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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신명기의 말씀 30,15-20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5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16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또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실 것이다.
17 그러나 너희의 마음이 돌아서서 말을 듣지 않고, 유혹에 끌려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고 그들을 섬기면,
18 내가 오늘 너희에게 분명히 일러두는데, 너희는 반드시 멸망하고, 요르단을 건너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19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20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그리고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가 오랫동안 살 수 있게 해 주실 분이시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9,22-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22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오늘, ‘재의 수요일’을 지내고 맞이하는 첫 번째 날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 수난을 예고하시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곧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이신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사명, 곧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 죽음을 당하실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었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루카 9,22)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일어날 일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반드시”(이백주년 성서; “마땅히”)라는 단어는 이 모든 것이 필연성이나 당위성에 의해 다가오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 일은 첫째, “많은 고난을 겪는” 일이요, 둘째, “배척을 받아 죽는” 일이요, 셋째, “죽었다가 되살아나는”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는 모두 수동형으로 표현되고, 하느님의 권능이 개입할 것임을 시사해줍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루카 9,23)
당신을 따르는 길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지만, 세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요, 둘째는 “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이요, 셋째는 이를 “날마다” 지속적으로 지는 일입니다.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주권이 오직 하느님께만 있음을 믿고 오로지 하느님께만 신뢰를 둔다는 것이요,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꺼이 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버린다거나 자기 십자가를 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왜 버려야 하는지’, ‘십자가를 왜 져야 하는지’에 있습니다.
곧 그것을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해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곧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해야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결국 그것은 사랑이 가져오는 결단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목숨을 내놓은 결단이며, 그렇게 사랑으로 목숨을 내놓으면 오히려 목숨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루카 9,24)
이러한 결단은 제1독서에서 생명과 죽음의 길로 드러나며, 그 생명의 길을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신명 30,20)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하여, 사랑으로 그분께 매달려 있고, 생명의 길을 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루카 9,23)
주님!
제 자신을 따르지 않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을 붙잡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붙잡고 가게 하소서!
아니 당신께 붙들려 가게 하소서!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제시한 길을 가게 하소서!
당신을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뒤따르게 하소서!
그 무엇을 하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살려면 매달려야 한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공통 주제는 생명의 선택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생명을 선택하는 삶일지 얘기합니다.
그 방법에 대해 신명기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하느님의 명령인 계명을 지키면 생명을 얻게 되고 행복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중요 단어를 나열하면 계명-생명-행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제 생각에 여기에 순명이라는 말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계명-순명-생명-행복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자주 얘기하는 바이지만 무릇 모든 생명은 창세기 1장의 얘기대로 생기라는 명령에 순명하였기에 생명이 된 것들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느님께서 생기라고 명령하시자 그대로 되었다고 하고, 그걸 보시고 좋아하셨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생기라는 명령에 순명한 것이 생명 맞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탄생 자체가 하느님 명령에 순명한 결과이니 생명을 계속 살 수 있는 것도 하느님 명령에 달렸다는 것이 신명기의 가르침이고 구약성경이 내내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명령은 죽으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생기라는 명령이고 제발 살라는 명령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명령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누구보고 하라 마라 하느냐’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무리 좋은 것도 명령조로 얘기하면 싫어하고, 부탁하면 하려고 했던 것도 명령조면 하기 싫어집니다.
그런데 미성숙한 사람처럼 그렇게 반항하면 어떻게 될까요?
나이를 먹으면 사태를 파악하고 굽힐 줄 알지만 젊었을 때는 젊은 혈기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대들 듯, 살라는 명령도 명령이니 따르기 싫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의사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성숙하고 현명하다면 생명 앞에서는 겸손해야 합니다.
의사의 명령에 고집부리지 말고 겸손해야 하듯 하느님 명령에는 더더욱 겸손해야 하고 순명해야 합니다.
의사의 명령은 잘 들으면서 하느님 명령을 듣지 않는다면 말이 안 되겠지요.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께서는 생명의 길을 가르치십니다.
