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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그 내면의 풍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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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김용옥은 박정희의 딸 근혜씨가 여당 후보로 출마한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펴낸 책 <사랑하지 말자>에서 박정희의 삶과 죽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개했다. 10월유신(1972)과 10·26 사건(1979)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저자의 동의를 얻어 요약해 싣는다.
배신과 이상의 두 얼굴 박정희(1917~79)에게는 형이 4명 있었는데, 셋째 형 박상희(朴相熙·1906~46)의 영향을 어려서부터 많이 받았다. 박정희가 구미보통학교에 다닐 때, 20대의 건실한 청년 박상희는 (경북) 구미 지역에서 민족운동에 선구적 역할을 한 큰 인물이었다. 그는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뭉친 신간회(1927. 1~1931. 5) 활동을 했고, 구미면 동아일보 지국장을 지냈으며, 해방 후에는 구미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박상희는 소신 있는 사회주의 운동가였다. 박정희는 좌파 지도자인 형에 대한 존경심에서 자신의 인격과 삶의 비전을 키워나갔다. 그래서 박정희 삶의 뿌리에는 사회주의적 성향이 분명히 있다.
박상희는 친한 친구 황태성의 소개로 경북 김천의 한양 조씨 규수인 조귀분(趙貴粉)을 아내로 맞는데, 그 아내가 낳은 맏딸 박영옥이 바로 김종필의 부인이다. (즉 김종필의 장인이 박상희이다.) 박상희는 해방 후 민군정의 실정으로 일어난 1946년 10월의 이른바 '대구폭동'(식량난으로 민중이 일어선 정당한 항변이었기에 '대구민중항쟁'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외부에서 투입된 경찰들이 박상희를 총으로 쏴 죽인다. 그때 박정희는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학한 지 불과 일주일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평생을 존경해오던 형님의 쓸쓸한 3일장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비보에 대해 내색하지도 않았다. 그때 세태는 매우 혼란스러웠고, 자신의 인생행로도 복잡했다. 일제시대 때 "천황폐하에게 사쿠라 꽃잎처럼 깨끗하게 목숨을 바치겠다"고 서약한 황군 육군 소위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박정희가 창씨개명한 이름. 엄밀하게 말하면 그는 만주군이었다)이던 그가, 이제 조선경비대(남한에 정식 국군이 생기기 전 미군정 주도로 창설한 군대)에 입대해 제2의 군인생활을 시작하려는 시점인 터라 어떠한 생각도 분노도 표출할 수 없었다. 복잡한 세태의 추이를 관망하며 분노의 심정을 가슴 깊이 형의 주검과 함께 묻어버렸다.
조선경비대 남로당 새포책 박정희 그 후 두 달 뒤인 1946년 12월 14일 (29살의) 박정희는 소위로 임관했다. 1947년 9월 27일에는 중위도 거치지 않고 대위로 승진했고, 1948년 8월 1일에는 소령으로 진급했다. 당시로서는 그런 식의 (초고속) 승진이 별로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군인으로서 박정희는 인품이 있고 탁월하게 유능했다. 한편 박정희는 공산당 남로당원으로서 세포조직의 중책을 맡아 조선경비대의 조직 속에서 이른바 '빨갱이'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오늘날 우파 권세가들의 정신적 지주이며 직접적 뿌리인 대부 박정희 본인이 공산당원이었고, 좌파혁명의 꿈을 꾸던 사람이라는 사실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기에 우리가 현대사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우선 이런 문제부터 짚어보자! 일제시대 때 우리나라 사람들 스스로에 의한 군대는 있을 수 없었다. 군인이 있다면 일본 군대로 징병 나간 사람들이나, 중국 대륙에서 공산계 밑에서 활약한 홍군이거나 조선의용군, 동북항일연군, 그리고 장개석 계열의 지원을 받는 임정 광복군이 있었을 것이다.
