어린이 하나를 껴안으시시며 환대에 관한 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여기서 어린이가 상징하는 바는 천진무구한 그런 어린이가 아니라 약하고 병들고 불쌍하고 측은하고 가련한 주변으로 밀려난 소외된 인간 존재를 상징합니다.
성서의 언어로 하느님께만 희망을 둔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인 “아나뵘(anawim)”을 상징합니다.
바로 이런 아나뵘의 노래 모음집이 우리가 매일 기도로 바치는 시편집입니다.
부단히 우리의 무딘 마음을 두드리며 회개를 촉구하는 오늘의 아나뵘들입니다.
제 주변에도 도움을 청하는 이들이 자주 있지만 제대로, 제때에 응답하지 못해 강론 쓰는 지금도 마음이 무겁습니다.
바로 이런 가난한 이들을 환대하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를 받아 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린이로 상징되는 가난한 이들을 환대함이 바로 예수님을, 하느님을 환대하는 것이란 놀라운 말씀입니다.
바로 친히 가난한 이들의 배경이 되시면서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예수님이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지혜의 훈련에 환대의 훈련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하라는 베네딕도 성인의 가르침도 규칙에 명문화되어 있습니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사순시기 만반의 준비를 하시고 하루하루 날마다 영성훈련, 지혜의 훈련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지혜의 훈련에 좋은 도움이 됩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여라.
그러면 너는 길이 살리라.”
(시편 37,27)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함구령을 내리실 때도 자주 있습니다.
왜 그러실까 의문이 들지 않나요?
오늘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마르코의 입을 통해 밝혀지네요.
'예수님께서는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마르 9,30-31)
우선 제자들을 제대로 가르치는 것이 중요했나 봅니다.
제자들이 확실히 당신에 대해서 알기 전에는 곤란하다고 느끼신 것이겠지요.
예수님께서 따로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며 가르치신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당신의 기적과 사랑이 드러날수록 곁에 있는 제자들이 메시아 도래의 진정한 목적을 깨닫기도 전에 자칫 허영과 교만에 들떠 세속적 지위와 권력을 꿈꾸게 될까 봐 그러신 것은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아니나 다를까, 제자들은 오늘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9,34)는 문제로 자기들끼리 대놓고 논쟁을 벌이기까지 합니다.
논쟁의 원인을 물으시는 예수님께 차마 입을 열지 않는 걸 보면 자기들의 욕망이 스승의 마음에 들지 않으리라는 걸 모르지는 않는 듯합니다.
타볼산 체험 때부터 일부는 천국 체험을 하였고, 남아있던 이들은 연옥 체험을 하고나서 기분이 언짢은 상태였지요.
천국 체험을 한 이들은 남아있던 이들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체험을 자랑하면서 괜히 스스로 대단한 존재가 된 것인 양 좀 으스댔을 거라 생각됩니다.
안 그래도 기분이 찜찜하던 이들은 더 속이 상했을 것이고, 급기야는 말다툼까지 벌이게 된 것이 아닐까 짐작됩니다.
"모든 이의 꼴찌, ... 모든 이의 종."
(9,35)
그들 마음을 읽으신 예수님께서 첫째가 되는 조건을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분은 '모든 이의 종'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의 일을 완수하시고, 죽음으로 세상의 끝까지 내려가셨던 분이시지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9,35)
당신이 그렇게 사시는 분이니 당연히 체험적 가르침을 전수해 줄 수밖에 없겠지요.
'내가 살아보니 말이다. 진짜로 훌륭한 사람은 꼴찌와 종이 되는 사람들이더라. 이 말 알아듣겠니?'
예수님은 어린이를 시청각 교재로 활용하여 예화로 삼으십니다.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 그를 껴안으시며...'
(9,36)
우리 예수님은 참으로 정도 많고 어찌 그리 다정다감하신지요.
특히 어린이들와 약자들에게 그러하시지요.
예수님이 옹호하시는 "꼴찌, 종, 어린이"는 제자들이 욕망하는 "큰 사람"과는 명백히 대조를 이룹니다.
집회서 저자는 1장에서 지혜를 예찬하더니, 2장에서는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의 행복을 약속합니다.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집회 1,14)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주님 앞에서 어떤 모습일까요?
"주님께 매달려 떨어지지 마라."