살려면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대로 당신을 따르면 진리의 길을 걷고 생명에 이를 것이라고 하십니다.
길이신 주님을 따라 가면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가기 때문이니 생명의 길이요 생명의 길잡이신 당신을 잘 따르면 된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신명기의 마지막 말씀을 마음에 새깁시다.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십자가는 천국의 열쇠>
한 사형수의 십자가의 길 묵상입니다.
“한없는 자비와 그 크신 사랑으로 저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
이제 당신의 자녀로서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의 짐을 덜어 이 죄인의 어깨에 메겠습니다.
과거에 큰 죄를 저질렀지만, 이제는 과감히 욕망과 욕정을 버리고 주님이 가신 길을 불평 없이 열심히 따르겠습니다.
삶에 주어진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묵묵히 따르는 길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깨우치게 하소서.
비천한 제가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고 제 십자가를 지며,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되지 않게 해 주시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게 해 주소서.
큰 고난과 시련이 닥칠지라도 두려움과 절망에 빠지지 않고, 제가 짊어지지 못할 십자가는 주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굳게 믿고 오로지 주님만을 따르게 하소서.”
(김 아우구스티노)
죽음을 감당하며 오로지 주님께 의탁하고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지고자 하는 마음을 헤아려 주시기를 청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주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믿음이 십자가를 감당하게 합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십자가는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4)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이 곧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사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을 버리면 모두를 잃어버리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바라보면 답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 앞에서 당신의 뜻을 버렸기 때문에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었습니다.
아니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알퐁소 성인이 “당신이 제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를 맞추겠습니다.” 고백한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뜻에 부합하기 위해서 나의 뜻을 내려놓아야 하겠습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힘들게 고생하면서 따라오라는 말씀이 아니라 매 순간마다 자신의 욕심을 비우면서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라는 요구입니다.
그러나 막상 일상 안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주장, 뜻을 양보한다는 것이 정말 마음 같지 않습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내 공로를 내세우지 말고 또 내 생각에 고집을 부리지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양보하는 것 하나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하겠지만 그 시작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요까짓 것’ 하는 것이 정말 대단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고까짓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매사에 신중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어렵고 힘든 것을 선택한다는 것이 지금은 십자가이지만 그 십자가가 더없이 큰 축복임을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당신에게 증거할 방법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고 순종하며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에는 그 십자가가 우리를 짊어져 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은 생명을 투자하는 것>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라는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틀을 보면 조금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투자하면 투자한 것을 후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내어 놓는다는 말은 ‘이웃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생명을 내어 놓음입니다.
피 흘림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은 열정(passion)이라고도 하는데 이 열정은 또한 수난(passion)을 전제합니다.
열정이나 수난은 같은 말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이무석 교수가 의무관이었을 때 목격한 자해하는 청년은 몸에 피를 내지 않으면 살고 있는 느낌을 가질 수 없어서 계속 자해를 한다고 했습니다.
피를 내는 것은 수난입니다.
하지만 사랑의 열정이 아닙니다.
무언가를 사랑해서 그것을 위해 투자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살아갑니다.
내 피를 쏟을 목적이 없다면 삶의 의욕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두 주인공은 죽으려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삶의 의욕을 잃은 사람들입니다.
남자는 고아로 자라서 애인에게 배신 당하여 삶의 의욕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사형 선고를 받습니다.
여자는 가족에게 폭행 당하고 어머니에게 외면 당해서 죽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가족을 위해서도 내 피를 쏟을 수 없다면 스스로 피를 내야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피 흘림 없는 삶은 열정이 식은 삶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라도 피를 흘려야 합니다.
그 피를 흘리는 것을 우리는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것들을 위해 피를 흘리면 될까요?
돈과 쾌락과 명예를 위해 피를 흘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평생을 달려온 사람들이 “이게 다야?”라는 마음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것들은 마치 공갈 젖꼭지처럼 아무리 빨아도 영양분이 오지 않고 결국 그것이 가치가 없는 것임을 깨달을 때는 삶의 의욕을 잃습니다.
