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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 낮 미사
제1독서 : 이사 52,7-10
제2독서 : 히브 1,1-6
복 음 : 요한1,1-18
1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2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어느 해 성탄 미사 강론에서
‘엘리 비젤’이라는 유대인이 전한 비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제셀’이란 아이가 친구들과 숨바꼭질 놀이를 하다가 울면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술래 친구가 자기를 찾지 않고 집으로 갔다는 이유였습니다.
이 아이의 슬픔에 공감이 됩니다. 저도 어렸을 때 그런 체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잘 숨어 있어서 찾지 못한다고 좋아하고 있었지만,
한참을 숨어 있다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밖에 나와 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적막감이 흐르는 가운데 억울함의 눈물이 나왔습니다. 이 아이 역시 그런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눈물로 범벅이 된 손주의 호소에 랍비인 할아버지는 이 사실에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깨달음을 담아서 이렇게 타이릅니다.
“그랬구나. 그러면 안 되지. 그런데 얘야.
하느님도 마찬가지란다. 그분이 숨으셨는데 우리가 찾지 않는 거란다.”
술래가 숨어 있는 친구를 찾지 않고 그냥 집으로 가버리면
숨어 있는 사람의 입장은 기가 막힐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바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찾아야 하는데 찾지 않고 자기 편한 곳으로 그냥 가버리는
우리의 모습을 반성해야 한다고 교황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성탄에 마구간에 태어난 한 아이 안에 하느님이 숨으셨습니다.
그리고 숨은 하느님을 발견한 사람만이 성탄의 큰 기쁨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탄생 때에 그 자리를 지켰던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성모님, 요셉 성인, 동방박사, 목동….
그들 모두 큰 기쁨을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초라한 마구간의 말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큰 사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하느님께서는 숨어 계십니다.
내 이웃 안에 특히 고통과 시련 속에 힘들어하는 이들 안에 숨어 계십니다.
이 하느님을 발견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당연히 큰 기쁨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큰 사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기쁜 성탄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이웃 안에 숨어 계신 하느님을 발견하는 시간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코로나19’의 위험 속에서 찾아오는 이들을 반기지도 못하고,
찾아 나서기도 주저하는 이 암울함에도 아기 예수님은 기어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 방호벽을 뚫고, 그 두려움을 넘어, 그 비참함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비참함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슬픔과 무능에 짓눌려 있는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입니다.
사실, 오늘은 기쁜 날이라고 말들 하지만,
참으로 경악스럽고 놀라운 사건, 역사 안에서 둘도 없는 당혹스럽고 황당한,
신비롭고 믿기지 않는 대체불가능한 일이 벌어진 날입니다.
이 무시무시한 일을 오늘 <복음>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이는 앞의 1절에서 “말씀은 하느님이셨다.”라고 밝히고 있듯이,
‘하느님이 사람으로 나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여기서, “사람”은 직역하면 ‘살을 취하였다’는 뜻으로
“말씀”이신 하느님이 육을 지닌 사람의 약함 안으로 들어온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말씀’(다바르)이라는 히브리어의 그림문자의 뜻은
놀랍게도 ‘아들의 길’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첫째의 뜻은 ‘아들에게로 가는 길’이란 뜻이고,
둘째는 ‘아들이 이룬 일, 곧 사건’, 역사를 뜻이며,
셋째는 ‘아들이 걸어갈 길’, 곧 아들들이 걸어갈 모범임을 말하며,
‘길’(데레크)이란 에덴동산에 있는 생명나무로 가는 길(창세 3,24)을 가리킵니다.
결국,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로 살게 될 에덴동산으로 인도하는 빛이심을 드러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그리고 이어서 말한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
또 하나의 분명한 사실은 “말씀은 사람이 되시어” 오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셨다”는 것은 ‘천막을 치고 우리와 함께 거주한다.’는 뜻입니다.
곧 거처를 사람인 우리 가운데 두고 우리와 함께 사람으로 사신 것을 말합니다.
‘천막(장막)’이란 당신의 임재와 현존을 상징합니다.
모세에게 계시하신 성막은 이제 하느님께서 산 위에가 아니라,
‘하느님이 백성 가운데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성막과 성전에 하느님의 영광이 머물렀듯이,
이제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된 것을 말합니다.