(집회 2,2)
참 재미있는 표현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꼭 껴안아 주신 어린이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엄마에게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아기에게 흔히 '엄마 껌딱지'라는 별명을 붙여 놀리는 것처럼, 주님과의 관계에서 우리도 그처럼 "매달려 떨어지지 마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조건이 있습니다.
아기가 엄마보다 작아야 엄마에게 매달릴 수 있는 것이 당연하듯이, 우리도 무조건 주님보다 작아야 주님께 매달릴 수 있다는 겁니다.
자기보다 더 크고 무거운 존재를 매달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살은 빼긴 빼야할 것 같네요. ㅎㅎ
예수님은 모든 이의 꼴찌로, 모든 이의 종으로 오셔서 자꾸자꾸 작아지고 계시는데 제자들은(우리들은) 자꾸자꾸 크고만 싶으니 큰일입니다.
겸손으로 낮아지고 작아지고 희미해져 보이지 않게 되실 때까지, 결국 온전히 비워 '無, 없음'이 되신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도 더 많이 더 높이 더 크게 더 가득 채우고 싶어한다면, 우리는 주님께 매달려 붙어 있기 어려울 겁니다.
아니, 어쩌면 아예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게 맞습니다.
만물은 자라고 넓히고 채우는 속성이 있기에, 내려가고 줄이고 비우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곧 하느님 나라를 위해 세상의 물살을 거슬러 역행하는 것입니다.
쉽지 않고 이해받기도 어려운 길이지요.
그래서 시편 저자는 우리에게 그 어려운 길을 "주님께 맡겨라. 그분이 몸소 해 주시리라."(화답송)고 노래합니다.
우리가 스승 예수님처럼 낮아지고 작아지고 비천해지고 비울 지향만 있다면, 그 다음은 주님께서 해 주십니다.
우리는 그저 주님께서 하시는 대로 따르면서 딱 이대로만 하면 됩니다.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여라. 네 마음이 청하는 대로 주시리라."
(화답송)
마냥 천진난만하게 주님께 매달려 빙글빙글 웃는 어린 아이가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의 순수하고 사랑스런 바람을 아버지가 어찌 모른 채 하시겠습니까!
작은 이의 바람은 청하는 대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가난이 그의 가난을 알아보고 껴안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를 껴안듯이 말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모든 일이 잘 되고 술술 잘 풀릴 때는 사는 것이 문제 없고 신앙생활도 즐겁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역경이나 시련이 닥쳤을 때이지요.
이 시련과 역경이 찾아오지 않는 인생은 없다는 게 이에 대한 적절한 대처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허둥대지 말고 그냥 주님께만 의지하고 주님께 매달려 떨어지지 않으면 된답니다.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 닥쳐도 그분을 믿고 참고 견디기만 하랍니다.
그분의 자비와 은총을 기다리면서.
오늘 나에게 생각지도 못한 어려움이나 시련이 닥친다해도 이렇게 해봅시다.
하느님이 내편이신데 그분께만 매달려 있으면 다 지나갈 겁니다.
"이 또한 다 지나가리라."
아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바둑 용어 중에 ‘포석’이란 말이 있습니다.
초반에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는 것입니다.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은 소위 ‘강남의 노른자 땅’을 미리 차지합니다.
반면에 아직 실력이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별로 쓸모없는 ‘나대지’를 차지입니다.
이렇게 되면 바둑은 시작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이 됩니다.
그래서 바둑을 잘 두기 위해서는 어디가 중요한 자리인지 파악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같은 한 점이지만 어떤 한 점은 20집의 가치가 있고, 어떤 한 점은 1집의 가치도 없습니다.
이런 수를 ‘악수’라고 말합니다.
신문을 읽을 때도 행간과 전체 문맥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제 우리는 ‘사순시기’를 맞이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 주 부터는 ‘사순’에 대한 기사가 많이 나올 것입니다.
사순시기에 성탄을 이야기하는 것은 전례와 문맥에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행간과 문맥을 알아듣지 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며 꾸중을 들었습니다.
2000년 전에 로마는 지금의 미국만큼이나 강하고, 부유한 나라였습니다.
‘아프리카 북부, 중동, 유럽’은 로마의 통치 아래 있었습니다.
그때 로마의 변방이던 이스라엘에서 예수님은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런데 불과 200년이 되지 않아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는 로마에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극심한 박해에도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전역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역사는 그 이유를 2가지로 바라봅니다.
하나는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입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꿈속에서 십자가를 보았고, 십자가를 깃발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십자가를 구원의 표징을 삼는 그리스도교를 인정하고, 박해를 금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모친 헬레나 성녀입니다.