어차피 무언가를 위해 목숨, 곧 피를 쏟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목숨을 바치라고 하는 것은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목적으로 바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아기를 낳을 때의 피 흘림, 아기를 기를 때의 피 흘림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삶의 의욕도 잃지 않고 투자한 만큼의 생명을 되돌려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십자가의 피 흘림을 통해 교회를 낳으시고 부활하시어 영원한 생명을 누린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투자는 더 많이 벌기 위함입니다.
투자는 무언가를 사랑할 때 하게 됩니다.
투자로 나의 피, 곧 생명을 바치게 되는데 그 피, 곧 생명을 되돌려 줄 수 있는 곳에 투자하는 게 상책입니다.
투자를 하지 않거나 투자 비용이 회수 될 수 없는 곳에 투자하는 어리석은 일을 하면 회사는 망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피를 흘리지 않거나 생명을 되돌려 받을 수 없는 것들에 투자하면 망합니다.
어차피 투자하며 살아야 한다면 투자 비용이 더 회수되는 것에 투자하는 게 낫습니다.
생명이 충만하면 행복합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부터 행복이 오는 것에 투자해봅시다.
마더 데레사 효과라고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가 가난한 이웃을 위해 피를 흘리는 모습만 봐도 면역력이 증가하고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실험 결과입니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죽는 삶은 이 세상에서부터 투자 효과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웃을 위해 목숨을 내어줍시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부터 행복합니다.
그러다 주님께서 계셔서 영원한 생명도 받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위해 공갈 젖꼭지에 모든 에너지를 쏟지 맙시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을 찾다 보면 하느님 자녀를 낳는 일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투자한 만큼 이득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해야 살 수 있습니다.
올바로 투자합시다.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언젠가 반드시 화사한 봄날이!>
참으로 혹독한 시기,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텨나가고 계시는 분들,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어쩌다 나라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참으로 혼란스럽습니다.
몰상식과 파렴치가 일상이 되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비정상과 난감함이 일상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국격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습니다.
왜 언제나 이 큰 부끄러움과 참담함은 우리 서민들의 몫이어야 하는지.
어서 빨리 이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따뜻한 봄날, 꿈결 같은 봄날을 맞이하기를.
조금이라도 빨리 이 매서운 경제 한파가 지나가고 여유 있는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넉넉한 순간이 오기를.
어서 빨리 이 무덤 속처럼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가 환한 광명의 땅으로 들어서기를.
그저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간절히 꿈꾼다면, 끝까지 희망한다면,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을 끝까지 유지한다면, 많은 경우 꿈은 현실화 됩니다.
춥다고, 힘들다고, 우울한 얼굴로 앉아있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머지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 혹독한 추위가 지나가고 화창한 봄볕이 온통 우리 인생의 창안으로 쏟아져 들어올 것을 미리 그려보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지고 가는 십자가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 느껴질 때는 예수님께서 우리 곁에 바짝 붙어 서서 우리보다 수백 배, 수천 배 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고 계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를 향한 각별한 사랑을 지니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각자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녀로 생각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무게에 눌려 비명을 지르며 살아가기를 절대로 바라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메고 있는 갖은 멍에를 던져버리고 자유롭게 살아갈 것을 바라십니다.
우리 각자가 축복받은 행복한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내 능력, 내 긍정적 측면, 내 성공 때문이 아니라 나란 인간 그 자체를 존중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유일한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내 업적, 내 위치, 내가 하고 있는 일보다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소중히 여기시고 사랑해주시는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때로 지긋지긋하게, 때로 한시적으로, 때로 평생 따라다니는 수많은 유형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사랑의 하느님이라며, 왜 이렇게 많은 십자가를?’ 하며 의아해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언젠가 반드시 친히 당신 손으로 우리 어깨 위에 얹어져 있던 십자가들을 하나하나 내려놓으실 것입니다.