1945년 해방이 되었을 때 우리에게 찾아온 최대 비극이란 해방의 주체가 없었다는 것이다. 히로시마의 '피카-톤'(원폭이 터진 그 순간을 일본 사람들이 묘사하는 말) 때문에 그냥 도둑같이 찾아온 것이다. 그래서 결국 북쪽은 친소 도둑이 처먹고, 남쪽은 친미 도둑이 처먹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1948년 8월 15일의 일이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기쁜 사건이 아니라 슬픈 사건이다. 김구나 김규식, 여운형과 같은 위대한 지사들이 그토록 염원한 단일조국의 꿈을 깨고 남·북이 각자 세력의 아성을 구축한 사건일 뿐이다. 이승만이 정부 수립을 강행하자, 연이어 9월 9일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한다. 드디어 분단국가가 되고 만 것이다.
자, 박정희가 조선경비대의 소령으로 임관한 것이 바로 대한민국 수립이 선포되기 14일 전이었다. 생각해보라!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 해인 1947년 7월 19일에 3·1운동의 진정한 리더, 조선건국준비위원회·근로인민당의 수뇌이던 여운형이 피살된다. 그 배후는 뻔한 것이다. 그리고 정부 수립 다음해인 1949년 6월 26일 애국자 김구가 암살된다. 그리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동시에 존 하지 사령관은 민군정의 폐지를 발표한다. 김구는 일찍이 외군 철퇴를 주장했다. 김구가 피살되었을 때 미군 철퇴가 완료된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되었다는 것은 국가가 사라졌다는 뜻이다. 통치체제가 갑자기 증발해버린 것이다. 국민은 식민통치가 끝났다고 좋아 날뛰며 길거리로 쏟아져나와 만세를 불렀지만, 그 해방의 사건이야말로 우리나라의 모든 비극을 불러올 수 있는 공백의 사태라는 것을 염려하는 사람은 건국동맹·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어온 여운형이나 소수 애국지사들밖에는 없었다. 하여튼 국가가 없으니 '국군'이 있을 수 없다. 국군이란 '국가의 군대'란 뜻이다. 따라서 남한에 진주한 미군정은 조선 경비를 위해 1946년 1월 15일 '남조선국방경비대'를 창설하고, 그해 6월 이름을 '조선경비대'로 바꾼다. 또 조선경비대 유지를 위해 '조선경비사관학교'라는 간부 양성 속성과정을 만들어 장교를 임관시켰다. 박정희를 '육사 2기생'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을 말하는 것이다. 조선경비대에는 만주군·일본군의 군경력이 있는 사람들이 대거 진출할 수밖에 없었고, 박정희는 그 부류에서 제대로 훈련받은 우수한 군인이었다. 더구나 그는 만주군관학교 2년의 본과 과정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육사 유학생대를 3등으로 졸업한 탁월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조선경비대로 몰려온 사람들 중에는 일본군·만주군뿐만 아니라 항일투쟁의 기나긴 역정 속에서 훈련받은 좌파 계열의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조선경비대에는 거칠게 말해서 '백계'(우익)와 '빨계'(좌익)가 반반씩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조선경비대는 일본 경찰 출신이 장악한 경찰 조직의 보조 병력 정도로 간주되었다. 이런 현실에 불만을 품은 많은 경비대 장교들이 조선인을 탄압한 친일 경찰 프락치(끄나풀)들이 날치는 세상에 대해 반체제적 사유를 한다는 것은 결코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미국을 상대로 싸운 일제(출신)의 군인들에게는 골수에 사무치는 반미 감정이 있었다. 미군정을 빙자해 놀아나는 모든 집권세력에 대한 저항 심리가 있었다. 백계 출신의 박정희가 빨계의 활동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태였다.
