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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23일 대림 제4주간 수요일
제1독서 : 말라 3,1-4.23-24
복 음 : 루카 1,57-66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렸을 때부터 ‘오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디즈니 만화 ‘도널드 덕’과 비슷하게 생겼고,
‘오리 궁둥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오리처럼 엉덩이가 펑퍼짐했습니다.
수영장에서 헤엄칠 때도 오리처럼 했고, 심지어 오리의 꽥꽥대는 소리를 완벽하게 냈습니다.
이런 점들을 보고서 이 사람을 ‘오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별명으로 ‘오리’라고 부를 수는 있겠지만, 동물 ‘오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완벽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몇 가지 특징만으로 ‘오리’라고 말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사람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습니다.
‘그는 ~한 사람이다’라고 단정을 짓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단편적인 그 모습이 전체의 그를 나타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편협한 생각이 하느님을 향해서도 드러납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라고 단정하는 순간, 하느님을 모르는 것이 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은 우리의 작은 머리로 단정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섣부른 속단으로 어리석음의 길에 들어서지 말아야 합니다.
그보다 한 번 더 생각하는 마음으로 참 지혜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섣부른 판단으로 말을 못 하게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 잉태 후 낳기까지 말을 하지 못하면서
아마 하느님의 일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또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의 명명식에서 친척 가운데 아무도 쓰지 않은 이름이지만
하느님의 뜻에 맞게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판에 쓰지요.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아들이 요한이라는 이름을 받은 것은
그 이름이 ‘하느님의 은총’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못 낳는 태에 성령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시어 잉태된 요한의 기적 같은 출생은,
죽은 세상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깨우는, 회개를 외치는 요한의 설교를 예고합니다.
이제 구원 역사에서 요한이 맡은 역할에 대해 즈카르야가 예언할 수 있도록,
일찍이 천사가 묶어놓은 그의 입을 어린 아기와 아기의 이름이 지닌 힘이 풀어 주는 것입니다.
아기가 사람들의 예상과 전혀 다른 이름을 받자
사람들은 기적 같은 요한의 출생에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그 두려움은 하느님의 신비스러운 성사를 받을 준비를 하기 위해
회개하고자 사방에서 사람들이 요한에게로 모여들게 했습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우리는 누구나 “이름”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이름은 단지 그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지게 하는 것만을 넘어서,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때로는 이름이 그 사람의 운명이나 사명을 결정짓는다고 믿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이름을 짓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로 다루어졌고,
오늘날에도 “작명소”라는 곳이 있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의 전례>는 구세주의 탄생에 앞서, 요한의 탄생을 전해줍니다.
그는 사제인 아버지 즈카르야와 아론 가문의 어머니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가문의 이름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은 은혜로우시다’는 뜻의 요한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게 됩니다.
성경에서 ‘새 이름’을 받음은 새로운 지위와 역할을 부여받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그의 이름으로, 그의 신원과 사명이 밝혀집니다.
곧 주님 앞에서 길을 닦게 되는 엘리야로서의 예언자의 신원과 사명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도 이름과 함께 각자의 신원과 소명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요 수도승이라는 신원을 지니고, 그에 따른 직무와 소명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래서 실존철학자 하이덱거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세상 안에 과업을 짊어진 채 던져진 존재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소명을 과업으로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구원과 사랑을 “마음에 새기며”(루카 1,66), 소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본 훼퍼 목사님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있는 존재이다.”
아니, 사실은 그보다도 먼저 그리스도는 우리를 향하여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손길이 늘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웃들과 친척들도 그녀의 해산 소식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습니다.”(루카 1,58).
그것은 그들이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감추어진 무언가가 벙어리가 된 즈카르야를 통해 실현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탄생하자 그의 부모와 친지들은
아기가 어떤 이가 될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수행할 사명이 무엇일지 궁금해 합니다.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 1,66)
그런데 여드레째 되는 날, 아기는 할례를 받고,
“하느님은 자비하시다”라는 요한이란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그 순간 즈카르야의 묶였던 혀가 풀리고,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루카 1,65).
왜냐하면, 예상하지 못한 아기의 이름이 명해지면서
즈카르야의 혀가 풀린 사건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관여와 현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66)
그렇습니다. 먼저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입니다.”(루카 1,66).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의 손길이 오늘도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자신을 묻고,
우리의 신원과 소명을 찬미하며 살아갑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의 이름은 요한”(루카 1,63)
주님!
제 마음의 불신을 무너뜨리고,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소서.
닫힌 태를 풀고, 제 몸에 당신 소유의 이름을 새기소서.
당신이 주신 이름을 제 삶의 서판 위에 새기게 하소서.
소명을 살게 하시고, 당신이 뜻하신 바가 제게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종교는 으뜸가는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종교는 얽혀있는 삶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둠 속을 걷던 인류에게 등불이 되었던 종교는 크게 4가지의 특징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창시자입니다.
조로아스터, 석가모니, 예수님, 마호메트는 조로아스터교, 불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창시자입니다.
두 번째는 경전입니다.
조로아스터교에는 아베스타, 불교에는 불경, 그리스도교에는 성경, 이슬람교에는 꾸란(코란)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사회성입니다.