자유롭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때 모든 짐을 내려놓은 우리는 한 마리 어여쁜 나비처럼 너무나 홀가분한 마음으로 하느님 아버지께로 날아오를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보내시지만, 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보다 큰 선으로, 결국 사랑으로,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품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지금 내가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있다면 축복의 순간이 멀지 않았다는 표시입니다.
내가 십자가의 무게에 힘겨워하고 있다면 보다 큰 도약, 보다 큰 기쁨이 멀지 않았다는 표시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신앙생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루카 9,23-25)
이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고, ‘선택’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믿음’과 ‘희망’에 관한 말씀입니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희망하느냐에 따라서 ‘삶의 과정’이 다르게 되고, ‘삶의 끝’이 다르게 됩니다.
1) 아직 믿음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 라고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특히 25절의 말씀은 아직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겨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라는 말씀은 “온 세상을 얻는다고 해도 그것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만 쫓아다니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입니다.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입니다.
이 풀이를 모두 합하면 “이 세상에 속한 것을 얻는 일은 허무한 일이다. 온 세상을 전부 다 차지한다고 해도 허무한 일이 될 뿐이다. 너희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만을 목표로 삼고 살아라.”입니다.
23절과 24절의 말씀은 “내가 주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나를 따르다 보면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도 있지만, 그 길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감수해야 하는 과정일 뿐이다. 그것을 기꺼이 감수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고, 그게 싫어서 피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입니다.
2) 이미 신앙인이 되어서 당신을 따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 뒤를 따라오려면, ‘내 뒤만’ 따라와야 한다.”고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자신을 버리고’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방해하는 걸림돌들, 특히 자기 안에서 생기는 속된 욕심과 욕망들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날마다’는 ‘매 순간 순간마다’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는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나도 감내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 ‘끝까지’는 ‘죽을 때까지’입니다.
또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포기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너무 힘들어서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 생각을 물리치고 끝까지 인내할 수 있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인내’는 나 혼자만의 힘으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도와주시기 때문에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24절의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신앙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신앙생활을 중단한 사람입니다.
“목숨을 잃을 것이고”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입니다.
우리 교회 역사를 보면, 박해와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배교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날에도 냉담자가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배교자들보다 순교자들이 더 많고, 냉담자들보다 어떻게든 신앙생활을 계속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끝까지 가는 사람과 가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의지력의 차이가 아니라 ‘기도를 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사람마다 각자 다른 사정이 있겠지만, 꾸준히 기도하면서 냉담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믿고 희망하기 때문에 현세의 인생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리는 사람입니다.
“목숨을 구할 것이다.”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그런데 당장 눈앞에 닥친 고통은 생생한 현실이고, 하느님 나라에서 얻게 될 영원한 생명은 막연하게만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희망’이 중요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로마 8,24-25)
지금 겪는 고난과 시련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희망하는 것은 ‘영원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다음 말씀들에도 연결됩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루카 9,62)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로 가겠다고 한 번 결심했다면,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즉 허무한 것들에 대한 미련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얻기를 희망하는 그 생명 외에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하는 것이 신앙인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중간에 포기하고 중단하면,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은 사람과 다르지 않게 됩니다.
배반자 유다가 한때 충실한 사도였다는 것은 전혀 인정받지 못합니다.
‘끝’이 전체를 결정합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
(루카 14,28-30)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삶은 선택이다 - 선택의 은총, 선택의 자유, 선택의 지혜>
“생명을 선택하여라.”
오늘 제1독서 신명기의 소주제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선택의 은총, 선택의 자유, 선택의 지혜입니다.
때로는 선택의 외로움, 선택의 어려움입니다.
하루하루가 선택입니다.
참으로 무엇보다 좋은 선택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공부해야 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다.
저절로 좋은 선택이 아니라 좋은 삶에서 좋은 선택이 나옵니다.
선택은 자유이지만 선택은 은총입니다.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100% 하느님께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는 삶에서 좋은 선택의 은총이 선물처럼 주어집니다.
말그대로 노력하는 천재들입니다.