동지들을 넘겨주고 살아남은 박정희 박정희가 남로당원이 된 이유는 명약관화하다. 일제 막바지에 일본 장교의 꿈을 꾸었다가 일본이 패망하자 시무룩하게 빈둥빈둥 나날을 보내던 그는 1946년 9월 24일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해, 바로 존경하는 형 박상희의 죽음을 맞는다. 그해 12월 23일 남조선노동당이 정식으로 결성되고, 남한 적화공작을 하는 데 박상희의 친구들이 대거 참여한다. 그들 처지에서 박정희는 포섭 대상 제1호였다. 박상희가 피살된 후 그의 유족들을 보살펴주어 자연스럽게 박정희는 그들의 조직망에서 중책을 맡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1948년 4월 3일 4·3 제주 민중항쟁이 발발했다. 이 항쟁의 진압 명령을 받은 여수 주둔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여순 반란사건'이다. 이 사건은 '여수·순천 항명사건'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동족상잔이냐, 항명이냐 하는 택일의 기로에서 그들은 항명을 선택한 것이다. 차마 동포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었다. 이 항명의 주체는 빨계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대한민국 국군 내에 좌빨이 퍼져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진 것이다. 결국 여순 항명사건으로 국군 내 거대한 숙군의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박정희 소령이 검거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박정희는 당시 고문도 심하게 당했다. 그는 1948년 11월 11일 남로당 가입 등의 죄목으로 군 수사 당국에 체포되었고, 빨갱이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이와 같은 중형을 선고받은 군인 가운데 구명된 경우는 오직 박정희 한 사람뿐이다. 박정희가 살아남은 것은 변절의 대가이다. 그를 살린 사람은 당시 최고 요직에 있던 백선엽 육본 정보국장이었다. 박정희는 목숨을 구걸했다. 박정희보다 3살 어리지만 만주군의 선배였던 백선엽 중령은 그에게 정확한 목숨의 대가를 요구했다. 박정희는 살기 위해 그 요구에 순순히 응했다. 박정희는 군조직 내의 '좌빨세포들'(그들은 실제로 의식 있는 우국지사였으며 박정희의 동지였다)의 상세한 명단을 공개했다. 박정희의 자술서로 우리나라 군대 내의 유능한 인물들이 수도 없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 이슬의 대가로 박정희는 목숨을 건졌다. 박정희는 이상을 추구하는 인간이었고, 결의와 결단이 있는 인간이었으며, 성취를 향한 자기 디시플린이 있는 인간이었다. 미래를 향한 발돋움을 성취하기 위해 그는 항상 자신의 현재를 왜곡했다. 현재 삶의 상황이 미래적 이상과 불일치를 일으킬 때, 그는 항상 자기가 품었던 이상을 배반했다. 그리고 서바이벌의 본능을 발휘했다. 그의 인생은 변절과 굴절로 얼룩질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말했다는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말도 자신의 생애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나는 그의 삶에 침을 뱉어줄 가치조차 느끼지 않는다.
한국전쟁은 박정희에게 구원의 사건이었다. 한국전쟁 발생으로 경험 있는 장교가 절실한 상황이 되자 박정희는 소령 계급장을 다시 달았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날 그는 중령으로 진급했다. 10월 25일 신설된 9사단 참모장이 되었고, 1951년 4월에는 대령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1953년 11월 25일 준장으로 진급했다. 1955년에는 제5사단장이 되었다. 그는 비로소 전투부대 지휘관이 되었고, 젊은 장교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로 자리를 잡았다. 박정희 삶의 하중이 비록 변절과 굴절을 거쳤을지라도 이승만 치하에서 부패한 군상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어떤 이상주의적 가치관의 무게를 (젊은 장교들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사회주의적 이상 남아 있던 박정희 이승만은 군 수뇌부를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충성하도록 교묘하게 조작하는 능력이 있었다. 자유당 시절, 군대는 정말 개판이었다. 군납 물자를 둘러싼 부정의 도수는 조선 후기 삼정의 문란을 뛰어넘는다. 이런 상황에서 군대 내의 소장파 장교들이 군대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그 정군운동의 중심에 박정희가 있었다. 그리고 5·16 쿠데타는 멋들어지게 성공했다. 박정희의 쿠데타가 사전에 미국과 협의가 없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당시 쿠데타에 대한 미국 대사관의 보고를 보면, 5·16 쿠데타를 '좌익정권의 등장'으로 규정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박정희는 주체 없는 우리나라 역사의 꼬락서니에 대해 극심한 불만이 있었다.