공동선을 추구하고, 자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사회성이 결여된 종교는 유사종교라고 합니다.
네 번째는 죽음 이후의 삶입니다.
불의하고 억울한 고통에 대한 보상을 이야기합니다. 박해와 순교에 대한 보상을 이야기합니다.
현세의 삶에 충실해야 하는 이유를 이야기합니다.
으뜸가는 가르침을 스스로의 깨달음을 통해서 얻는 종교가 있습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입니다.
세상의 모든 고통은 삶에 대한 집착에서 왔다고 말합니다.
그 집착을 버리면 비로소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바른 길을 가야하는데 불교에서는 그것을 팔정도(八正道)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처럼 인간의 이성과 성찰로 생겨난 종교를 ‘자연종교(自然宗敎)’라고 합니다.
으뜸가는 가르침을 하느님께서 보여주신다고 믿는 종교가 있습니다.
그런 종교를 ‘계시종교(啓示宗敎)’라고 합니다.
조로아스터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는 계시종교입니다.
부모가 아이가 가야 할 길을 알려주듯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가야할 길을 알려주신다고 이야기합니다.
부모가 아이를 지극한 사랑으로 돌보듯이 하느님께서는 자비와 은총으로 사랑하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서 다양한 방법으로 구원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신다고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는 ‘자연’을 통해서입니다.
구름, 꽃, 나비, 시냇물, 바람, 햇살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예술인들은 자연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양심’을 통해서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에게는 양심이 있습니다.
이웃의 고통을 공감합니다. 자신을 낮추는 겸양을 가집니다. 잘못된 행동을 부끄러워합니다.
옳고 그름을 식별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양심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예언자(預言者)’를 통해서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릇된 길을 갈 때면 바른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망과 고통 중에 신음할 때는 하느님의 위로와 희망을 전해 주었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네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구세주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하면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 수 있고,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매년 예수 그리스도께서 2,000년 전에 오셨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에게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를 ‘대림시기’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난 4주간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준비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와 요셉의 순명을 통해서 오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밤을 새워 양을 돌보았던 목동들이 축하하였습니다.
먼 길을 달려온 동방박사들이 황금, 유향, 몰약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였습니다.
세상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우리 곁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에 눈이 먼 사람, 자신의 욕망을 따르는 사람,
권력에 취한 사람은 ‘임마누엘’이 곁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제 곧 성탄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면 좋겠습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으리라.”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루카 1, 57)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 어떤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소중한 탄생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탄생이
모두 중요하다.
하느님 탄생의
여정 안에
세례자 요한의 탄생도 있다.
믿음을 딛고
일어서는 탄생이 있다.
우리가 모두가 바라는
모든 것이 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탄생을 선물로 주셨다.
우리의
압박과 속박의 세월을
치유하여 주신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의 때를
결코 놓치지 않는다.
쏟아지는 은총이다.
은총은
기다리는 이들의 것이다.
하느님 은총에
감사하는 대림이다.
대림이 있기에
탄생이 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빛으로 오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준다.
탄생 중의 탄생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하느님의 때가 이루어진다.
세례명이 왜 중요한가? 이름은 무의식을 담는 그릇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태어나서 할례를 받는 내용입니다.
유대인 남자는 누구나 태어난 지 여드레가 되면 아브라함의 전통에 따라 할례를 받습니다.
할례는 이전의 내가 잘려 죽고 하느님 백성으로 새롭게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할례가 신약으로 오면 세례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할례를 통해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꿔주신 이유는
새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새로 태어나면 갖게 되는 것이 본성이고 그 본성은 새로운 이름 안에 갇힙니다.
오늘도 하느님은 즈카르야의 아들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라고 하며 의아해합니다.
당시 요한은 흔한 이름이기는 하였으나 즈카르야 가문 이름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즈카르야는 아기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라고 씁니다.
그러자 묶였던 입이 열려 주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왜 이름을 인간이 짓는 것보다 하느님의 뜻에 맡기는 것이 그리 중요할까요?
그 이름을 누가 지어주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운명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1971년 스탠퍼드대 필립 짐바르도 교수는 대학교 지하에
모의 감옥을 만들고 2주 동안의 사회심리학 실험 지원자를 모집했습니다.
건강한 남자 대학생 24명을 선발해 추첨으로 교도관과 죄수로 나누었습니다.
실제 상황과 같이 연출하기 위해 어느 일요일 죄수들은 실재 범인처럼 체포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리고 교도소에서 실제로 하는 것처럼
알몸 검사와 분말 소독을 진행하고 발에는 쇠사슬을 채웠습니다.
1일: 교도관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고 교도소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수감자들을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언어가 폭력적으로 변했습니다.
저항하는 수감자들을 전부 탈의시켜 수치심을 주었으며 독방에 가두었습니다.
2일: 새벽에 교도관들은 갑작스러운 점호를 취했고 수감자들은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교도관들은 아무 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2차 세계대전 때의 나치수용소 처벌을 감행합니다.