사실, ‘아들’(바르)이라는 단어의 그림문자의 뜻은 ‘집에 거하는 사람’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말씀”은 우리 안에 아버지의 집을 짓고 거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유대 랍비 아브라함 여호수아 헤셀의 표현대로
‘성막’이 공간 속의 성소이고 ‘안식일’이 시간 속의 성소라면,
이제 ‘사람’이 하느님의 성소요 집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십니다.
이를 오늘 <복음>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 1,12)
그러니 그분을 맞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그러기에, 이는 단지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탄생하셨다’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오시어 ‘바로 여기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사실을 말해주며,
나아가서는 ‘당신을 맞아들이는 이들 가운데서 사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따라서 함께 거처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함께 구원의 공동작업을 하십니다.
그것은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과 함께 벌이는 ‘사랑’입니다.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이 사랑의 행위가 바로 강생의 신비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의 신비입니다.
오늘, 이 극진한 사랑이 우리에게 오셨으니, 그 사랑이 우리에게서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당신께서 내려오시니 우리도 따라 내려가야 할 일입니다.
당신께서 비우시니 우리도 비워야 할 일입니다.
당신께서 가난해지셨으니, 우리도 가난해져야 할 일입니다.
참 생명을 받았으니 새 인간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다시 한 번, 사랑과 기쁨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주님!
당신께서는 저의 죽음을 가져가시고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제 안에 빛을 불어넣으시고 어둠을 몰아내소서.
빛의 아들로 세상의 등불 되어 당신 빛을 비추게 하소서.
빛을 증언하여 세상이 당신의 말씀을 맞아들이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주님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가장 아름답게 드러난 모습이 바로 오늘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지만 가장 완벽하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 악,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셔서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성탄의 기쁨이 온 세상에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온다고 했습니다.
코로나19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우리는 주님의 성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어두운 방에 촛불이 하나 켜지면 밝아집니다.
우리의 구세주께서 세상에 오셨으니 온 세상이 밝아졌습니다.
외로움도, 슬픔도, 고통도, 절망도 벗어버리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쁘게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유튜브’는 동영상을 볼 수 있는 플랫폼(승강장)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유튜브에 영상을 올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영상을 공유합니다.
승강장에는 가판대가 있고, 자동판매기가 있고, 마트가 있어서 많은 사람이 이용하듯이
유튜브는 좋은 품질의 영상을 제공하면서 광고로 수익을 창출합니다.
저도 유튜브를 애용하고 있습니다. 산책을 하면서 강의를 듣기도하고, 뉴스를 듣기도 합니다.
책을 읽거나 강론을 준비할 때면 음악을 듣기도 합니다.
유튜브는 광고를 보도록 하고 있습니다. 저도 광고를 보는 수고를 감수하고 있었습니다.
핸드폰을 켜두어야 하기 때문에 움직이면 다른 영상으로 가기도 합니다.
광고를 듣다보면 흐름이 끊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광고가 나오면 ‘건너뛰기’를 누르곤 합니다.
작년부터 유튜브에서 제게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한 달에 11불을 내면 광고 없이 유튜브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핸드폰을 열지 않아도 유튜브를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핸드폰에서도, 컴퓨터에서도, 텔레비전에서도 광고 없는 영상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1달 동안 무료로 체험할 수 있다고 합니다. 1년 동안 망설였습니다.
책을 사거나, 여행을 가거나, 밥값을 낼 때는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지만
영상을 보는데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타당한지 스스로에게 묻곤 했습니다.
광고를 보는 수고만 감수하면 영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솔직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며칠 전입니다. 큰마음 먹고 무료체험에 가입했습니다.
광고 없이 영상을 보니 편했습니다. 핸드폰을 열지 않아도 되니 좋았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용을 지불하면 특별한 대우를 해줍니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아마존의 프라임(Prime) 회원은 1년에 119불을 지불하는 고객입니다.
아마존은 그런 고객에게 다양한 혜택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빠른 배송이 있습니다. 아마존에서 제공하는 영화를 볼 수 있습니다.