요즘 이율곡 평전을, 세종대왕 평전을 읽으며 감탄하는 바도 노력하는 천재들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참 많이도 읽은 자서전들이요 평전들입니다.
앞으로도 시간되는 대로 귀감이 되는 옛 선비들이나 성인들, 위인들의 평전을 읽을 계획입니다.
우리는 옛 위인들에 대해 너무나 무지합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주님과의 우정을 깊이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오늘 주님 말씀은 너무나 자명하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요즘 참 많이 강조하는 것이 선택과 훈련입니다.
타고난 것도 끝없이 많습니다.
좋게 타고난 것들도 있지만 바꿀수 없는 부정적인 타고난 것들도 참 많습니다.
선택할 수 없이 주어진 것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도대체 타고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아무도 고향도, 부모도, 형제도, 가정도, 재능도, 성격도, 건강도, 기질도, 외모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좋게 타고난 것들에 감사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이렇지 못한 경우 좌절하거나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타고난 것들도 많지만, 하루하루 날마다 새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도 무궁무진합니다.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찬미도 감사도 감동도 아름다움도 기쁨도 평화도 선택입니다.
선택하여 치열히 훈련하여 습관화하여 제2천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타고난 것들, 주어진 것들, 회개로 이미 지나간 것들에 대해서 하느님은 결코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눈이 열릴 때 선물처럼 발견되는, 선택할 수 있는 것도 끝이 없습니다.
이래서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란 고백도 나옵니다.
그러니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루하루 행복한 삶을 선택하여 참으로 감사하며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행복도 선택입니다.
행복도 발견입니다.
행복의 선택, 행복의 발견입니다.
선택한 행복을, 발견한 행복을 살아가는 것이 정말 지혜로운 삶, 아름답고 매력적인 삶입니다.
이런이들은 결코 숙명주의자나 비관주의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신명기의 하느님 말씀을 받아 전하는 모세가 참 고맙습니다.
선택의 달인 신명기의 모세,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선택의 달인, 하느님의 사람, 모세가 강조하는 바,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여전히 큰 울림을 주는 모세를 통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이어지는 말씀, 역시 직접적이며 감동적입니다.
곧바로 우리의 지체없는 선택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네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주님은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생명이신 주님을 선택하여 열렬히 항구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래야 참으로 사는 것이요 행복한 삶, 충만한 삶입니다.
시편 1장 화답송도 하느님을 선택하여 온전히 신뢰와 사랑을 바친 이들의 행복을 노래합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 힘, 우리 생명, 우리 행복이라 고백하는 것입니다.
행복하시길 원하십니까?
답은 너무나 간단명료합니다.
하느님을 선택하여 열렬히, 항구히 신뢰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을 떠날 때 바로 스스로 자초한 불행의 연속이니 이 또한 내 탓입니다.
신명기 백성에게 주신 말씀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그러나 너희의 마음이 돌아서서 말을 듣지 않고, 유혹에 끌려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고 그들을 섬기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분명히 일러두는데, 너희는 반드시 멸망하고, 요르단을 건너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을 떠날 때 도처에 널려 있는 유혹들이요 악마의 덫들입니다.
시편 화답송이 하느님을 선택한 의인들과 그 반대의 악인들에 대한 운명을 잘 보여줍니다.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의인이냐 악인이냐?
이 또한 스스로 자초한 선택의 문제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삶의 중심이자 의미이신 주님께 날로 깊이 뿌리 내린 의인들이요, 이런 생명의 주님과 무관한 관계로 뿌리를 전혀 내리지 못해 뿌리없이 끊임없이 표류하고 방황하는 이들이 바로 참내가 없는 좀비같고 유령같은 악인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의 길, 구원의 길, 성인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최상, 최고, 최선의 선택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친히 말씀하십니다.
당신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신 후 주시는 말씀입니다.
은연중 당신을 닮아 각자 십자가의 길을 각오하라는, 때로는 순교까지 각오하라는 말씀이겠습니다.