진짜 놀라운 사실은 이 실험을 이끄는 짐바르도 교수 자신도
교도소 소장이 되어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교수는 실험실 감독을 강화하고 실험실을 진짜 교도소로 옮기려고 생각합니다.
3일: 수감자들이 사제와 면담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단 2명만이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했고 나머지 9명은 수감자 번호로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교도소에서 벗어나기 위해 변호사가 필요하다고 간청했습니다.
이들은 단 3일 만에 실험 참여자가 아닌 진짜 수감자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수감자들은 모두 초췌해졌고 건강상의 문제도 발생했습니다.
5일: 교도관들은 수감자들을 성적으로 학대하고 교묘한 고문과 가혹행위를 합니다.
수감자들은 아무 저항도 없이 그들의 고문과 가혹행위를 따릅니다.
2주의 계획이었지만 이 실험은 어쩔 수 없이 단 5일 만에 종료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정신적 변화를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실험이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어떻게 규정하고 정의하는지에 따라
얼마나 무섭게 변하는지 보여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스스로’란 말은 틀렸습니다.
그들에게 교도관의 정체성과 죄수의 번호를 붙여준 것은 하나의 권위였습니다.
그리고 그 권위를 믿어버림으로써 그 정체성 안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잘 살펴야 하는 사실은 사제에게 자신들을 소개한 죄수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잊고 죄수 번호로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이제 자신들의 이름에서 벗어나 죄수 번호 안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보자면 이름은 ‘무의식의 껍질’과 같습니다.
만약 요한이 아니라 즈카르야 주니어 정도로 이름을 지었다면
요한은 즈카르야 가문의 사제직을 이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집단 무의식입니다.
우리 각자가 사는 세계는 이 집단 무의식으로 묶여 있습니다.
저처럼 삼용이라는 이름으로 살면서 트럼프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트럼프란 이름 안에 이미 그가 태어날 때부터 가졌던 것,
자라오면서 받아들인 것이 합쳐진 개인과 집단 무의식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무의식이 그 이름이라는 껍질 안에 들어있고
그 참 자신은 그 이름을 바꾸지 않는 한 그 무의식 속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 사람이 새로운 세례명을 가지게 된다면
그동안 트럼프로 묶여 있던 무의식에서 해방되게 됩니다.
오리 부모에게서 길러진 백조인 미운 오리 새끼는
백조의 이름을 가지게 되면 우아하게 하늘을 날게 됩니다.
오리 이름을 가지면 그저 오리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름은 정체성이고 정체성은 그동안 내가 믿고 받아들인 무의식입니다.
물론 그 무의식은 나의 태어날 때의 생존 욕구와 결합하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달걀 안에 노른자는 닭이 될 가능성을 지녔습니다.
그러나 껍데기를 깨야 합니다. 그 껍질 안에는 나를 살게 하는 무의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요리하면 흰자가 되는 부분입니다.
그 껍데기를 깨고 나오면 달걀에서 병아리가 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태어나고 그때마다 이름을 바꿉니다.
우리가 세례명을 존중해야 하는 것은
그 세례명 안에 하느님 삼위일체의 집단 무의식인 ‘사랑’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으로 산 이들이 우리 세례명이 됩니다.
나의 세례명이 누구이고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보다
그 사람들처럼 하느님의 사람으로 새로 태어났다는 것을 세례명을 통해 믿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요한이라는 이름보다 그 이름을 하느님께서 지어주셨다고 믿는 것이 더 중요한 것과 같습니다.
삼용이란 이름을 인간적 아버지께서 지어주셔서 그 사회 안에서 살 수 있었던 것처럼,
요셉이란 이름을 하느님께서 지어주셨다고 믿어야 그분의 뜻 안에 살고
그분 나라에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세례명은 세례로 하느님 가족으로 새로 태어났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구약 성경의 마지막 권인 말라키서는
대예언서에서 소예언서에 이르는 예언서 전체를 수렴합니다.
특히 “나의 사자”라는 뜻인 말라키 예언자와
예수님께서 활동하시기 전에 주님의 길을 준비하던 세례자 요한이 연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말라키서의 메시아 관련 내용에 감명을 받고,
말라키가 기다렸고 또 지금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아가 바로 나자렛의 예수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오늘 독서의 첫 구절을 읽어 봅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말라키의 예언은 세례자 요한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주님 성탄이 되면 가려질 조연이지만 그는 분명 대림 시기의 주인공입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말라키는 갑자기 도래할 주님의 날을 준비하라고 권고합니다.
아직 구원의 때는 이르지 않았으나 언젠가 주님의 날이 오면,
인간의 죄는 종식되고 의인들이 구원되는 시대가 오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예언은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경고인 셈입니다.
따라서 주님 성탄을 곧 앞두고,
오늘 복음 속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부부의 이웃들이 메시아의 선구자로 주님의 사자요
주님께서 앞서 보내신 엘리야인 세례자 요한에게 지녔던 두려움을 생각합니다.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지금을 사는 우리도 두려운 마음으로 이 질문을 되새겨야겠습니다. 이 아기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고자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요한 3,1-18 참조).
성인이 된 세례자 요한에게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묻는
유다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처럼 무지해서는 안 됩니다(요한 1,19-28 참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