아마존에서 제공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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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회원보다 30분 먼저 구매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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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표를 뽑지 않고 바로 은행 업무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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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사에서도 VIP 고객에게 혜택을 줍니다. 여분의 짐을 더 부칠 수 있습니다.
줄을 서지 않고 먼저 탑승할 수 있습니다.
비용을 기꺼이 지출할 수 있는 사람은 그만큼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성탄’은 어떤 의미일까요?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유튜브의 프리미엄 회원처럼 혜택을 받으면서 살 수 있을까요?
아마존의 프라임 회원처럼 혜택을 받으면서 살 수 있을까요?
은행과 항공사의 VIP 고객처럼 혜택을 받으면서 살 수 있을까요?
알렉산더 대왕의 삶과 예수님의 삶을 보면 예수님 성탄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알렉산더는 왕궁에서 왕자로 태어나 왕자로 자랐고
예수님은 마구간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목수의 일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알렉산더는 고귀한 왕으로 왕궁에서 죽었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셨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소유와 야망을 불태우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피를 흘렸고
예수님께서는 온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살리기 위하여 스스로 피를 흘리셨습니다.”
성탄을 맞이하여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변화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이기심이나 소유욕에 지배되지 않고
고통 받는 이웃을 외면하지 않으며 어떠한 생명도 소외되거나 경시되지 않는
건강하고 바람직한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도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본받아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하겠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세상 구원의 봉사자가 되어 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고 사랑하며, 섬기고 용서하는 삶을 살 때
바로 그곳에서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할 것입니다.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행복하십니다,(루카 2, 7)
한상우 바오로 신부
대림 뒤에 맞이하는
뜻깊은 성탄이다.
성탄의 시간이
우리에게로 왔다.
힘겨움 뒤에는
분명 우리를 살리시는
성탄이 있다.
성탄은
자리바꿈의 사건이다.
우리 삶의 자리로
하느님께서 탄생하셨다.
삶의 애환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성탄이다.
당신 생명을
내어주시는 성탄이다.
그러나
성탄을
받아드릴 빈자리가
우리에게는 없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빈자리를 찾으신다.
빈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이
성탄의 기쁨이다.
내어드림으로
우리의 나날들은
하느님의 나날들이 된다.
고개를 숙여
구유에 계신
아기 예수님을 바라본다.
하느님 없는
우리 삶에
하느님께서 오셨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성탄의 별빛과
성탄의 햇살을 흠뻑 받으며
다시 시작하는
희망의 성탄이다.
하느님께서 오셨기에
모든 것은
은총이 될 것이다.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하늘과 땅
영광과 평화
하느님과 사람은
다시 치유와 행복으로
나가게 될 것이다.
하느님을
맞아들임이 성탄이다.
코로나 백신처럼 오시는 예수님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은 주님 성탄 대축일입니다.
예수 부활 대축일과 마찬가지로 많은 본당에서 대축일 미사가
신자들과 함께 하는 미사로 행해지지 않습니다.
그래도 되니까 주님께서 이런 상황을 허락하셨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태어나시기보다 ‘우리 마음’에 태어나십니다.
우리 각자는 예수님을 모신 작은 마구간입니다.
이런 의미로 ‘미사’는 사실 매번 드릴 때마다
예수님의 성탄과 부활 대축일이 반복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옷을 입고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이나,
그 예수님께서 밀떡의 옷을 입고 우리 마음에 들어오는 것이나 본질적으론 다를 게 없습니다.
매 미사가 성탄이 되지 못하면 성탄 미사도 그 사람에게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태어나신 것이나, 성체로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이
우리에게 도대체 왜 기쁜 일이 되는 것일까요?
요즘 같아서는 코로나 백신 접종이 전 세계적으로 시작되는 것이 가장 기쁜 소식일 것입니다.
주식이 폭등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기쁜 소식인 이유는
우리가 모두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죄의 바이러스에 두려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 죄를 없애는 백신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오히려 코로나 백신 보다 환영받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무서울까요, 죄 바이러스가 더 무서울까요?
코로나 바이러스는 자칫 우리 생명을 잃게 만들 수 있지만,
죄의 바이러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도 아주 가끔은 존재합니다.
호주에 사는 세 아이는 부모가 코로나에 걸렸지만 멀쩡했습니다.