우선 그는 이승만과 같은 '예수쟁이'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미국을 로고스의 전당으로 칭송하는 이승만과 같은 멘털리티(사고방식)는 없었다. 그는 일제 사범학교 출신이다. 교사로서 도덕적 인격이 무엇인지에 대해 혹독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그리고 일본 군인이었다. 그 나름의 로직에 따라 어떤 인격의 철저성을 배워간 디시플린 과정을 우리는 인정할 수도 있다. 하여튼 혁명가 박정희의 가치관 속에는 사회주의적 국가 재편에 대한 어떤 갈망이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박정희는 군사혁명을 일으켰을 때도 분명 좌빨 성향이 있었다.
공화당의 박정희와 민주당의 윤보선이 맞붙은 민정이양 대통령 선거일을 불과 이틀 앞둔 1963년 10월 13일, 당시 야당 정통지로서 명성을 드날리던 <동아일보> 호외 하나가 서울 시내 중심가에 뿌려졌다. 박정희가 빨갱이라는 것을 폭로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여순 반란사건 이후 군법회의에서 박정희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는 사실을 폭로한 내용이었다. 나도 내 손으로 그 호외를 받은 기억이 있다. 국민이 얼마나 경악했을까? 그런데 윤보선 같은 정통파 정치인이 박정희를 일제의 군인이며 새빨간 공산주의자라고 폭로했을 때 국민들은 윤보선을 지지했을까? 오히려 국민들은 '빨갱이' 박정희를 선택했다. 전라도·경상도 지역에서 박정희가 우세를 보인 지역은 예외 없이 좌익활동이 왕성했거나 좌익연좌제로 피해를 본 지역이었다. 민중은 윤보선의 폭로를 오히려 매카시즘류의 야비한 공세로 낙인찍은 것이다.
한국의 보수세력 속에도 뼛속 깊은 곳에 숨겨진 좌빨들이 많을 수도 있다. 당시 민중은 스펙 좋은 윤보선의 허울을 쓰기보다는 오히려 군사혁명 세력의 참신한 붉은 색깔을 좋아했던 것이다.
김일성은 박상희의 동생이 남조선을 뒤엎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그래서 박정희와 직접적인 커넥션이 닿을 수 있는 인물을 모색했는데, 그가 바로 박상희의 절친한 친구 황태성이었다.
황태성을 죽이고 과거와 단절한 박정희 황태성은 해방 전에 연희전문을 2년 다니다가 중퇴한 인텔리로서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 경북도당 조직부장으로서 대구 지방에서 활동했다. 그는 당시 대구 남로당 간부였던 박상희와는 둘도 없는 친구였으며, 박정희를 조선경비대 남로당 조직원으로 포섭한 이재복(李在福·평양신학전문 졸업)과 함께 셋이서 10월 대구 민중항쟁의 주도적 역할을 했다. 황태성은 박상희가 피살되고 대구 민중항쟁이 진압되자 도주하여 남로당 지도자 박헌영의 측근이 됐다. 월북한 뒤에는 북한 정권의 무역성 차관에까지 승진했다가, 박헌영 실각 후 해임되었다. 김일성은 황태성에게 박정희에게 평화통일을 제안하는 비밀협상 임무를 맡겼다. 황태성은 김일성에게 "박정희는 내가 어려서부터 세배도 받고 머리를 수없이 쓰다듬어주던 아이이므로 직접 가보겠다"고 나선다. 황태성은 최소한 자기만은 다치지 않고 다시 북환에 귀환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1961년 9월 1일 임진강을 건너 서울에 잠입하는 데 성공한다.
