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제가 고구려 쳐들어와서 고구려군과 첫 접전이 요수....였던걸루 기억하는데요.
거기서 수나라군대가 요수를 건널려고 부교라는걸 맹글려는데, 부교가 짧아서 요수를 제대로 건너지 못했고
오히려 고구려군의 요격사격에 수나라 군대 반절이 상했다..........
라고 기억하는데...
여기서 부교가 정확히 뭘 말하는건가요? 물위에 둥둥 뜨는 다리인가? 어떻게 맹글기에 다리가 짧아서 사상자가 나는지...;;;
거기다 아무리 고구려군이 화살을 열심히 쏴댔어도 그래도 그렇지 수나라 군대 반절이 피해를 입었다?
아무리 전투인원만 반절이 상했더라 쳐도 수십만은 되지 않음여?
이게 가능은함? 화살쏜게 아니라 혹시 수공쓴거 아님? ㅎㄷㄷㄷㄷ
다른 전투들이야 청야전술에, 요새전이라서 수나라군대가 경험부족으로 질 수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 요수전투는 대체....- -;;; 통상적으로 중원에서도 있었을 전투형식인데도 불구하고
수양제 그 분은 군대에게 뭔 명령을 내렸길래 부교맹글다가 군사들을 날려먹었나요?
부교가 뭐임? 어캐맹그는 다리인건가요?
의문점이 한둘이 아님... 2차대전 일본군처럼 반자이공격을 하던것도 아니구...;;
첫댓글 부교는 나무다리인데... 나룻배나 수레로 제작한 나무 다리입니다. 그리고 저 전투에서 반이나 상했다는 군대가 수나라군 선봉대를 의미하는 것인지, 수나라 침략군 전체를 의미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요수에 배치된 고구려군은 최소 1만명 이상이었고 노로 무장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부교가 짧아서 상륙하지 못한다면 부교 위의 침투병력은 그야말로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다리가 닿지 않으면서 집중사격당하면 공황상태에 빠지죠. 거기에 뒤에는 후속부대가 몰려듭니다. 그러면 전진하는 것보다 후퇴하는 것이 더 어려워집니다. 그 많은 병력이 한꺼번에 달아나다가 밟혀죽거나 물에 빠져죽거나가 되죠
고구려군이 육지에 닿지 않는 수나라 대군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 맨 앞쪽의 적군을 집중사격 한 후, 부교의 중간이나 뒷부분에 화공을 가했을 겁니다. 그러면 부교의 수나라군은 퇴로가 차단되어 빠져죽거나 화살 맞아 죽게되는 것이죠. 그리고 첫 전투에서 아군이 부교에서 꼼짝없이 죽어가는 것을 보는 수나라군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10년전 고구려에서 수군 30만이 몰살당한 일을 떠올렸을 겁니다. 비록 다음 전투에선 쪽수로 밀어붙여 고구려군을 요동성으로 후퇴시켰지만 나중에 그들은 10년전의 운명을 다시 겪게 되죠.
그나저나 하복은 서양의 죽음의 신이라 하던데 이런 건 잘 아는 것 아니었나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죽음의 신ㅋㅋㅋㅋㅋㅋㅋㅋ
그나저나, 그렇게 추론한다면 좀 그려지는군요. 부교 위에 서있던 수나라군사들은 그렇다면 거의 전멸했었다고 볼 수도 있군요. 허이구... 그거보고 수양제는 계속 고구려 침공을 하고 싶었을까... 머, 자존심문제겠다만...
어느 독일학자가 수당의 고구려침공에 대해 쓴 어느 중국사책을 봤는데, 중국으로썬 요동쪽으로의 영토확장은 별 얻은것이 없을 것이었는데도 전쟁을 했다 라고 말하더군요.
부교를 회수해서 다시 고쳤다는 자치통감의 기록을 보면 부교를 태울만한 화공이 펼쳐졌다거나, 부교 위의 군대가 전멸했다거나, 수군의 전력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고 볼만한 상황은 아닙니다.
물론 부교에 화공이 감행되었다는 것은 제 추측일 뿐이죠. 다만 투입된 병력의 사상자가 많았다는 것은 쉽게 병력을 물리지 못한 상황에 처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니 부교에 손상을 입히는 공격을 고구려군이 가했을지 않을까 추측한 것입니다. 아니면 투입되는 병력이 퇴각하고 전진하는 후속부대가 맞물려 정체가 발생했을 가능성도 높겠지요. 어찌 되었든 1장의 차이가 지옥을 불러들였을 것이라고 짐작할 따름입니다.
그게 <<자치통감>>을 보면 수나라 군대가 많이 죽었다는 것은 나오지만 반절이 죽었다고는 나오지 않지요. 이 당시 이 도하부대를 이끌던 장군이 그 유명한 맥철장인 것을 보면 수나라 선봉대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수나라 군대 전체가 많이 죽었다면 그 이후의 전투는 전혀 불가능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 부교만들기는 상당히 힘듭니다. 이 부교를 만든 사람이 우문개인데 이 사람은 당시 여러 궁전을 건축한, 매우 유능한 건축가이자 장군이었지요.
그가 처한 상황은 페르시아의 자칭 관대하신 분이나 정조대왕과는 다르지요. 관대하신 분은 제해권을 제압하신 상황에서, 정조대왕은 조선의 국왕인 상황에서, 즉 매우 널널하게 부교를 건설할 수 있어던 것에 비해, 우문개는 그야말로 고구려군과의 대치 상황에서 처음 건너는 요수를 건너는 부교를 만들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장 정도 짧은 부교를 그것도 3개나 만들어냈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지요.
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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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든게 아니라 고친 것이지요. 수양제가 아무리 물량이 많더라 하더라도 고생해서 만든 3개의 부교 버리고 다시 만들만큼 바보는 아니지요. <<자치통감>>을 보면 맥철장이 전사한 후 군사와 부교를 물린 다음에 다시 1장을 더해서 완전한 다리로 만든 듯 합니다. 얕은 지점이라도 강물에 있는 것과 언덕에 있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니 말이지요.
아흫... 그렇군요... 정확한 디테일설명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고구려로써는 맥철장이란 장수를 전사시킨것만으로도 상당한 전과였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리고 원래 도하작전 자체가 건너는 쪽이 피해가 크게 마련입니다.
네. 그건 그런데, 제 집에 있는 책에서 간단히 저 전투를 서술했는데, 언듯보니 이해가 안되는 부분들이 있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