헬레나 성녀는 일찍이 하느님나라를 받아들였습니다.
예루살렘을 방문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웠습니다.
이런 헬레나 성녀의 깊은 신앙이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역사가들은 그리스도교가 로마에 급속하게 퍼질 수 있었던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았습니다.
그것은 당시에 로마를 뒤덮었던 역병입니다.
지금의 코로나 팬데믹처럼 당시 로마를 뒤덮었던 역병은 ‘홍역과 흑사병’이었다고 합니다.
의료시설이 지금처럼 발전하지 않았을 때이기에 역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로마의 황제도 피난을 갈 정도로 역병은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때 로마를 떠나지 않고 역병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돌본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들은 박해를 받으면서, 순교하면서 신앙을 지켜왔습니다.
역병 속에서 죽을지라도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굶주리고, 병들고, 죽어가는 이들에게 선행을 베푼 것이 바로 예수님께 선행을 베푼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목숨을 걸고 따랐습니다.
역병으로 죽어가던 로마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도움으로 죽음에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역병과 함께 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면역력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당시 로마는 박해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인정했다고 합니다.
물 위에서 화려하게 움직이는 백조를 보지만 물 밑에서는 헤엄치기 위해서 부단히 움직이는 백조의 다리가 있습니다.
예전에 성전을 신축할 때입니다.
본당 신부님의 강론과 추진력이 성전 신축의 기반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전이 세워지기까지 폐지를 모아서, 빈병을 팔아서 신축금을 내셨던 교우들의 정성이 있었습니다.
신축 현장에서 나무에 박힌 못을 모두 빼서 모아 자재를 아꼈던 교우들의 정성이 있었습니다.
돌아가며 야밤을 서면서 자재를 지켰던 교우들의 정성이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곧 사순시기를 맞이합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허구일 뿐입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고통일 뿐입니다.
십자가라는 뿌리 위에 부활이라는 꽃이 피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만을 꿈꾸던 제자들에게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언젠가 강의 시간이 남아서 근처 식당에 들어가 식사했는데, 그때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이 식당이 맛집으로 유명한 곳인지 식사 때도 아닌 데도 많은 사람으로 북적였습니다.
‘잘 들어왔다.’라고 생각하며, 메뉴 중에서 ‘설렁탕’을 주문했습니다.
잠시 후에 음식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주문한 설렁탕이 아닌 뼈다귀해장국을 식탁 위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주문서를 확인해보니, 분명히 설렁탕입니다.
그래서 주문한 음식이 잘못 왔다고 종업원을 부르려 했습니다.
하지만 식당 홀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직원들을 보니 미안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저로 인해 불편함을 겪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냥 뼈다귀해장국을 먹었습니다.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내가 직원까지 이렇게 배려한 거야.’라면서 말입니다.
잠시 뒤, 화난 목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뼈다귀해장국을 시켰는데 왜 설렁탕을 가져다줬냐는 소리였습니다.
맞습니다.
음식 전달이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배려한다고 그냥 먹었지만(이미 두 숟가락 먹었습니다), 처음에 미리 직원에게 이야기했다면 손님을 화나게 할 일도 없었고 직원이 혼날 일도 없었겠지요.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었고, 불편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자기 생각이, 또 배려라고 생각했던 것도 결코 완벽할 수 없습니다.
종종 자신이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배려했는데 자기에게 이럴 수 있냐면서 화내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생각과 배려가 남을 곤란하게 하고, 기분 나쁘게 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부터 주님께서 말씀하신 겸손의 삶이 시작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하늘나라의 신비에 대해 듣게 되었고, 또 그 나라의 영광이 얼마나 큰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의 관점에서 이해하려 했습니다.
세상에서의 첫째 자리의 영광처럼, 하늘나라에서도 첫째 자리의 영광은 떵떵거리면서 남 위에 군림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 논쟁하기까지 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이야기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르 9,35)
아오스딩 성인께서는 이를 나무에 비유하셨습니다.
나무가 하늘 높이 자라야 하기 위해서는 뿌리를 깊숙이 내려야 하는 것처럼, 겸손의 뿌리를 깊숙하게 내려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첫째 자리를 욕심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임을 인정하면서 겸손의 덕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지요.
부족해 보이는 어린이까지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만이 주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겸손의 뿌리를 깊숙하게 내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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