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의 아름다운 절집 무위사는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의 월출산(809m) 동남쪽에 있는 사찰로서 대흥사의 말사이다. 사기에 의하면 이 절은 신라 진평왕 39(617)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관음사라고 하였고 헌강왕 원년(875)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중창하면서 절 이름을 갈옥사로 바꾸면서 수많은 스님들이 머물게 되었다.
그 뒤 고려 정종 원(946)년에 선각국사가 3창하면서 방옥사라고 개명하였고 조선 명종5년에 태감선사가 4창하면서 ’인위나 조작이 닿지 않은 맨 처음의 진리를 깨달으라는 뜻의 ‘무위사無爲寺’라는 이름‘을 붙였다. 조선 초기 선종사찰에서 태고종절로 바뀐 무위사는 사찰 통폐합의 와중에도 이름난 절에 들어 그 위세를 유지하게 되는데 그것은 죽어서 제 갈 길로 가지 못하고 떠도는 망령들을 불력으로 거두는 수륙재를 지내는 수륙사로 지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절의 건물로는 극락보전, 명부전과 벽화보존각, 천왕문, 응향각, 천불전, 미륵전, 산신각 등이 남아있어 56동에 이르렀다는 옛 절의 모습을 그나마 보여주고 있다고 할까.
형미는 친왕건의 세력으로서 후백제 지역인 이곳에서 선종세력으로 성장하였고 회군하는 왕건을 따라 태봉국의 수도였던 철원으로 올라갔다. 그는 궁예가 정신이상으로 처자까지 죽이고 왕건을 의심하여 죽이려 하자 왕건을 비호하다 917년에 궁예에게 죽임을 당했다. 궁예의 책사였던 종간과 은부 역시 궁예에게 의심을 받자 왕건에게 돌아서고 미륵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했던 궁예는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조선의 선비같은 무위사의 극락보전
가을이면 피어난 상사화가 사람의 혼을 빼앗아 갈 것 같은 요사 채 쪽의 작은 꽃밭을 느티나무, 팽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정면에 소박한 아름다움이 어떠한 것인지를 무언으로 보여주는 무위사의 극락보전이 단아하게 서있다. 김제 귀신사의 대적광전이나 예산 수덕사의 대웅전, 부석사의 조사당과 안동 봉정사의 극락보전 같은 고려시대 맞배지붕 주심포 집인 무위사의 극락보전은 바라보면 볼수록 단정하면서도 엄숙한 조선 선비의 전형을 보는 듯하다.
세종 12년에 지어진 극락보전은 1934년 일제에 의해 국보 제13호로 지정되었다가 1962년 우리 정부에 의해 다시 국보 제13호로 지정되었다. 1983년 해체 복원공사 중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정면 3칸에 측면 3칸인 이 건물은 조선초기인 세종 12(1430)년에 효령대군이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1950년 극락보전 수리 공사를 하던 중 본존불 뒤쪽의 벽화 아래 서쪽에 쓰인 열기문에 의하면 성종 7(1476)년 병신년에 후불벽화가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를 대표할 만큼 뛰어나 국보로 지정된 아미타 삼존벽화는 어느 때 조성되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으나 극락보전 안벽에 성종 7년에 그려진 벽화들을 1974년 해체 보수하다가 그 벽화들을 통 채로 드러내어 벽화보존각을 지어 따라 보관하고 있다.
고려불화의 맥을 잇는 전통적인 후불벽화는 신필에 가깝다. 그 벽화에 얽힌 일화는 이렇다. 법당이 완성된 뒤 이 절을 찾아온 한 노거사가 벽화를 그릴 테니 49일 동안 법당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하였다. 49일 되던 날 무위사 주지가 문에 구멍을 뚫고 법당 안을 들여다보니 파랑새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마지막으로 후불탱화의 관음보살 눈동자를 그리고 있었다. 새는 인기척을 느끼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려 지금도 후불탱화의 관음보살 상에는 눈동자가 없다. 극락전 옆에는 선국대사 형미대사의 부도비와 삼층석탑이 서 있고 미륵전에는 마음씨 좋은 동네 아줌마 형상의 미륵불이 모셔져 있으며 그 옆에는 산신각이 있다.
내가 이 세상을 하직한 뒤 영혼을 맡기고 싶은 절, 무위사에서 강진을 찾은 사람들과 보냈던 하루가 어느덧 추억이 되었구나.