예외없이 모든 사람이 선택해야 할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세상 모든 것을 다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얻은 것은 명예요 재물이고 잃은 것은 삶이요 건강이라면 얼마나 허망하고 억울한 무지의 삶이겠는지요!
주님을 얻은 자가 자신을 얻고 세상 모두에 초연할 수 있습니다.
아, 오늘은 요한 사도의 직제자인 "신앙의 용사" 스미르나의 주교 성 뽈리카르보 사도교부의 축일이기도 합니다.
선배 성인에는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냐시오가 있고, 성 이레네오는 성 뽈리카르포의 제자가 됩니다.
주변에서 이렇게 서로 보고 배운 성인들임을 깨닫습니다.
155년경 화형에 처해져 의연히 순교할 때 성인의 고백이 감동적입니다.
죽기까지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 성 뽈리카르포 주교입니다.
“내가 86세가 되도록 섬겨온 그분은 나의 왕이며 구세주이시고 또 나를 조금도 해치지 않으신 분이신데 어떻게 배반할 수 있겠는가!”
하루하루가 선택입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여 선택함으로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제 운명의 십자가, 제 책임의 십자가를 지고 시종여일, 한결같이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주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 하나뿐이요, 이 십자가의 길에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끝으로 늘 고백해도 늘 새롭게 와닿는 제 좌우명 고백시를 다시 나눕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어제 이마에 재를 받고 예수님과 함께 수난과 고통의 길로 들어선 우리에게 오늘 복음은 곧바로 예수님의 수난을 예고합니다.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 배척을 받아 ... 죽임을 당했다가 ... 되살아나야 한다."
(루카 9,22)
예전에는 주로 "고난, 배척, 죽임"이란 말씀이 다가와서 자못 비장한 마음으로 그 말씀들에 머물렀는데, 오늘은 "되살아나야 한다"는 말씀이 강하게 다가옵니다.
사실 사순시기는 예수님의 파스카를 준비하는 시기인데, 그동안 너무 수난과 죽음에만 갇혀 있었나 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반드시 되살아나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 당신 안에서도 희망이 피어올랐을 겁니다.
그 희망을 견지하기 위해서는 그 일을 이루실 사랑하는 아버지께 대한 믿음을 꼭 붙잡고 가는 수밖에 없으셨을 것이고요.
사실 우리 삶에 언제나 고통만 있는 건 아니지요.
아무리 힘겨워도 희로애락의 기본 감정들을 일으키는 다양한 일들이 오가게 마련이니까요.
살다 보면 끝이 보일 것 같지 않은 긴 터널 어둠 속 한가운데를 걷는 것처럼 막막했던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희망 없이 걷다가, 아니 무엇을 희망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걷다가, 문득 터널 입구에서 새어들어 오는 빛줄기가 저 앞에서 콩알만하게 비치는 순간을 만납니다.
얼마나 반가운지요...
그렇게 이 터널에도 끝이 있음을 확인하고 나서 걷는 발걸음은 과연 이 터널에 끝이 있기나 할까 하는 두려움과 의혹에 떨며 걸을 때의 발걸음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부활 역시 이렇듯 "고난, 배척, 죽임"과 더불어 "반드시" 이루어질 하느님의 업적이기에, 예수님과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며"(로마 8,24 참조) 오늘도 묵묵히 믿고 기다리며 한걸음씩 나아갈 뿐입니다.
제자들에게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신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을 따르는 길을 안내하십니다.
대상이 확대되면서 보다 보편적인 방식이 제시되는 듯합니다.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루카 9,23)
"날마다"!
"매일매일, 끊임없이, 꾸준히, 건너뜀 없이..."
자기의 실존에서 스스로에게 십자가가 되는 부분을 우리 각자는 알고 있습니다.
떼어 버리려 애도 써봤고 거부하려, 부정하려 도망도 가 보았지요.