막내딸은 부모와 함께 같은 침대에서 잤지만, 전혀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았습니다.
자칫 우리도 죄의 바이러스에 이처럼 면역력을 지니고 태어났다거나 걸렸어도
우리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바이러스는 코로나바이러스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전파력이 강력하고 걸렸다면 자가 치료가 절대 불가능합니다.
이것을 모르니 백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모시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코로나바이러스로 사망한 사람은 백육십팔만 명입니다.
그런데 ‘아돌프 히틀러’ 때문에 사망한 유태인 수만 육백만 명입니다.
또 그가 일으킨 전쟁으로 죽은 사람은 그 열 배인 육천만 명입니다.
과연 어떤 바이러스가 더 위험할까요? 당연히 죄의 바이러스가 더 위험합니다.
히틀러가 죄 바이러스의 최초 보균자는 아닙니다.
죄는 우리 안에 있고 끊임없이 생성됩니다.
누구도 그 죄의 바이러스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원죄입니다. 물론 히틀러의 집은 그 원죄의 영향이 매우 컸습니다.
그런 죄의 바이러스로 가득 찬 가정에서 자라나 히틀러가 더 완전한 죄의 보균자가 된 것입니다.
히틀러에게 죄를 더 감염시킨 장본인은 아버지였습니다.
어머니는 매우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였습니다.
그러나 폭력적인 남편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약한 여인이었습니다.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는 밖에서는 유능한 공무원이었고
집안에서는 매우 폭력적인 남편이요 아버지였습니다.
알로이스는 사생아로 태어나 어머니를 여의고 삼촌 밑에서 자란 고아였습니다.
누구도 그의 자아에서 솟아나는 바이러스를 잡아줄 백신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아의 열등감을 세상 명예와 돈과 쾌락으로 극복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폭력으로 모조리 제거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죄의 바이러스가 무서운 것은 그 죄의 바이러스가 우리 각자 안에서 솟아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아에서 솟아나는 재물에 대한 욕심과 성욕, 그리고 명예나 권력욕 등입니다.
사탄이 똑똑한 이유는 이것들의 위험성을 사람들이 모르게 하고
오히려 이 바이러스에 취해 살아도 된다고 믿게 만든 것입니다.
히틀러도 아버지를 미워했지만 결국 아버지처럼
자아에게서 솟아나는 죄의 바이러스를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죄의 바이러스를 죽이는 백신은 무엇일까요?
이 백신은 2차에 걸쳐 접종해야 합니다.
1차 접종은 이 세상의 부모로부터 받아야 하고, 2차 접종은 하느님의 부모로 받아야 합니다.
부모가 주는 사랑이 죄 바이러스를 죽이는 백신입니다.
히틀러는 1차 접종에 실패하였고, 그러니 2차 접종도 효과를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통제되지 않는 죄의 바이러스는 온 독일을 물들였습니다.
좋은 부모에게서 자라 자아를 통제할 줄 알았던 독일인들도
히틀러의 엄청난 바이러스에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좋은 부모가 있어도, 그리스도를 믿어도 그들은 학살과 전쟁의 공범이 되었습니다.
물론 몇 안 되는 1차,2차 접종을 모두 한 사람들만 이 물결에 저항할 수 있었습니다.
히틀러는 본인이 성공한 줄 알았습니다.
교만이 극에 달해 있어서 독일 총통까지 오른 것은 엄청난 자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본인이 그런 착각에 빠져있으니 1차 접종의 중요성을 알 리가 만무했습니다.
그는 순수한 아리아인의 피만 남겨야 한다고 말하며 아기 생산 공장도 만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어머니가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독일 남자나 여자라면 그 공장에 들어가 아기를 만들고 낳으면 그냥 나라에서 키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장한 아이들이 히틀러의 선전용으로 쓰였습니다.
그들은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완전한 히틀러의 바이러스 안에서 자란 아이들입니다.
1차 접종부터 거부당한 아이들입니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부모님의 사랑 안에서 자랐습니다.
부모님이 주시는 그 사랑이 바로 1차 접종입니다.
1차 접종으로 세속-육신-마귀의 바이러스가 활개를 치지 못하게 자랍니다.