황태성은 1963년 12월 14일 토요일 오전 11시 20분, 인천 근교의 한 육군 부대 안에서 총살형이 집행돼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졌다. 이것이 그 유명한 '황태성 간첩사건'의 시말이다.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박정희는 그에게 내밀어진 사형집행 승인 서류에 사인하기를 주저하고 또 주저했다. 눈물을 흘리면서 "아까운 분인데! 아까운 분인데…" 했다. 자신이 인간적으로 숭배한 형님의 가장 절친한 친구, 그리고 이 민족의 지도자로서 결코 흠 없이 살았던 황태성을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한다는 악연을 감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황태성은 남한 침투 후 제일 먼저 자신의 친구로서 대구 민중항쟁의 동지였던 김성곤(金成坤·1913~75·쌍용그룹 창업자)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가 유럽여행 중이라 만날 수 없게 되자 대구로 내려가 박상희의 아내 조귀분의 집으로 갔다. 황태성은 놀란 조귀분을 설득했고, 조귀분은 사위 김종필에게 황태성을 데려갔을 것이다. 박정희·김종필·황태성, 이 세 사람이 한자리에 앉아 담론을 즐겼을까? 내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김종필과 황태성이 함께 공화당을 사전 조직했으며, 황태성이 공화당 비밀요원의 밀봉교육을 담당했다. 그가 철저한 마오쩌둥류의 당 우선 대중노선을 가르쳤다는 등의 이야기는 학생들의 서클실 담론의 흔한 주제였다. 이런 얘기는 김형욱의 회고록 등에도 나타난다. 하여튼 황태성은 반도호텔에 상당 기간 유숙했으며, 박정희도 황태성을 예우했음이 틀림없다.
박정희가 황태성을 죽인 것은 곧 자신의 형 박상희를 죽인 것이다. 형 박상희를 죽인 것은 곧 자신의 과거를 죽인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죽였다는 것은, 이 경우 북한과의 모든 인연을 단절하겠다는 것을 표명했다. 이런 의지 표명만이 제3공화국 대통령으로서 인간 박정희가 생존해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결국 황태성은 미국이 죽인 것이다. 미 수사 당국이 황태성 간첩사건을 집요하게 추궁했고, 황태성의 신병을 2주 동안 넘겨받아 필요한 정보를 모두 빼갔다. 박정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박정희는 조선경비대 남로당 조직 친구들을 죽게 만듦으로써 자신의 활로를 개척했고, 또다시 황태성을 사형에 처함으로써 활로를 마련했다. 이것은 박정희 생애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동일한 패턴이지만, 박정희의 개인적 변절이라는 차원을 떠나 박정희가 비애롭게 굴종해야만 했던 우리 시대사의 굴절이기도 했다. 박정희는 분명 쿠데타를 일으킬 때는 참신한 사회주의적 사고까지 포섭했을지 모르지만, 황태성을 죽인 후부터는 철저히 친미·친일 우익의 매판자본 경제발전의 활로를 적극적으로 개척해나간다.
우선 내가 박정희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 이야기를 통해서 남북의 역사가 서로를 소외시킬 수 없는 하나 된 몸이며 그 역사의 진로가 서로에게 한정성을 예시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이 없으면 우리가 발해를 잃어버린 것처럼 북녘땅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제 우리는 남북의 역사를 근원적으로 초극하는 새로운 통합적 관점이 필요하다.