그런 길을 돌고 돌다가 결국 '내 십자가는 나와 한 몸이구나' 체념하고 받아들이게 되고, 또 한걸음 더 나아가 '내 십자가가 사실 내게 짐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통로'임을 은총으로 깨닫는 순간을 체험하기도 했을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점은 그런 "제 십자가"를 지되, 어제나 내일의 십자가도 아닌, 남의 십자가도 아닌, 제 십자가를 '날마다' 지라고 하신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많은 경우 과거의 상처가 만든 십자가와, 미래에 대한 걱정의 십자가를 지고 있느라 '지금 여기' 현재의 십자가를 놓치고 살기 쉽습니다.
과거는 주님의 자비에, 미래는 주님의 섭리에 맡기라는 어느 성인의 충고처럼, 딱 지금 이 순간 여기 내 자리에서 주어진 내 십자가를 지는 것은 단순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믿고 희망할 때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져야 할 제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신명기에서 모세는 백성 앞에 "생명, 행복, 축복"의 길과 "죽음, 불행, 저주"의 길을 펼쳐놓고 선택하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구체적으로 날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 주지요.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신명 30,20)
먼저 주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내 행 · 불행의 결정권을 쥐고 계신 분과 굴욕적이고 비굴한 상하종속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시고 돌보시고 구하시는 그분의 마음을 알아드리고 헤아리다 보면 그분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 사랑에 장애가 되는 무엇이 내 안에 움직인다면, 그것이 곧 나의 십자가가 아닐까 합니다.
또 그분의 말씀을 '들으라'고 합니다.
창조하시고 이루시고 완성하시는 말씀께서 우리 구원을 위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말씀께서 이루어 주실 구원을 믿고 희망할 때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 희망을 방해하는 것이 내 안에 있다면, 그것 또한 나의 십자가가 아닐까 합니다.
모세는 또 그분께 '매달리라'고 합니다.
매달린다는 것은 간절한 청원의 심정을 내외적으로 절박하게 표출하는 태도입니다.
상대를 신뢰하지 않고는 좀처럼 드러내기 어려운 태도이지요.
나에 대한 상대방의 사랑과 호의, 연민을 믿을 때 매달리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 믿음을 발휘하는 데 걸리는 것이 있다면, 그 또한 지금 내가 지고 있는 십자가일 겁니다.
어제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하느님께 돌아오라. 하느님과 화해하라. 숨어 계신 하느님께 보여라."고 독서와 복음이 호소한 까닭이 바로 이 때문이었군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생명과 축복을 원한다면 우리가 해야 할 오직 한 가지 일은 생명과 축복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 매달리는" 일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하느님 향한 사랑과 희망과 믿음을 막는 무언가가 현재 내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도무지 사랑도 못하게, 희망도 갖지 못하게, 믿지도 못하게 만드는 지긋지긋한 내 안의 그림자, 그 십자가에 짓눌려 포기하지 않고, 그 십자가가 무서워 던져버리지 않고 "날마다, 매일매일, 끊임없이, 꾸준히, 건너뜀 없이" 지고 예수님을 따를 때, 언젠가 우리는 "되살아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생명이시기"(신명 30,20 참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음, 불행, 저주"로 여기던 십자가는 어느새 "생명, 행복, 축복"의 생명 나무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함께 한 목소리로 "유일한 우리 희망 십자나무여"(성주간 저녁기도 찬미가 중)를 기쁨에 차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예전에 어느 성인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현재는 하느님의 은총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드립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리이까?
오히려 용서하심이 주님께 있사와 더더욱 당신을 섬기나이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8장에서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의 죄를 묻지 않겠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월간 잡지 <꿈>에서 읽은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가난한 이들, 알코올 중독자들, 병든 이들이 모여 사는 달동네에 수녀님들이 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수시로 싸우고, 길에서 자고, 물건을 부수면서 지냈습니다.
수녀님들은 그런 마을 사람들을 씻겨주고, 먹여주고, 재워주었습니다.
왜 싸우는지, 왜 길에서 자는지, 왜 물건을 부수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조금씩 변하면서 알코올 중독자도 줄어들고, 싸움도 잦아들고, 길에서 자는 사람도 없어졌습니다.
나중에 마을 사람들이 수녀님께 물었습니다.
