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愈(한유)-左遷至藍關示姪孫湘(좌천지남관시질손상)(좌천되어 남관에 이르러 질손 상에게)
一封朝奏九重天(일봉조주구중천) 아침에 조정에서 상소 한번 올렸다가
夕貶潮州路八千(석폄조주노팔천) 그날 저녁에 팔천 리 밖 조주로 좌천되었다
欲爲聖明除弊事(욕위성명제폐사) 천자께 폐가 되는 일 없애려고 했던 일
肯將衰朽惜殘年(긍장쇠후석잔년) 어이 쇠약한 남은 목숨을 아까워 하겠는가
雲橫秦嶺家何在(운횡진령가하재) 구름은 진령을 덮어 고향집이 어디인지 모르겠고
雲擁藍關馬不前(운옹남관마부전) 구름은 남전관을 감싸 말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知汝遠來應有意(지여원래응유의) 너도 생각이 있어 먼 길을 왔을 텐데
好收吾骨瘴江邊(호수오골장강변) 조주 강가에 내 뼈나 잘 거두어다오
*韓愈{한유, 768년 ~ 824년, 자는 퇴지(退之), 하양[河陽, 하내군(河內郡) 남양(南陽)지금의 허난성 난양] 출생, 그의 선조가 창려(昌黎, 지금의 랴오닝성 진저우(錦州)에 살아 세인들은 그를 한창려 또는 창려선생이라 부름}는 당나라 때의 걸출한 문학가, 사상가, 철학가, 정치가로 훗날 그를 당송팔대가의 첫째로 꼽으며 유종원과 함께 한류韓柳로 일컬었습니다.
한유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어머니를 잃었고, 3세에 아버지를, 14세에 형 한회(韓會)를 잃고 형수 정부인(鄭夫人) 밑에서 가난하고 어려운 생활을 하였는데, 7세 때부터 독서를 시작한 한유는 13세에 이미 문장에 재능을 보였고, 덕종(德宗) 정원(貞元) 2년(786)부터 장안(지금의 산시성 시안)에서 과거에 응시했으나, 이렇다 할 문벌도 배경도 없었던 그는 세 번이나 낙방하고서 정원 8년(798)에 31세의 나이로 진사과에 합격했으며, 다시 이부시(吏部試)에 응시하였을 때에도 다시 세 번 낙방한 그는 정원 11년(795) 세 번이나 재상에게 글을 올리고서야 가까스로 천거되었고, 경조윤, 병부시랑(법무부차관), 이부시랑(문교부차관)을 역임하였고, 819년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헌종이 불골(佛骨, 부처의 유골이나 사리)을 궁중으로 맞아들이려는 행사를 벌이자 불교의 폐해가 심각함을 느낀 그는 이를 극구 만류하는 간불골표諫佛骨表를 지었다가 황제의 미움을 사 조주지사로 좌천되었습니다. 문하에 가도賈島, 맹교孟郊 등의 인물이 배출되었습니다.
*위 시는 문학비평가이신 김희보님의 “중국의 명시”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본 것입니다. 헌종은 원화 14(819)년에 불골佛骨(부처의 사리)을 궁중에 맞이하여 사흘 동안의 공양을 하였다. 한유는 유학 부흥의 입장에서 이를 반대하여 논불골표論佛骨表를 올렸다. 때문에 천자의 노려움을 사 사형이 될 것을 한 등급 감형되어 조주자사로 좌천되었다. 이 작품은 그 도중에 뒤따라 온 질손(한상)에게 자기 신념을 밝힌 것이다.
*형식 : 칠언율시(七言律詩)
*藍關(남관) : 남전관의 약칭, 섬서성에 있는 관소 이름.’
姪孫(질손) : 1.조카의 아들. 2.형제(兄弟)의 손자(孫子).
湘(상) : 작가의 둘째 형 한 개(韓介)의 손자 상(794~?)
一封(일봉) : 한통의 상소문
奏(주) : 천자께 진언하거나 문서를 바치는 것.
九重天(구중천) : 궁정을 가리킴
路八千(팔로천) : 장안長安에서 조주潮州까지 8천리 길
聖明(성명) : 천자의 존칭, 헌종을 가리킴
將(장) : 以와 같음, …그렇다 해서의 뜻
秦嶺(진령) : 장안 남쪽의 산맥, 남전현藍田縣 동남쪽에 있는 종남산終南山
汝(여) : 너. 한상韓湘
瘴江(장강) : 고온다습한 곳에서 많이 생기는 여러 가지 나쁜 기운이 많은 강물
첫댓글 타인에 의해 먼 길을 떠나야만 하는 안타까운 마음.
내 소신과 믿음이 굳건하니 어찌 슬프기만 할꼬.....
임금이 '정관정요' 같은 책도 읽고, 충언을 기꺼이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참, 세상살이 어려운 듯 합니다.
오늘도 좋은 날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