박근혜는 박정희를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박정희를 안다는 것은 박정희 삶의 사건들을 안다고 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삶의 사건들에 얽힌 역사 전반을 통관할 줄 알아야 한다. 또 그 사건들의 내면에 흐르는 박정희 본인의 생각과 느낌과 신념과 원칙을 총체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그것은 박근혜나 우리에게 똑같이 객관화되어 있는 인식의 지평이다. 더구나 자식들은 어버지나 어머니의 생애를 잘 알지 못한다. 그것을 객관적 앎의 대상으로 소외시킬 수 있는 감정의 여유를 갖지 못한다. 자식은 부모를 무개념적 느낌 속에서 일차적으로 파지하며, 그 느낌은 역사의 일반 개념 속에서 보편화되지 않는다. 박정희는 신념의 사나이였고, 원칙의 사나이였고, 삶의 디시플린이 있었고, 또 이상주의가 있었다. 그런데 박근혜는 이런 아버지의 정신세계를 하나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그러니 아버지를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최후의 시간, 최후의 안식 나는 박정희의 최후 순간을 같이한 여가수와 오랫동안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궁정동 안가에 심수봉(沈守峰)은 기타를 들고 박 대통령의 왼쪽에 앉아 있었다. 당시 상황에 관해서는 여러 진술이 있다. 나는 단지 심수봉에게 들은 것만 옮기겠다.
"대통령께서 저에게 <그때 그사람> 한번 불러보게 하시기에 그 노래를 다 부르고 나서 신재순이가 <사랑해 당신을>을 불렀는데, 너무 못 부르자 박 대통령께서 도와주시느라 함께 흥얼거리셨죠. 그리고 제가 기타 반주를 해드렸고요. 그때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빠앙~' 총소리가 난 거예요."
"총성은 그냥 갑자기 난 것이었어요. 차지철의 오른쪽 손목에 구멍이 뻥 뚫렸어요. 난 손목에 그렇게 큰 구멍이 뚫린 건 처음 봤어요. 순간 차지철은 화장실로 도망갔어요. 총이 없어서도 그러했겠지만 아마도 다음 총알이 각하에게 날아가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겠죠. 하여튼 경호를 맡은 사람의 행동은 아니었어요. 저는 그 순간 '이런 장면을 각하는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고 놀란 가슴을 누르며 바로 옆을 쳐다보았지요. 각하는 총소리에 조금의 동요도 없이 눈을 지그시 감고 앉아 계셨어요. '이 녀석들이 또 철없이 난동을 부리는구나' 하는 식의 태연한 모습이었어요. 이때 운명의 총알이 튀었지요. 오른쪽 가슴으로부터 왼쪽 아래 옆구리로 피가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아무런 흐트러짐이 없는 자세로 그대로 위엄을 지키며 선승처럼 끝까지 앉아 계셨습니다."
"정적 속에서 심하게 가래 끓는 소리가 들렸어요. 나는 본능적으로 대통령을 부축하면서 '괜찮으세요' 하고 물었지요. 그때 '괜찮아' 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때 김재규가 다시 들어와 확인 사살을 시도했다가 총알이 없자 다시 새 총을 들고 들어와 가혹하게 대통령 머리를 겨누었지요. 박 대통령은 제 품에서 그렇게 마지막 숨을 거두셨습니다."
지금 디테일에 관한 검증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은 박정희가 죽음의 순간에 모든 것을 예감하고 받아들이는 듯한 초연한 자세를 취했다는 것과, 그의 마지막 말이 "괜찮아" 이 한마디였다는 사실이다. 박정희를 이해한다는 것은 3선 개헌으로 유신정국에 접어들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는지, 그 민중의 신음 소리를 동시에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그토록 많은 학생들이 길거리에서 피를 흘려야 했고, 인혁당 사람들이 아무 죄도 없이 사형집행을 당해야 했으며, 비상계엄의 부마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박정희라는 태양의 폭염(<시경>(詩經)에서 '폭정'을 상징하는)은 너무 강했다. 당시 박정희가 제거되기를 갈망하지 않은 상식적인 인간은 없었다!