“수녀님은 왜 우리가 싸우는지, 부수는지, 길에서 자는지 묻지 않았습니까?”
수녀님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따지지 않는 분이십니다.
과거의 죄를 들추어내고 허물을 캐내고 응징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진정으로 회개하기만을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런 하느님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은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예전에 어른들이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라!”고 하셨습니다.
바른 길로만 가는 학생을 ‘모범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모범생만 있지 않았습니다.
다른 길로 가는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저도 초등학교 때 넓고 빠른 길로 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 길은 좋은데 재미가 없었습니다.
좁고 먼 길로 학교에 갔습니다.
그 길에는 재미있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입구에는 만화가게가 있었습니다.
떡볶이 가게, 빙수가게, 뽑기 아저씨, 핫도그 아저씨, 구술 게임 아저씨가 있었습니다.
그 길로 가면 학교에 지각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학생들은 그만 결석하기도 했습니다.
모범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모두 학교를 졸업했고, 지금은 손자를 돌보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오늘 독서는 하느님께 축복을 받는 길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복을 주신다고 이야기합니다.
유혹에 빠져서 하느님과 멀어지고 다른 신을 섬기면 약속의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을 따를 것인지 다른 신을 섬길 것인지 선택하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패자부활전’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비록 죄를 지었을지라도 뉘우치기만 한다면, 하느님을 다시 찾기만 한다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시고 축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순시기는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시간입니다.
사순시기는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지금 내가 가는 길이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는 길이라면 감사하면 좋겠습니다.
지금 내가 가는 길이 하느님과 멀어지는 길이라면 뉘우치면 좋겠습니다.
밀과 가라지는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면 우리는 밀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과 멀어지면 우리는 가라지가 될 것입니다.
선택은 언제나 우리의 몫입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상대방을 향해 칼이나 몽둥이를 휘둘러 상해를 입히는 사람은 정상일까요, 비정상일까요?
또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폭력을 쓰는 사람과 동조해서 자기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에게 똑같이 칼이나 몽둥이를 휘둘러 상해를 입히는 사람은 어떨까요?
모두 비정상이 분명합니다.
이런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사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에 너무나 많다고 합니다.
바로 익명성이 보장되는 인터넷 공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악성 댓글을 달고, 또 여기에 동조해서 또 다른 악성 댓글을 남깁니다.
이런 악성 댓글이 칼이나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과 어떻게 같냐고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악성 댓글을 당하는 당사자들의 뇌에서는 칼에 찔리거나 둔기에 얻어 맞을 때의 똑같은 고통의 경험이 관찰된다고 합니다.
즉, 뇌에서는 칼이나 몽둥이로 맞는 것처럼 엄청난 상해를 받은 것을 깨닫습니다.
악성 댓글뿐일까요?
친구 사이에서도 이상한 소문으로 상대에게 해를 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본인은 말로만 했을 뿐이라 생각하겠지만, 이 역시 칼에 찔리거나 둔기에 맞는 것과 같은 고통을 뇌에서 느끼게 됩니다. 엄청난 폭력입니다.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말로도 이 계명을 어길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을 늘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합니다.
자기만의 정의를 외치면서 살인을 범하는 엄청난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닌, 사랑이 넘치는 세상이 될 수 있도록 나부터가 말과 행동을 조심하면서 사랑 실천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벌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모두를 사랑으로 감싸 안아주십니다.
그들 역시 구원의 대상에서 절대로 제외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과거를 모두 잊고,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주님께 내맡기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의 뜻을 기억하면서 버릴 수 있는 세상의 것들을 과감하게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것에 대한 욕심으로 인해 차마 내려놓지 못하고, 자기를 드러내려는 이기심으로 잘못된 말과 행동을 생산하기도 합니다.
이런 상태로는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어쩌면 주님과 정반대의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많은 폭력이 난무하고, 욕심과 이기심이 차고 넘쳐서 더 힘든 세상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더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이 필요할 때입니다.
그래야 온전히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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