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10
—언어
채호기
그것은, 허공을 흐르는 속도에서
사물의 틈새를 빠져나오면서
소리의 길이와 공간을 가지는 그것은,
목구멍에서 둥글게 뭉쳐지고
이빨과 입천장 사이에서 늘어나거나 압축되거나 얇아지고
혀 위에서 더 정교하게 나누어지고 단단해진다.
그것은 벌린 입술 사이에서 태어나며 견고한 윤곽을 갖춘다.
그것은 생각의 심연에서 허공의 심층에서
공기를 뿜어내는 입이 있다는 듯이 방울로 맺혀
퍼지며 점점이 물방울 다발이 된다.
바깥의 온도와 체온이 맞부딪혀 하얀 안개꽃
다발을 피워 내는 입김처럼 생각의 물방울들은
바깥 공기에 달라붙으며 독립적인 물질이 된다.
그것은 생각과 분리된 물체, 동그랗게 오므린
입술은 그것을 낳은 구멍(곧 다물어지고 사라지고 말)만을 남긴다.
그것은 하나의 완전한 육체가 되어 등을 보이며 저쪽으로 멀어진다.
그것은 날개가 되어 윙윙거리며 귓가를 맴돈다.
그것은 잡힐 듯 잡히지 않으며 모든 다문 입을 벌리려 애쓴다.
*
그것은 눈을 뜨고 있어도 눈을 감게 한다.
그것은 빛을 끈다. 갑자기 모든 사물은 사라지고
그것만이 밤처럼 있고 질긴 암흑으로 에워싼다.
그것은 빛을 켠다. 암흑에 구멍이 생기고
핀 조명 아래 사라졌던 사물이 하나하나 돌아온다.
사물은 마술사의 모자에서 갑자기 생겨난 비둘기처럼
그것의 서랍에서 그것이 끄집어낸다.
*
얼음은 손가락에 잘 달라붙지 않는다.
미끈거리며 요리조리 손아귀를 빠져 달아난다.
잡았다 싶어도 혹독한 차가움이 금방 불로 변해
화끈화끈한 손가락은 숯 토막이 된다.
얼얼하고 감각이 없는 손가락은 얼음을 집을 수 없다.
붙잡을 수 없는 얼음은 곧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한파에 얼었던 한강에 유빙이 떠다니는
광경을 공중에서 고속 촬영한 영상.
육체의 심연에서 불쑥 솟아오르는
가라앉지도 채 녹지도 않은 그것.
문을 밀고 침묵의 실내에 들어서면
귀가 먹먹할 정도로 온통 하얀 내부. 하지만
하얀 벽과 하얀 바닥 하얀 천정이
높이와 넓이와 깊이를 가진 내면의 입체에서
기둥과 기둥의 높낮이 기둥과 기둥의 간격
기둥과 기둥이 지탱하고 떠받치는
침묵의 인상들을 붙잡았다 놓치고
침묵의 체온과 몸짓을 읽고 표현하려
그것은 떠다닌다.
목구멍 저편에 잠긴 육체보다 훨씬 거대한 빙산
입안에서 녹지 않는 얼음이 혀를
무게 짓누르고 차갑게 마비시킨다.
눈에 보이는 바깥에서인지 요리조리 굴리는
눈동자 뒤편 의식의 안쪽에서인지
어디에선가 계속해서 손가락이 얼음을 집으려 하듯
체온과 얼음이 맞부딪친다. 체온에서인지
얼음에서인지 그것이 그것을 발굴한다.
얼음과 입술.
그것은 육체의 수면을 시원스레 벗어나
바깥 공기와 사물들의 반짝임에 뒤섞인다.
—《시작》2013년 겨울호
------------
채호기 / 1957년 대구 출생. 1988년《창작과 비평》으로 등단. 시집『지독한 사랑』『슬픈 게이』『밤의 공중전화』『수련』『손가락이 뜨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