박정희는 위대한 전범을 달성하기에는 그가 치달린 삶 자체가 너무 왜곡돼 있었다. 3선을 넘어 종신 대통령을 꿈꾸는 유신으로 치달은 그는 이미 목이 잘린 항룡이었다. 항룡유회(亢龍有悔)! 항룡에게 남은 것은 후회밖에 없다. 그러나 그가 탄 자전거는 계속 페달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안 밟으면 쓰러지니까! 그러나 박정희는 그 지겨운 페달밟기를 누군가 멈추게 해주기 바랐을지도 모른다. 여민동락(與民同樂)의 대의를 위해 자신의 권세를 포기하는 용단을 내리지 못하는, 개인적 독락(獨樂)의 욕망 때문에 계속 굴러가야만 하는 자전거에 올라탄 자신을 그는 가련하게 관조했을지도 모른다.
김재규는 박정희의 조선경비사관학교 동기생으로 키도 같고 교사생활한 경력도 비슷하다. 박정희는 그를 아꼈고, 그를 중용했다. 그는 1964년 6·3 사태 당시 계엄군을 지휘해 박정희의 신임을 얻었다. 김재규는 의리가 있었고, 의협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부마 민중항쟁 등 계속된 정국불안 사건들을 수습하면서 단 한 명의 권력자를 위해 더 이상 국민의 희생이 있어선 아니 되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의 상식은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상식적 판단이 박정희의 종언을 가져온 것이다. 그가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에 총부리를 겨누었을 때, 박정희는 그 총부리를 회피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발악의 여유는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친구 김재규가 유신의 심장을 쏜다면 기꺼이 그 총알을 받아들이겠다는 역설적 안도의 숨을 내쉬었을지도 모른다 . "친구여, 끝내주게! 나도 어쩔 수 없었네. 이제 그만 내 인생의 종막을 내리려 하네! 난 괜찮아!" 몇 초 안 되는 순간이지만 이런 대인의 교감이 오갔을지도 모른다.
박근혜는 아버지를 얼마나 아는가 박근혜가 어버지 박정희를 이해한다면 동시에 박정희의 심장을 쏜 김재규의 심정도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한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친구의 총성을 기다리는 박정희의 모습에서 지친 해탈인의 모습과 역사 굴절의 톱니바퀴에서 희생당하고만 초라한 욕망의 화신, 그 두 면모를 동시에 본다. 도저히 우리 역사가 되돌아가야 할 지점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구국의 결단'을 운운하는 박근혜의 판단 능력은 인간학의 걸음마도 경험하지 못한 유치한 소녀의 푸념에 불과하다. 이제 아버지의 '구국의 결단'을 재현하기 위해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인가! 거대한 박정희 동상을 세우고 그 밑에 전 국민을 집결시키겠다는 것인가!
글 김용옥
꽃너울 뒤집어 쓴 섬진강, 화르르 화르르 낙화하던 벚꽃의 눈물, 그 눈물 받아 안고 덩달아 꽃빛 얼굴로 여울지며 흐르던 강물때문이었을까. 그 때부터 귓가에서 일어나 지금까지 맴을 돌던 노래. 젊은 날이었다면 왠지하는 마음에 스르르 뒤로 밀쳐두었을 그 노래... '봄 날은 간다' 아! 봄이 내 인생과 함께 가고 있었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 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 가더라 오늘도 꽃 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속에 슬퍼지더라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
첫댓글 대한독립
변화무쌍한 친일 박정희의 변신에 대한 전국민의 인식이 되는 날은 언제일까 궁금합니다. ㅠㅠ
부끄러운 대한민국의 상징입니다. 빨갱이에서 친일파에서 반공주의로 독재 18년 해먹은 박정희는 어두운 역사 자체입니다.
그 딸이 다시 대통령이 되려하니...ㅠㅠㅠ
장사익씨의 노래가 가슴을 울린다.. 일본정벌님 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