그러나 비록 그렇지 못한 부모에게서 자랐더라도 일단 인간으로 성장했다면
1차 접종은 어떤 형태로든 맞은 것입니다.
그리고 2차 접종 없이 1차 접종만으로는
어른으로 성장하여 솟아나는 바이러스를 잡을 수는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이 2차 접종입니다.
그런데 이 2차 접종은 개인의 자유의사가 매우 존중됩니다.
1차 접종 때 사랑의 필요성을 깨달은 사람만이 2차 접종을 받아들입니다.
사랑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맞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서 대부분이 맞지 않습니다.
오늘 성탄 때 이 접종을 한 사람들은 목동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천사들을 시켜 이들에게 가장 완전한 죄의 백신인
거룩한 하느님 사랑의 총체인 그리스도의 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몸을 먹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성체이십니다. 성체는 하늘의 아버지, 하늘의 어머니의 사랑 백신입니다.
이 사랑을 맞으면 더는 세속-육신-마귀의 바이러스가 힘을 쓰지 못합니다.
하느님 자녀라는 ‘믿음’의 항체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자녀가 어떻게 돈에 집착할 수 있고,
육체의 쾌락을 좇으며, 남의 험담을 하고 사람을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그런 욕구나 행위가 나와도 바로 고해성사를 통해 이전으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죄의 바이러스를 이기며 살게 됩니다.
그리고 이 2차 접종은 계속되는 성체성사를 거행하며 반복됩니다.
부모에게서 사랑이 아닌 무관심이나 폭력이 온다면
자녀는 자신 안에서 솟아나는 바이러스에 지배당하여
히틀러나 혹은 그와 비슷하게 이웃에게 피해를 주며 살아가게 됩니다.
세속-육신-마귀의 바이러스가 좋은 것처럼 여기라는 사탄의 방해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부모는 자신들의 사랑으로 사랑이 아니면 죄의 바이러스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들이 성장하여 2차 백신 접종을 스스로 받게 됩니다.
아이들이 성체를 거부하는 이유는
부모가 사랑보다는 죄의 가치를 더 크게 알려주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으로 하느님 사랑의 가치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면 구유 위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은
코로나 백신보다 비교도 안 될 만큼 귀한 영원한 생명의 백신으로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성체를 영하며 기쁨으로 주님을 찬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이 기쁨을 되새기라고 잠시 이번엔 언제든 받을 수 있는
2차 백신 접종의 기쁨을 미루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기쁨으로 성체를 영하면 그날이 참 성탄절입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주님 성탄 대축일 낮 미사의 복음 말씀은 요한 복음서의 머리글입니다.
장엄한 별, 천사들의 천상 찬미가, 가난하고 겸손한 목자
그리고 구유 안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을 선포하는 지난밤이나
오늘 새벽 복음과 달리 오늘 복음은 ‘말씀의 육화’,
곧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사실 요한 복음서의 머리글은 시적 구절들과 담화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시적 구절이 한처음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을 노래한다면
담화 부분은 사람이 되시어 오신 말씀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 성탄 대축일 낮 미사에
요한 복음서의 머리글을 묵상하는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동화 같은 예수님의 탄생을 좀 더 깊게 성찰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그저 환상으로만 남지 않기를 선포하면서,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분께서 죄 말고는
모든 것에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음을 마음속 깊이 새기라고 초대합니다.
성숙한 눈으로 강생의 신비를 깨달으려면
연약한 사람의 살을 취하신 말씀을 바라보는 “은총에 은총”이 필요합니다.
로마 제국 치하에서 여러 정치적, 종교적 신념으로 분열된 이스라엘 사회에
예수님께서는 연약한 아기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뚜렷한 자기 주관에 고집까지 더해진 사람들과 함께하시고자
상처받기 쉬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이십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더 고집스럽고 더 확고한 정치적, 종교적 신념 속에 살아갑니다.
게다가 성탄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기보다는 이를 상업적으로 이용하기에만 바빠 보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신비를 바라보고 깨달을 “은총에 은총”이 더욱 간절한 때입니다.
성탄의 신비를 노래한 요한 복음사가의 시를 다시 한 번 읊어 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